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고백
욱은 시무룩해져서는 고개까지 떨구고 가만히 생각 하다가 결심한 듯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해주를 불러 세운다.
"대표님, 아니..해주씨"
해주는 욱 쪽으로 몸을 돌려 선다.
"왜"
"근데요...그동안 아무리 사랑 없는 연애를 했어도...그래도 한 번쯤은 기억을 지워서라도 사랑만 하고 싶었던 적...없어요? 그럼 사람...없었어요?"
"...있었지...근데...그것도 난 그때 뿐이야...헤어질 때는 그 사람을 위해서 헤어지는 것 같아서 슬프고 괴로운데...
내가 악마가 된 이유...이 역을 생각하면 금방 까먹어지고, 더이상 안 슬프고 괴롭지도 않던데 뭐..."
"그래서 이 역은 왜 다시 만나려고 하는 건데요? 다른 연애처럼 그냥 이 역도 까먹으면 안돼요?"
"까먹어지는 거면 벌써 까먹었지...물어볼 것도 있고..."
"물어볼게 뭐길래 500년 넘게 기다려요?"
"...물어볼 거...왜 그랬냐고...왜 나한테 그랬냐고..."
"네?"
[과거 1506년]
중종을 모시는 이 내관이 채경의 처소에 서신을 전하러 왔다.
"마마, 이 내관이옵니다."
"들라하라."
이 내관이 처소 안으로 들어오고 서신을 채경에게 건넨다.
서신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채경은 표정이 굳어간다.
중전 보시오
반정 세력이 중전을 폐위 시키려하고 있소
이후에도 신씨 집안까지 처리하려 할 것이오
그 전에 궁을 떠나 사가로 가는 것이 어떻소
궁은 내가 알아서 할터이니 내 걱정은 말고
하루라도 빨리 궁을 떠나시오
기별하면 채비 해놓겠소
채경도 붓을 들어 답신을 써내려간다.
채경이 답신을 다 쓸 때까지 기다리는 이 내관
채경이 붓을 내려놓고 답신을 이 내관에게 건넨다.
"이 내관, 이 내관도 전하 말에 동의 하시오?"
"마마, 저의 뜻이 무슨 소용이 있겠사옵니까. 전하의 뜻도 저의 뜻이고, 마마의 뜻도 저의 뜻이 옵니다."
"어쩌겠소. 지아비가 떠나라고 하면 떠나야지요. 서신..잘 전해 주시오. 그리고, 마지막 인사는 하게 해달라고, 부탁드린다고도 좀..꼭 전해 주세오."
"네, 마마. 강령 하시옵소서."
이 내관은 곧장 중종의 처소로 향했고 이 역에게 답신을 건넨다.
하지만 이 역은 그 답신을 바로 읽지 않고 자개장 속에 넣어둔다.
이 내관은 이 역에게 답신을 읽어보라 당부하지만 듣지 않는다.
채경이 궁을 떠나는 날에도 마지막 인사를 하게 해달라는 부탁은 접어두고 반정세력이 신씨 집안을 처리하는 일은 막아보려 했지만 힘이 부족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반정세력이 힘이 쎄서 그랬던지 이 역이 그들을 막지 못했고, 결국 신씨 집안을 풍비박산 냈다.
이후 이 역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궁을 들였고 마지막 인사는 커녕, 변장해서라도 저잣거리를 드나들었던 이 역이지만 채경의 사가를 알고도
생전에 한 번도 찾지 않았다.
70세에 마지막 숨을 내뱉던 순간까지도 이 역을 기다리던 채경은 그렇게 홀로 생을 마감 하였다.
[현재 2023년]
해주는 다시 꺼낸 기억에 가슴이 미어져 눈물을 흘린다.
"물어봐야지...평생을 그리워만 하다가 혼자 죽어 갔는데...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저 멀리서 지켜보던 그 얼굴, 그 눈빛이 안 잊혀지는데...
왜 그런 얼굴이었냐고...왜 그런 눈빛으로 돌아섰냐고...서신과는 다른 그 모습은 왜 그런거냐고...
물어봐야 편히 눈 감을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소멸 되더라도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욱은 해주는 뒤에서 살며시 양팔 가득 안아준다.
"그냥 사정이 있었겠거니 생각하고 잊어요...내가 잊게 해줄게요...많이 부족한 인간인 거 알지만...노력 할게요..."
해주는 놀라 욱에게서 떨어지고는 돌아본다.
"인간인 네가 악마한테 뭘 해줄 수 있을 거 같아? 어떻게 잊게 해줄 건데? 노력을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두려워서 그러는 거죠...? 사랑하게 될까봐...능력 잃고 소멸 되고 나면 내가 버려졌다고 생각 할까봐...
그런 거면 걱정 마세요...내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했는지 알아요? 해주씨 구해달라고 '신'에게 어떤 심정으로 빌었는지...
한낱 인간인 제가 거기까지 해주씨를 데리러 가는 길이 쉬웠을 거 같아요?"
"넌 무슨 고백을 그렇게 훅 날려...됐어...그만해"
해주는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한다.
집에 도착해 정 실장까지 퇴근 시키고 나서야 혼자가 되었고 겨우 진정됐던 눈물이 다시 차올라 주저 앉아 오열했다.
(인간 주제에...뭐 그렇게 앞뒤가 없어...팩폭이나 하고...
그렇다..장 욱 말이 맞다...'신'에게 소환 되었을 때,
그곳에 장 욱이 있었을 때, 짐작은 했다...
그래서 '신'도 경고를 하신 거 겠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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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 선택의 기로
한참을 울다가 일어나려고 하는데 너무 오래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지 다리가 저려와 찌릿한 고통을 최소화하며 천천히 일어서는 해주
반신욕을 하기 위해 욕조에 물을 받고는 입욕제를 풀어놓는다.
욕조에 들어가 몸을 기대자 창 너머로 야경이 한 눈에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깐 잠이 들어 꿈을 꾼다.
[해주의 꿈 속]
평소 해주는 꿈을 꾸면 채경의 모습으로 꾸곤 했는데 이번에는 해주의 모슴을 하고 있고 차원의 경계선에 와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손과 발부터 서서히 투명해진다.
잠깐의 어지러움증과 두통이 와 눈을 감았고 눈을 뜨자 눈 앞에는 '신'의 공간에, '신'과 그의 앞에서 빌고 있는 욱이 보인다.
"정령 인간인 그대가 악마를 구하고자 한다는 말이냐..."
"네. 그렇습니다. 저승사자가 해주씨를 가둘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악마로서의 임무에 사소한 감정을 배제시키지 않고 소홀히 하여
'신'을 괴롭혔다는 이유라는데 한낱 인간이라 악마로서의 임무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적어도 간절한 영혼의 기도를 들어주고 정당한 대가를 받고,
부당하게 계약 위반을 하는 인간들에겐 응징을 하고, 선한 영혼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선행을 베푸는 것이 정말 벌해야 할 정도로 잘못된 일인가요?
인간 세상의 법도에는 무고죄가 있는 것처럼 되려 무고한 해주씨를 가둔 저승사자를 벌하여 주세요."
해주는 욱의 말에 동요하며 저승사자에게 복수할 생각에 이를 간다.
(이름도 없는 게 감히 악마를 건들여? 뒤졌다, 저승사자...)
"다시 묻겠다. 정령 악마가 무고하다고 생각하느냐...악마는 오로지 계약에 의해서 움직일 수 있다.
허나, 계약을 맺지도 않은 인간에게 해를 가한 것은 정당하다고 보느냐...또한, 선한 영혼이라는 이유로 다른 인간들과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저승을 어지럽게 한 것이 정령 타당하다고 보느냐..."
(아니, 그건...그래서 합당한 대가 치뤘으면 끝난거지!)
"그건...해주씨의 능력을 제한하는 걸로 대가를 치른 거 아닌가요?"
욱은 반박에 해주는 욱에게 시선을 옮겨 한참을 바라본다.
(처음이었다...그동안 연애를 하면서 대부분은 사랑이라는 감정없이 해왔고,
창혁이처럼 기억에 남는 연애도 있었지만 그 마저도 사랑의 감정은 없었기에
'신'이 능력이 제한되는 형벌에 대해 경고한 적은 있었으나 실제로 제한 된 적은 없었다...
근데...시작도 하지 전에 인간이 이렇게 '신'에게 소환 되어 대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인간들이 봤다는 신은 '신'의 환영일 뿐이다...
이 인간은 뭘까...어떤 존재이길래 이렇게 까지 하는 걸까...
이 역의 환생이라는 것이 특별함이라면 왜 이 인간이어야 했을까...
자꾸 이 인간에게서 이 역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이 인간이 이 역의 환생이기 때문인 걸까...
아니면 단지 전생에서 이 역이 자결하던 것도 살리고, 현생에서 이 인간이 자살하려던 것도 살렸으니...
그냥 데자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걸까...
그래서 이 인간은 나에게 특별하다...인정하기 싫어도 받아들여야겠다...
어쩌면 이 인간이 나에게 마지막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
겉으론 이 인간을 수호하려고 곁에 있기로 했지만 이 인간을 위로 하면서 나 자신 또한 위로가 되고 있었다...
그동안 누구도 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정 실장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나의 진심을, 장 욱은 이해했고 받아줬다...
그거면 되지 않을까? 선택을 하는 데 필요한 명분...혹은 이유...갑자기 느껴진 감정들은 아니다...몰랐을 뿐...
근데 장 욱의 기도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10분을 살아도, 10년을 살아도...헤어짐이 아플 걸 알아도...그저 행복할 수 있겠다...)
갑자기 '신'의 공간이 빠르게 물로 차오르더니 '신'은 사라진다.
욱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허우적 대다가 해주를 발견하고 해주를 향해 손을 뻗자 해주는 욱을 구하려 욱에게 가려고 해보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움직여지지 않다가 숨을 더이상 참지 못해 숨을 쉬러 수면 위로 올라가지 꿈에서 깬다.
[해주의 욕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헝클어진 채 얼굴에 붙은 머리를 뒤로 넘긴다.
"꿈에 이 역이 아니라 장 욱이 나온 건 처음인데...후..."
시간이 지나 진정이 되면 숨을 고르게 쉬게 되는데 해주는 점점 숨이 잘 안 쉬어지고 고통스러워한다.
욕조에서 빠져나와 수잡장에 있는 약통에서 약을 꺼낸다.
급히 수돗물을 손에 받아다가 약과 함께 넘긴다.
서서히 진정이 되는지 비로소 숨이 천천히 쉬어지며 맥박 또한, 정상으로 돌아오지만 왼쪽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진다.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욕실을 나온 해주
(가끔씩 약몽을 꾸고나면 이러는데...최근에 악몽도 줄어들고 이런 증상도 없길래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악마의 능력으로는 치유가 안 되는 게 있다는 게...이해가 안 되는데...이게 치유가 안 되면 아무리 상처가 치유가 되고 죽지 않아도...
무슨 소용이지? 과연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행복할 수 있을까?...)
해주가 드레스룸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신'에게 소환 된다.
"결정할 준비가 되었느냐..."
"아니, 몇 시간 됐다고 벌써 결정을 하라고 하십니까?"
"너에게 충분했다...얼마나 기한을 준다고 한 적도 없다..."
"하..."
"결정하라..."
"...그 전에...제가 장 욱과의 인간 인생을 선택하면 악마의 자격은 바로 사라지나요? 아니면 소멸되는 44살에 영혼과 함께 소멸 되나요?"
"그대가 장 욱과의 삶을 선택하는 순간 악마로써의 계약은 파기된다. 더이상 임무를 수행할 수도 없거니와 능령 똑한 전부 상실된다.
영혼만이 유예기간을 갖는 것이니라..."
"그럼 이 역과 다시 재회할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는 건가요?"
"그대가 나와 계약을 했던 조건이 그것이니..."
"...결정..하겠습니다..."
"......"
'신'은 손짓하여 악마의 계약서를 해주 앞에 꺼내 띄우고 그 옆에 악마의 계약 파기 확인서도 함께 꺼낸다.
"두 장에 사인을 하면 이제부터 너는 인간으로 남은 10년을 살게 될 것이고, 사인을 하지 않으면 장 욱과는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
이를 어길 시 장 욱은 즉시 소멸이다..."
해주는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계약서를 보고를 반복하다가 결심한 끝에 고개를 들어 계약서를 읽어내려가고 서명란에 시선을 두자
그녀의 사인이 획을 따라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