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지 않은 만남
-1년 전-
루나가 연남동으로 카페를 이전하기 전, 군자역 근처에서 운영하던 10평 남짓한 카페가 3년 전에 처음 카페를 오픈했을 당시에 비해 작년부터
꾸준히 매출이 올라 연남동 골목에 있는 2층짜리 주택을 개조하여 운영하던 꽃집을 매수할 수 있었고, 이전을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바빴던 점심시간이 지나고 조금 한가한 분위기였다.
한 손님이 조용히 카운터에 다가와 커피 한 잔을 주문했고, 손님은 카페 한구석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루나를 힐끗대며 시간을 보내곤 했으며,
그녀는 그 시선이 불편하게 느꼈지만, 예의상의 친절함을 잃지 않았다.
그 손님은 단순히 카페 앞을 지나가다 루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다음엔 예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고, 그날부터 매일 이렇게 방문했다.
그러다 일주일이 지나 연남동으로 이전을 마쳤고, 그날도 어김없이 군자역 카페를 방문했던 그 손님은 원상 복귀된 카페 외부와 내부,
그리고 유리에 붙은 확장 이전 안내문과 이전한 위치 지도를 보았다.
확장 이전한 카페에도 방문해 루나를 계속해서 관찰하기 시작한 그 손님의 입가엔 섬뜩하면서도 묘한 미소가 지어졌으며,
자신을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점점 분노를 느꼈다.
-현재-
그리고 그 손님은 루나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날에도, 지금도 여전히 그녀의 카페에서 그녀를 힐끗대고 있다.
이번에는 다 마신 매장 컵을 픽업대에 가져다주며 루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안 보이시던데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제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입원해 있었어요…"
"아~ 그래서 어깨에 보호대를 하고 계신 거구나. 아프셨겠어요."
그 손님의 말 뒤에 숨겨진 냉소를 루나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걱정 감사해요. 재활 치료만 잘하면 금방 보호대도 안 하고, 일상생활 하는 데에 지장 없을 거래요."
"아, 그건 좀 아쉽네…"
그 손님이 작게 중얼거렸고, 알아듣지는 못했어도 수상한 낌새가 느껴져 의심은 거두지 않는 루나
"근데…아직도 나를 기억 못하는 건 좀 서운한데…"
"네? 기억..하죠. 군자역 카페에 자주 오셨던 손님이셨잖아요."
"아닌데…그전에도 우리 만난 적 있는데…?"
그 말에, 그 손님의 눈에서 오래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13년 전-
서울시 광진구에 위치한 광진고등학교.
루나가 졸업한 학교로, 처음 입학 당시에 9반에 배정받았고, 조용히 앉아 있던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었던 건 '조이나'라는 이름표를 단,
한 여학생이었으며, 그 손님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웃으며 대화를 나눴고, 그 후로 같은 반 짝꿍에, 급식도 함께 먹고, 등하교도 함께 하는 친구가 되었으며, 이나는 루나에게 항상 웃어주는 친구였다.
2학년이 되면서는 다른 반에 배정받았지만 쉬는 시간마다 서로의 반을 오가며 우정을 유지했고, 루나에게 다른 친구들이 생기면서 루나가 이나의 반을
가는 날이 줄어들었으며, 이나가 루나의 반을 가면 루나를 다른 친구들과 웃으며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다시 자신의 반으로 돌아가는 날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급식과 등하교를 함께 하는 건 변함이 없었다.
3학년 수험생이 되고 나서도 같은 반은 아니었고, 루나에겐 이나가 여전히 친구였지만, 이나는 생각이 달랐다.
3학년 체육 과목을 맡은 선생님은 한 학년에 한 명씩 체육관을 관리하는 학생을 정해 봉사 점수를 주곤 했고, 체육 시간 때마다 제일 먼저 체육관에 가서
그날 수업 때 사용할 농구공, 배구공 등 준비 혹은 정리를 하거나 체육관 문을 잠그고 열쇠를 선생님께 반납하는 일을 그 일을 도맡아 했다.
다른 반 수업을 위해 등교하자마자 하는 일도 체육관 문을 여는 일이었고, 하교하기 전에 체육관을 확인하고 문단속을 하는 것 또한, 이나 몫이었으며,
종종 같이 하교하기 위해 기다리던 루나와 함께 체육관 정리도 하고 함께 문단속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하루는 함께 체육관을 정리하는데, 공 보관함 겸 캐리어에 배구공을 담고는 창고로 옮겨 놔야 했고, 이나는 열쇠를 어디에다 뒀는지 모르겠다며
찾을 동안 루나에게 대신 부탁했으며, 루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캐리어를 창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열쇠를 잃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었고, 밖에서 창고 문을 잠근 후, 그대로 체육관 문까지 잠그고는 열쇠는 선생님께 반납한 후에 하교를 해버렸으며,
다음날 등교해 열어줄 생각이었다.
지욱의 도움으로 창고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창고 문도, 체육관 문도 잠글 수 있는 사람은 열쇠를 가지고 있던 이나 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이나의 반으로 찾아가 왜 그랬냐고 따졌고, 이나는 되려 울면서 '왜 내가 그런 짓을 했겠냐, 너에게 먼저 손 내밀었던 건 나였는데
내가 너에게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냐, 어떻게 나를 의심할 수 있냐, 나도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선생님이 오셔서 자신이 대신 문단속 할 테니
먼저 가라고 했고 정문 앞에서 널 기다렸지만, 니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서 먼저 간 줄 알았고 오늘 널 만나면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너에게 물어보려고
했다'며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말만 들은 이나의 반 아이들은 루나를 아무런 증거도 없이 2년을 함께 다니던 친구를 일부러 자신을 창고에 가둔 사람으로
몰아가는 몰상식한 사람 취급하며 한마디씩 했다.
루나가 하루아침에 부모님을 잃은 후에도 이나를 포함한 이나의 반 아이들은 루나가 지나가면 '니가 그렇게 못돼 처먹어서 니 부모님도 그렇게 된 거야,
ㅅㅂ년아'라며 욕을 해댔고, 루나의 반 아이들도 루나를 피하며 아무도 곁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나는 창고의 문이 잠길 때, 이나가 작게 '넌 내가 널 놓아주기 전까지 절대 날 떠날 수 없어'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고,
창고 문을 잠그고 체육관을 나서는 이나의 구두 소리도 똑똑히 들었지만, 그녀에게 이나가 먼저 손 내밀어줬던 친구였기에 더이상은 문제 삼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이나의 친구들의 멸시와 조롱에 굴하지는 않았다.
그날의 기억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편의점, 마트, 호텔, 카페 알바를 하면서 일에 치여 사느라 점점 잊혀졌고 이나도 졸업한 후 양악 수술 등으로
외모가 많이 변했기에, 이나가 처음 군자역 카페에 왔을 때도 루나는 이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으며, 이나의 눈과 그 눈빛을 보는 순간, 그날의 기억도,
이나의 목소리도 전부 기억이 되살아났다.
-현재-
"혹시…이나? 조이나?"
"맞아. 나 이나야, 루나야. 이제야 나를 기억한다니 섭섭하네."
"미안.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어서…"
"왜? 니가? 아, 하긴. 때린 사람은 기억 못해도 맞은 사람은 기억하는 것처럼 당했던 내가 기억하고 넌 기억도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거겠다.
그치? 항상 궁금했거든. 고3 때 나를 버러지 취급하던 너는 잘 살까, 그날 이후로 고아가 된 너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근데 군자역에 카페도 이쁘게 해놓고, 여기로 확장 이전도 하고, 돈 잘~ 벌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더라~? 짜증 나게? 이젠 여기 안 와야겠다.
커피 팔아주는 것도 그만하고, 뭐가 이쁘다고…잘 살라고는 말 못 하겠다, 진짜로 더 잘 살까 봐. 갈게. 다신 보지 말자."
그 말을 남기고 카페를 나간 후, 이나는 카페를 다시는 방문하지 않았고, 다행이라는 생각보다는 뭔가 찝찝한 느낌이 들어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2024년 11월 14일>
AM 10:00
루나는 건물주의 연락대로 군자역 카페 창고로 물건을 가지러 출근 전에 들렀다 가기로 했다.
군자역 카페 자리였던 건물 1층은 현재 비어 있었고, 유리에는 임대 문의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건물 앞에서 집주인을 만난 그녀는 창고 키를 건네받았고,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구석엔 그녀의 물건이 아닌 낯선 상자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고, 다른 상자 표면에는 얼룩진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것과는 달리,
그 상자는 마치 새 상자처럼 깨끗했으며, 상자 안엔 쪽지 한 장만이 들어있었다.
말했잖아. 넌 내가 널 놓아주기 전까지 절대 날 떠날 수 없다고. 이젠 놓아줄게. 날 원망하지는 마. 다 니가 자조한 일이고, 다 니 탓이야. 지옥에나 가버려.
(쾅!!!)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순간, 창고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누군가 창고 문을 자물쇠로 잠그는 소리가 들린 후, 갑자기 창고 입구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무슨 상황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코끝을 찌르는 타는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졌으며, 그녀가 급히 뒤돌아섰을 땐 이미 작은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것이 순식간에 주변의 박스와 쓰레기들을 집어삼키며 거대한 화염으로 변했고, 연기는 순식간에 퍼져 창고 안을 가득 메우면서
결국 그녀는 불길에 갇히고 말았다.
(타닥, 타닥.)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뭐야, 이게 어떻게..."
그녀는 황급히 소매로 입을 막았다.
연기의 자극적인 냄새가 코와 목구멍을 파고들어 왔다.
문 쪽으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창고 문을 두드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창고 문은 밖에서 잠긴 상태였고, 화염은 이미 창고의 반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지도 않았지만, 너무 뜨거워 고통스러웠고, 숨은 더 가빠졌다.
연기가 창고를 가득 채우며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그러나 문밖은 적막만이 흘렀다.
불길이 점점 가까워졌고, 연기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그녀는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더 이상 쉬어지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공간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녀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부모님이 떠올랐다.
하지만 의식이 희미해지지 않도록 정신 차려야 했고, 그때, 최후의 순간에 나를 소환하면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던 시안의 말도 함께 떠올랐다.
루나는 간절하게 시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이름을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 순간, 검은 연기 속에서 푸른 연기가 나타나면서 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염력을 이용해 창고 문을 온 힘을 다해 밀었고, 문의 경첩이 파괴되고 문 전체가 찌그러지면서 50m가량 날아갔으며,
그 충격과 엄청난 소리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놀라 일제히 창고로 시선을 옮겼다.
창고 안을 가득 채웠던 연기와 불길은 문이 있던 자리로 빠져나왔고, 행인들은 저마다 핸드폰을 들었다.
그 행인들 사이에선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고, 119에 전화를 걸어 화재 신고를 했다.
모습을 감춘 시안을 뒤로하고 비틀거리며 창고 밖으로 걸어 나온 그녀는 창고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그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고 말았으며,
행인들 중 몇몇이 그녀에게 달려와 괜찮냐고 물었지만, 목구멍에서 무언가가 턱 걸린 듯 칼칼함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대답하지 못했다.
현장엔 5분 만에 소방차와 구급차가 도착했고, 불길은 곧 진압되었다.
루나는 구급차에 실려 근처 병원 응급실로 이송됐고, 퇴원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6개월 전엔 의식 없이 응급실로 실려 왔지만, 지금은 의식이 있는 채로 실려 왔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열등감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실수를 저지르며 점점 우등한 사람이 되어 간다.=
-헨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