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한 공포
AM 09:30
장례식장을 나온 루나는 곧바로 재활 치료 센터가 있는 병동으로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익숙한 기구들과 치료실의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퇴원 후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2달째 받고 있는 재활 치료로, 어깨는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재활 치료를 하면 몰려오는 통증만큼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재활 치료실 앞에서 담당 치료사를 만난 루나는 지도에 따라 스트레칭부터 시작했다.
보호대를 낀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며 근육을 늘렸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근육이 땅기는 듯한 감각이 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호흡 고르세요. 너무 힘주면 오히려 더 뻣뻣해질 수 있어요."
치료사의 부드러운 조언에 맞춰 루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심호흡하며 통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지만, 고통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 다음, 가벼운 덤벨을 이용해 팔 근력을 단련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보호대가 걸리적거려 탈착을 요청했지만, 아직은 이르다는 치료사의 말에 끝까지 치료를 이어갔다.
"많이 좋아졌네요. 예전보다 가동 범위가 훨씬 넓어졌어요."
"아직도 뻐근하긴 한데, 처음보단 나아졌어요."
"꾸준히 하면 곧 더 좋아질 거예요."
"오늘도 많이 뻐근할 거예요. 천천히 해볼까요?"
치료사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루나는 보호대를 낀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순간, 어깨가 찢어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아…"
루나는 이를 악물고 참고 있었다.
"너무 힘들면 말하세요. 무리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어요."
하지만 루나는 아팠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버텼다.
어깨 관절의 가동 범위를 넓히는 것이 재활의 핵심이며, 하루빨리 보호대도 탈착하고 운전도, 마감도 혼자서 하고 싶은 마음에 치료가 끝날 때까지 참았고,
어떻게, 얼마나 꾸준히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통증과 고통, 그리고 끝이 보이지 않는 막연함.
언제까지 이 고통을 참아야 할까?
몇 달이 걸릴까? 1년? 아니면 몇 년?
그 알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더 큰 고통처럼 느껴졌다.
확실히 몸은 재활 치료를 할수록 나아지고 있지만, 그 과정은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었다.
이 고통을 견디는 것이 결국 다시 일어서기 위한 과정이니까.
두 시간에 걸친 재활 치료가 끝난 뒤, 루나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치료실을 나섰다.
그녀의 몸이 노곤하고, 어깨는 여전히 욱신거렸다.
병원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니 회색빛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고, 눈은 그친 상태였다.
병원 입구 앞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루나는 거실로 들어오자마자, 소파에 쓰러지듯 기대어 앉는다.
그녀는 그대로 깜박 잠이 들었고, 깊은 어둠 속에서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고, 그 어둠 속은 숨 막히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그러다 문득, 시야가 밝아졌다.
[루나의 꿈속]
루나에겐 익숙한 사무실이 보였고, 그곳은 지욱이 소속되어 있는 로펌 안에 있는 지욱의 사무실이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 아래, 지욱과 한 남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고, 테이블 위엔 깔끔하게 정돈된 서류들 사이로 김이 서린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표면엔 루나의 카페[청월]의 로고가 도장으로 찍혀 있었고, 그로 인해 지욱은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이 남자가 로펌 앞에도 있는 카페가 아닌,
굳이 루나의 카페까지 가서 커피를 사 왔다는 걸 깨달았다.
남자가 어딘가 수상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의심하며 상담하러 왔다는 고객을 내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많이 바쁘신가 봐요. 상담 예약받기 개 힘들던데.”
정적인 말투, 그러나 목소리는 어딘가 가라앉아 있었다.
지욱은 그의 책상에 쌓인 다른 사건 관련 서류들을 힐끗 보고는 들고 있던 서류를 한 장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요. 근데, 저게 그나마 줄인 거예요. 제 얘기를 이쯤하고 형주님 얘기 들려주세요."
넘긴 서류에 포함된 의뢰인 형주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던 지욱은 점점 얼굴이 굳어갔다.
"이제야 제가 누군지 알아보셨나 봐요? 언제 알아보나 했네."
"당신…신사역 사거리 4충 추돌 사고 피해자 유가족 맞..죠?"
형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의 손끝에는 살짝 떨림이 있었다.
그러나 지욱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고, 테이블에 놓여 있던 커피를 들이켰다.
한 모금씩 그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고, 따뜻한 김이 얼굴을 스치고,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절반 이상 마셨고, 처음 몇 모금은 아무 이상이 없었다.
"정확히는 그 사고로 1명이 중상을 입고 3명이 사망했는데 그 사망자 3명 중 지해주라는 여자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그 사고 가해자 개새끼는 정당한 처벌도 받지 않고 존나 편하게 디졌든데? 그럼 안 되는 거 아닌가?"
"아..저…근데 저에게 법률 자문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모른 척 해보시겠다? 시도는 좋았는데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 개새끼 주변을 알아보다가 유일한 가족이 아들이고,
그 아들이 대형 로펌 변호사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다 한 가지 당신이 감추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됐죠.
당신이 매일 집에 데려다주는 그 커피 파는 카페 사장님은 그 비밀을 모르는 거 같은데. 내가 까발려 줄까요? 재밌을 거 같은데.."
"원하는 게..뭐죠…?"
"원하는 거..원래는 그 개새끼가 정당한 처벌을 받고 평생 감옥에서 썩는 거였는데 디져버려서…
그건 이미 틀린 거 같고. 이미 디진 새끼한테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내가 기댈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더라고."
지욱은 커피를 마시며 형주의 말에 귀기울였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뭔가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졌고, 형주에게 말을 하려 했지만, 혀가 굳은 듯했다.
서류의 글씨가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한 순간, 머릿속이 핑 돌았다.
‘…이게, 뭐지…?’
지욱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숨이 가빠졌다.
눈앞의 형주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냉정한 눈빛, 깊숙이 가라앉은 표정.
"처벌이 안 되면 천벌로. 그 개새끼한테 천벌이 뭘까…? 지 새끼를 지옥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거…
그거밖에 없지 않을까 싶었지…당신한테 1도 안 미안해. 원망하려면 내가 아니라 니 애비를 원망해.
술 처먹고 3명이나 죽이고 1명은 죽다 살아났는데 반성은커녕 그렇게 디져서 도망쳐 버렸어!
우리 누나는 그렇게 길바닥에서 죽어갔는데…그 아들놈은 잘나가는 변호사에, 인면수심이 따로 없지.
그 사장님이 당신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당신을 곁에 둘까? 안면몰수하고 언제까지 살 수 있을 줄 알았어!"
"…ㅈ제..발…ㅅ살려..주세요…"
(턱.)
지욱은 그대로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의 머리가 테이블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형주는 가방에서 천천히 무언가를 꺼냈다.
번뜩이는 칼날.
지욱의 목을 향해 내리꽂힌 칼이 살을 뚫고 깊이 박혔다.
그의 몸이 움찔했지만, 힘을 쓸 수 없었다.
목에 박혔던 칼이 형주의 힘에 의해 뽑혔고, 이윽고 다시 심장을 관통했다.
그 후로도 날카로운 칼날이 계속해서 그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의 피가 형주의 얼굴을 비롯해 사방으로 튀었지만, 형주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
마지막으로 찔린 순간, 지욱의 몸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공기 중에 퍼지는 금속 냄새.
바닥을 적시는 선홍빛 피.
형주는 피로 얼룩진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지욱의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를 들어 곧바로 경찰서에 전화를 걸었다.
“제가…사람을…죽였습니다.”
그 목소리는 너무도 덤덤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는 도망치지 않고, 소파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듯 태연하게 한숨 돌리고 있었으며, 사무실은 의뢰인의 보호를 위해 사방이 통유리가 아닌
두꺼운 벽이었고,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욱이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는 바람에 사무실 밖의 풍경은 그 어느 때와 다름없이 모두들 저마다의 업무에
집중하느라 분주해 지욱의 사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안타깝게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루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
숨이 차오르고 손이 떨렸다.
눈앞에는 익숙한 자신의 집 거실 천장이 보였지만,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꿈속의 광경이 너무도 선명했다.
온몸이 얼어붙은 듯했고,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물은 그녀의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멍한 상태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그녀는 예지몽의 여운으로 충격과 공포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방 안에 차갑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왜 이렇게 힘들어해, 새삼스럽게…”
시안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닦았다.
"이거…예지몽..아니죠? 아니라고 해줘요..제발…"
"그 또한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어. 받아들여."
눈앞의 현실과 꿈의 경계가 무너진 듯한 혼란 속에서 머릿속은 아까 본 장면으로 가득 차, 마치 그 공간에 다시 갇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욱이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던 모습.
그를 무참히 찌른 남자의 냉담한 눈빛.
그리고 지욱의 피로 물든 사무실.
그 모든 것이 너무도 선명했다.
마치 꿈속이 아니라, 직접 그 순간을 겪은 것만 같았다.
“하…”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지욱 선배가 죽는다.
그것도 끔찍하게, 잔인하게, 무참하게.'
숨을 몰아쉬는 그녀의 귀에 다시금 지욱의 마지막 숨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시선이, 그 마지막 순간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루나는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그 꿈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서도,
꿈속의 남자, 형주가 한 말이 진짜 다 사실이라면, 그 가해자의 아들이 진짜 지욱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서도…
'진짜…지욱 선배가…그 새끼 아들이라고?'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마비되는 듯한 느낌.
머릿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몸이 무너져 내릴 듯한 충격으로 인해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다.
'믿을 수 없어…아니, 믿고 싶지 않아…'
"…하아…"
입술이 덜덜 떨렸다.
충격에 의한 감정 때문인지, 입술이 떨려서인지, 그녀가 내쉰 한숨 소리조차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어..어떻게…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 왜 이렇게 나한테 잔인한 건데, 왜?!!!"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한 착각.
손끝이 얼어붙은 듯이 차가웠다.
심장은 온몸을 부수듯이 뛰고 있었지만, 몸은 이상할 정도로 무력했다.
모든 것이 어지러웠다.
꿈에서 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지욱의 아버지는 가해자였고, 그로 인해 지욱은 피해자 중 한 사람의 유가족에게 복수 당했다.
이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복수의 고리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 루나는 온몸을 감싸 안았다.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위험에 대한 공포는 위험 그 자체보다 천 배나 무겁다.=-디포우-
=죽음의 공포는 죽음보다 무섭다=-리처드 F.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