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20일째
한참 드라마 <폭삭 속았수다>를 보다 말고
익숙한 멜로디 한 조각이 불쑥 떠올랐다.
그 순간 두 곡의 제목이 나란히 머릿속을 스쳐갔다.
김광석의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예민의 '산골소년의 사랑 이야기'
두 곡의 공통점은 선명하다.
풋풋했던 젊음, 그리고 그 젊음이 지나간 자리.
그런데 뜻밖의 한 곡이 끼어들었다.
무의식의 흐름대로 부록처럼 찾아온...
이홍렬의 '영희네 담벼락에 누가 써놓은 이야기'
기억 깊숙이 묻혀있던 오래된 노래.
피식 웃음이 났다. 왜 갑자기 이 노래가 떠올랐을까?
제목은 장난 같지만 노래는 진지하다.
작사 작곡은 김창완. 감성이 통기타 선율을 따라 고요히 흐른다.
마치 옛 벗을 만난 기분으로 한 줄 한 줄 따라 썼다.
어릴 땐 별생각 없이 흥얼거렸던 가사들이 이제는 다르게 들린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
오래된 노래가 나이 든 나에게 새롭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랄까.
통기타 치며 진지하게 노래 부르던 영상,
다소 촌스러운 패션,
흐릿한 화질
TV 앞에서 흥얼거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던 내 모습까지. 나는 어느새 그리운 시절과 마주 앉아 있었다.
과정을 즐긴다는 것.
사실 나는 '과정을 즐긴다'는 말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과정보다 결과' 혹은 '눈에 보이는 성취' 가 없으면 쉽게 지쳤다.
그런 나에게 필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필사에는 늘 거리를 두었다.
당장 결과가 보이지 않는 필사와 나의 거리감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필사 20일째.
나는 놀랍도록 자연스럽게 '오늘은 뭘 써볼까?'를 즐기고 있다.
즐거운 고민은 길지 않다. 기억의 틈에서 무엇 하나가 툭 튀어나오면 저절로 필사 거리가 된다.
오늘처럼 잊고 있던 노래 한 곡이 무의식의 덤불 속에서 나올 때 반가움은 작은 설렘이 되어 돌아온다.
필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소소한 여운이 머무는 탓이었다.
평소보다 천천히 필사 노트를 덮었다.
이 여운을 어떻게 풀어볼까 고민했는데 별다른 고민 없이 글이 써졌다.
그리움은 때론, 글을 쓰는 힘이 된다는 걸 알았다.
다음에 또 어떤 추억 한 조각을 만나게 될까.
나는 지금,
과정을 즐긴다는 정체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