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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키오 Feb 02. 2023

(동화) 눈이 내린다

  햇빛에 반사되는 눈길이 눈부셔요. 간밤 무섭게 불던 눈바람도 빈 바구니처럼 조용해졌어요.

  쓰윽 쓱…….

  할아버지는 넉가래를 들고 눈을 치우셔요. 나무로 만든 삽처럼 넉가래는 자루가 긴 옛날 농기구예요. 삽보다 끝이 네모나요. 헛간 구석 어딘가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걸 용케 찾아내셨나 봐요. 주로 곡식을 밀고 모을 때 사용해요. 겨울에는 눈을 치우기도 하고요. 할아버지 덕분에 마을 길이 말끔해져요. 

  “저러다 넘어지면 어쩌시려고.”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심심해서 그러시나?”

  눈이 내린 날이면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마을 길에 쌓인 눈을 치우셔요.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어요.

  “반성해야 되여, 반성!”

  엄마 아빠가 저러다 큰일 나겠다고 걱정하지만, 할아버지는 반성해야 된다는 말만 되풀이하셔요.

  “영민 아빠, 아버님이 뭘 반성하신다는 거지?”

  “글쎄, 영문을 모르겠네.”

  “아빠는 선생님이면서 그것도 몰라?”

  “인석아, 선생님이라고 다 아는 줄 아냐?”

  아빠는 우리 학교 선생님이에요. 전교생이 85명뿐이어서 3, 4학년은 합반 수업을 해요. 담임 선생님이 아빠예요. 내게는 퍽 안된 일이에요. 눈치가 보여서 장난도 제대로 칠 수 없어요. 수학 문제 같은 걸 틀리면 아빠가 선생님인데 그런 것도 틀리냐고 친구들이 놀리기 일쑤예요.

  “선생님 아들이라고 다 아는 건 아니거든.” 

    

  할아버지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으셔요. 흔히 말하는 치매예요. 오래된 기억 몇 개만 남았을 거라고 했어요. 

  “그럼 시간이 쪼그라든 거야?”

  “시간이 쪼그라들었다고?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그냥 시간 여행을 하시는 거로 생각하면 돼.”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다니시는 거네!”

  할아버지는 금방 한 말도 자주 잊어버리셔요. 습관적으로 해오던 것들도 낯설어할 때가 많아요. 어떤 때는 엄마나 나도 잘 알아보지 못하셔요. 그렇지만 아빠를 못 알아보신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어쩜 며느리도 자식인데 못 알아보시니 섭섭해요.”

  “어이쿠, 젊은 새댁이 못하는 소리가 없네.”

  웃으면서 하는 엄마 말에 할아버지는 정색하시곤 해요.

  “우리 아들도 어서 새댁 같은 색시를 얻었으면 좋겠구먼.”

  할아버지는 엄마가 마음에 드는 색싯감으로 보이시나 봐요.

  “……!”

  가끔 할아버지 정신이 맑아질 때가 있어요. 타임머신에서 내려 현재로 돌아올 때예요. 그때마다 눈 치운 얘기를 하면 언제 그랬냐고 펄쩍 뛰셔요.

  “할아버지, 저 방패연 만들어 주시면 안 돼요?”

  “공부해야지.”

  “방학 숙제예요. 아빠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셨다면서요. 저도 만들어 주세요.”

  겨울방학 숙제 중에 만들기가 있어요. 나는 방패연을 만들고 싶어요. 가오리연은 만들 수 있지만, 방패연이 훨씬 멋있기 때문이에요. 방패연은 연살 깎는 것부터 힘들어요. 나는 잽싸게 할아버지가 바른 정신일 때 방패연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어요.

  “안 돼. 네가 생각해서 만들어.”

  “엄마, 나는 못 만든단 말이야. 겨우 아빠 없을 때 부탁하는 건데, 혹시 알아? 방패연을 만들다 보면 할아버지가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 그럼 나도 좋고 할아버지도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아냐?”

  “어휴, 말이나 못 하면…….”     

  할아버지가 지게를 짊어지고 나무를 해올 때도 있어요.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해 먹는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보일러에 가스 놓은 지가 언젠데…….”

  헛간에 나무가 쌓여가자 아빠는 거실에 난로를 설치하고 불을 지폈어요. 

  “아빠, 우리 집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집처럼 고급스러워 보인다.” 

  “다 할아버지 덕분인 줄 알아야 해. 이 녀석아!”

  난로에 고구마도 구워 먹고 어떤 때는 삼겹살 파티도 해요. 나는 군고구마를 무척 좋아해요. 고구마를 굽다 보면 얼굴 가득 숯검정이 묻어요. 그래도 신나고 재미있어요. 포슬포슬한 군고구마를 뜨거운 김 내뱉으며 씹을 때면 황소바람이 문을 두드려도 모를 지경이에요. 

  “반성해야 되여, 반성!”

  우리 마을은 유난히 눈이 자주 내려요. 눈보라가 밤새 말을 달리면 할아버지가 치워 놓은 길이 하얗게 지워져요.

     

  “며칠 있으면 설인데 어머니 산소에 다녀와야겠어. 설에는 아무래도 복잡할 거 같고……. 이번에는 영민이랑 나만 다녀올 테니 당신은 아버지를 돌보고 있으면 좋겠네.”

  “알았어요.”

  할아버지가 치매를 앓기 전에는 온 가족이 할머니 산소에 다녀오곤 했어요.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 얘기를 하며 쓸쓸해하셨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때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었다고 해요.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대요.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셨대요. 아빠가 유일한 희망이어서 대학교까지 가르치는 데 밤낮이 없었다는 할아버지 할머니. 발은 늘 뜨거운 맨발이었고 발바닥은 굳은살이 박여 곰 발바닥 같았다고 해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날 그렇게 기뻐하시던 아버지 어머니를 본 적이 없어.”

  “……!”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젊은 날을 떠올리며 눈시울 붉힐 때가 많아요. 할아버지가 치매를 앓기 시작하면서 힘들어할 때도 많아요. 그때마다 엄마가 아빠 손을 꼭 잡아요. 

  “그렇게 살아오셨는데 무슨 반성을 하신다는 건지 모르겠어.”

  “아빠, 할아버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학교 다닐 때 빵점짜리 시험지를 찢어버렸다거나 뭐 그런 거.”

  “인석아, 너나 그러지. 할아버지가 너 같은 줄 아냐?”

  겨울 햇볕이 따뜻해요. 산그늘이 진 쪽은 아직 눈 세상이지만 양지쪽은 마른 풀이 뽀얗게 드러났어요. 햇볕이 내리쬐는 할머니 산소는 깨끗하게 눈이 녹아 있어요. 술을 따르고 절을 하고 아빠는 한참 할머니 산소를 바라봤어요. 마음속으로 할머니랑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아빠, 할머니한테 무슨 말했어?”

  “할아버지가 오래 사실 수 있도록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했지.”

  “할머니가 그러신대?”

  “글쎄다. 대답을 안 하시네.”

  때까치 떼가 깍깍거리며 산소 주변을 날아다녀요. 선득한 바람이 지날 때마다 소나무 가지에 쌓였던 눈가루가 하얗게 날려요.

     

  “관섭이, 관섭이 있나?”

  “아이고, 아버님 아니십니까?”

  서울에 사시는 할아버지 친구 덕배 할아버지예요. 일 년에 한두 차례 할아버지를 만나러 오셔요. 아빠는 덕배 할아버지를 아버님이라고 불러요. 

  “산소에 다녀오시는 길이시네요?”

  “그려. 그냥 갈까 하다가 관섭이 본 지도 오래됐고 요즘 듣자니 치매가 왔다고 해서 일부러 들렀네. 그래 치료는 하고 있나?”

  “알츠하이머라서 증세를 늦춰주는 치료를 하고 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요.”

  “저런……, 하기는 다들 어렵다고 하더라고.”

  할아버지는 덕배 할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하셨어요. 악수하고 손을 흔들어도 누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멀뚱거리셨어요. 할아버지 기억에 덕배 할아버지는 없나 봐요.

  “어허 이 사람! 나여, 덕배!”

  “덕배가 누구여?”

  “저 건너 대밭집 사시던 아버지 친구분 있잖아요.”

  “덕배가 누구여?”

  덕배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울먹이셨어요. 

  “쯧쯧, 좋은 사람이 왜 이렇게 됐어?”

  “……?”

  덕배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손을 힘주어 잡으셨어요. 손등으로 파란 힘줄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덕배 할아버지 눈이 그렁그렁해졌어요.

  “그런데 아버님, 혹시 눈 오는 날마다 아버지가 무슨 반성을 한다고 마을 길을 치우는데 뭐 짚이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반성한다며 마을 길을 치운다고?”

  “예. 눈만 내리면 그러셔요.”

  “그려?”

  덕배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셨어요.

  “암만해도 그 일 때문에 그러는 모양이구먼!”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젊었다기보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렇듯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며 놀기에 바빴어요. 농사일을 거들기도 했지만 틈만 나면 친구들과 뭉쳐 다니는 게 일이었어요. 동네 형들하고도 어울려 다녀서 배우지 않아야 할 것을 일찍 배우기도 했어요. 그중에 하나가 ‘서리’였어요. 서리는 주인 몰래 남의 과일, 곡식, 가축 따위를 훔쳐 먹는 장난이에요.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었어요. 봄이면 감자 서리, 여름이면 참외나 수박 서리, 가을이면 밤 서리, 감 서리, 사과 서리, 콩 서리 심지어 겨울이면 닭서리까지 했어요. 

  “감자나 참외, 수박, 밤 같은 거야 그래도 흔했으니까 어른들도 별로 야단치지 않았지. 문제는 닭서리였어.”

  덕배 할아버지네는 대숲이 우거진 마을 안쪽 집이었어요. 집 뒤로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싸여서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가 오랫동안 귀에 남는 집이었어요. 더욱이 사랑방은 안채와 떨어져 있었어요. 대문이 아닌 쪽문으로 드나들어서 심심하면 쉽게 마실을 갈 수 있었어요. 

  사랑방은 늘 북적거렸어요. 동네 형들이 한방을 차지하고 있어서 재미없는 날이 없었어요. 시시덕거리며 만화책을 보거나 윷놀이를 하다 보면 겨울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게 깊어갔어요.

  어느 날인가 그날따라 책장이 닳도록 보고 또 봤던 만화책도 시들해지자 형들은 끼리끼리 닭서리 윷놀이를 했어요. 닭을 잡아다 삶아 먹자고 한 거예요. 집집이 닭을 키우고 있었으므로 어느 집으로 갈지 정하는 내기였어요. 

  윷놀이에서 지는 사람이 자기 집에 가서 망을 보고 다른 친구들이 닭을 잡아 나오는 거예요. 할아버지하고 덕배 할아버지도 닭고기 생각에 침만 꼴깍꼴깍 삼키며 어서 닭서리 해오기를 기다렸어요. 

  마침내 윷놀이에서 진 형들이 닭 세 마리를 서리해 왔어요. 할아버지와 덕배 할아버지는 잔심부름을 해주며 쇠죽 끓이는 솥에 물을 끓였어요. 한참 닭서리 무용담을 들으며 닭털을 뽑을 때였어요.

  “이놈 자식들, 다들 그대로 있어!”

  갑자기 방문이 왈칵 열리고 랜턴 불빛이 호랑이 눈알처럼 번뜩였어요. 닭털을 뽑다 말고 모두 얼음이 되는 순간이었어요.

     

  “다들 집에서 엄청 혼났지. 동네 형들이 닭서리를 했지만 그곳에 있었던 게 잘못이야. 닭값도 다 물어줬어. 더욱이 자네 조부장께서 좀 엄하셨나? 관섭이 저 친구 보고 반성하라는 뜻으로 겨우내 마을 길, 눈을 치우라고 하셨지. 그게 기억에 남은 모양일세.”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닭서리는 도둑질이지만 할아버지 때는 서리가 ‘못된 장난’쯤 되었나 봐요. 

  “아빠, 조부장이 뭐야?”

  “돌아가신 남의 할아버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야. 아버지도 참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영민아!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할아버지 반성을 도와주는 의미로 우리도 눈을 치워야겠다.”

  “에이 아빠, 할아버지 타임머신은 일인용이어서 탈 수 없을 텐데……. 그런데 자기 집에서 키우던 닭을 서리한 것도 잘못인가?”

  “어른 허락도 없이 한 일이니까 잘못이지. 아빠 몰래 할아버지한테 방패연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처럼.”

  저럴 때 보면 엄마는 절대 내 편이 아니에요. 방패연 만들어 달라고 할아버지 조른 일을 어느새 아빠에게 이른 모양이에요.

  “아빠 아니 선생님, 내일은 눈이 더 온다고 했는데 모레부터 하면 안 될까요?”

  “시끄러! 이 녀석은 급하면 아빠 보고 선생님이래.”

  눈이 내린다. 눈이 또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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