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아이
대학생 때 우리 자매의 통금은 밤 10시였다. 초저녁만 되어도 쓰러지는 언니는 억지로 시간을 지킬 이유가 없이 따박따박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달랐다. 나는 야행성이라 밤시간이 좋았다. 그렇다고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취향은 아니고 가끔 친구들과 유행하는 칵테일 소주를 찾아 홀짝 거리거나 당시 강남역에 있던 이화주막 지하층에서 동동주를 마시며 지금은 기억도 안나는 수다들로 시간을 채워 넣었는데 이렇게 채워지는시간을 밤 9시에 끝내고 10시까지 집에 도착하기는 불가능이었다. 일탈 (순전히 아빠의 입장에서의 일탈이지만)이 몇 번 반복되자 자정을 살짝 넘겨 들어간 어느 날 현관에 커다란 여행가방이 놓여있었다.
어찌나 짐들을 쑤셔 넣으셨는지 지퍼가 다 닫히지도 않은 여행가방 안의 내 옷가지와 신발들이 보였고 가방 위엔 지폐뭉치가 올려져 있었다.
'
"차에 가있어. 아빠 잠드시면 엄마가 데리러 갈 테니까 거기서 자고 있어."
아빠의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왔으니 태풍은 피하고 보자며 엄마가 내 손에 몰래 자동차키를 쥐어주시며 하신 말씀이셨다.
"그렇게 네 맘대로 살 거면, 나가!! 당장 나가!!"
가타부타 없이 짧은 문장으로 나가라고 명하셨다. 아마도 그만큼 내게 해야 할 잔소리를 엄마에게 퍼부었으리라 짐작이 갔다. 엄마 말씀대로 돈뭉치와 여행가방을 끌고 차에 가있어도 되었지만 귀찮았다. 어차피 아빠가 잠드시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잔들 아침엔 불려 가 무릎 꿇고 앉아 들어야 할 훈계라면 그런 과정을 스킵하고 지금 맞고 끝내고 싶었다.
"흑... 아빠... 잘못했어요. 죄송해요... 다신 늦지 않을게요... 제가 어딜 가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갈 수 있겠어요... 정말 다신 안 그럴게요 흑"
연기가 되는구나 이때 알았다. 눈물을 흘리며 가련히 굴었다. 나는 아빠를 안다. 성질이 급하고 논리가 항상 앞서다 보니 그만큼 사람들의 이해가 따라오지 못하면욱욱하셨지만 마음이 여려 금세 푸시곤 우리를 살피던아빠셨다. 그런 아빠의 화는 무섭지 않았다.
"이 집을 나가고 싶지 않아요. 아빠 용서해 주세요"
나의 눈물에 흔들리는 아빠의 얼굴을 보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들어와'하실 용의도 보였다. 아빠는 내게 각서를 쓰게 한 후 방으로 들여보내 주셨다.
'통금시간을 어길 시 이 집을 제 발로 나가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화를 내셨지만 나의 울음은 용서할 명분을 드렸고 각서는 아빠의 가오를 살리는 수단이 되었다. 나는 걱정되지 않았다. 각서 따위야 100장이고 써드릴 수 있었다. 이것은 아빠가 항상 지는 일이 될 거란걸, 울며 연기한 나를 방으로 돌려보내실 때 눈치챘다. 오빠는 남자라는 이유로 통금이 없었다. 나와 언니는 온실 속 화초처럼 집안에 두려고만 하셨는데 나는 그런 아빠의 뜻을 어기며 매번 각서를 쓸 때마다 기만하는 자의 우월감을 맛보기도 하였다, 이런 철부지는 아빠의 마음이 걱정으로 문드러져도 내 즐거움이 먼저인지라 귀가 닳도록 하시는 잔소리는 잠깐 참아내고 풀려나는 순간 딜리트와 함께 소소한 일탈은 반복재생되었다.
결혼하자마자 아들이 생겼다. 늦은 결혼이었기에 내심걱정하고 있었는데 그와 나의 아이가 생겼다는 것은 세상 기쁘고 은혜로웠다. 다만, 그에게는 털어놓지 못하는 고민도 생겼다. 나를 닮으면 안 될 텐데...라는...
아이는 태중 초음파 사진부터 아비를 닮은 모습이었는데 자라면서 아비의 ‘미니미’라 할 정도로 판박이가 되어갔다. 작고 네모난 얼굴, 도톰한 입술에 머리통의 한쪽이 약간 더 들어가 있는 비대칭까지 유전학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DNA의 신비를 체험으로 터득하게 만들었다. 외모뿐 아니라 까칠한 성격이나 이과적인 성향모두 아비의 것과 유사하여 다행이다 싶었다.
‘아빠를 닮았으니 모범적이겠군’
이것이 나의 속내였으며 기대이기도 했다.
시어머님은 결혼 초부터 아비의 모범적인 어린 시절을뿌듯하게 자랑삼아 얘깃거리로 내어 놓으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실내화부터 빨아 널고 시키지도 않은 숙제를 다 마치고서야 놀이를 찾았다는 아비.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단 하루도 그리 살아보지 않은 나는 그런 아비가 좋아 한 결혼인지라 아이도 아비 같기를 바라고 있었다.
내 아들이 아닌 그의 아들이기만을 바랬다.
12살인 아들을 집에 두고, 나와 아비는 함께 수영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아이는 영어학원에 있을 시간이라 우리는 편한 마음으로 저녁수영강습을 받았을 텐데 어제 코로나에서 해제된 아이를 바로 학원 보내기가 안쓰러워 하루 더 쉬게 하는 바람에 혼자 한 시간 정도 집에 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부가 수영장을 가기 전부터 아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자신의 계획을 읆었다.
"엄마, 영어 숙제는 다 했으니 이젠 수학할 거야"
"숙제 다 안 했어?"
"숙제 조금 남았어. 엄마랑 아빠는 얼마나 걸려?"
"한 시간 정도 8시 10분이면 올 거야"
"아 그럼 나는 수학숙제 다하고 복습해야겠다"
"오 정말? 멋진데~~ 탭보지 말고!"
"못 믿겠으면 숨겨두던가"
"음...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럴까?"
나는 탭과 리모컨을 감추고 편한 마음으로 수영장을 향했다. 아이는 숙제를 하겠다고 야무지게 말한 터라 기특하기까지 했다. 수영장 탈의실에서 막 코트를 옷걸이에 걸으려는데 징~~~ 하는 알림 톡이 울렸다.
‘PC에서 카카오톡 로그인’
노트북이었다. 켜는 순간 카카오톡 로그인 접속알림이오는데 아이는 몰랐을 거다. 노트북 마저 처리하지 않았던 것은 비번으로 잠금을 해두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비번은 비밀이었으니까.
알림톡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아들 컴을 왜 켜?"
"아 그냥 한번 열어봤어요."
"비번은 어떻게 알고?"
"아... 전에 엄마가 넣는데 제자리에서 보였어요"
"왜 알면서 말 안 했어?"
"잊고 있었어요..."
"... 음... 컴 닫아"
"... 음... 네..."
(당황한 아들의 입에선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최근 컴을 열어 달라고 할 때마다 순식간에 로그인을 했는데 어찌 보았는지... 이것은 작정하고 알아내기 위해 보지 않고선 그냥 우연히 알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와 아비가 수영장을 다녀오겠다고 할 때부터 아이는들떠 있었던 거 같다. 호기롭게 탭과 리모컨을 숨겨도 좋다며 자기는 전혀 볼 생각이 없다는 철든 소리를 하며 우리를 안심시키곤 딴 주머니를 찰 맘으로 말이다. 알아낸 비번을 이용할 생각에 어깨를 들썩이면서...
탈의실에서 나는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요것 봐라... 이 맹랑한 것 나를 맘 놓게 하려고 연기를 해? 누굴 닮은 거야?’
그 순간 다름 아닌 내가 떠올랐다.
‘나구나…나야 나를 닮았어...’
나를 닮은 모습이었다. 잔머리를 쓰고 어설픈 연기를 하고 걸려도 한 번 참아 내면 되는 심정으로 ‘네네’ 대답하는 아이
‘아... 아비만 닮지!! 나도 닮은 거야~ 나를 닮다니...’
솔직히 너무 아비만 닮은 듯하여 아주 쬐금은 서운함도 있긴 했다. 그래도 나를 닮아야 한다면 저 모습은 아니었음 했는데 결국 아이는 나를 닮기도 하였다. 이 진한 DNA 같으니... 나는 너털웃음이 나면서 동시에 한숨도 나왔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맞다. 내 아이가 확실하다’
이 아이는 내 아이가 맞습니다!!!
이제부터 아이와 나의 머리싸움이 예상된다.
내 아이가 확실하니까. 나는 그게 뭔지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