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리스트 <<자클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리뷰(2)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재클린 뒤 프레(애플 뮤직 소개글). 세계적 첼리스트로 이름을 날렸지만 젊은 나이에 불치병에 걸려 일찍 생을 마감한 그녀의 전기를 다룬 <<자클린느 뒤 프레, 예술보다 긴 삶>> 두 번째 리뷰 글이다. (책은 그녀의 이름을 ‘자클린느‘로 번역했지만 우리에게 더 익숙한 명칭은 ‘재클린’이므로 명칭을 재클린으로 통일해서 쓴다.) 두 번째 리뷰는 1.성인 첼리스트로서 전성기를 구사하던 시기, 그리고 2.다발성경화증이라는 병과 싸우던 말년(그래봤자 40대)의 그녀의 모습을 다룬다. 첼리스트 신동 시기 재클린의 모습은 아래 리뷰(1) 참고.
https://brunch.co.kr/@artisticlifeand/26
청소년기를 벗어나 성인으로 가는 길목에 선 유수의 연주자들은 큰 내적 혼란에 빠진다고 한다. 꽤 오랜 시간 악기를 내려놓기도 하고, 극심한 우울증이 오기도 하며 심지어 신체적 마비를 앓기도 한다고.
도대체 왜 연주를 해야 하는가. 연주는 내 길이 맞는가. 부모님(어른)의 전두지휘 아래 어릴 적부터 해오던 연주 신동으로서의 삶을 성인이 되어서도 연장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 엄청난 압박감 속 공연이 겨우 끝나고 타인에게 칭송받으며 화려한 파티에 참석한 후 적막한 호텔로 잠시 들어갔다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음 연주회 장소로 이동하는 쳇바퀴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 심지어 다른 사람이 누리는 일상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심지어 음악을 업으로 삼기에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고. 어릴 적에는 ‘시키는 대로’ 또는 ‘타고난 감각’으로 해왔지만 다양한 음악적 이론 쌓은 후로는 도대체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소용돌이 속에 빠지기도 한다고.
재클린 또한 수없이 많은 고민과 방황을 겪었고 첼로를 몇 달간 켜지 않기도 했지만, 재클린은 무대로 곧 돌아왔다. 이전보다 더 아름답게 말이다. 금발의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첼로를 연주하는 것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책에는 재클린 전담 의상 디자이너와의 에피소드가 많은 부분 할애되어 있었다. 디자이너의 회상의 말에는 당시 드레스의 고혹적인 색깔과 반짝임이 묻어났다. 재클린은 자신만을 위해 맞춤제작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섰으며 이를 즐겼다.
성인이 된 재클린이 ‘모든 음마다 쏟아내는 혼이 나간듯한 강렬함, 확신, 신들과 소통하는(258쪽)‘ 듯 공연하던 모습은 지금도 영상으로 꽤 많이 남아있다. 검색만 하면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녀의 연주 모습을 굳이 활자화하면 아래와 같다.
재클린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흔들어댔고 그래서 듣는 연주인만큼 보는 공연이기도 했다. … 몸을 앞으로 숙여 현을 툭 자르듯 활을 켰고 활처럼 몸을 둥글게 구부렸다가 머리를 휙 뒤로 젖혔다가 다시 첼로 가까이 몸을 숙이며, 모양새가 흉할 정도로 격렬하게 첼로를 켰다.(255쪽)
성숙한 여성이 되면서 그녀의 연주에는 관능적인 요소가 확연히 드러났다. 재클린 뒤 프레가 공공연히 첼로와 사랑을 나눈다고들 했다. 확실히 그녀의 연주를 지켜보노라면 마치 성행위를 훔쳐보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 재클린의 얼굴에 곡의 강렬한 기쁨이나 고뇌가 드리워질 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리듬을 타고 몸을 일으켰다 내리고 좌우로 흔들며 맹렬히 움직일 때의 그녀는 마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듯 고스란히 자신을 드러냈다.(226-227쪽)
연주회마다 그녀의 노란 말갈퀴 같은 머리칼이 도리질하듯 흔들리다가 때로 줄감개에 엉키기도 했고 그녀의 연주는 마치 톱으로 썰듯 활로 첼로를 두 동강 내는 듯하다.(255쪽)
뭐니 뭐니 해도 재클린의 삶에 빠질 수 없는 사람은 그녀의 남편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80대인 지금도 전 세계 투어를 하며 지휘와 연주를 하고 음반을 발매한다. 피아니스트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지휘가로 더 알려진 거장 중의 거장이다. 음악에 있어서 전성기를 맞이하는 것은 나이가 깊어진다 해도 가능하다. (어쩌면 재클린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80대의 거장 첼리스트로 있을 지도. 시대별 그녀의 음반을 비교해 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았을까.)
책에 묘사된 젊은 다니엘 바렌보임의 모습을 보니 재클린과는 또 다른 결의 ‘천재’다.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어떤 주제로도 토론을 할 수 있는 논리적 언변력을 갖췄다. 그는 암기력도 뛰어났다. 연주할 모든 곡을 암보할뿐만 아니라 3년 치의 세세한 연주 일정과 관련 요구 등을 다 기억했다고. 그는 엄청난 에너지의 소유자기도 했다. 하루에 2-3시간만 잤고, 공연이 끝나고서도 뒤풀이 파티에서 새벽까지 연주를 즐겼단다. 그는 통 큰 면모도 지녔는데, 저녁 만찬을 비롯하여 각종 모임에서 항상 크게 쐈다고 한다. 재치와 유머를 겸비했지만 때로는 타인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거만하기도 했다고.
다니엘 바렌보임과 재클린은 여러모로 극과 극이었다. 재클린은 금발의 백인으로 영국 청교도 가정에서 자랐고, 바렌보임은 검은 머리를 가진 아르헨티나생 유대인이었다. 재클린은 키가 175센티미터, 바렌보임은 160센티미터였다. 재클린은 본능적, 감성적으로 연주했다면 바렌보임은 냉철하며 논리적으로 음악을 대했다고(그의 별명은 ‘절제의 정수‘란다.) 하지만 극과 극은 서로에게 끌린다던가. 재클린은 외모 성격 음악에서의 태도 모두 다른 바렌보임에 반해, 그리고 그도 재클린에게 완전히 사랑에 빠져 1967년(그녀 나이 22세) 결혼한다. 심지어 결혼식은 당시 전쟁 중인 이스라엘(제3차 중동전쟁)에서 거행되었다. 더 놀라운 건, 결혼 직전 재클린은 바렌보임을 따라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다(이는 재클린의 영국 가족, 지인에게 두고두고 불만을 낳았고 후에 그들은 재클린이 불치병에 걸린 결정적 까닭으로 치부해버리기까지 한다). 그들은 결혼 축하와 평화의 메시지를 동시에 담아 전쟁통에서도 황홀하게(?) 공연했다고 한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후에도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공연을 꾸준히 해왔는데, 팔레스타인을 위한 공연으로 이스라엘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고)
분야는 같지만 각자의 최고봉에 있었던 그들은 서로 영향을 주며 음악적으로 성장한다. 본능적으로 음악을 느끼고 연주한다는 것이 무언인지에 대해 재클린은 분석적인 남편에게 알려주었으며, 바렌보임은 바그너 오페라 등을 비롯하여 음악은 첼로 이외에도 무한한 영역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재클린의 어느 말이 기억에 남는다. 연주에 대한 고민이 밤늦게까지 계속될 때 침대 머리맡에서 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어 참으로 행복하다고. 그러게. 영혼을 공명할 수 사람과 눈 떴을 때부터 잠자리까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축복일 것이다.
하지만 이 행복도 영원할 수 없다. 한때 열렬하게 사랑해 결혼했고 그들이 함께한 음반과 영상이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으나, 재클린이 아픈 후로부터 부부 관계는 조금씩 멀어졌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외도에 아이까지 낳아, 비극적 아내를 버린 못된 남편으로 세간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보니 당시 바렌보임의 선택이 반드시 비난받을만했던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저자는 말한다.
공식적으로 재클린의 결혼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결혼은 결국 다니엘에게는 깊은 갈등의 근원이, 재클린에게는 수치가 되었다. 그녀의 경우 점점 더 약해지는 마음, 짐이 된다는 부담감, 결함이 있는 파트너라는 데서 오는 수치심(가장 큰 건 성적인 면이었다) 그리고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 모든 것이 상대로부터 점점 더 많은 확신의 말을 듣고 싶게 했다. 무기력함에 짓눌리고 과거의 잘못한 일들에 대한 회한에 휩싸인 바렌보임은 아내에 대한 진실한 애정과 자신의 첫사랑인 음악가로서의 길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387쪽)
재클린의 지인은 말한다.
그(바렌보임)가 ’화성에 대해 배워보면 어떨까? 베토벤 4중주를 공부해 보면 어때? 여기 악보와 음반이 있어. 이걸 들어봐, 그리고 내가 돌아와서 연주를 하면 당신이 그에 대해 내게 말해줄 수 있잖아.’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음악을 했기 때문에 악보 읽는 걸 힘들어했어요. 그녀는 아주 완고할 때도 있어서, 누가 뭘 하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기도 했고요. 그는 그녀가 자신을 위해 생각해 낸 작은 계획들에 관심이 없는 걸 보고 몹시 실망했던 것 같아요. (414-415쪽)
재클린의 굴곡진 삶도 가슴 아프지만, 그런 재클린을 아내로 둔 남편의 삶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의 입장과 상황에서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한 모습을 책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공연을 여러 차례 취소하기도 했고, 유수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수 있는 좋은 자리가 났을 때도 아내와의 시간을 위해 거절하기도 했으며, 연주로 인해 타국에 있을 때도 아내와 매일 밤 통화하려 하고, 꽃과 같은 선물을 집으로 자주 보냈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연을 계속해서 취소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바렌보임은 세계를 휘날리던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였고 연주 일정은 몇 년치로 꽉 차 있어 이를 소화해내야만 했다.
문득 의문이 피어오른다. 물론 이런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되겠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과 사람들이 갑자기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나는 얼마만큼 타인의 삶에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나는 바렌보임만큼이라도 시간을 내고 위로의 마음을 내어줄 수 있을까. 과연 그가 한 만큼이라도 할 수 있을까. 상대는 세계 최고 첼리스트였다. 상대방의 상실감과 좌절감을 어떻게 받아내고 위로하고 껴안을 수 있을까. 이렇든 타인의 삶은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천재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는 꽃다운 나이 20대 후반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불치병을 진단받는다.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이 병은 지금까지도 원인과 완전한 치료법이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섬세하게 첼로를 연주해야 하는 첼리스트로서는 자신의 커리어를 접어야 하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며, 심지어 생명까지도 위독할 수 있는 병에 걸리게 된 것. 책은 다발성경화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뇌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신경섬유의 절연체와 척수를 침범하는, 중추신경계에 일어나는 만성적이고 점진적인 질병이다. 손상을 입은 곳은 신경섬유를 감싸는 수초가 두껍고 딱딱한 ‘경화성’ 상처 조각으로 대체되어, 뇌에서 근육과 장기로 전달되는 메시지를 방해한다. 신경계의 어느 부분(들)이 영향을 받으냐에 따라 근육 약화, 평형감각 상실, 현기증, 사물이 흐릿하거나 겹쳐 보이는 증상, 어눌한 말투, 마비, 간지러운 증상, 음식물을 삼키기 어려운 증상, 방광과 대장 및 성기능 장애, 경련(무릎과 고관절부를 굳게 만들고, 발을 아래로 밀어내거나, 걷거나 계단을 오르는 것을 몹시 힘들게 만드는 비자발적 근육 위축 증상)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다발성경화증 환자들은 이 중 하나 또는 여러 가지의 증상을 보이는데 이런 증상들은 어느 때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며, 가벼운 것에서 아주 심각한 증상까지 그 정도가 다양하고 몇 분 사이 잠깐 혹은 몇 년씩 지속되기도 한다. … 단기간의 심각한 증세가 나타나는 발병 뒤에는 증세가 몇 주, 몇 달, 혹은 심지어 몇 년간 사라지거나 완화되는 병의 일시적 진정 기간이 이어지는 게 전형적이다. 이 병은 치명적이진 않지만 다른 질병(가장 흔한 것이 폐 또는 방광 감염)을 물리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을 훼손시킴으로써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원인도 치료법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 최악의 경우에 해당하는 15퍼센트의 환자들은 질병이 급속히 진전되어 완전한 마비에 이른다. (356-358쪽)
재클린에게도 전조 증상은 있었다. 갑자기 발이 너무 차가워진다. 손가락이 무뎌진 느낌이 든다. 갑자기 비틀거리거나 넘어진다. 갑자기 심하게 피곤해진다. 하지만 초반에는 본인만 느낄 수 있는 이상함이었다. 한 번도 연주에 두려움이 없었던 재클린은(심지어 어릴 적 재클린은 공연 전에도 긴장 없이 활달한 모습에 ‘네 연주 차례는 다 끝났구나‘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고) 연주를 망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여 리허설을 두 배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행동은 결과적으로 다발성경화증 환자에게 피로를 가중시키는 무리한 행동이었다고. 병을 알 길이 없는 바렌보임은 왜 이렇게 초조해하고 소심해졌냐고 핀잔을 주게 된다. 그럴수록 재클린은 우울증은 가중되었다. 재클린은 병원에도 갔지만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고 정신적 스트레스쯤으로 치부된다.
1971년부터 공연을 쉬고 복귀와 취소를 반복하다가 1973년 2월, 재클린이 악몽은 현실이 된다. 첼로 케이스를 열 힘조차 없던 재클린은 공연 직전 연주를 포기하려 했으나 당시 지휘가(레너드 번스타인)의 설득 끝에 무대에 올랐고 최악의 연주로 듣도 보도 못한 혹평을 받는다. 이후 온갖 검사 끝에 1973년 10월, 28세에 ’다발성경화증‘ 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재클린은 오히려 ’안도’했다고 한다. 그동안 헛된 망상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 아픔이 맞았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클린은 프로이트를 기반한 신경정신과적 치료도 계속해서 받았는데, 이 시간만이 유일하게 재클린에게 허락된 감정 분출의 시간이었다.
당시 영국의 문화, 여성을 향한 잣대 등에 의해 재클린은 분노, 슬픔, 우울, 불안, 좌절, 수치심, 자기혐오 등을 타인에게 솔직하게 표출할 수 없었다. 여전히 ‘모든 게 괜찮은’ 체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이 우선적인 의무(379쪽)가 되었다니.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것일까, 하며 남 앞에서 통곡할 수도 없었다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내 마음대로 몸을 못쓴다는 수치심 등을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다. 아름답고 젊고 천재적인 첼로 연주가에서, 악기를 놓은 채 휠체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으로 급변해 버린 삶을 도대체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살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했으나 재클린은 ‘삶’을 택했다. 재클린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했습니다. 아직 살아 있다면 인생을 즐길 수 있고 할 일들이 있으니까요.”(393쪽)라고 말했다. 찬란했던 연주자로서의 과거는 작별하고 또 다른 단계의 삶으로, 엄청난 진통 끝에 진입했다.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이해 차와 음식을 대접하고(물론 도우미가 있었다), 일기를 쓰고, 구두와 옷 쇼핑을 위해 백화점을 가고, 멋지게 차려입고 다른 이의 연주회에 참석하는 삶. 1975년 하반기에는 처음으로 휠체어 위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드러냈고, 텔레비전에 출연했고, 같은 질병을 앓은 환자 앞에서 공개적 연설을 했다.
과거에 녹음한 본인의 음반에 대면하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한다. 하지만 결국 음악의 길로도 진입한다. 녹음했던 자신의 곡을 다시 들어보고, 검토하고, 비판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첼로 선생님으로서 레슨을 하고, 공개 마스터클래스를 열었다. 재클린과 함께한 레슨의 즐거운 기억을 갖고 있던 제자의 말을 인용해 본다. (409-411쪽)
좀 괴상한 걸 해보자, 정통적이지 않은 핑거링을 해봐.
악마가 되어 봐. 업 바우(up bow)로 끝내!
길게 연주해야 하는 음은 영원히 연주하라.
‘테이크오프 노트(takeoff note)‘ 특히 다음에 왼손의 위치를 바꾸는 경우에 길게 연주한다.
활주법(한 음에서 다른 음으로 넘어가는 것)은 활 스트로크를 바꾼 뒤 왼손의 손 이동을 시작하는 게 지극히 중요하다.
재클린은 자신의 최고급 첼로(스트라디바리우스 등)로 학생에게 연주를 요청하기도 했다. 어느 학생은 재클린이 본인의 첼로를 느낄 수 있도록 재클린의 손을 쥐어 현에 갖다 대게 하고 활을 켰다고도 했다. 감동적인 장면이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그녀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전갈을 받고 급히 집으로 돌아온다. 재클린은 1987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재클린 뒤 프레 이미지를 검색하면 첼로와 함께한 전성기 때의 젊고 밝고 화려한 사진이 대부분이다. 병마와 싸우던 시기의 사진은 몇 차례 검색해야 나왔다. 재클린의 말년이라 해봤자 40대이지만 휠체어 위 그녀의 모습과 첼로를 연주하던 모습은 극렬히 대조적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한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환한 웃음만은 같다.재클린의 별명은 아프기 전에도 후에도 모두 스마일리(smiley)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