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 짧은 파편
A는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하고 힘들다며 나를 찾아왔다. 여전히 아프다고 했다. 더 많이 운동하고, 일에 몰두하며 일상생활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 시기를 열심히 버티는 중이라 말했다. 일부로 술을 멀리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것도 한 때라며, 이 나이엔 그러면 안 되겠다며.
애써 웃고 있지만, 그 말을 하면서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슬픈 눈은 감추기 어려워 보였다. 안쓰러움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는 조금 슬퍼했다가, 조금 웃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원망도, 사랑했던 기억도, 분노도, 슬픔도 하나씩 털어갔다.
그러다 그가 말했다.
"뭐, 그랬다고. 어쨌든 잊으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야. 슬퍼도 울지 않을 거야. 아예 생각도 안 하려고 떠오를 것 같은 장소도 안 가고 얘기도 잘 안 꺼내. 오늘은 그게 안 돼서 찾아왔지만."
애써 입꼬리를 올리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잊어야 하는데?”
그가 나를 쳐다봤다. 당연한 걸 왜 묻냐는 표정이었다. 다시 무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왜?”
“잊어야 하니까.” 작은 목소리로 그가 답했다.
“잊는다고 마음먹어서 그게 돼? 애쓸수록 더 힘들지. 잊는 건 굳은 의지로 되는 게 아니라 잊. 혀. 지. 는 거잖아. 눈물이 나는데 왜 참고, 생각이 나는데 왜 지워? 잊는다면서 오히려 그 마음을 내보내지 않은 채 숙성시키면서 더 힘들어해. 차라리 떠오르면 떠올리고, 눈물이 나면 펑펑 울고, 욕하고 싶으면 욕해야지. 그렇게 감정을 다 털어내야 잊을 수 있지. 진짜 잊으려면 그 마음을 억지로 누르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참으면 병 된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반대가 없었으면 사귀다 헤어졌을 걸.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고, 잊어야지 하면 마음이 더 깊어지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지만, 만약 욕이든, 눈물이든, 추억이든 다 털어놓고 싶으면 와. 한동안은 들어주도록 하지.”
A는 멋쩍게 웃었다.
그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내가 정답이고 그가 오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을 선택한 거겠지. 다만 그날의 그는 이미 한계 같았다. 툭 치면 우르르 쏟아질 것 같았다. 오지랖일 수도 있지만, 내 방식대로 위로하고 싶었다. 차라리 울라고, 억지로 웃지 말고 펑펑 울라고. 다행히 그는 내 의도를 이해해 줬다. 오래된 관계라 굳이 긴 말로 변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그 무엇, 그런 거였을 것이다.
나는 항상 감정을 담아두기보다는 밖으로 쏟아내는 편이었다. 짝사랑도 오래 담아두지 못하고 바로 고백했다. 말 못 하고 끙끙대며 그 마음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아프더라도 짧게 아프고 말리라 생각했다.
이별 후에도 나는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았다. 떠오르면 잠시 추억에 잠겼다. 좋은 기억, 나쁜 기억 모두 머릿속에서 빠르게 스쳐갔다. 어떤 장면에서는 마음이 찌르듯 아팠고, 또 어떤 모습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맺히면 더 슬픈 생각을 떠올리며 마구 울었다. 일부러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곳에 잠시 머무르며, 그를, 우리를 떠올렸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답은 하나다. 내 방식일 뿐이다.
그를 보며 문득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이별 후 억지로 잊으려 애를 쓴 적이 있다. 그가 떠오르면 머리를 흔들며 “저리 가”라고 외치기도 했고, “난 절대 안 울어”라고 입을 막고 끙끙대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애처로운 의지가 나를 더 힘들게 했다. 그래서 방식을 바꿨다. 참지 않고 다 털어내기로. 처음엔 떠올리기만 해도 베이듯 아팠다. 하지만 그렇게 쏟아내다 보니 점점 덤덤해졌다. 어느 날 그를 떠올리다가, 문득 “맞다, 내일 뭐가 있었지?” 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이별을 받아들였다는 신호였다. 그제야 나는 힘든 이별을 보내고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사랑과 이별, 그 시절은 온전한 내 인생의 한 조각이다. 왜 내 아름다운 시절을 굳이 도려내야 할까.
10년 뒤, 20년 뒤 시간이 지나면, 아니 그보다 짧은 시간만 지나도 자연히 희미해질 상대 때문에 내 소중한 시간을 일부러 지우고 싶지는 않다. 그 시절의 감정은 나를 성장시키는 과정이자 삶의 일부다. 기억과 감정이 자연히 흘러갈 때, 진정한 이별도 시작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날이 올 거야.”
이 말이 그에게 닿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