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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덤으로 사는 인생 

by 제나랑 Mar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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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3일>

지욱을 보내고 며칠간, 루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면 어김없이 무거운 감정에 잠식당했다.

소파에 기대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거나, 손에 쥔 커피가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잊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겨우 한 모금 삼키곤 했고,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따뜻한 봄날 오후, 매점 앞에서 가볍게 농담을 던지며 웃어주던 지욱.

대학 시절, 지칠 때마다 “밥은 챙겨 먹었어?”라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내던 모습.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다시 만났을 때조차 변함없이 다정했던 그 목소리.

하지만 이제, 그 모든 순간들은 되돌릴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몇 번이고 기억 속에서 지욱을 떠올렸지만, 루나의 일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고, 자신의 카페에서는 직원들과 함께 바쁜 하루를 보냈고,


손님들에게 커피를 내어주며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되었다.

매일 아침, 평소처럼 음악을 틀고 커피 원두를 갈며 하루를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움직이는 듯했던 손길이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퇴근 후에는 동네를 산책하며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면서 바뀐 공기를 들이마셨고, 어깨의 통증을 달래기 위해 꾸준히 재활 치료도 받으며


한두 달 뒤에는 보호대를 탈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재활 치료사와 주치의의 소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어깨 관절 가동 범위가 이전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때때로 감정이 올라올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면 일부러 더 바쁘게 움직이며 생각을 밀어냈다.

루나는 자신이 이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고 이후, 말 그대로 죽다 살아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살아남았지만, 마치 자신이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고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으며, 


시안을 만나게 된 뒤로는 스스로의 삶을 본래의 것이 아닌, 빼앗은 것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지욱까지 떠나고 난 후로는 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루나는 멈추지 않았다.

무의미하게 보일지라도 계속 나아갔다.

어느 순간, 문득 지욱이 없는 세상이 낯설게만 느껴졌던 시간들은 점점 옅어지고,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덤으로 얻은 인생이라도 어떻게든 살아가기로 했다.

PM 12:30

오전 10시에 예약했던 재활 치료를 마치고, 루나는 병원을 나와 어플로 택시를 부르려는데, 길 건너편에서 작은 푸드트럭에서 파는 토스트를 발견해


점심은 토스트로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신호에 당황하며 푸드트럭 바로 앞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로 들어갔다.

재활 치료를 들어가기 전에 알 수 없는 긴장감 때문에 500mL 물 한 병을 다 비운 게 화근이었는지 애써 참아보려 했지만, 더는 참으면 안 될 거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카페를 운영하다 보니 다른 카페는 신메뉴가 나오지 않는 이상 갈 일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직원에게 급히 다가갔다.

"저... 화장실 좀 이용해도 될까요?"

직원의 표정이 어딘가 딱딱했다.

"화장실은 주문하셔야 이용 가능하세요."

당황한 그녀는 난감해졌다.

허둥지둥 지갑을 꺼내려던 순간, 카운터 앞에 줄을 서 있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말했다.

"자기야, 뭐 마실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본 그녀는 목소리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얼굴은 낯이 익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루나의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놓고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단골손님.

점심때쯤 테이크아웃으로 또 한 잔을 들고 나가고, 저녁에도 들러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가는 남자.

그 남자가 지금,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야’라고 부르며 자신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적인 당황과 급한 마음에 루나는 그의 연기에 동조하며 대답했다.

"어, 자기야, 난 사과 유자 티~"

남자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그녀의 음료를 주문했고, 직원은 그녀에게 화장실 비밀번호는 영수증에 쓰여 있다고 알려주었다.

결제를 마친 남자가 영수증을 그녀에게 내밀었고, 영수증에 적힌 비밀번호를 기억해 곧장 화장실로 향했다.

픽업대 주변에 서서 기다리던 남자는 자신이 주문한 음료가 나오자, 화장실에서 바로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화장실 입구를 마주 보고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화장실을 다녀온 루나는 자연스레 남자가 앉아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휴,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네요."

"시원해요? ㅎㅎ"

루나는 한숨을 내쉬며 컵을 들어 올렸고, 남자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매일 노트북을 두드리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표정에 그녀도 신선함을 느꼈다.

"네ㅋ 뭐, 덕분에요. 깜짝 놀랐어요."

"뭐가요?"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자기야' 그러셔서..연기 잘하시던데요? 배우신가?"

"배우는 아니구요. 작가입니다. 그렇다고 '저기, 모르는 분?' 이럴 순 없으니까요."

"아, 그쵸ㅋ 아~ 작가님이세요?"

장난스러운 대답에 루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 도이겸입니다. 카페 청월 사장님이시죠? 저 거기 오전에 매일 가는데.."

"그쵸~? 어쩐지 얼굴이 낯이 익더라구요~ 전 채루나에요."

그렇게 시작된 가벼운 대화.

그 대화는 자연스레 이어졌으며, 서로를 잘 알지는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장님 카페에도 사과 유자 티 있던데, 원래 사과 유자 티를 좋아하세요?"

"그렇기도 한데 그냥 급해서 메뉴판 사진에 딱 보이는 거 시킨 거예요."

"아 ㅎ 사장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94년생이요. 벌써 서른이네요. 평생 20대일 줄 알았지.."

이겸은 루나의 뾰로통한 표정이 귀엽다는 듯 웃는다. 

"괜찮아요~ 아직 서른 같진 않아요~ 전 95년생, 스물아홉이요."

"아, 동생이구나~?"

"왜요? 연하 싫어해요?"

"20대 땐 싫어했죠. 근데 그것도 사람 바이 사람이더라구요. 남친한테 많이 의지하는 편이라 일단 연하면 의지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10살이 많아도 의지가 안 되고 오히려 저한테 의지하려는, 애 같은 남자도 있고, 4살이나 어려도 저보다 더 오빠 같은 애늙은이도 있으니까~"

"전 연상 좋은데.."

"네?"

무심히 내뱉은 말이지만 무언가 갑자기 루나의 심장을 간질이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화장실 좀."

이번엔 이겸이 화장실로 향했고, 루나는 갑자기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직원들과의 단톡방을 확인했다.

>>청월 크루

-사장님, 재활 치료 끝나셨나?

=이미 끝나고 집에 계실 시간 아닌가? 

+왜 왜 왜~ 이것들은 쉬는 날에도 보고 싶어 죽겠지? 아주 그냥~

그녀는 방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주은과 도운은 한결같이 흥분한 반응이었다.

>>청월 크루

-대박!!! 그분, 설마 사장님 좋아해서 매일 오는 거 아니에요?

=잘됐네~ 사장님, 이 기회에 연애 좀 하세요!!!

+연애는 무슨,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단골손님 우연히 만난 건데~

+그리고 연하여서 그렇게 끌리지도 않아~ 혹시나 마주쳐도 니들 티 내지들 마!

-연하래, 연하래!!!

=얼마나 연한데요? 저보다 어려요?

+아니, 나보다 한 살 어리더라~

그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봤을 때, 그녀는 등 뒤에서 조용히 멈춰 선 이겸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 순간, 이겸의 얼굴에 스치는 묘한 감정을 보았다.

곧바로 그는 가방을 챙겼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요, 먼저 갈게요. 음료값은 안 갚으셔도 돼요."

그 말과 함께 그는 빠르게 카페를 나가버렸다.

그녀도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실수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카페를 나왔고, 토스트는 새카맣게 잊어버린 채,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전날 일부터 이어지는 감정을 안고 카페에 출근한 루나는 오전 내내, 점심도 팬트리 공간에서 김밥으로 대충 때우면서 이겸을 기다렸지만,


그 후로 그는 카페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아침마다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손님이, 점심때까지 노트북으로 글을 쓰던 남자가, 하루에 루나의 카페 아메리카노만 세 잔씩 마시던 남자가 사라졌다.

며칠이 지나도 오지 않는 이겸를 떠올리며 루나는 평소에 주은과 도운에게 손님들에게 아는 척 티 내면 다신 안 오니까 부담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자신이 되려 단골손님을 내쫓은 상황이 돼버린 것 같아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다가 익숙한 실루엣과 노트북 백팩을 발견했다.

그녀는 이겸이라는 직감에 곧바로 뛰쳐나가 그 사람을 불러세웠다.

"잠깐만요!"

루나의 부름에 한 박자 늦게, 천천히 고개를 돌려 루나를 바라본 그 사람은 역시나 이겸이 맞았고, 그는 그녀를 보자, 잠시 멈칫했다.

"왜 요즘 카페에 안 와요?"

"…그냥 요. 단골 카페 바꾸는 것도 허락 맡아야 하나요?"

날이 서 있는 듯한 대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루나 

"아..아뇨. 그런 게 아니라…무례하게 느꼈다면 미안해요. 그날,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게 있으면 말해줘요."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마침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우연히... 사장님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게 됐어요. 그 후로...사장님 얼굴 보기가 좀 껄끄러워서 요즘은 근처 다른 카페 다녀요. 됐죠?"

루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아..."

그제야 자신이 주은, 도운과의 단톡방에서 무심코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마음 상했다면 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남자의 눈동자가 루나를 바라봤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알고 싶다는 듯한, 묘한 시선이었다.

루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을 이었다.

"직원들이 일 한 지 꽤 됐는데 내가 연애를 안 하는 거 같으니까, 직원들은 그냥 장난으로 호들갑을 떨어댄거고 난 괜히 당사자도 아닌 직원들이


되려 김칫국 마시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한 거였어요…변명으로 들리겠지만…진심으로 미안합니다…"

그리고, 진심을 담아 덧붙였다.

"제대로 해명하고 싶은데...점심 시간이죠? 밥, 같이 먹을래요?"

이겸는 루나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 순간, 어느새 따뜻해진 봄날의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는 것처럼 그들의 새로운 관계도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간 속에는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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