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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해 Nov 25. 2023

사랑도 배움이 필요한걸

사랑도 배움이 필요한 걸       

    

나와 남편인 원은 카페 가기를 좋아해 자주 찾는다. 오늘도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 주고 마치는 시간까지 대기할 겸 학원 근처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해 앉는다. 여기서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읽거나 쓰거나 인데, 몇 줄 쓰다 글이 막히면 대각선에 앉은 원을 보곤 한다. 특별히 심신의 안정을 준다거나 없던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닌데 난 자주 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원은 그럴 때면 의식되는지 날 보며 왜? 라는 입모양을 짓는다. 왜? 음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영아의 의미 없는 배냇짓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지금도 네 다섯줄의 글을 쓰다 멈춘다. 나아갈 길을 잃은 문장을 여러 번 읽다 지우기 전 원을 본다. 멍하니 보다 그 뒤로 단정하게 반코트를 입은 어린 남자가 시선에 들어온다. 원의 대각선 테이블에 이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 명의 남녀가 앉아있다. 호기심이 생긴다.      


긴 머리 여자와 패딩 입은 남자가 나란히 앉아있고 그 남자 앞에 반코트의 남자가 있다. 긴 머리 여자가 무얼 흘렸는지 패딩 남자가 재빨리 일어나 티슈를 가져와 닦는다. 한 손은 테이블을 닦고 한손은 여자의 긴 머리를 쓸어내린다. 그 모습을 보던 반코트 남자는 테이블 위에 있던 여자의 핸드백 끈을 조물 거린다. 그 행동으로 보아 이 남자도 여자와 꽤 가까운 사인가 싶은 판단을 하게 된다. 패딩 남자의 여자 친구를 소개받는 자리라면 그리 자연스럽게 여자 가방끈을 만지작거리진 못할 테니. 여자의 애교스러운 눈웃음에 옆에 남자가 활짝 웃는다. 동시에 반코트 남자는 고개 숙여 슬며시 웃는다. 흠... 저 셋의 관계 미묘하다. 미묘하게 간질거린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참 좋을 때구나.    

   

내게도 좋을 때가 있었을 텐데 그때 나는 정말 좋았던가.

열아홉 겨울, 수능을 보자마자 시험이 망했음을 직감했지만 절망보단 할 일을 찾았다. 공부 빼곤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고 하고 싶었다. 고등학생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올 때면 동네 유일하게 꺼지지 않는 불이 하나 있었는데 집 앞 편의점이다. 깜깜한 망망대해에서 바라본 등대처럼 난 그 편의점을 의지해 학교를 다녔다. 어둡던 길목을 밝혀주니 고마워 참새처럼 자주 그곳에 들러 간식하나 사들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만큼 익숙한 곳이라 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 달려갔다.      


여기 아르바이트 안구하세요.     


점장의 의아한 표정이 스치긴 했지만 그도 내가 익숙했는지 아님 인력이 급했는지 바로 채용되었다. 당시 시급은 처참했지만 중요치 않았다. 그저 감사했다. 날 받아주다니. 나는 저녁타임에 대학생 언니와 파트너가 되어 일 했고 우리 다음으로 대학생 오빠 둘이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오빠가 그만두고 뉴 페이스인 T가 들어왔는데 나와 동갑내기 남학생이다. T의 친화력은 남달랐다. 파트너 형과 호형호제하며 급속히 가까워지는 거야 그렇다 쳐도 얼마안가 나와 대학생 언니가 일하는 시간에도 수시로 들러 놀곤 했다. 그 덕에 대학생 언니, 나, 대학생 오빠, T 이렇게 넷이 자주 뭉쳤다. 수능보기 전 백일주도 안 마신 내가 종이컵 가득 소주를 들이 킨 일도 이들과 있을 때다. 자주 어울리다보니 대학생 오빠와 언니가 정분이 났다. 커플이 아니었을 땐 그렇게 놀리더니 커플임을 선언하고 나서 언니를 향한 오빠의 태도는 무척 고분고분했다. 그것을 옆에서 직관하는 것만으로도 재미났는데 더 큰 즐거움은 T였다.  

    

강남구 논현동 거주, 영동고 3학년, 교내 싸움 짱 이자 의리 짱,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그럭저럭 빠지지 않는 나름 선한 터프가이. T는 이렇게 자신을 어필하며 다가왔고 이 중 논현동 거주를 특히 강조했다. 어찌되었건 여자고등학교를 다녔던 난 동갑내기 남자를 처음 보는 것과 다름없어 마냥 신기했고 살짝 들뜨긴 했다. 하루는 제법 있어 보이는 오토바이를 몰고 친구와 나타나 날 뒷자리에 태우고 편의점 앞 대로변을 달려주니  영화 ‘비트’ 속 정우성이라도 만난 양 설레기도 했다. T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 모아 그의 어필이 맞는 말임을 증언해주며 나와 T를 응원했다. 그렇게 나도 편의점 2호 커플이 되었다.   

   

나의 첫 연애는 오로지 T의 리드에 의존했다. 머가 먼지 너무 몰랐던 나는 휩쓸리듯 T와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도 아는 게 하나 없었는데 관계란 더 모르는 쪽이 끌려갈 수밖에 없기에. 아직 고등학생이었지만 한편으론 대입을 치른 후라 남는 게 시간인지라 거의 매일 보다 시피 했다. 한 번은 내 친구와 T의 친구를 불러 넷이 노래방에 갔다. 감미로운 발라드를 주거니 받거니 하던 중 난 화장실을 가려 나가는데  T가 에스코트를 했다. 그 건물 화장실은 남녀가 같이 사용해야 했기에 누가 들어가면 밖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T는 갑자기 따라 들어오더니 입을 맞추려 했다. 내가 아무리 몰라도 첫 키스를 화장실에서라니! 있어선 안 될 일이었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순간 T의 당혹스러운 낯빛이 보였지만 그건 내 쪽도 마찬가지인지라 어찌 수습할 바를 몰랐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건 그가 바로 미안하다며 사과했기에 어색하게나마 넘어갔다. 그렇게 어찌 어찌 시간이 흘러 만난 지 30일 되던 날 T는 선물로 커플링을 준비해왔다. 난 뭣하나 준비 못했는데 반지에 이니셜까지 세 겨 온 정성에 아 이런 게 연애구나 사랑받는 거구나 싶었다. 다만 그 반지를 맞춤 제작하는데 자신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돈은 얼마가 들었는지 참깨만한 다이아를 박아와선 또 얼마나 어필을 하는지 심쿵이 오려다 달아나며 내 맘을 나조차 헷갈리게 만들긴 했지만.   

  

이 날 T는 작정 한 듯 했다. 우리 집 아파트 담벼락에 날 세우고 다시 한 번 입맞춤의 도전이 있었다.  30일 연애 기념 이벤트도 준비했고 손잡고 나면 키스로 이어지는 연애의 단계 정도는 알기에 굳이 튕길 마음은 아니었으나 한편, 난 정말 이 아이가 좋은가. 아니 사랑하는가. 이런 확신 없이 키스해도 되는가. 싶은 오만가지 생각이 들긴 했다. 그렇지만 이번엔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입안으로 T의 혀가 쑥 들어와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상당히 분주한 그의 혀가 멈추길 기다리며 이런 생각을 했다.  

    

당최 왜 연인들은 키스를 하는가. 이게 뭐가 좋아서.      


심장의 떨림이나 울림은 내치고서라도 입안에 침이 고이기 시작하니 숨이 막힐 거 같았다. 그래도 나름의 배려로 T를 서서히 떼어내고 눈으로 그에게 물었다.   

  

이거 어찌해?      


입안 가득한 그와 나의 타액을 말하는 거다. 그는 당연한 듯 말했다.  

    

삼켜야지     


그의 말에 이번엔 눈썹까지 찌푸리며 눈빛을 발사했다.

      

미친... 너라면 할 수 있어?     

 

그리곤 바닥에 퉤하고 뱉어버렸다. 뱉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냥 더러웠다. 그런데 삼키라니. 난 이날 T를 향했던 모든 호감을 타액과 함께 버렸고 T도 실망스럽긴 마찬가지였는지 자연스레 30일 연애가 종료되었다. 그리곤 일주일 뒤 T가 찾아왔다. 요는 커플링을 돌려달라는 거였다. 물론 고등학생이 장만하기엔 마음먹고 사야 했겠지만 절대 고가의 것이 아니었고 내 이니셜까지 세긴 것을 달라니. T라면 충분히 긁던지 녹이던지 재활해서 쓸 거 같긴 했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을 내밀었는데 거기엔 우리가 먹었던 햄버거 비용, 보았던 영화관 티켓 비용, 그리고 내게 반지 외에 선물로 주었던 필통 가격이 쓰여 있었고 그 모든 비용의 반을 청구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그걸 보며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T도 정말 받아낼 작정을 한 건 아님을 알기에 웃고 지나갔으나 참 치사스럽긴 했다.  

   

허세 가득했던 고딩 남아와 어리버리 했던 고딩 여아의 미숙하기 짝이 없던 연애. 꺼내어 풀어놓기엔 더러움과 치사함만 남았던 연애. 지나보니 반은 그 아이에 대한 호감이고 반은 연애행위에 대한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30일 천하였다. 어릴 적엔 ‘처음’이라는 의미에 상당히 무게를 두어 T와의 만남 자체를 통으로 편집해 인생사에서 없었던 일처럼 지내기도 했다. 연애가 아니었으니 그것이 절대 나의 첫 키스가 아니라며.   

  

그러나 더 지나보니 돌아서면 보고 싶고, 곁에 있어도 그리운 이를 알아 볼 수 있게 해준 건 더럽고 치사하고 아프고 섬뜩하기도 했던 이런 나의 연애 경험들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난 T뿐 아닌 몇 번의 연애를 통해 남자의 허세를 배웠고 남자라고 모두 소설 속 주인공처럼 희생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배웠고 나처럼 상당히 나약하고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기도 하다는 것을 배웠다. 반면 내가 어떤 이에게 매력을 갖는지 분별할 수 있게 되었고 남자들의 미숙한 표현 속엔 더 한 순수함이 숨어 있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이를 만나 뜨거웠다 식었다 이별하는 과정의 반복은 결코 유쾌하지 않다. 지치고 허무하고 아프기도 하지만 세상에 나와 동일한 주파수를 갖고 있는 이를 알아보기 위해 필요한 학습이다. 경험의 부재 혹은 학습의 부족은 내 것이 아닌 인연에 속거나 내 연을 알아보지 못해 돌아가는 길을 맞닥뜨리게 하기에.    

 

물론 단 한번으로 딱 맞는 연을 맺는 이들도 있지만 그 행운이 내 것은 아니었기에 난 부단히 애쓰며 사랑을 배웠던 거 같다.       

 

원 뒤로 세 남녀가 테이블을 정리하며 카페를 나갈 채비를 한다. 막 타오르는 패딩 남자와 사랑스러운 긴 머리 여자와 단정한 반코트의 남자. 이 젊은이들에게서 피어나는 향긋한 사랑내음이 코를 찌른다. 그들 각자의 연애 학습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임을 알기를...때론 무너지고 때론 슬프고 때론 무모하고 때론 이용당하기도 하겠지만 그 단련에 충만한 사랑이 있고 행복이 있음을 그 또한 알게 되기를 응원하며 원을 본다.      


나의 배냇짓은 그에게서 사랑을 충전하는 나만의 짓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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