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말에 오빠가 방으로 잽싸게 들어가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품에 안고 나온다. 설레는 마음으로 지켜본 티브이 화면에 딴딴~ 딴 딴 딴딴~딴 딴 반복된 음악과 함께
근사한 외국 남자들이 해변에 등장하면서 영상이 시작된다.
영어를 모르는 내 귀에도 '헤븐'이라는 가사가 수 없이 반복되는 탓에 노래 제목이 아마도 헤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1993년 내 나이 13살,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지긋한 남의 집 전세살이를 끝내고 은행이 주인이지만 어쨌거나 우리 집, 엄마 명의의 새 아파트로 이사한 그 해에, 역사적인 영상기기를 만났다. 텔레비전 하단에 비디오테이프 투입구가 있는, 비디오를 품은 텔레비전. 비디오비전이집에 설치된 것이다.
오빠가 테스트용으로 처음 넣어 본 비디오테이프는 당시 핫한 외국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모아놓은 뮤비 샘플러였다. 그 첫 주자가 영국의 국민 보이밴드
테이크 댓 (take that)이었다.
앳된 외모의 외국 청년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서 바다를 즐기며 여자들에게 천사가 되어달라며, 수 없이 천국을 찾는 이 뮤비는 테이크 댓의 I found heaven이라는 곡이다. 자연광 아래서 빛나는 그들의 외모와 달콤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뮤직비디오는 어린 나에게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내가 알던 외국인은 늘 검은 양복바지에 하얀 셔츠의 단추를 목까지 다 채우고 서류가방을 들고 2인조로 바삐 움직이는 몰몬교 선교사가 유일했다. 직접 대화를 해본 적은 없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시내를 돌아다니는 그들은 이미 나에겐 동네 주민처럼 전혀 새롭지 않은 존재였다.
반면에 영상 속 테이크 댓 오빠들은 머리에 힘을 주고 힙한 옷을 입고 스포츠카를 타고 해변에 등장한다. 롤러스케이트를 타기도 하고, 상의를 벗고 비치발리볼을 하고 비키니 입은 언니들과 어울린다. 내가 봤던 그 어떤 어른보다 멋있다.
오빠들에게 반해서 반쯤 정신이 나갔다가 문득 깨달았는데 그때까지 나는 바다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에 살면서 바다를 직접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더 나아가 가족끼리 여행 한번 다녀오지 못할 만큼 우리 집이 가난과 불화에 잠식되어 있었다는 사실을처음으로 깨달은 슬픈 날이다.
학교에서의 소풍 말고 제대로 여행이란 것을 해본 적 없는 나에게 여행지에서의 행복한 순간을 누리는 그들의 모습, 그 자체가 천국이었다.
영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테이크 댓이 무슨 뜻인지 가사가 뭔지 아무것도 몰랐지만 그 뮤비만 보면 짜릿하고 세상을 다 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에게 빠져 나중에는 take that & party 앨범 전체를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었다. 팝송을 스스로 찾아 듣기 시작할 때쯤에는 back for good이발매되었고 친구와 이어폰을 나눠 끼며 그들의 음악을 공유했다.
오늘날의 테이크 댓이
궁금해서 트위터를 찾아보니 공식 계정이 있고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새 트윗을 업로드했다. 해체와 재결합, 로비 윌리암스의 합류와 탈퇴 등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3인조로 여전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테이크 댓 이후 백스트릿 보이즈, 엔싱크, 보이존, 웨스트라이프 등 많은 보이밴드가 팝시장을 뒤흔들었고수십 년이 지난 2022년 11월에도 나의 1990년대를 떠올리며 그들의 음악을 찾아듣는다.
그 시절과 달라진 게 있다면
몸통 큰 카세트 플레이어와 비디오비전의 역할을 손 안의 핸드폰이 대신해준다는점이다.
그리고
13살의 내 옆에서 뮤비 샘플러를 받기 위해 음악잡지를 사러 시내를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테이크 댓이 어떤 음악을 하는지, 내 눈엔 다 비슷비슷하게만 느껴지던 5명의 멤버가 누구누구인지 열정적으로 설명해주던 17살의 오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