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용감한 헤이스 Aug 21. 2023

주재원 아내의 첫 번째 특근+야근+초과근무

온몸의 근육통과 맞바꾼 컨테이너 대정리 프로젝트


한국에서 컨테이너 이삿짐이 도착했습니다.
언제 받으실 건가요?




달 전 파견국으로 보내어 우리의 이삿짐.

나의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이 드디어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최소한의 생필품으로 극한생활을 하고 있을 때라, 이 소식이 얼마나 반갑던지..

내돈내산 작은 택배도 반가운데 열악한 살림살이 속 무려 한국에서 오는 나의 익숙한 살림들과 새로 산 신상 쇼핑템들까지 오는 반가움이란! 덩실덩실 춤추고 싶던 소식에 이미 아줌마의 내적 흥은 폭발했다.


한국에서 떠나기 직전 이거 사야 해, 저거 사야 해, 이런 것도 필요할 거야, 거기선 구하기 힘들 거야, 거기는 두배로 더 비싸데.. 등등의 합리적 이유를 들며 무엇을 사도 다 필요한 것 같고 용서가 되던 시기가 있었다.

어마무시한 카드값을 외면하며 내 안의 물욕이 폭발하던 그 시기.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사는데도 불구하고 생전 처음 가는 낯선 곳에서 미니멀 추구하다 우리 가족 못 살아낼까 봐, 아직 낯선데 대체품도 해결방법도 모르는 불편한 상황 속에서 생활이 더 힘들어질까 봐 일말의 안락한 삶을 보장받기 위해 물건들을 마구 사들였었더랬다.

사실 흉내만 내는 미니멀리스트여서 그런 걸 수도!






그 결과 집의 어느 한 공간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의 창고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고, 프로 이삿짐팀은 나의 박스들을 풀어헤쳐 빛의 속도로 안전하게 포장해서 바다 건너 이곳까지 보내주셨다.

그렇게 애틋하게 만난 나의 살림살이와 기다리던 각종 상비품들.

짐이 오기 전까지 짧은 기간 주재국에서 살아내며 한국과 다른 점, 부족한 점을 빠르게 파악한 후라 짐만 오면 이제 나의 삶의 질이 달라질 거라 예상했는데..



그래, 달라지긴 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나의 특근+야근+초과근무 삼종세트는 한마디로, 결과는 만족스러웠지만 매우 무모한 도전이었으며, 끝이 안 보였던 컨테이너 대정리 프로젝트는 슬프게도 거의 보름 정도 지속되었다.


현지 이사팀이 집 정리를 도와주는 게 기본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포장이사를 하더라도 집 구조와 평수가 바뀌면 대략 난감한 결과가 벌어진다는 건 몇 번의 이사경험을 통해 익히 경험한 터였다. 하물며 말도 잘 안 통하는 이곳에서, 집 구조며 수납 구조까지 많이 바뀐 상황 속에서 그들이 넣어주더라도 다시 꺼내 내가 다시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해서,



그래, 크게 결심했다. 내가 하기로.

까짓것 여기서 아직 할 일도 없는데!






한국의 전형적인 아파트 구조에서 나온 짐들은,

한국과는 다른  집 구조에 맞게 수납을 해야 했고,

있어야 할 곳에 있을 게 없고, 없어야 할 곳에 쓸데없는 게 있는 공간을 요리조리 각을 봐가며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고, 기분 좋게 시작된 단순 노동의 결과는 나의 무료한 일상에 작은 성취감을 주기 시작했지만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 일의 끝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무서운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수납공간은 왜 이렇게 생겼는지, 천장 천고는 또 왜 이렇게 높은 건지, 의자 밟고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아, 내 무릎이여..

아, 내 팔과 어깨여..





우선 제일 급한 주방부터 (주방이 정리돼야 하루하루의 먹고사는 전쟁, 도시락 전쟁을 치러낼 수 있다) 정리하고, 잠잘 곳을 정리하고, 앉을 곳을 만들고, 욕실을 정리하며... 내 안의 테트리스 본능을 깨워 공간 도장 깨기를 완수해 가며 뿌듯함이 솟구쳤지만, 그 결과 나의 육신은 매일매일이 두들겨 맞은 듯 근육통을 동반하기 시작했다.


점점 정리정돈에 속도감은 떨어져 가고 이러다 처음 온 이국 땅에서 병날까 싶어 모든 일을 올스탑하고 몸을 쉬어 줘야겠다 싶어 대자로 뻗어 누워있는데도 내 눈은 남은 박스의 숫자를 헤아리게 된다. 내 몸이 쉬더라도  업무를 대신해 줄 사람 없기에 그대로 멈춰있는 박스들을 보면  머릿속엔 '마법봉' 하나로 싹 다 정리되는 판타지가 펼쳐지는 유치 찬란한 상상도 하게 된다.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내가 아니면 진행이 안 될 이 미션을 나는 어쨌든 완수해야 한다.


한국보다 두 배, 세 배는 더 일하느냐 밤늦게 퇴근하는 남편을 시킬 수도 없고,

세상 처음 보는 아이들과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 적응하느냐 고군분투 중인 아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하지만 단순 노동의 백미가 이런 걸까?

단순 노동을 무한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찾아왔으며, 공간 하나하나 정리 후의 뿌듯함, 그로 인한 생활의 편리함이 내게 꿀처럼 보상으로 다가왔다. 내 인생 통틀어 이렇게 단시간 고강도의 육체노동을 해내고 보상을 경험한 적이 있었나..? 역시 육체노동은 힘들긴 했지만 보람차고 신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나의  미련하고 무모했던 이곳에서의 첫 도전이자 특근은 어느새 마무리되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야근이었고, 나인투식스 근무를 지향하는 나에게는 매일이 초과근무였던 컨테이너 이삿짐 정리.

청소보다 정리에 뜻이 있던 나였는데, 그 뒤로 족히 반년 이상은 정리의 'ㅈ' 자도 쳐다보기 싫을 정도로 넌덜머리가 나는 후유증을 남겼다.


이제 제법 시간이 흘러 살림살이가 눈에 거슬리거나 정리정돈이 안 돼서 생활의 불편함이 찾아오면 두 팔 걷어 부치고 일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고 화들짝 컨테이너 정리의 대악몽이 떠올라 피식 웃게 된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구나,

이래서 여자들이 둘째를 낳는 거지.

귀국 때까지 절대, 앞으로, 다시는 집정리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고작 얼마 전인데 말이다.

나는 또 앞으로 어떤 멍멍이 같은 고생을 잊고 다시 반복하고 있을까? 



'끝'이 있던 이 프로젝트가 내 고생의 끝, 행복 시작인 줄 알았는데, 그건 나의 좌충우돌 생활기의 시작이었을 뿐으로 잠시나마 착각 속에서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든 뒤돌아보면 고생했던 기억이 제일 많이 남는다는 진리를 일깨워 준 나의 특근의 기억.


작가의 이전글 세 번째 직업, 주재원 와이프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