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과 피해의식의 최후
루나의 연락을 받은 규호가 응급실로 달려왔고, 그녀는 이나의 이야기를 하며 방화범이 이나라는 사실과 창고에서 본 상자 속 쪽지의 내용을 알려줬다.
규호는 자신의 관할 구역이 아니었지만, 건물주와 주민들 혹은 목격자들을 탐문하면서 정보들을 습득했다.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건물주의 진술과 알리바이를 확인한 결과, 건물주는 어떤 여자가 친구를 위해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고 싶은데
창고를 빌려줄 수 없겠냐며 전화가 걸려 왔고, 돈도 주고 이벤트가 끝난 후, 깔끔하게 치우겠다고도 했으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창고로 불러내 주기만 하면
된다기에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하면서 억울해했다.
루나에게 창고 키를 건네주고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댄 것 또한, 카페 직원을 통해 확인하였고,
루나에게 받은 이나의 졸업사진을 보여주며 용의자의 얼굴도 확인했으나, 전화로 통화만 해서 목소리 말고는 이름과 얼굴은 잘 모르겠고
돈도 봉투에 넣어 건물 우편함에 두었더라면서 돈이 들어 있던 봉투를 규호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건물주는 용의자가 아닌 듯했고, 좀 더 탐문을 해보기로 하는데, 카페 직원이 건물주의 알리바이를 확인해주면서 불이 나기 직전에
어떤 여자가 창고 주변을 서성이는 걸 봤다고 진술했다.
이나의 사진을 보여주자, 자신이 본 여자와 동일 인물인 것 같다는 말에, 루나의 말대로 이나가 방화범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두고, 이나의 소재 파악부터 하는데,
규호는 이때부터 관할서에 찾아가 협조를 요청했다.
루나가 응급실에서 간단히 치료를 마치고,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주은과 도운에게 군자역 카페에 매일 와서 커피를 마시며 그녀를 수상한 시선으로 보던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4일 전날에 그 손님과 나누던 대화와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담하게 모두 털어놓았고, 두 사람은 어쩐지 이상했다며 그녀를 위로했다.
PM 09:40
오늘도 역시나 도운과는 마감을 함께하고, 지욱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고 귀가한 루나
텅 빈 집 안과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창밖의 가로등 불빛 한 줄기가 어둠 사이를 뚫고 있었다.
그 빛 한 줄기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소파에 쓰러지듯 앉은 그녀는 시안이 나타나도 이젠 놀라지 않았다.
"덕분에 살았네요. 저승사자가 인간을 수호하기도 해요?"
"아니, 난 널 수호를 한 게 아니라 그 창고 문이 걸리적거려서 치운 거뿐이다."
"그래요. 그렇다고 치죠. 하아…오늘 연기를 하도 마셨더니 말할 힘이 없어요."
"너의 예상대로 방화범이 조이나면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네? 뭘 당연한 걸 물어요? 벌..받아야죠. 천벌이든, 형벌이든…그게 뭐든.
더 글로리 박연진처럼 내 인생과 영혼을 부서뜨렸으면 진작에 시안 님한테 부탁했죠.
문동은에겐 없는 게 저한텐 있으니까. 근데 그 정돈 아니었어요. 그리고 지욱 선배 같은 사람이 있어서 나쁘진 않았거든요.
그 선배 아니었으면 지옥 같았겠지만…"
그 순간, 루나의 핸드폰이 울리고, 핸드폰 화면에 뜬 이름은 규호다.
>>연남경찰서 이규호 형사님
"네, 형사님."
(루나 씨, 퇴원 축하드려요. 다름이 아니라 알려드려야 할 거 같아서 전화했어요.
6개월 전 루나 씨의 사고 가해자, 그 덤프트럭 운전기사요. 사망했어요.
죽은 지는 꽤 지난 거 같은데 이제야 발견돼서.. 죽어 있던 곳이 버려진 폐허여서…)
"네? 죽..었다구요? 그 새끼가?"
(네. 목매달고 스스로…이럴 땐 간혹 신이 있는 거 같기도 하네요. 이제 마음은 좀 편해지시겠네요.)
"그건 좀 오래 걸릴 거 같은데요. 그 새끼는 그렇게 쉽게 가면 안 되거든요…"
(네?)
"아니에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네. 그럼 언제 카페로 놀러 갈게요.)
통화를 마친 루나는 시안을 돌아봤지만,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시안이 다시 나타난 곳은 이나의 원룸 오피스텔의 현관 입구였다.
현관에서 침대가 있는 곳까지 한눈에 보이는데, 이나는 무드등만 켜놓은 채,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해서 TV로 영화를 보고 있었고,
몇 시간 전에 루나를 살해하려 창고에 불을 낸 사람이라고는 믿기 힘들만큼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며 태연해 보였다.
시안은 천천히 그녀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나는 처음엔 환영인 줄 알고 눈을 비볐으나, 시안의 차가운 존재감은 그녀를 금세 현실로 끌어들였다.
"누... 누구야? 누구냐고!"
이나는 다급히 물었지만, 시안은 미동도 없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끝없이 어두웠다.
그는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의 마지막을 인도하러 왔다."
시안은 온몸이 오싹해지는 서늘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를 덜덜 떨게 했다.
"니가 과거에 한 짓에 비해 너무 부당하다 생각지 마라. 몇 시간 전에 니가 한 짓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감히! 너 따위가 인간의 생과 사. 그중에서도 죽음을, 우리조차 못하는 걸, 니까짓게!"
갑재의 마지막 순간에도 이성이 흔들렸지만,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욱 격양되어 있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직전인 시안의 모습은 지금 이 순간,
저승사자가 아닌 인간이었을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걸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머리를 흔들며 뒷걸음질 쳤고, 갑재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아마도 공포의 끝에선 모든 범죄자들의 모습은 어떤 죄를 지었든, 같은 모습일 것이다.
"자..잘못했어요…살려주세요…저는 그냥 그년은 고아가 됐지만, 나는 엄마, 아빠도 있고, 고졸 학력인 그년보다 난 좋은 대학에, 좋은 직장에,
뭐 하나 나보다 더 나은 게 없는 년이 나보다 더 잘 벌고 행복하게 더 잘 사는 거 같아서 그랬어요…"
"용서는 채루나한테 빌었어야지, 내가 아니라. 이미 늦었다. 너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결국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다.
넌 그 누구도 탓할 자격조차 없다. 너에겐 형벌보다 천벌이 답이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격앙되었지만, 시안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손을 들자, 그의 손끝에서 미묘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 기운은 곧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고, 그녀의 몸은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며 깊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사자의 눈을 보아라."
시안의 목소리는 마치 귓속을 파고드는 저음의 울림 같았고, 간담이 서늘해질 정도로 차가웠다.
그의 눈빛을 마주한 이나는 금세 그 속에 빨려 들어갔다.
그녀의 의식은 희미해졌고, 그저 그의 말에 끌려갈 뿐이었다.
시안은 그녀의 얼굴 가까이 바짝 다가가 왼손으로 그녀의 뒤통수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움켜쥐고, 푸른 빛으로 변한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통제하기 시작했다.
"갑술년 무진월 을유일. 조이나.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만 듣는다.
니가 지옥을 가는 그날까지 '너희가 어디로 도망가든, 죽음은 너희를 쫓는다.' 그것이 너의 죗값이다.
니가 죽을 때까지 죽음이 너를 쫓는다는 뜻이다. 죽고 싶을 만큼 아프겠지만 쉽게 죽어지지는 않을 거다.
최대한 고통을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천천히 느끼다가 이 자리에서 죽게 될 거다.
니가 한 짓 그대로! 넌 그녀가 아니라 널! 니 손으로 직접! 그 화마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니 죄를 알렸다.
니 죄를 용서받지 못한 죄,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음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죄, 그 죗값을 이승에서 치르기에는 너무 가볍다.
죗값은 지옥에서 치르면 된다. 너에겐 신의 배려는 없을 테니까.
너는 지금부터 입구에 놓인 휘발유를 이 좁아터진 방 곳곳에 뿌린다. 그다음은 내가 도와주마.
억울할 자격 따위는 너에겐 없다. 나는 너를 간.접.적으로 처단하는 거다, 그뿐. 너의 마지막도 내가 인도해주마. 아, 곱게 인도하진 않을 거다, 참고로."
시안의 목소리는 어느새 이나의 내면 깊숙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녀는 표정이 사라지고 온몸에 힘이 풀리면서 시안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치 꼭두각시 인형처럼 반응하며 최면에 걸린 채,
현관 입구로 걸어갔다.
기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그녀의 움직임은 역시나 갑재를 연상시켰다.
마치 자신의 의지가 사라지고, 남은 것은 시안이 부여한 명령뿐인 듯했다.
휘발유를 손에 든 그녀의 얼굴에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휘발유 뚜껑을 열어 방안 구석구석에 뿌리기 시작했다.
휘발유가 침대 시트에 스며들고, 벽을 타고 바닥에까지 흘러내렸다.
코를 찌르는 휘발유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으로 침실 한가운데에 선 이나
시안은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검은 수트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켠 채로 방 안으로 던졌다.
이나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불길이 휘발유에 닿자마자 강렬한 화염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불길은 순식간에 타올라 침대와 벽, 그리고 바닥까지 빨아들였으며,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피부를 태우기 시작했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
피부가 검게 타들어 갔고, 그녀의 머리카락은 재로 변하며 바닥에 떨어졌다.
폐 안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공기가 그녀의 심장을 옥죄어 왔지만, 그녀는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불길 사이로 시안과 이나의 눈이 마주치자, 이나는 최면이 풀리면서 끔찍한 고통은 한꺼번에 몰아쳤고, 그녀의 비명소리가 방 안을 울리고 있을 때,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차가운 눈빛으로 지켜보던 시안이 불길 속에서도 태연하게 서 있었으며, 화염 속 타오르는 그녀의 육체에서 빠져나온 영혼을 바라봤다.
이나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몸은 이미 검게 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방 안은 재투성이로 변해 있었다.
"이게 끝이라고 착각하지 마, 조이나. 이제부터가 시작이지."
그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의 손끝에 나타난 검은 실은 이나의 영혼에게 이어졌으며, 그의 손길에 의해 억지로 끌려가는데,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시안의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시안은 이나를 지옥으로 인도하기 위해 유황도로 가는 차가운 문을 열었다.
그 문 너머에서는 불길과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두려움과 절망 속에서 울부짖었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은 후회였다.
문이 닫히고, 이나의 비명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시안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이끌고 유황도를 걸었고, 지옥의 문을 통과해 또 한 명의 악인이 지옥으로 사라졌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끝없이 자신을 묻고 있었다.
-13시간 전-
이나는 근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군자동 카페가 있던 건물에서 네일샵을 하고 싶다고 계약을 빌미로 건물주와의 만남을 유도했고,
창고를 이용해 루나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나는 쪽지가 담긴 작은 상자를 창고에 남기고는 창고에 있는 다른 상자들과 쓰레기 위로 미리 챙겨온 휘발유를 창고 곳곳에 뿌린 뒤,
계약서에 적힌 건물주의 연락처로 다른 사람인 척, 변조까지 해가며 친한 친구 생일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하고 싶은데, 창고도 싹 치우고,
사례도 섭섭지 않게 하겠다면서 한 가지 부탁도 덧붙였다.
사실 그 친구가 전에 카페 하던 채루나라는 친군데, 창고에 두고 간 물건이 있으니 가지러 오라는 전화 한 통.
그 후, 돈이 든 두툼한 봉투를 건물 우편함에 넣고, 근처 카페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루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는 루나를 그 장소로 유인하기 위한 계략이었다.
루나가 창고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카페를 뛰쳐나가 라이터를 켠 채, 창고 안으로 던진 후, 창고 문을 닫았고,
바로 앞 건물로 들어가 건물 입구 유리문 너머로 창고가 불길에 활활 타는 모습, 지나가던 행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치 불이 난 걸 보고 건물에서 막 나온 사람처럼 연기를 하며 119에 화재 신고를 하고는 뒤돌아서 태연하게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악마는 당신을 망치기 위해 피해의식을 발명했다=
-허지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