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루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핸드폰이 짧게 진동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애써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반복해서 떠오르는 익숙한 이름, 지욱.
그는 며칠째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지욱
미안해.
>>지욱
제발 한 번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욱
정말 미안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할게.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정작 무엇을 미안해하는지,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그걸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루나를 잃지 않기 위해, 이 위기를 어떻게든 모면하기 위해 쏟아내는 공허한 단어들.
그녀는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메시지를 열지 않은 채 그대로 화면을 꺼버렸다.
답장할 의욕조차 없었고, 지욱에게 더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솔직하지 않았다.
이제는 루나도 더 이상 지욱의 메시지를 받아줄 이유가 없었다.
<2025년 02월 14일>
누군가에게는 연인과 함께하는, 달콤한 초콜릿과 사랑이 넘치는 발렌타인 데이였지만, 연인과 함께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겐 외로움이 깃든 날이었고,
루나에게는 너무나도 잔인한 날이자, 그를 떠나보내는 날이었다.
AM 11:00
오전부터 카페는 연인들로 붐볐다.
서로를 위해 준비한 선물과 초콜릿을 교환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연인들.
커피 머신이 끊임없이 작동했고, 달콤한 초콜릿 향과 에스프레소 향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루나는 아무리 카페가 따뜻해도, 그날이 다가왔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지 않길 바랐던 그가 나타났다.
예지몽 속에서 봤던 그대로의 모습을 한 형주였다.
검은 패딩, 단정하게 정리된 머리,
굳은 얼굴로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아웃이요."
그 어떤 감정도 섞이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로 내뱉은 단 한마디.
마치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는 군인의 얼굴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루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예지몽에서 봤던 장면 그대로라면, 이 커피는 자신을 위한 커피가 아닌, 지욱에게 건넬 커피일 것이고, 커피엔 수면제가 섞이고,
지욱은 무방비 상태로 마시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일부러 샷을 4샷이나 추가했다.
평소에 지욱이 쓴 것을 싫어해 기본 2샷 중 1샷만 넣어 커피를 연하게 마신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지욱이 커피를 입에 댄 순간, 쓴맛이 너무 강해 한 모금 이상 마실 수 없게, 절대 그냥 마실 수 없게.
진하디진한 아메리카노를 조용히 건넸다.
"맛있게 드세요."
형주는 커피를 받아들고,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카페 문을 나섰다.
그가 곧장 지욱의 로펌 사무실로 향할 것이라는 걸 예상한 루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112를 눌러 경찰에 즉시 신고했다.
"여기 어떤 남자가 [누리] 로펌 변호사를 죽이겠다면서 그쪽으로 가고 있어요."
긴박한 그녀의 목소리에 경찰도 바로 출동하겠다고 답했고, 구급대원과 경찰들이 도착했을 땐 이미 사건은 벌어진 뒤였으며,
예지몽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지욱은 그녀의 예상대로 그 커피가 너무 써서 한 모금만 마시고 내려놓았다는 것.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20분 전-
형주는 초조해졌다.
지욱이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계획이 틀어지기에 수면제가 아니어도 그는 오늘 반드시 죽여야 했다.
순간, 형주는 지욱이 방심한 틈을 노려 미리 준비한 식칼을 꺼냈다.
(푹.)
칼날이 그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지욱의 눈은 확장됐고, 억지로 내뱉은 숨이 새어 나왔다.
“—윽…”
손끝이 떨렸고, 그의 몸이 점점 힘을 잃었다.
형주는 무려 14번이나 멈추지 않고 찔러댔다.
바닥에는 붉은 피로 물들어 흥건해졌고, 그는 그 자리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숨을 몰아쉬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지막 한숨을 내뱉었다.
경찰들이 지욱의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침과 동시에 칼까지 손에 쥔 채로 현장에서 체포된 형주는 경찰서로 연행됐고,
구급대원들에 의해 지욱의 시신은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규호가 전화를 준 덕분에 유가족이 사망자의 신원을 확인한 후, 루나도 지욱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루나는 규호의 전화를 받자마자, 병원 내 영안실로 향했고, 냉동고 앞에 차가운 운반대 위에 누워 있는 그를 볼 수 있었으며,
그의 몸은 아직 체온이 식지 않은 상태여서 더욱 그의 죽음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의 시신 위엔 하얀 천을 얼굴만 보이도록 덮어놨고, 그녀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순간, 지욱의 영혼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왔고, 시안이 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영혼은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함께 눈물을 흘렸고, 지난날의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다 망쳤어…루나는 나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줬는데…그걸 못 알아 처먹고…제대로 사과하는 방법도 모르고…
그저 이런 상황을 만든 죽은 아버지만 탓하면서 억울해하기만 했어…"
"그녀가 널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니가 설갑재의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숨겼고 묵인했고 기회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털어놨어야 할 순간조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심지어 사과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지…끝내 이렇게 되었군. 니가 그녀를 저렇게 만든 거다. 죗값은 지옥에서 받으면 된다."
시안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깊은 회한이 서려 있었다.
그의 영혼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젠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점점 색이 바래진 그의 영혼은 시안의 인도를 따랐다.
"계유년 을묘월 기축일. 설지욱 망자. 당신의 마지막을 인도한다. 가자."
그렇게, 지욱의 영혼은 유황도에 오르게 되었다.
<2025년 2월 15일>
[서울 조은희망 병원 장례식장]
AM 09:00
루나는 4개월 사이에 몇 번째 오는 건지 모를 이 장례식장에 또 오게 된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럽지만, 오늘은 지욱의 장례식이라 더욱 애통한 심정이다.
지욱의 장례식이 시작된 후부터 줄곧 빈소를 지키며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는 지욱의 유일한 유가족이자, 상주인 이모
"루나 씨, 이제 들어가요…그만하면 됐어요…루나 씨가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슬픔에 젖은 표정을 하는 그의 이모는 자신의 형부가 루나에게 한 짓을 알까?
모를 수도 있지만, 알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굳이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가해자는 죽었고, 따지고 보면 이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이 말은 누군가를 잃은 사람을 위로할 때 쓰는 말이 아니라 이럴 때 써야 맞는 표현이다.
그냥 누군가가 조카를 살해해 억울한 유가족이 되어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당신은 그저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사세요. 이게 선배를 위한 내 마지막 배려입니다.'
"그럼 이제 저 가보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의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는 장례식장을 나와 자신의 카페로 향하는 루나
AM 09:30
주은이 막 오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평소 출근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온 루나를 보고 의아해한다.
"벌써 오셨어요? 오늘은 계속 장례식장에 계실 줄 알고…괜..찮으세요?"
"괜찮아질 거야..괜찮아..져야지…거기 계속 있다간 안 괜찮아질 거 같아서…"
"그럼 집에서 좀 쉬시지…"
"우리 엄마,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아닌데…또 두 사람 힘들게 하긴 싫었어. 이 어깨도 아직 다 안 나아서 미안해 죽겠구만…"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스물여덟 먹도록 일 한 번 안 하고 백수처럼 살면서 엄마 등골 빼먹던 년 1년 만에 사람 만드신 것도,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신 것도 사장님인데 그 정도는 해드릴 수 있죠.
자꾸 미안해하시면 제가 더 섭섭한데요…그렇게 못 미더우신가..싶어서…"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고마워, 항상…"
"고마우시면 뒤에서라도 쉬고 계세요."
"알겠어."
그녀는 조용히 카페 바 뒤쪽 팬트리 공간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손끝이 얼어붙은 듯 가만히 있었다.
결국, 운명은 변하지 않았고, 그는 사라졌다.
그렇게 한 사람의 운명이 끝났다.
그리고 또다시 혼자 남겨졌다.
그때, 한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와 카운터 앞에 선다.
흰색과 회색 배색의 체크무늬 코드, 위아래 세트로 맞춘 회색 후드티와 회색 조거팬츠, 헤어는 레드 브라운 컬러에, 더욱 푸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베이비펌 스타일, 그리고 밝은 회색과 진회색 조합의 노트북 백팩을 메고, 한 손에는 핸드폰, 다른 한 손에는 버건디 컬러의 가죽 카드지갑을 미리 꺼낸 채,
고민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문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 헤이즐넛 시럽 펌프 3번 추가해 주세요. 마시고 갈게요."
주문을 마치고 가장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는 노트북 백팩에서 노트북과 수첩, 펜, 보조배터리까지 야무지게 챙겨온 개인 물품을 꺼내 세팅한다.
주은이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담긴 머그잔을 픽업대 위에 두자, 부르기도 전에 일어나 자신의 커피를 가져간다.
그리고는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노트북 키보드를 연신 두들기며 작업을 하는 듯하다.
주은은 할 말이 있는 듯, 루나에게 다가온다.
"사장님, 그 사람 또 왔어요."
"그 사람?"
"그 푸들 머리요~"
"아~"
"뭐 하는 분일까요? 매일 이 시간에 와서 점심때까지 한두 시간 저렇게 노트북만 두들기다가 가끔 수첩에 뭐 쓰고,
점심 이후에는 자리 정리하고 또 한 잔 테이크 아웃 해서 나가고. 저녁쯤에 또 온다면서요~"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해. 좀 늦게 출근 하나 보지~ 저녁에는 가방 없이 와서 테이크 아웃해서 가져가더라~ 정해진 루틴이 있는 사람 같긴 해~"
"늦게 출근하면 자기 바쁜데 여기까지 와서 일하다가 가는 거, 저만 이상해요? 저 같으면 아침이 아니라
저녁에 와서 일하고 들어가서 맘 편히 쉴 거 같은데요? 평범한 직장인은 아닌 거 같아요. ㄱㄱ에서 일하나?"
"손님한테 관심을 좀 끊어주시죠? 그러다 너 부담스러워서 저 손님 다신 안 오면 어떡할래?"
"아…그런가? 아, 근데 전 왜 이런 게 궁금하죠? 사장님은 안 궁금해요?"
"궁금하지. 어떤 루트로 우리 카페에 온 걸까. 뭐 하는 사람인데 같은 시간에 매일 오는 걸까.
왜 같은 음료만 매일 마실까. 다른 음료는 안 궁금할까. 남들 바쁜 출근 시간에는 느긋하게 매장에서 마시고
되려 한가한 퇴근 시간에는 잠깐 들른 사람처럼 테이크 아웃으로 가져갈까. 노트북으론 뭘 저렇게 열심히 쓰는 걸까.
다 궁금하지. 사장님이 손님한테 궁금한 게 없으면 안 되지. 근데 난 티를 안 내지.
MBTI가 I인 사람이나 남자들은 자신을 궁금해하는 순간 부담스러워져서 다신 안 오거든.
그러니까 티 내지 말고 속으로만 궁금해해~"
"네~"
남자 손님은 평소처럼 점심시간 때쯤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하더니 다 마신 머그잔은 픽업대 위에 올려두고, 카운터에서 또다시 주문을 한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테이크 아웃이요."
"저희가 한 번은 리필 무료로 해드려요."
"아니에요. 계산해주세요."
"아..네."
보통은 마다하지 않지만, 서비스조차 거절하고 제값을 치르는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는 않은 손님이다.
남자 손님이 카페를 나가고 나서도 주은은 그 손님 얘기를 이어간다.
"저거 봐요. 이상한 손님이라니까요? 보통은 몰랐다가도 리필 무료니까 그걸로 테이크 아웃 해드릴까요, 하면 몰랐던 사람도, 그래요? 하면서 좋아하고,
되려 안 알려 줬으면 한 잔 더 벌고 사장님한테 칭찬받았을텐데 왜 말해줬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저 사람은 계산을 한다니까요? 이게 안 이상해요?"
"그럴 수도 있지.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니가 더 이상해~ 뭐 이것도 내 추측이지만, 아마도 장사하는 사람의 마음을 재료 하나까지 헤아려 주시는 분이 아닐까?
그게 꼭 아니더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괜히 기분이 좋아지잖아~ 그냥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고, 오늘 하루가 시간은 더디게 가고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루나는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을 보내며, 잠시라도 잊을 수 있었다.
=그대를 형편없이 대하는 사람이 그대를 떠나간다고 하더라도 좋은 사람을 잃은 쪽은 그대가 아니라 상대방이니 하나도 슬퍼하는 일 없기를=
-흔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