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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화

새로운 시작 그리고 인연

by 제나랑


이겸에게 점심 식사를 함께하자고 제안을 먼저 하긴 했지만, 루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했다.

오랜만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정도로 이 감정이 낯설었다.

마치 처음 연애를 시작했던 때로 돌아간 것처럼.

이겸과 마주 앉아 있는 지금, 루나는 괜히 손끝이 간질거렸다.

평소 루나의 카페에서 무심한 듯, 형식적으로 나누던 대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 속 세계관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여전히 차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따뜻하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녀의 심장을 물들이는 듯했다.

"무슨 생각해요?"

그녀의 물음에 그는 피식 웃었다.

"그냥요. 너무 오랜만이라서..누군가와 이렇게 마주 앉아서 밥 먹는 거요. 항상 혼자 먹거든요."

"그럼, 카페 다시 와요. 다시 커피 마시러 와서 글 쓰고 점심 시간 되면 저랑 밥 먹어요."

그녀의 그 한마디가 어쩐지 이겸의 마음을 간질였다.

그녀는 괜히 물컵을 집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녀는 어느새 긴장이 풀려,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경청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묘하게 가깝게 느껴졌고, 그녀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겸은 그저 그녀에게 서두르지 않고, 한 걸음씩 다가오는 사람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따뜻한 아메리카노처럼 은은하게 스며드는 그런 사람.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의 마음이 아주 천천히 그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PM 10:30

카페 마감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루나는 드레스룸에서 편한 홈웨어로 갈아 입고 나왔다.

그때, 한 동안 나타나지 않았던 시안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좋아보이네."

"오랜만이네요."

"이제 너에게 나만 보이지 않으면 되겠네."

"아니..꼭 그렇지만은…"

"이게 마지막이 될 거야.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진짜 너의 마지막 순간일 거야. 아주 먼~훗날에…"

"아니, 이렇게 그냥 사라진다고? 갑자기?"

"갑자기 나타났으니 갑자기 사라져야지."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어서 온 거야. 버스에서 어떤 남자가 널 구해준 꿈, 기억나?"

"그 남자가 내 배우자일 가능성이 높다던? 그거 진짜였어?"

"진짜가 될 지, 아닐지는 너의 마음에 달렸어. 너의 마음이 그에게 향해 뛴다면 그 사람이야.

너의 진짜 마지막 순간이 예지몽에 나올지, 말지는 나도 모르지만, 명부가 올라오면 그땐 내가 널 인도하러 갈게.


내가 언제까지 저승사자로 있을 지는 알 수 없어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너의 마지막은 내가 인도하게 해달라고 빌어 볼게."

"이제야 이렇게 말도 편하게 하고..갑자기 나타나도 놀라지 않게 되었는데..벌써…"

"정신차려. 난 저승사자야. 헤어짐을 이렇게 아쉬워 할 대상이 아니라고. 내가 보이지 않았던 예전의 너로 돌아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


그렇게 됐음에 감사해 하면서, 오래 오래…"

단호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말하는 시안의 얼굴엔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 있다.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녀와 자신이 멀어질 수록 그녀는 행복해질 거라는 걸.

-49년 후-

남은 여생을 이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루나는 처음 시안을 만났던 날, 29세의 아홉수 이후로 50년이 지나 79세의 아홉수가 되었고,


몇 달 전부터 심장 부근에 통증이 이따금씩 나타나다 사라지곤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루나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그러던 어느 햇살 좋은 날.

평소에도 꿈을 자주 꾸는 루나지만, 이번엔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꿈속 세계로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고,


50년 동안 잊고 있었던 지난 날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루나의 꿈속]

여느때처럼 잠에서 깨어난 루나

그녀와 이겸의 침실에서 아침을 맞이했고, 이겸은 항상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 주방에서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침대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놓인 달력 시계를 보니, 9월 17일 오전 9시 44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고개를 돌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을 본 순간, 갑작스러운 압박감에 가슴이 짓눌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와 그녀는 왼쪽 가슴을 움겨쥐었다.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관통한 상태로 양쪽에서 비틀며 동시에 강하게 압력이 가해지는 느낌이었고, 점점 더 강해져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고, 주변의 소음이 멀어져 갔다.

그녀의 심장은 불안정함 속에서 고통의 메아리가 울렸다.

목과 턱에도 불쾌한 압박이 느껴졌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을 참아보려 애썼지만,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그녀의 이마, 목, 등 전체를 적셨고,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갑작스러운 메스꺼움이 밀려오며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편함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어지러움이 더 심해지자, 세상이 회전하는 것 같았고, 불안한 마음이 그녀의 심장을 더욱 조여왔다.

그 순간의 절망감이 그녀를 굴복시키려했지만, 그럴수록 그 고통은 마치 그녀의 생명력을 앗아가는 듯했다.

그리고는 끝내, 그녀가 마지막 한숨을 내뱉았고, 그녀의 심장은 움직임이 잦아들더니 결국 멈추고 말았다.

그녀의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그녀의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는 50년 전, 멈췄던 숨이 돌아오듯, 잠에서 깬 루나가 다시 숨을 몰아쉬며 거칠게 심호흡을 했다.

'예지..몽…다시 시안을 만날 날이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건가…? 결국 그날, 나는 죽는다.'

루나가 꾼 꿈이 예지몽이라면 일주일 뒤에 심장마비로 죽기 전, 남들처럼 버킷리스트라도 만들어야 하나,


마지막으로 누구와 무엇을 함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겸과 제주도에 있는 바다를 보는 것 말고는 다른 건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제주도 바다를 보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군말없이 그러자고 했고, 두 사람의 딸인 '이나'의 도움으로 가족 여행을 떠나게 되었으며,


그렇게 마주한 제주도의 바다는 검은색 모래와 대비되는 에메랄드 빛 바다, 그리고 새하얀 뭉게 구름이 새파란 하늘 위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웠다.

그 풍경을 마치 두 눈에 새겨 넣기라도 할 것처럼 한참동안, 오래도록 담았다.

<2074년 9월 17일>

AM 09:44

루나의 예상대로, 예지몽대로 그녀는 그렇게 심장마비로 마지막 한숨을 내뱉는다.

가장 먼저 그녀를 발견한 이겸의 신고로 5분만에 출동한 구급차에 실려 그녀의 시신은 급히 [서울 조은희망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이동하는 동안에도 계속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그녀의 숨은 50년 전과는 달리, 돌아오지 않았다.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그녀의 시신은 빈소가 꾸려지며 장례식이 준비되는 동안, 영안실 냉동고에 임시로 안치 되었고,


이겸과 이나는 루나를 잃은 슬픔은 잠시 미뤄두고 그녀의 장례식 절차를 진행하는 데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영안실 냉동고 안, 루나의 육체에서 분리된 그녀의 영혼이 그녀의 이름이 적힌 냉동고 앞에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랜만에 보는 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진짜 마지막인가봐요. 이렇게 만난 걸 보니…"

"여전히 그대로네. 마지막으로 내가 인도하게 될 망자가 너라서 기뻐. 난 신과 1000년 계약을 했거든. 그 1000년 동안 망자를 저승으로 인도하기로…"

"그 다음은요? 어떻..게 되는데요?"

"소멸..돼야지…이승에서 지은 죄를 저승에서 1000년 동안 갚았으니까…"

"그렇구나…다른 저승사자가 절 인도하게 될까 봐..걱정했는데…다행이에요…"

"너의 인연과 마지막 인사는 했어?"

"…아뇨…차마 입이 안 떨어져서…"

"보고..올래? 현몽으로…"

"현몽이요?"

"너의 인연이 잠시라도 잠이 들었을 때 니가 꿈에 나타나는 거…"

"가능한가요?"

"그건 내 마지막 배려로 하지."

한편, 이겸은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쁘다가 장례식 절차 중에 정해야 할 것들은 얼추 다 정하고 발인, 그리고 납골당 안치만을 남았고,


새벽 늦게까지 추모객을 맞이하다가 빈소 한켠에 있는 상주 대기실에서 벽에 기대어 쪽잠을 자는 이겸과 그의 무릎을 배고 잠이 든 이나.

[이겸과 이나의 꿈속]

안개가 자욱한 빈소.

루나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고 서 있다.

손을 뻗어 재단 위에 놓인 국화 꽃을 집으려 했고, 다른 물건들은 닿을 수 없었지만, 재단 위에 있는 음식과 향, 그리고 국화 꽃만큼은 만져졌으며,


손에 든 국화 꽃을 영정 사진 앞에 올려 둔다.

'예지몽을 꾸고 나서 찍은 영정 사진이라…늙었네…좀 더 젊을 때 미리 찍어 둘 걸…'

그녀의 장례식에 조문을 하러온 손님들은 대부분 그녀와의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겸과 이나의 지인들이고,


유일한 그녀의 지인들은 카페를 운영했을 때, 함께 일하던 주은과 도운뿐이었다.

두 사람은 빈소를 들어설 때부터 이미 울면서 들어오고는 조문을 하는 내내 울다가 장례식을 나갈 때까지도 눈물을 닦아내며 나간다.

'조촐하니…좋네…나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는 사람이 남편과 딸 그리고 저 두 사람이면…내 인생도 나쁘진 않았구나…와줘서 고마워, 두 사람…'

두 사람도 모르게 두 사람을 배웅한 루나는 이겸과 이나가 쪽잠을 자고 있는 상주 대기실 문 앞에 서고, 천천히 한 발자국을 이동하자,


그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선다.

루나가 나타나자, 두 사람은 놀란 것도 잠시, 하루종일 눌러두고 미뤄두었던 슬픔이 한꺼번에 파도가 몰아치듯 밀려와 눈물을 흘리고,


루나는 담담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자기야…?"

"…엄..마…?"

"울지 마…두 사람이 이렇게 슬프게 울면 나 못 가…"

"엄마…가지 마, 제발…ㅎ흐흑..흑…"

"조만 더 있어 줘…왜 이렇게 빨리 가려고 해…"

두 사람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고 붉어진 눈가는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루나는 힘겹게 웃어 보이고, 두 사람의 손을 향해 손을 뻗는다.

국화 꽃처럼 두 사람의 손에 자신의 손이 닿자, 그녀는 양손에 두 사람의 손을 꼭 쥔다.

"두 사람 덕분에 행복했어. 자기랑 함께 한 모든 순간이, 이나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 모든 순간이…"

두 사람에게 루나의 눈빛은 그녀의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후회 없는 삶이었다고, 두 사람과 함께한 시간이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두 사람…나 없어도 행복해야 해…미안해…이렇게 빨리 가서…그리고 사랑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루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녀는 조금씩 희미해졌다.

그렇게 루나의 영혼은 두 사람의 현몽 속에서 빠져나와 시안의 곁으로 돌아왔고, 시안은 그녀의 장례식장 한 켠에서 소고기 뭇국을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망자의 장례식장에서 그 어떤 것도 먹지 않지만, 그녀가 생전에 좋아하던 소고기 뭇국으로 차려진 손님상을 보고는 먹으면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고,


그녀가 돌아오자,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는 바로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는 시안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그의 손 끝에서 검은 실이 빠져나와 그녀의 손 끝으로 연결 되었고, 그녀는 시안을 따라 저승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안개가 자욱한 유황도가 펼쳐지고, 양 옆엔 유황천이 흐르고 있었다.

유황도를 따라, 시안의 뒤를 따라 걷던 그녀는 저승문 앞에 다다랐고, 망각의 샘물이 보였다.

"손을 담가 한 모금 떠 마시면 돼. 그 한 모금이면 이승에서의 기억은 사라져. 망각은 신의 배려니까."

그녀는 망각의 샘물에 손을 담근 후, 조심히 두 손을 모아 샘물을 떠 한 모금 들이켰다.

그 순간, 그녀는 정신을 잃은 것처럼 머릿속은 까맣게 변하고, 잠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자,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머릿속과 동공은 텅비어 있었다.

저승문이 열리자, 시안과 루나는 함께 통과했고, 그녀가 저승의 재판을 받는 동안에도 줄곧 그녀 옆에 시안이 서 있었으며,


그녀를 변호하면서 그녀는 49일 동안 받았던 재판 중 그 어떤 지옥도 가지 않고 천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생명이 저승의 문턱을 넘었다.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것에는 반드시 명이 있으니 사람으로 태어나 한 번 죽는 것은 진실로 아까울 게 없는 것이다.=

-제증참판정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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