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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세 번째 명부

by 제나랑


<2024년 11월 10일>

AM 01:40

병원을 벗어나 퇴원한 후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꿈을 꾸고 숙면에 들지 못하고 있다.

처방받아 온 약들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꾸준히 잘 챙겨 먹고 있지만, 저녁에 먹는 약들에 포함된 수면제를 먹어야 잠이 들곤 했고,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며 약을 먹으려고 하는데, 잠시 서늘한 기운이 감돌더니 시안이 나타났다.

"또…명부가 올라왔어…"

"또요?"

시안은 들고 있던 검은 봉투를 열어 안에 든 명부를 꺼냈다.

빨간 글귀에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갑술년 경오월 기묘일 출생. 채루나. 갑진년 을해월 임오일 사망. 질식사.]

"질식..이요? 뭐지? 집에서 가스가 새나? 카페에 무슨 일이 생기나?"

"그건 모르지. 아마 지금 그 약을 먹고 잠이 들면 예지몽을 꾸게 될 거다. 그 예지몽 속에 답이 있겠지."

"근데요…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못 자는 상황인데 지금 이 약을 먹지 않고 잠을 안 자면, 예지몽을 못 꾸면..어떻게 되는데요?"

"너에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하지만 예지몽을 꾸지 못하면 니가 어떻게 죽는지 모른 채로 피할 수 있는 기회도 없이 죽는 거지.


근데 이 질문은 진작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안 물어보길래 이미 알고 있는 줄 알고 생각보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아…아, 자꾸 팩폭하지 마요. 오던 잠도 달아나니까~"

AM 04:00

시안이 사라진 후, 약도 먹고 따뜻한 우유도 마셔보고 반신욕도 하고는 침대에 누웠고, 겨우 잠이 든 루나

역시나 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익숙한 듯, 다른 느낌이다.

[루나의 꿈속]

루나는 어딘가 낯설지 않은 창고 한가운데 서 있다.

주변은 어둡고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지만, 창고 구석에서 작은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처음 보는 낯선 상자였다.

다른 상자 표면에는 얼룩진 먼지가 얇게 내려앉은 것과는 달리, 그 상자는 마치 새 상자처럼 깨끗했다.

'이게 건물주가 말한 건가? 내 거…아닌 거 같은데…'

루나는 상자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상자를 열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창고 뒤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코끝을 찌르는 타는 냄새가 공기를 타고 퍼졌다.

(타닥, 타닥.)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였다.

루나는 급히 뒤돌아섰고, 창고 뒤편 구석에서 작은 불꽃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에 불과했던 것이 순식간에 주변의 박스와 쓰레기들을 집어삼키며 거대한 화염으로 변했고, 연기가 피어오르며 창고 안으로 빠르게 퍼졌다.

"뭐야, 이게 어떻게..."

그녀는 황급히 소매로 입을 막았다.

연기의 자극적인 냄새가 코와 목구멍을 파고들어 왔다.

(쾅!!!)

그 순간, 창고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 쪽으로 달려가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누구 있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창고 문은 밖에서 잠긴 상태였고, 화염은 이미 창고의 반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지도 않았지만, 너무 뜨거워 고통스러웠고, 숨은 더 가빠졌다.

연기가 창고를 가득 채우며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온 힘을 다해 문을 두드렸다.

"도와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그러나 문밖은 적막만이 흘렀다.

불길이 점점 가까워졌고, 연기가 시야를 완전히 가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벗어나려 했지만,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은 더 이상 쉬어지지 않았다.

불길에 휩싸인 공간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녀의 머릿속으로 갑자기 부모님이 떠올랐다.

"아니야...이건 꿈일 거야. 꿈이야!"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창고 안에서 의식을 잃을 것만 같던 순간, 갑자기 번쩍 눈이 떠졌다.

그녀의 방, 침대 위였고, 방 안은 어둡고 고요했으며, 그녀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자 창고도 불길도 없었지만, 꿈속의 뜨거운 열기와 연기의 냄새는 여전히 그녀의 폐 속에 남아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고통스러웠다.

이번 예지몽도 너무도 생생하고 현실적이었다.

마치 진짜로 창고에서 일어날 일을 미리 겪은 것처럼.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이 꿈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꿈속에서 느낀 공포와 함께,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은 운명의 그림자가 또다시 그녀에게 더욱 뚜렷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11년 전, 루나의 부모님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그녀가 조용히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결혼 이후,


둘이서 오붓하게 여행 한 번 못 갔던 터라 국내 1박 2일 여행으로라도 겸사해서 다녀오자고 했고,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동의를 구했다.

"왜 진작 두 분이서 여행을 안 갔어~ 1박이 아니라, 더 있다 와도 돼~"

"이번에는 우리끼리 좀 쉬고 올게. 수능 끝나면 같이 가자~ 그래도 공부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부모님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녀가 본 부모님의 마지막 미소.

그 뒤로는 잿더미로 변한 펜션과 뼈대만 남은 폐허를 바라보며 울부짖던 어린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길은 맹렬히 타올랐고, 그녀의 부모님은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엄마! 아빠!"

루나는 현실과 악몽 사이에서 소리쳤다.

눈물과 연기가 섞이며 목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날, 루나의 부모님은 자신들이 묵던 펜션에서 갇힌 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방화로 밝혀진 사건이었지만, 가해자는 뻔뻔스럽게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죗값을 제대로 치르기는커녕,

감형을 위해 눈물, 콧물 다 짜내며 감성팔이와 유가족은 보지도 못한 반성문 몇 장으로 고작 7년의 형을 살고 풀려났고,


그 일이 루나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리고 지금, 그날의 악몽이 그녀를 다시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느새 나타난 시안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그때, 그의 눈에만 보이는 형상이 그녀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데, 어딘가 쓸쓸하고 애잔한 느낌이다.

"무슨 일을 겪었던 거냐…"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던 루나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깊게 심호흡을 한다.

그녀는 떠올리는 것조차 힘든 기억이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루나의 부모님은 무고하게 생을 마감했고, 11년 전의 사건은 루나의 삶에 깊은 상처로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시안은 그녀의 주변에 나타났던 형상을 다시 보았고, 그 형상들은 잠시 머물다가 이윽고 사라졌으며,


그는 그 형상이 11년 전에 화재 사고로 사망한 그녀의 부모님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정적을 깬 건 그녀의 핸드폰 벨 소리였다.

>>군자역 카페 전 건물주

"어~ 루나 씨, 나 기억하지? 자기, 그 군자역에서 카페 할 때 그 건물, 건물주~ 뒤에 창고 하나 있었잖아~

루나 씨 다음 세입자는 그 창고를 안 써서 냅뒀는데, 아니~ 그다음 세입자가 쓴다 그래서 확인하려고 열어봤더니 자기 물건이 하나 남아 있드라고~


와서 세입자 공사 전에는 비워줘야 하니까~ 빨리 와서 가져가~ 늦어도 14일 전까지는 가져가야 된다~? 알았지?"

그녀가 대답도 하기 전에 자기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건물주의 전화에 한숨을 내쉬는 루나

"ㅉㅉ 건물주면 뭐 하나? 사람에 대한 예의는 밥 말아 먹은 인간인데"

"그래도 악덕..까지는 아니었어요~ 월세만 말리면 별로 터치 안 하셔서…"

"그래서, 월세 밀린 적은 없고?"

"있..죠…선불이라 오픈 첫 달에는 내고 들어가니까 모아둔 돈으로 해결하고, 사실 6개월까지도 제 돈으로 냈죠.


근데 저도 모아둔 돈이 그렇게 많지가 않았어서 그다음 달부터 밀리니까 아주 난~리 난~리.

처음 1,2주 밀렸을 땐 입금할 때까지 카페 와서 한마디씩 하고 가고, 공짜 커피 내놓으라 그러다가 한 달 밀리니까 손님 있는 데도 막말..조금…하셨죠…


근데 또 입금하면 김밥도 사다 주시고 그랬어요~"

"아, 그랬어요~? 되~게 착한 건물주 납시셨네요~? 그래서 그다음은?"

"뭐 장사가 안될 때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면서 하나하나 지적질 하고 가더니,


매출이 오르면서는 그건 또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 가지고 그동안 사정 봐주다가 월세 못 올렸으니까 매년 5%씩 올린다 그러고,

자기 덕분에 장사가 잘되는 카페라면서 자기가 다 쏠 것처럼 지인들 매주 데리고 와서 계 모임을 하는데 계산을 안 하더라구요.


그러다 제가 한남동에 집을 사면서 그 주변으로 카페 자리 알아보다가 연남동 골목을 지나는데 너무 예쁜 꽃집이 있었어요.


근데 임대 문의라고 써 있고 폐업 준비 중이시더라구요. 그래서 바로 계약하고 군자동 카페 매장은 뺐죠. 더러워서…"

"그래도 악덕은 아니다?"

시안의 말에 헛기침하는 그녀를 보고 미세하게 미소를 짓는다.

너무 찰나의 미소라서 그녀는 보지도 못했고, 시안과의 대화로 어느새 부모님 사고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다.

"근데..살다보니까 더한 인간들도 많더라구요…그 정도는 침 한 번 뱉고 지나갈 수 있는 정도랄까?"

"인간들은 우리를 악마라고 하더군. 죽을 때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저승으로 끌고 가는 것들이라면서…

너희 인간들은 평생 모를 거다, 우리는 죽을 때가 된 망자,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오갈 데 없어진 영혼들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게 임무이고,


그게 저승법이며, 수백 년간 그 저승법을 지키며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일 뿐.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들은 저승의 문을 지나 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한 재판을 받는 망자만이 만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하지만 진짜 악마들보다 더 악마 같은 건 부와 명예에 대한 욕심,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욕심,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탐욕, 피해의식이나 자격지심,


자기 연민 등등 이런 것들에게 지배당하며 인간이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않고 넘어버리는 한심하고 멍청한 인간들이다…"

"그런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제 운명을 지키는 게 먼저겠네요…"

"순서가 틀렸지. 니가 그런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너의 운명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거다."

"아…그럼,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는 건데요?"

"이봐, 나 저승에서 온 저승사자라고. 명부가 올라온 망자도 단번에 찾아가는데 좋은 인간, 나쁜 인간도 구분 못할 거 같나?


그리고 그런 건 내가 아니어도 그 사람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라고.


눈을 보면 그 인간의 진심이 보인다. 이 인간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


근데 멍청한 인간들은 착각하지, 자신이 다른 인간을 정말로 감쪽같이 속이고 있다고. 언어라는 건 입으로만 뱉는 게 다가 아니다.


눈으로도 말하고, 표정으로도 말하고, 심지어는 손으로도 말하는 거다. 그걸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들만 모르더라. 한심한 인간들…"

=말하는 사람은 씨를 뿌리고 침묵하는 사람은 거두어들인다=

=침묵하는 사람보다 언어에 능숙한 사람은 없다=

-샘 레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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