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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Mar 18. 2023

겁 많던 아이

문득 엄마 생각

어릴 적 부모님께서 아무리 방에 무엇도 없음을 확인시켜 주셔도 공포심을 물리치진 못했다. 외형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 안에서 만들어낸 허상에서 오는 공포심은 사실 스스로 떨쳐 내야 하는 것이었다.     

초등에서 중등까지 나는 주택에서 살았다. 주택은 큰 대로변과도 멀지 않고 근처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가까이 있어 웬만한 상가들이 즐비한 위치적으로 편의성이 있었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었는데 짧은 골목을 갖고 있었다. ‘ㄷ’ 자 모양의 골목이었다. 양쪽으로 각 세 집 정도가 가지런히 있었고 그 두 선을 잇는 모양새로 우리 집이 골목 끝에 위치했었다. 나는 그 골목을 혼자서 걸어 들어가지 못했다. 누군가 골목을 들어가거나 나오는 때를 기다렸다 후다닥 쫓아 움직이거나 한 참 서성여도 사람을 찾지 못하면 공중전화로 엄마를 불러내곤 했다.      


초등학생의 겁은 사람보다는 마당에 심어진 나무의 윗가지가 흔들리는 그림자, 대문 위에서(당시 우리 집은 대문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올라가면 장독이나 화분을 둘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노려보고 있는 고양이, 다른 집 마당에서 컹컹 거리는 줄 풀린 개, 무엇보다 가장 큰 공포는 뒤에서 귀신이 쓰윽 잡아당길 것 만 같은 상상에서 비롯되었다.      


겁 많던 여자아이가 대담해진 것은 중학생이 되면서부터였다. 성장은 개와 고양이가 작아 보이게 했고 나무의 흔들림은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였고 귀신은 적어도 대낮에 볼일은 없는 존재라는 이성적 인지를 가능케 했다. 성장과 함께 생활의 경험치가 쌓이니 막연한 불안감은 확실히 줄어들게 된 것이다.   

   

이리되기까지 부모님은 내게  핀잔 한번 준 적 없으셨다. 한낮에 전화를 걸어도 엄마는 웃으며 골목을 나오셨고 당신이 잠시 집을 비운 날엔 분식집에 들어가 떡볶이라도 먹고 있으라고 하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런 막내딸의 모습이 깊이 각인되긴 하셨던 것 같다.      


내 나이 서른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언니와 오빠는 이미 분가를 했기에 그 집에 엄마와 나 둘이서 버틸 이유가 없었다. 집의 사이즈를 줄이고 엄마의 생활비를 마련하는 편이 현명했다. 내가 회사를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엄마는 동네 부동산을 왔다 갔다 하셨는지 어느 날 기존집보다 10평을 줄인 동네 다른 아파트 매수 계약을 하셨고 살던 집의 매도도 동시에 이뤄졌다. 계약이 이루어진 것은 알았어도 이사 전 가볼 일은 없었다. 같은 동네의 아파트인지라 헤매며 찾을 일이 없기에 이삿날 나는 기존집에서 출근해 퇴근은 새집으로 걸음 했다. 찾기 쉽다 해도 너무 쉬웠다. 정문만 지나면 바로 나타나는 101동이었다.

     

이사 첫날 된장찌개로 저녁을 함께하며 엄마와 식탁에 마주 앉아 물었다.  

    

“어떻게 이런 집을 골랐어. 내가 좋아하는 저층에다 정문에서 바로라 찾기 쉬웠어”

     

엄마는 골목을 걸어오지 못하는 어린 딸을 데리러 나오던 웃음을 지어 보이셨다.    

  

“오천 더 줬어”   

  

“응? 무슨 소리야?”

    

“너 겁 많잖아 안쪽 동은 저녁에 퇴근해 들어오기 무서울까 봐 기다렸다가 5천 더 주고 이 집으로 했지”     


“아...”    

 

시골서 올라와 서울살이서 자리 잡는 동안 엄마는 무던히도 아끼시던 분이다. 친구 언니의 교복을 기꺼이 물려 입는 나를 보며 엄마는 마음 놓아하시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동일 평형 동일 단지에서 5천을 더 주셨다니. 이 집이어야 했다니.   

   

서른이었다. 나는 다 컸다. 친구들 혹은 회사 동료들과 주점을 돌다 보면 밤 12시도 거뜬했다.

적어도 어둠이, 골목이 무서운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의 기억은 강력했다.

어릴 적 나와 성인 된 나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발동동하며 아파트 단지 사잇길을 걸어올 막내딸이 여전히 걱정이셨다.


엄마가 기꺼이 5천을 아까워하지 않으셨듯이 나 역시 안타까워 할 수 없었다.

엄마는 마음이 놓이셨고 나는 마음이 차올랐기에


엄마란 그런 사람들인가 보다.

그래서 자식은 엄마를 생각하면 그렇게들 시큰해지나 보다.   




(고백하건데 당시엔  그 5천 아껴 엄마 생활비에 보태지.. 아님 나 시집갈때라도 주시지란 생각을 전혀 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흔 중반의 지금은 5천의 물질적 가치에 대한 아쉬움은 남아있지 않다. '너 무서울까봐'란 엄마의 마음만 연애편지 처럼 소중하게 남아있다. 결국 사람은 사랑이 먼저 채워져야 거뜬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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