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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저승으로 가는 길

by 제나랑


<2025년 1월 6일>

전날 밤부터 내린 눈이 새벽까지 이어지면서 흐린 하늘이 드리웠다.

습기를 머금은 구름층이 하늘을 덮었고, 기온이 영하와 영상의 경계를 오가면서 비와 눈이 뒤섞여 내렸다.

도심 도로에는 살짝 녹은 눈이 얇게 깔려 희미하게 녹아내리며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AM 09:00

가랑비처럼 흩날리는 눈이 공기 중을 떠다녔다.

일출 이후에도 기온이 오르지 않아 도로 곳곳에는 얇은 빙판이 형성되어 있었고,


특히, 그늘진 골목길이나 인도에는 아직 얼지 않은 눈과 녹았던 눈이 다시 얼어붙어 더욱 미끄러운 곳이 많았다.

출근길 사람들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스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에 두꺼운 외투를 연신 여미며 걸었다.

택시를 타고 조은희망 병원 장례식장 건물 입구 앞에 내린 루나는 이나의 장례식에서와는 다르게,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어 애도하는데,


빈소에 들어서자, 낮은 조명의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몇몇 조문객들이 조용히 분향과 헌화를 올리고 있었고, 영정사진 속 영길은 푸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집어 든 국화꽃 한 송이를 조심스럽게 재단 위에 올려두었다.

영길의 영정사진 앞에 놓인 국화의 하얀 꽃잎이 검은 제단 위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모으고 잠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부디 편히 쉬세요.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했지만, 당신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인연으로 이렇게 애도합니다.

당신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목례했다.

빈소 한편에는 단 한 명의 유가족이 서 있었다.

그녀는 영길의 막내딸로, 위로 오빠 한 명이 있지만, 영길이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도 돈이 필요할 때만 찾아오고,


유산을 미리 달라며 괴롭히는 등, 패륜적인 행동과 폭언을 일삼았으며, 남매에게 공평하게 나눠준 유산도 여동생의 몫까지 빼앗으려다가 여동생의 승소로


패소한 오빠는 그 후로 찾아오지도, 연락을 받지도 않으며 심지어 부고 소식에도 깜깜무소식이어서 여동생이 오빠 대신 상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대학 때부터 캐나다에 거주 중인 영길의 딸은 영길이 위독해 중환자실로 옮겨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한국으로 바로 들어오려고 했지만, 일 때문에 쉽지 않았고,


한국으로 들어올 준비를 하는 동안, 영길은 그녀를 기다리지 못하고 끝내 돌아가신 상황이라 시차로 인한 피곤함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인한 힘든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상주 노릇을 톡톡히 하며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질끈 묶은 긴 머리는 헝클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가에는 밤새 울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루나는 조심스레 다가갔다.

"많이 힘드시죠...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길의 딸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근데..누구시죠? 저희 아빠와는 어떻게…"

그녀의 목소리는 피로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아버님이 일반 병동에 입원하셨을 때 옆 병실에 있던 사람이에요. 채루나라고 합니다."

"아..네. 일부러 이렇게 와주셔서..감사합니다…"

그녀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캐나다에서 급히 오려고 했는데, 너무 늦어버렸어요. 연락받고 서둘렀지만, 그 사이에 아빠가…그래도 늦지 않게 장례식은 치를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오빠라는 사람은…부고 문자를 보내도 아무런 답도 없고, 어차피 아빠와도 오래전부터 연을 끊은 상태였으니까요."

루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길은 생전에 아들보다 딸에게 유서를 남길 만큼 딸을 아꼈다.

비록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장례를 정성스럽게 치르는 딸의 모습에서 영길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며 그리워했을지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아버님도… 따님이 이렇게 끝까지 함께 해주셔서 기뻐하실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말을 보태지 않은 루나는 그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장례식장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빈소 입구에선 인간들 눈에 보이지 않는 희미한 존재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 존재는 자신의 육체와 분리되었지만, 바로 이승을 떠나지 못한 영길의 영혼과 그의 부탁으로 그의 딸을 잠깐이라도 볼 시간을 준 시안이었고,


이승에서의 시간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이제 가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영길의 영혼은 시안을 따라 어느새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있는 유황도를 건너고 있었다.

시안은 조용히 영길의 앞에 서서 그를 인도하고 있었다.

시안의 얼굴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지만, 시선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자의 숙명처럼, 담담하게.

유황도는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시작으로 저승문 앞까지 이어진 길로, 유황도 양옆으로는 유황천이 흐르고,

유황천을 따라 유황도를 걷는 동안, 모든 망자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들이 걸어온 발자취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며, 죄악과 선행이 저울질 된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땅은 단단한 듯하면서도 무언가 흐물거리는 느낌이었고, 수증기와 안개가 자욱이 깔려 있어 발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며,


걸음을 뗄 때마다 마치 무언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듯한 감각이 스며들었다.

영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길은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주변은 희뿌연 어둠이 깔려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흐릿한 형체들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과거를 부유하는 기억의 파편들.

(아버지, 이 사람은 제가 선택한 사람이고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구요. 다시는 이 집에 오는 일 없을 겁니다.)

(아빠로 만들어줘서 고마워. 잘 키워보자.)

(우리 아들이 서울대에 붙었다고? 잘했다, 잘했어.)

(우리 딸내미 유학 가고 싶어? 당연히 보내줘야지~ 근데 멀어지는 건 좀 서운하네.)

(아들아, 유산은 미리 줄 수 있지만, 니 여동생 몫은 건드리지 마라.)

(딸, 이거 유서야. 혹시라도 내가 떠나면 그때 읽어줘. 그리고 여기 쓰인 대로 해줘. 알았지?)

(아빠는 우리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 사랑해, 우리 딸.)

익숙한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영길은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지만, 보이는 건 자욱한 안개뿐이었다.

"내가…살아 있을 때 했던 말들이군."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살면서 무심코 했던 말들이, 지나간 순간들이, 한 겹 한 겹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차마 똑바로 서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유황천에는 이곳에 갇힌 수많은 망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수면 아래에 갇힌 것처럼, 강물 속에서 손을 뻗으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때로는 흐느끼는 소리가, 때로는 비명이 섞인 신음이 들려왔다.

영길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시안은 흔들림 없이 걸어갔다.

"두려워할 필요 없다."

시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이승에 미련이 남아 떠나지 못하거나 천국으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걸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자들이다.


네가 저들처럼 될지 아닐지는 오직 너의 삶이 결정할 것이다."

영길은 그 말을 듣고도 쉽사리 안심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저승의 시간이다."

시안이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이란 그저 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이어지는 시간이라니.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요?"

그는 망설이며 물었다.

시안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승에서의 삶이 어땠든, 저승에서는 네가 살아온 모든 것이 평가된다.


선한 일을 했든, 악한 일을 했든, 모두 재판을 통해 심판을 거치고 그 무게에 따라 너의 길이 정해질 것이다.


저승문을 지나면 신 앞에서 49일에 걸쳐 나태, 거짓, 불의, 탐욕, 증오, 배신, 폭력, 천륜, 살인, 9개의 재판을 받게 된다.


이승에서의 아무런 죄가 없다면 천국으로 가게 될 것이고, 하나라도 죄가 있다면 해당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다."

시안의 설명을 들으며 걷던 그는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걷다 보니, 차가운 안개가 그의 발끝을 감쌌고,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문이 보였다.

바로 저승문이었고, 이 문을 지나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49일간의 9개 재판이었다.

유황도을 지나온 모든 영혼들이 거치는 관문이자,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심판의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생전의 삶이 낱낱이 평가받게 되며, 천국과 지옥 중 행선지가 결정될 것이다.

거대한 저승문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저승문 앞,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경계에 작은 연못의 샘물이 고요히 자리하고 있다.

이승의 모든 기억을 씻어내는 망각의 샘물로, 저승으로 들어서기 전, 망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마지막 관문이며,


샘물은 잔잔하면서도 그 아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고, 어느 한쪽에서는 푸른빛이, 또 다른 한쪽에서는 검은 안개처럼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샘물의 표면은 얼핏 보면 고요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은은한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속에는 망자의 기억들이 떠다니듯 흐르고 있었고, 물 위를 들여다보면 자신의 생전 기억들이 비쳤다.

어떤 이는 가족의 얼굴을, 어떤 이는 평생 간직했던 가장 행복한 순간을, 또 어떤 이는 후회로 얼룩진 기억을 바라보았지만,


물에 손을 담그는 순간, 그것은 조용히 사라졌다.

망자는 저승으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이 샘물을 마셔야 했다.

샘물을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생전에 품고 있던 기억들이 물속으로 녹아들 듯 희미해졌다.

기억은 아득한 안개처럼 흩어졌고, 이름도, 얼굴도, 감정도 서서히 지워졌다.

그것은 슬픔도, 아픔도, 사랑도 모두 씻어내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완전히 망각하지 못한 망자들은 샘물을 다시 마실 수는 없었고, 망각 또한 신의 배려이기에 이승에서의 후회든, 슬픔이든, 아픔이든


모두 기억한 채로 지옥에 가더라도 그 이후에 벌어질 상황은 온전히 망자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이다.

저승사자의 안내에 따라 망각의 샘물을 손으로 떠 올리면 차가운 듯하면서도 따뜻한 감촉이 느껴져 굉장히 낯선 느낌으로, 마시는 순간,


혀끝에서 달고 씁쓸한 맛조차 동시에 느껴졌고, 뒤이어 깊은 평온이 찾아왔다.

그것은 삶의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망각의 샘물 주변에는 흰 안개가 부드럽게 감싸듯 피어올랐다.

그 안개는 망자의 기억을 흡수한 듯, 때로는 웃음소리, 때로는 흐느낌처럼 들리는 환상적인 울림을 남겼다.

저승사자들은 이곳에서 조용히 망자들이 샘물을 마실 때까지 기다렸고,


기억을 되새김질하던 망자들은 결국 망각의 샘물에 손을 담가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샘물을 마신 후, 망자들의 눈빛은 서서히 텅 비어갔다.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감정도 함께 사라졌다.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고, 오랜 슬픔도, 미련도 더 이상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저승의 문을 통과할 준비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주 가끔, 샘물을 마신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 망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생전에 너무나 강렬했던 감정, 망자가 끝까지 놓지 못한 기억이었다.

간혹, 망각하지 못하고 기억을 간직한 망자가 저승문을 넘지 못한 채, 유황천에서 본 그들처럼 떠돌게 되는데,

이승에 대한 미련이 남으면 그 미련을 내려놓기 전까지 이승을 떠돌다가 49일이 지나서도 저승문을 넘지 못하면 유황천에서 끝없이 떠돌고 마는 것이다.

망각의 샘물은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잇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모든 것을 잊고 가벼운 영혼으로 저승에 들어가거나, 새로운 삶으로 환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하며,


누군가에게는 해방의 공간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지막까지 붙잡고 싶은 기억이 사라지는 아득한 장소가 된다.

이 샘물을 마신 후엔 다시는 돌아갈 수 없으며, 이승에서의 모든 기억을 잃고 나면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이승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천국으로 가게 될지, 지옥으로 가게 될지, 지옥으로 간다면 어떤 지옥으로 가게 될지, 예상조차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시안은 망각의 샘물을 마신 영길의 영혼을 저승문을 지나는 것까지 인도했고,


저승문을 지난 후부터는 다른 저승사자에게 그를 연계해 저승의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저승법 제1조 1항. 이승에서 진심 어린 용서를 받은 자는 저승에서 다시 심판할 자격이 없다.=

-영화<신과 함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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