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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Oct 21. 2023

쌓아온 시간의 가치

빨간 약 줄까? 파란 약 줄까?

빨간 약과 파란 약이 있다. 


빨간 약:  현재 가진 모든 지식을 가지고 6살로 돌아간다. (인생 2회 차 고고 -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파란 약:  현금 $10 밀리언달러를 받는다. (100억 원이라 치자)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단톡방에 올라온 질문에 톡방이 간만에 수다스러워졌다. 서슴없이 한쪽을 선택한 친구들도, 쉽게 결정하지 못한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파란 약을 선택했다. 


빨간 약을 선택해 지금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가지고 6살로 돌아가서 인생 2회 차를 살게 되면 돈은 백억보다 많이 모으겠지만, 다시 40년을 사는 건 너무 지겹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었는데, 출발점으로 다시 가라니. 초년에 고생도 좀 했지만, 굳이 돌아가서 무엇을 바꿀까, 싶다.  


어쩌면 이 질문은 우리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의 가치를 묻는 질문이 아닐까 싶다.  존버해서 살아낸 내 인생의 가치. 그 시간의 가치가 적다면 인생 2회 차에 도전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새로이 내 인생을 설계할 일이고, 내가 쌓은 시간의 가치가 크다면 백억으로 만족하는 거다. 


그렇다면 나는 쌓아온 시간이 아까워서 이 결혼에 목을 매고 있는 걸까?  연애 3년, 결혼 16년. 하루하루 투쟁하듯 살아온 날들이 아까워서? 아니면 실패를 인정하기 싫은 걸까? 그것도 아니면 사실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걸까? (내가 좀 둔하고 포기가 빠른 편이긴 하다.)


일단 후보 몇 개를 추려보았다.

어차피 다 비슷할 것 같아서? (그 X이 그 X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귀찮아서? (어떤 변화든 일단 귀찮다. 모든 것이 똑같고 남편만 없다? 삶이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치명적인 단점을 찾지 못해서?  (남편은 크게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다. 꼼꼼한 성격 탓에 허튼짓 따위는 하지 않고, 딱히 취미도 없어서 모든 시간을 가족과 보낸다.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고 노름도 안 하고 바람도 안 피운다.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생판 남에게도 육두문자를 날리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큰 잘못이 없으니 크게 화낼 일이 없다. 내가 가진 불만들은 왠지 치사하고 작아 보여서 따지기도 뭐 하다.) 

그를 사랑해서? (모르겠다.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내 마음에 꼭 드는 순한 얼굴도, 비상한 두뇌도 내 취향이긴 하다.) 


누가 그러더라.  결국 이혼까지 가는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그런 거라고.  반대로 끝까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참을 만하니까 사는 거라고.  지나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긴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고생은 고생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견딜만하니까.  그러나 모르는 일이다. 언젠가 결코 참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해서 이 결혼이 끝날지도.  


제발 남편과 나, 둘 중 그 누구도 그 가능성을 잊지 않기 바란다.  언제든 돌아서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부부사이라지 않나.  아무리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어졌다 해도 성인 남녀가 함께 한다는 건, 그리고 그 관계가 지속된다는 건, 다분히 의식적인 결정 (Conscious Decision) 임을.  '내가 왜 굳이 너와 맞춰 살아야 하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면 그 답은 언제든 '글쎄. 모르겠네. 관두자.'로 이어질 수 있음을. 그러니 노력하길. 말 한마디라도 예쁘게 하고 관심 가져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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