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명부
<2025년 1월 4일>
AM 04:00
[루나의 꿈속]
의식이 가라앉는 순간, 그녀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눈이 떠진 건지, 점점 어둠에 갇혀 있던 시야가 걷힌 건지, 시야가 밝아졌다.
루나는 익숙한 병원 복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듯한 중환자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어두운 조명의 희뿌연 빛이 병실을 감쌌다.
차가운 공기와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기계들이 내는 일정한 소음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천천히 병상에 누워있는 한 환자에게 다가갔다.
그는 루나도 본 적이 있던 환자였는데, 병원 입원 중에 일반 병실로 옮겨질 때, 스쳐 지나가면서 잠깐 봤던 옆 병실 네임판에서 본 이름과 같은 이름인
방영길이었고,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중환자실로 옮겨질 만큼 위독해 보였으며, 점점 그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수많은 의료기기에 의지한 채,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안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여윈 손등에 꽂힌 링거,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 그리고 몸에 연결된 여러 개의 의료 기계들.
그 순간, 기계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삐! 삐! 삐!)
루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채,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곧이어 긴 기계음이 울렸고, 그녀의 동공이 커지며 얼어붙었다.
(삐——————)
영길이 거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들썩이던 가슴이 어느 순간, 잦아들면서 이윽고 멈추고 말았다.
긴 기계음이 병실을 가득 채우는 순간, 루나는 그 자리에서 숨이 멎는 듯한 공포가 몰려왔다.
영길은 이제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걸 인지하면서 온몸이 얼어붙었고,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때, 영길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그녀의 손과 닿았고, 손끝이 얼어붙은 듯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들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며 CPR을 시작했고, 의사가 들어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영길의 생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방영길 환자. 10시 44분. 사망하셨습니다."
시간을 기록하는 차가운 목소리가 공기 중에 가라앉았다.
이번에도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지몽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예지몽으로 꾼 건 처음이어서 혼란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 순간, 루나는 자신의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며 현실로 빨려 나오는 기분을 느꼈다.
눈을 뜨자, 그녀의 방 침대 위였고, 그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푸른 연기가 나타나고, 그 속에서 시안이 나타나자, 연기는 다시 사라졌다.
"저 명부 올라왔어요?"
"아니, 올라온 명부에 너는 없는데."
"저..저 예지몽 꾼 거 같은데 제가 아니었어요…ㅁ뭐..뭐죠?"
"아는 사람?"
"안..다기보다는 본 적이 있어요. 병원에 있을 때 일반 병동으로 옮기는데 옆 병실이었던 사람 같았어요. 근데 꿈에선 중환자실에 있고 되게 위독해 보였어요.."
"이름이 뭐였는데?"
"방영길이요..젊은 사람은 아니고 한..70대?"
이름을 기억한 시안이 손짓하자, 그의 손에 태블릿PC가 나타나고, 명부가 올라온 리스트를 확인한다.
그중에서 방영길이라는 이름의 40년대생을 찾았다.
"있다. 을유년 기묘월 계묘일. 방영길."
"족자 같은 거 촤라락 펼칠 줄 알았는데..아니네요..?"
"이 와중에? 우리도 다 전자화에, 데이터 센터에, 디지털 시각화, 응? 다 한다고. 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 너와 관련되지도 않은 사람의 죽음이 예지몽에 나온 거지?"
"그걸 저승사자가 모르면 누가 알까요…"
"일단 날짜가 내일이니까 그 장소에 가봐야 할 거 같다."
"어차피 한 번 인사차 가야 되고, 간 김에 재활 치료 날짜 당겨서 받을 수 있으면 받고. 겸사겸사 갔다 올 게요. 근데 중환자라 면회가 안 되면 어떡해요?"
"넌 안 될 수도 있지만 난 되지."
"아…시퍼런 연기로…"
루나는 다시 잠이 들기에는 틀린 것 같아 서재에서 책이라도 읽어볼까 했지만,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다.
AM 09:30
전날 내린 눈으로 인해 도로와 건물 옥상 곳곳에 하얀 잔설이 남아 있는 아침, 밤사이 찬 공기가 가라앉으며 새벽에는 체감온도가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졌고,
차가운 기온이 외투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늘은 맑았지만, 얼음장 같은 공기가 도시를 감싸며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했고, 아침 출근길에는 도로 곳곳이 미끄러웠으며,
도심 곳곳에서는 털모자와 목도리로 중무장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저마다 조심스러운데, 햇볕이 점점 뜨겁게 내리쬐는 시간에도 기온은
영하 5도 안팎에서 좀처럼 오르지 않아 체감 온도는 여전히 낮았다.
도심 속의 그늘진 골목길에 하얗게 남은 눈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반짝였다.
새벽부터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길 위에 남아 있었고, 루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면서 시린 겨울 공기를 마시며 카페에 먼저 들렀다.
테이크 아웃 잔에 담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캐리어에 담은 후, 쿠키, 다쿠아즈, 마들렌 등 디저트를 세트로 포장용 봉투에 따로 담아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했다.
지난 화재 사고 이후로 그녀의 몸은 빠른 회복력 덕분에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까지 나아졌다.
다만, 보호대를 착용한 어깨부터 팔꿈치까지는 아직도 가끔 찾아오는 근육통과 뻐근함 때문에 가동범위가 아직은 완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고,
카페 쉬는 날인 매주 월요일로 정기 예약이 되어 있지만, 갑작스러운 날짜 변경은 어렵다는 직원의 말에 재활 치료는 내일 다시 와서 받기로 하고
중환자실 면회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중환자실 면회는 외상 센터로 가서 문의하라는 말만 들을 수 있었다.
퇴원한 지 2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익숙한 병원 복도를 다시 걷는 느낌은 묘하게 낯설기도 했다.
이제는 환자로서가 아니라 방문자로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이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가벼웠다.
매주 월요일마다 재활 치료하러 방문했던 재활 의학 센터는 별도로 있다 보니, 외상 병동은 오랜만이었다.
외상 센터 병동으로 넘어온 루나는 로비에서 잠시 숨을 돌린 후, 병원에 입원해 있던 동안 자신을 케어해 준 간호사들과 주치의가 있는 병동 데스크로 향했고,
루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루나 님, 어쩐 일이세요?"
익숙한 간호사가 반갑게 다가왔다.
루나는 미소를 지으며 가져온 음료와 디저트를 들어 보였다.
"새해 인사도 할 겸, 제가 내린 커피도 맛보여드릴 겸 해서요~ 잘 돌봐주신 덕분에 이렇게 빨리 회복해서 퇴원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어머, 아이~ 매번 이렇게까지 챙겨주실 필요 없는데~ 저희 진짜 큰일 나는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과 눈은 감사한 마음을 가득 담아 슬쩍 받아들고는 휴게실에 얼른 가져다 놓는 간호사
곧 다른 의료진들도 모여들어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루나
"다들 연말, 연초 바쁘셨죠?"
"그럼요. 연말에는 응급 환자가 많아서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루나 님 같은 분 보면 뿌듯해요. 저희가 이런 보람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거 같아요."
주치의도 루나를 반갑게 맞으며 그녀의 회복 속도에 대해 칭찬했다.
"예상보다 회복이 빠르네요. 통증 관리 잘하고 있죠?"
"네, 아직 조금 불편하긴 한데,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나아요."
"그럼 다행이고요. 너무 무리하지만 않으면 조만간 보호대도 벗을 수 있을 겁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루나는 의료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입원 환자들 이야기가 나왔다.
"아, 혹시 방영길 환자님 퇴원하셨나요?"
"방영길 님이요?"
"네. 아, 제 병실 옆 호실 쓰셨던 거 같은데…"
"꽤 오랫동안 계셨는데…그땐 뇌졸중으로 쓰러져서 실려 왔다가 회복 상태를 보고 일반 병동으로 옮기신 분이었는데
저번 달부터 갑자기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면서 심정지가 왔어요. 그날 이후로 날이 갈수록 더 악화 되셔서 중환자실로 옮겨서 집중 치료 중이시구요.
많이 친하셨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제 꾼 예지몽이 떠올랐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루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면회 가능할까요?"
"네. 원래 가족들만 면회가 가능한데 지금까지 찾아온 가족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연락도 안 받으셔서요.
지금은 환자의 의지가 중요해서 누구라도 옆에서 환자의 의지를 북돋아 주시는 게 가장 필요해요.
잠깐 들여다보는 건 괜찮을 거예요."
루나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중환자실로 향했고, 입구에선 파란 위생복과 위생모자, 그리고 신발에도 위생 캡을 씌운 후,
깊은숨을 들이쉬고는 중환자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중환자실의 차가운 공기와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기계들이 내는 일정한 소음이 꿈속과 너무나도 똑같았다.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에게 다가가 영길의 이름표를 확인했다.
꿈속에서처럼 점점 그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수많은 의료기기에 의지한 채,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불안한 호흡을 내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여윈 손등에 꽂힌 링거, 거칠게 오르내리는 가슴, 그리고 몸에 연결된 여러 개의 의료 기계들.
모든 것이 전부 꿈속과 다른 점이 없었다.
그 순간, 기계음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더니, 갑자기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삐—— 삐—— 삐——삐! 삐! 삐!)
루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채, 숨을 삼켰다.
그리고 곧이어 긴 기계음이 울렸고, 그녀의 동공이 커지며 얼어붙었다.
(삐——————)
거칠게 들썩이던 영길의 가슴이 어느 순간, 잦아들면서 결국 멈추고 말았고, 긴 기계음이 병실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꿈속에서 봤던 장면이지만, 그 자리에서 숨이 멎을 듯이 몰려오는 공포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영길이 마지막 한숨을 내뱉으며 생명이 꺼진 순간,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왔다.
그때, 영길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며 그녀의 손과 닿았고, 꿈속에서 느껴졌던 손끝이 얼어붙은 듯 차가움이 고스란히 느껴져 숨이 턱 막혔다.
의료진들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며 CPR을 시도했지만, 영길의 생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방영길 환자. 10시 44분. 사망하셨습니다."
꿈속에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중환자실 앞에 모여 있는 간호사들과 의료진, 긴박한 움직임, 빠르게 오가는 단단한 목소리들.
식은땀이 맺히고 손끝이 떨렸다.
눈앞이 흔들리는 듯한 기분, 그리고 이내 중환자실에 흐르는 정적.
꿈에서 본 장면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심리를 더욱더 강하게 뒤흔들었다.
수족 냉증이 있던 그녀의 손끝이 얼어붙은 듯 더욱 차가워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려웠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꿈에서 보고, 그 일이 현실로 일어난 이 상황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자신의 예지몽처럼 다른 사람의 예지몽도 꾸는 것이라면
자신에게 죽음보다 더한 일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주변이 멀어지면서 공포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도대체…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야…왜…?”
루나를 중환자실로 안내했던 간호사에 의해 잠시 자리를 피한 의료진들
그 중환자실 안엔 방금 운명을 달리한 영길의 육체와 이미 분리되어 자신의 육체를 마주한 그의 영혼, 그리고 그의 영혼을 인도하러 온 시안뿐이었다.
"을유년 기묘월 계묘일. 방영길. 본인, 맞습니까?"
영길의 영혼은 체념한 듯, 시선은 자신의 육체에 고정한 채, 고개만 천천히 끄덕였다.
"망자 방.영.길. 당신의 마지막을 인도한다. 가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진실되고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두려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프란시스 무어 라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