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선택
루나는 머리가 터질 듯한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끝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예지몽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는 건 이미 여러 번 겪은 사실이었다.
그 꿈은 현실이 되고, 예외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욱도 곧 죽게 될 것이다.
눈앞에서 보았던 그 참혹한 광경이…현실이 될 것이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마지막 한숨을 뱉으며, 그의 생명은 점점 꺼져갈 것이다.
지욱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막아야 할까?
그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그의 마지막을 운명에 맡길 것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했다.
손끝까지 얼어붙은 것처럼 저렸다.
운명의 장난인 걸까, 신의 실수인 걸까…
어쩌다 자신이 이런 괴롭고 잔인한 선택을 해야만 하는 걸까.
사람을 살리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그가 가해자의 아들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녀가 느낀 분노와 고통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데도, 그는 그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는데도, 그를 살려야 할까?
머릿속이 끝없이 뒤틀렸고, 마치 양쪽으로 누르는 힘이 서로 충돌하며, 그녀를 산산이 찢기는 듯한 심정이었다.
확인하고 싶었다.
어김없이 시안이 나타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하려는 그녀를 제지하는 시안
"무슨 말 하려는지 알아. 니가 무슨 선택을 하든, 뭐라고 할 인간은 아무도 없어. 그저 니가 원하는 걸 선택해.
설지욱의 아버지가 트럭 운전자라는 거, 그걸 묵인한 채로 너의 곁에서 안면 몰수한 아들이지만, 죄를 지은 건 설지욱의 아버지지, 설지욱이 아니니까.
하지만 왜 묵인한 건지, 언젠가는 털어놓을 생각은 있는 건지에 따라 달라지겠지…
금연했다고 하고 몰래 담배 핀 걸 말하지 않는 정도의 상황도 아니고,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로 니가 죽을 뻔했다는 걸 묵인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운명대로 죽게 냅둬. 니가 막겠다고 해도 그게 하다는 보장도 없고…"
가만히 시안의 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고민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깊은 갯벌 밑으로 파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선배니까…기회는 주고 싶어요…곁에서 항상 도와준 사람인데…그저 아무것도 안 하고 선배가 죽는 날을 마냥 기다리다 선배가 죽고 나면
그 이후에 전 죄책감으로 온전히 살아갈 수 없을 거 같아요…혹시 명부는 이미 올라왔나요?"
"2월 14일. 사인은 과다 출혈. 니가 원하는 선택을 해. 기회를 주든, 죽음을 막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하든, 난 이번에도 너의 결정에 따를 거야."
시안의 마지막 말이 그녀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그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맴돌았다.
<2025년 1월 7일>
AM 10:00
루나는 카페로 출근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지욱의 차량이 보였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지욱은 그녀를 태우고 [청월]로 향했다.
그가 운전하는 모습을 조수석에서 바라보던 그녀는 한참 동안 망설이다 입을 뗐다.
"선배,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비밀 같은 거."
"비밀? 내가 너한테 숨길 게 뭐가 있어~ 없어, 그런 거."
그의 대답을 들으며 그의 눈에 집중한 루나
그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척하며 대답했다.
자신의 눈을 피하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다시 물었다.
"진짜…없어? 작은 거라도?"
"..왜, 왜? 갑자기 왜 그래…"
끝내 대답을 회피하는 그를 보고,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니야. 없으면 됐어."
그 이후로 그녀의 침묵 속에서 지욱은 눈치를 보다가 카페 앞에 도착했다.
지욱의 차에서 내리던 그녀는 다시 지욱 쪽으로 돌아봤다.
"선배, 2월 14일은 상담하는 고객 가려서 받아. 혹시 모르니까…그리고 이제 나 픽업 안 와도 돼. 택시 탈게."
이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카페 안으로 들어간 그녀의 뒷모습을 당황한 채로 멍하니 바라보던 지욱은 다가오는 출근 시간에 쫓겨 로펌 사무실로 차를 몰았고,
카페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얼굴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처음 보는 그녀의 표정에 함께 일한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주은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으며, 걱정스러운 마음에 계속해서 그녀를 힐끗댔다.
"사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아, 신경 쓰였어? 미안해. 별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다고 말하면서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더 이상 묻지 않는 주은
그러다 카페 주변을 서성이는,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꿈속에서 본 형주의 얼굴이었다.
다른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오늘이 그날은 아닌 듯했다.
지욱에게 직접 묻고,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준 기회가 기회였던 것조차 모른 채, 넘겨버렸다.
루나는 어제의 꿈을 잊어보려 직원들과 손님들 앞에선 친절함과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주은과 도운은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녀에게 힘든 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PM 10:50
도운의 도움을 받아 카페 마감을 마친 루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카페를 정리하고, 매장 보안 시스템을 설정하고 있는데,
30분 전부터 와서 매장 앞에 차를 대고는 그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욱이 차에서 내렸다.
"루나야.."
그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루나는 뭔가를 직감한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 그를 마주하자, 그는 짧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형주 알아?”
지욱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 순간, 루나는 확신했다.
지욱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게 누군데?”
"아…몰라? 모르면 안 될 텐데…그럼…내 어깨 아작낸 가해자 이름, 설갑재. 그 새끼 아들도 모르겠네?"
지욱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그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루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한번 더 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니까…대답..똑바로 해…선배가 설갑재 아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욱은 끝까지 머뭇거렸다.
입술을 여는 듯하다가 다시 다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말할 듯 말 듯…
그러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숨기려고 했다.
그 순간, 루나는 깨달았다.
지욱은 자신이 준 기회를 저버렸고, 침묵을 선택했다.
루나는 그에게 마지막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직접 말할 기회,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을 기회…
하지만 그는 그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혼란과 고통이 루나를 집어삼켰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선택을 함으로써 운명에 맡겨야 하나.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막았듯, 그를 살리기 위해 확실히 막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모험을 해야 하나.
처음엔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지욱의 행동이 그녀의 믿음을 져버렸다.
지욱을 살리는 것이 자신에게 의미가 있을까?
그렇다고 지욱을 살리지 않은 걸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 모든 고민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가해자의 아들이지만, 가해자는 이미 죽었고, 그가 죄인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정말로, 그를 구해야 할까?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답은 보이지 않았다.
루나는 자신의 선택이 얼마나 잔인한 고민인지, 완전히 깨달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지욱은 식은땀으로 흥건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도 대답은 하지 않았다.
"…루나야…아니야…우리 아버진 나 어렸을 때 죽었어. 너한테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근데 내가 그 사람 아들이라고 누가 그래…?
그런 살인자가 어떻게 내 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 성이 같다고 다 가족은 아니..잖아…"
그녀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면서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그의 모습에 혼란스러움과 속상함은 점점 실망감으로 커져 갔고,
그에게 고마웠던 기억들은 점차 희미해져 갔다.
"선배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나에게 솔직하지 못했던 지난날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올 거야…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어…
그날이 오면 나 원망하지 마…생각도 하지 마…선배는 그럴 자격..없으니까…망친 건 선배야…내가 아니라…우리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었다면
숨기지 말았어야지…멀어지고 싶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솔직히 털어놨어야지…이제 선배 얼굴 못 보겠다…고마웠어, 그동안…"
루나는 지욱을 지나쳐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녀는 택시에서 내려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가지고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바로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17층 버튼을 누른 후, 우편물을 하나씩 살펴본다.
그러다 한 우편물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고, 엘리베이터가 17층에 도착해 도착음이 울릴 때까지 멈춰 서있었다.
-채루나 님에게-
발신자도 없이 루나의 이름만 적혀 있는 흰 봉투였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방과 다른 우편물만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봉투를 열어 안에 있던 엽서를 꺼냈다.
뒷면에는 신사역 사거리의 야경 사진이 있고, 앞면에는 반으로 접힌 편지지가 덧대어져 있었다.
[채루나님, 안녕하세요.
저는 지형수라고 합니다.
아마도 저를 모르실 겁니다. 저도 몰랐으니까요.
제가 당신을 알게 된 건 누나 때문이었습니다.
저희 누나는 뒷면 사진에 있는 신사역 사거리에서
작년 5월 11일에 큰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갑재라는 대형 덤프트럭 운전자의 음주운전으로 인해,
4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고, 그 사고로 저희 누나를 포함해
3명이 죽고, 1명이 중상으로 병원으로 이송됐죠.
그 1명이 당신이었고, 큰 수술을 하고 퇴원하셨다고 들었어요.
제가 당신에게 이런 편지를 쓰는 이유는…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고 계신 거 같아서요.
설지욱이라는 변호사가 설갑재 아들입니다.
그 파렴치한 늙은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비겁한 방법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해 버렸고,
그 늙은이의 아들은 그 사실을 알고도 숨기고 친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아무렇지 않게 당신 곁에서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너무 부당하지 않나요?
우리 누나를 잃은 저희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고, 당신도 죽을 뻔했는데,
그렇게 만든 장본인에게 이제 더 이상 죄를 물을 수 없게 되었죠.
우리를 이렇게 만든 그 늙은이의 아들은 모든 걸 알고도 외면하고 있다구요.
몰랐으면 모를까, 알았다면 적어도 그 사고로 가족을 잃은 저희에게
사과 한마디라도 해야 하잖아요. 그게 맞잖아요.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고 있어야 할 당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게
그 아들이 너무 괘씸하고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부디 그 뻔뻔한 사람과 멀리하세요.
저희 누나 대신이라도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으로 당신의 미래를 응원하며…]
형수의 편지 내용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져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오열을 하는 루나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방법은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