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마지막
<2024년 11월 15일>
PM 10:00
아직 보호대를 착용한 상태로 지욱과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이나의 장례식장.
차가운 공기가 장례식장 입구에 선 지욱과 루나의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24시간 전-
역시나 도운과 카페 마감을 함께 하고 지욱이 집까지 데려다 준 후, 루나에게 연달아 전화 두 통이 왔다.
한통은 규호에게서 온 이나가 자택에서 분신 자살을 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고, 다른 한 통은 군자역 카페 건물주였는데,
머쩍은 사과와 함께 어떻게 된 일이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통화였다.
트럭 운전사에 이어 이나의 사망 소식은 루나의 멘탈을 흔들기 충분했고, 적지 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도착한 장례식장은 다른 빈소 유가족과 조문객들의 곡소리로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이나의 빈소는 많지 않은 조문객들이 식사를 하며 낮은 목소리로 저마다 유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었고,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은 초췌한 얼굴로 영정사진을 바라보며 조문객들의 조문 맞이를 하고 있었는데,
앞서 빈소 안으로 들어서는 루나와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르는 지욱을 발견하고는 특히 루나에게 시선이 고정 되었으며,
유가족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았지만, 왜 온 건지 의아해하며 잔뜩 긴장 한 채 숨죽이고 있었다.
검은 코트를 걸친 그녀는 코트 자락이 휘날릴 정도로 힘차게 한 걸음 한 걸음, 그리고 천천히 빈소로 향했고,
그녀의 발소리가 장례식 복도와 빈소를 울릴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쿵 쿵)
루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빈소 입구에 마련된 부의함 옆, 방명록 앞에 섰고, 펜을 집어 들어 망설임 없이 부의록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큼지막하게 자신의 이름을 꾹꾹 눌러가며 적었다.
킬힐을 잘 신지 않는 그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검은 신발 중 가장 굽이 높은 15cm의 검은 킬힐을 신었는데,
빈소 안으로 들어올 때는 모든 조문객들이 신발을 벗으라고 신발장도 배치되어 있지만, 그녀는 벗지 않고 힐을 신은 채로
빈소 안으로 들어가 영정사진 앞으로 향했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분향소 앞에 선 그녀는 이나의 영정사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보통 분향이나 헌화 중 하나를 선택에서 하지만, 그녀는 분향한 후, 이어서 헌화를 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으로 향을 집어 들고 촛불을 이용해 불을 붙였다.
이 과정에서도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치는 건 생략하고 오른손에 든 향에 붙은 불을 끄는데, 예의를 갖추기 위해선 절대 입김으로 불지 말아야 하지만,
그녀는 당연한 듯, 입김으로 불어서 끈 후, 향로에 꽂았다.
그리고는 향로 옆에 놓인 국화꽃 한 송이를 집어 들었다.
(휙)
국화꽃은 영정사진 바로 앞, 재단 위에 가볍게 던져졌다.
그 순간, 장례식장 안의 분위기가 더욱 얼어붙었다.
루나는 자신이 이나에게 아무런 악의를 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인해 생명의 위협을 당했다는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았고,
그녀의 삶에 남겨진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며, 올해만 두 번째 살해당할 위험에 처했던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조이나, 결국 이렇게 됐네.
평생을 자신의 인생이 망한 걸 남 탓하면서 살다가 가는구나.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면서 살았던 그 세월이 참 불쌍하다.
지금쯤 지옥에 있으려나? 거긴 어때? 살만해?
너에겐 이승이나 지옥이나 별 차이 없지?
결국 너의 마지막을 그렇게 스스로 포기할 거면
차라리 남은 시간 동안 너 자신을 위해 살다 가지 그랬냐.
잘 가라는 말도 아깝다, 넌.'
루나는 어떠한 묵념이나 인사도 하지 않고 유가족들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지만, 할 필요가 없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고인의 명복은 못 빌어주겠네요. 당신 딸 때문에 내가 골로 갈 뻔해서.”
유가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루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 말과 함께 루나는 몸을 돌려 장례식장을 떠났다.
전혀 예의를 갖추지 않은 그녀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유가족조차도 그녀를 향해 뭐라고 하지 못했고,
다른 조문객들 중에서도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방금 나간 조문객은 누구고, 고인이 무슨 짓을 했길래 골로 갈 뻔했다는 건지, 고인과는 어떤 사이였는지,
왜 유가족은 저런 예의 없는 행동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건지에 대해 수군대고 있었지만,
아무도 유가족에게 직접 묻는 사람이 없기에 명확히 답을 알지는 못했다.
루나는 이나와 나누었던 짧은 대화로는 자신을 왜 그리도 증오했는지, 자신이 그녀에게 잘못한 게 무엇인지,
무슨 일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싶었을까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어 답답했지만, 유가족에게 물어보지 않았던 건 방화로 인해 살해하려는 의도는 변하지 않으며,
심지어 고등학교 때 유일하게 먼저 다가와 줬던 친구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다는 사실이 적지 않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2024년 12월 31일>
작년보다는 규모가 작아졌지만, 연말 분위기로 가득한 거리 곳곳에서 반짝이는 조명이 빛나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 해의 마지막을 보내기 위해 웃으며 거리를 거닐었다.
평소엔 낮은 볼륨으로 틀어 놓는 음악, 곳곳에 켜둔 향초와 무드등만이 분위기를 풍기던 루나의 집 역시 따뜻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거실 한가운데에는 원래 있던 테이블을 치우고는 커다란 접이식 타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케이터링 업체에서 준비한 진수성찬이 정갈하게 가득 채우고 있는데, 공간이 부족해 아일랜드 식탁에도 가득했다.
타원형 테이블에는 메인 요리인 등갈비찜, 육회, 밀푀유나베, 각종 부위별 참치회(가마살, 붉은 살, 대뱃살, 중뱃살, 배꼽살),
모둠 초밥 5종(도미, 광어, 연어, 와규, 방어), 모둠 조개찜(키조개, 가리비, 참소라, 바지락), 아일랜드 식탁에는 서브 요리인 아스파라거스 베이컨 말이,
레몬 버터 관자구이, 케이준 샐러드, 안심 찹쌀 탕수육, 또띠아롤, 감바스&바게트, 그리고 과일 5종(천혜향, 딸기, 단감, 샤인 머스캣, 파인애플)으로
채워져 있고, 고급 레스토랑 못지않은 풍성한 식탁을 보며 가장 먼저 도착한 도운이 감탄했다.
“사장님, 이건 거의 호텔 뷔페 수준인데요?”
루나는 보호대를 착용한 팔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
“어차피 내가 직접 요리하지 못할 거, 제대로 준비했지. 나도 케이터링 처음 이용한 건데 너무 좋다~
메뉴를 내가 넣고 싶은 요리로 선택해서 구성할 수 있더라. 이제 이런 거 매년 할까 봐~”
“역시 사장님 클래스…”
도운이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은과 루나의 카페 바로 옆 상가 건물인 모노 빌딩에 입점해 있는 가게 사장님들이 하나둘씩 도착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고,
반응은 최고였으며, 모두들 좋아했다.
“자, 다들 앉아! 음식 식기 전에 빨리 먹자!”
각자 덜어 먹을 접시와 수저를 가져다 타원형 테이블로 와서 질서 정연하게 앉기 시작했다.
주방에 아일랜드 식탁을 기준으로 왼쪽의 가장 안쪽부터, 루나가 이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입점한 1층의 꽃집 사장님 박진주, 그 옆엔 2층의 책방 사장님 오경임과
그녀의 남편 이이환, 그다음은 3층의 가죽 공예, 목공예, 주얼리 공예 공방을 하는 강서경, 그리고 서경을 도와 함께 일하고 있는 그의 남동생 강서준이 앉았고,
아일랜드 식탁의 오른쪽으론 도운, 주은, 지욱 순으로 앉았으며, 가장 아일랜드 식탁에서 가까운 자리엔 호스트이자 집주인 루나가 앉았다.
다들 자리에 앉자마자 분위기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도운은 참치 가마살 회 한 점을 먹으며 감탄했고, 서경은 밀푀유나베를 조심스럽게 떠먹으며 따뜻한 국물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으며,
경임은 이환과 함께 등갈비찜을 접시에 덜어내며 이야기를 나눴다.
진주는 도미 초밥 하나를 입 안 가득 넣으며 씹을 때마다 느껴지는 식감을 음미했다.
이들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고, 각자 2024년 올 한 해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웃고 떠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 깊이 따뜻한 기분을 느낀 루나가 지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PM 11:50
어느새 11시 50분을 향하고 있는 핸드폰 시계를 확인한 도운
“자, 자! 이렇게 모였는데 우리 카운트다운해요!”
도운의 들뜬 한 마디에 루나는 ㅇㅇ패드를 꺼내 초 단위까지 있는 시간 어플을 띄웠다.
"할 거면 제대로 하는 스타일이라~"
루나의 준비성에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각자 화장실 가거나 멀리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하면서 소화도 시킬 겸 잠시 휴식 시간도 가졌고,
그 틈을 타 자리에서 일어난 루나는 각자의 샴페인 잔에 와인 냉장고에서 꺼내온 폴 드 코스트, 블랑 드 블랑 브룻을 조금씩 따른다.
어느덧 ㅇㅇ패드 화면에는 23:59:30이 표시되었고, 모두들 시간 맞춰 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봤다.
"호스트가 한마디 해~"
"다들 장사하느라 올해 고생 많았고,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적게 일하고 많이 벌자! 내년에도 잘 부탁해!"
23:59:45
모두들 한마음 한뜻으로 일제히 손뼉을 치며 외쳤다.
"10! 9! 8! 7! 6! 5! 4! 3! 2! 1!"
00:00:00
시계 어플의 숫자가 모두 0이 되는 순간, 환기를 위해 잠깐 열어둔 창밖으로 새어나가 근처에 있는 사람들,
지나가던 사람들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모두가 입을 모아 소리쳤다.
아파트나 다세대 주택이었으면 층간 소음으로 민원이나 신고가 들어왔겠지만, 17층엔 루나의 집, 1가구만 있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소음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고도 마음껏 홈파티를 즐길 수 있었으며, 다들 서로 새해 인사하느라 걱정할 틈도 없었다.
"해피 뉴 이어~!"
모두가 서로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고, 서로에게 잔을 부딪치며 새해 인사를 건넸다.
루나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2024년,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사고에, 수술에, 생명의 위협은 두 번이나 겪었다.
아팠고, 힘들었고, 견디기 어려운 순간도 많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할 순 없지만,
저승사자 시안을 보게 된 건 절대 빼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2024년의 마지막 날을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과 같이 보내고,
2025년의 새해를 함께 맞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모든 고통을 조금은 덜어주는 것 같다.
Goodbye, 2024! Welcome, 2025!'
루나는 조용히 화이트 와인 한 모금을 넘겼다.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아~”
“새해 복 많이 받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렇게 2024년 갑진년 푸른 용의 해가 지나가고, 2025년 을사년 푸른 뱀의 해가 다가왔다.
=내일에는 두 가지 자루가 있다.
불안의 자루와 믿음의 자루,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잡아야 한다.=
-헨리 워드 비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