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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삼 Apr 22. 2024

3대가 사는 집


나는 이혼을 시작하면서 친정에 들어와서 살게 되었다. 요즘처럼 1인가구의 증가가 가파른 시대에 나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부모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나의 아이까지 데리고서. 그래서 우리 집은 드물게 3대가 함께 사는 집이 되었다. 3대가 사는 집이라고 해도 예전처럼 대가족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가족구성원은 아빠, 엄마, 나와 아이 4명뿐이다. 나의 형제들은 진작에 독립해서 나가 살고 있었으니 나는 오붓한 노후를 보내려던 두 분의 삶에 끼어든 불청객이 된 셈이다. 





내가 양육권을 주장했으니 마땅히 나의 힘으로 아이를 키워내야 하지만 나는 염치없게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기로 했고 그렇게 친정에 들어왔다. 정말 어쩔 수 없다면 원룸에서라도 아이와 둘이 살아가야 하겠지만 부모님 댁에서 살 수 있다면 굳이 차선책을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내가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란 물심양면으로 많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부모님이 아니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도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서른이 넘어 다시 돌아온 친정집에서 나는 낯선 분위기를 느꼈다. 아이가 있고 없고는 집안분위기를 180도 바꾸어 놓았다.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를 않았다. '나도 언젠가 저런 표정으로 바라봐 주신 적이 있었을까?'라는 순수한 호기심이 들 정도로. 아이는 그때 두 돌이 안돼 말도 못 하던 시절이었고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항상 행복한 아이의 미소와 깜찍한 행동들은 사막처럼 건조한 우리 집에 웃음꽃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나 또한 다시 돌아온 친정에서 평안을 찾았다. 안락한 수면을 보장해 주던 시몬스침대도 없고, 아이의 장난감방으로 꾸며놓은 곳도 없고, 내 손에 익숙해졌던 살림들도 없어 낯선 집에 온 것만 같았지만 예전 남동생방에 토퍼를 깔고 대충 잠들었던 첫날, 나는 마음이 참 편안했다.  내가 원할 샤워를 있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감사했다.  내가 씻고 싶을 씻을 있고, 낮잠 자고 싶을 낮잠을 있는 곳! 나에게는 천국과 다름없었다. 출산 친정부모님과 육아를 같이 하는 사람이 많은지 납득이 갔다.





이렇게만 보면 굉장히 화목한 집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결혼 전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았다. 나 외에 또 다른 누가 집에 있는지도 모르고 핸드폰을 들고 각자 방에 틀어박혀 있던 삭막한 집이었다. 엄마와 나는 눈만 마주치면 그르렁대는 고양이와 개 같았다. 두 번 이상 대화가 오가면 싸움이 되던 통에 '입을 다무는 게 상책이다'라며 점점 대화를 잃어갔던 우리 집. 사실 그런 친정으로 돌아오면서 걱정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심지어 결혼 후 엄마와는 자주 만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한 손에는 캐리어, 한 손에는 아이를 안고 나타난 나를 보며 엄마는 할 말이 많으신 듯했지만 꾹 참으시는 게 보였다. 나는 친정에 들어오면서 각오를 했다. '여기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으니 납작 엎드리고 살아야겠다'라고. 내 성질머리는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히 세계최고 수준이었지만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게 엄마 아닌가! 부모님이 제공해 주시는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3대가 사는 우리 집은 2년 가까이 순항 중이다. 근 30년간 같이 살았던 부모님이지만 내가 또 엄마가 되어 함께 지내는 부모님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그리고 나의 아이까지.


3대가 사는 집은 생각보다 복작복작 하지만 또 생각보다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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