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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미래 Oct 29. 2024

평일 저녁 시간에 강의라뇨?

이제 가능한 일이 되었습니다.

애 낳고 처음으로 우리 동네가 아닌 타 지역 도서관(걸어서 30분 거리) 평일 저녁 강의를 맘대로 신청해 봤다. 

그것도 1회성이 아닌 4주 동안 4번의 평일 저녁 7시 반부터 9시 강의.

그동안 평일 오전 근무가 없는 날에는 간간이 뭘 배우러 다닌 적도 있었다. 도서관 강의도 다녀보고 운동을 하러 다닌 적도 있었다. 가뭄에 콩 나듯 큰맘 먹고 주말에 한 번씩 개인적인 모임을 나간 적도 있었고 애만 데리고 1박 2일 친구들 모임도 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평일 저녁 강의나 모임은 엄두도 못 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아마도 내가 불안해서 그랬을 것이다.


식구들 저녁밥도 괜히 신경 쓰이고 먹고 치우고 애 씻기고 공부 봐주고 뒤치닥 거리 하다 보면 평일 저녁은 한 거 없이 후다닥 지나가는 게 일상이다. 그나마 아이의 치어리딩 수업이 주 2회 저녁 시간이다. 한 시간 반씩 여유가 있어서 그 시간에 나도 운동을 하거나 산책 겸 도서관을 종종 다녀올 때도 있다. 물론 운동 가기 전후에 후폭풍도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 내가 평일 강의를 그 누구의 허락(?)도 없이 맘대로 신청하다니 도대체 뭘 믿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강의 첫날이다. 하필 가을비가 하루종일 주룩주룩 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계속 창밖을 바라봤지만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별 도움 안 되는 남편까지 지방출장이라 집에 없다. 이럴 때는 조금 아쉽다. 불이라도 켜놓고 집에 있으면 조금은 안심이 될 텐데.

그 시간, 집에 잠깐이라도 혼자 있을 애가 걱정돼서 불안감이 급증했다.

갈까? 말까? 수천번 고민하다가 아이한테 간다고 얘기했다. 안 가면 결국 나만 후회할 것 같았다.


올해 4학년 된 아이는 그동안 생각보다 많이 컸다. 특히 올해 많이 큰 느낌이 든다. 몸도 마음도 강해진 아이를 믿었다. 얼마 전 엄마 없이 1박 2일 일정으로 치어리딩 공연을 2번이나 다녀온 경력이 있으니 믿어도 되겠지?

아이는 7시 넘어서 집에서 나가야 하고 나는 7시 전에 나가야 한다. 적어도 30분 이상은 걸어가야 하는데 비까지 오니 더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아이한테 양해를 구하고 먼저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눈도 노화가 왔는지 밤눈이 어둡고 우리 동네가 아니라 살짝 길이 헷갈렸다. 부리나케 빗 속을 뚫고 질주했으나 2분 지각이었다.

다소 차분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역시 글쓰기 수업은 아주 조용~한 수업이다ㅎㅎ


도서관 강의는 임선경 작가님과 함께하는  '나이 먹고 체하면 글쓰기가 약'이라는 주제로 4주 동안 매주 다른 테마를 가지고 수업이 이루어진다.

첫날 소주제는 '첫 문장의 두려움을 없애자'라는 내용으로 강의가 진행되었다. 수업 막바지에는 각자만의 의미 있는 숫자 하나를 정해서 아주 짧은 시간에 글 하나를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글 쓰고 발표를 하고 보니 보통 본인들의 나이, 옷 사이즈(55,66 사이즈), 정년 나이, 염색 주기 등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시고 계셨다.

나는 무슨 숫자로 글을 써야 할까? 5분 남짓한 시간에 재빠르게 생각해서 써야 하는데....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이 엄마로 살고 있는 나라는 사람은 딸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내 나이가 아니라  딸의 나이 '11'로 정했다.

(사실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 나이, 옷 사이즈, 염색 주기를 밝히긴 꽤나 부끄러웠을 수도ㅎㅎ)

내가 이 강의에 참석할 수 있었던 건 훌쩍 커버린 네 덕분이니까.

11살 딸을 키우는 엄마입니다.
아이를 낳은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나 지났습니다.
4kg이 다되어 태어난 아이가 벌써 40kg가 되었습니다.
가끔씩 제 눈앞에 있는 저 아이가 진짜 그 아이가 맞는지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 동안 11살 딸을 키우느라 밤 시간에 혼자 멀리 나가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항상 거의 잘 시간까지 함께하는 날이 많았고
화, 목 운동가는 날에는 지금도 항상 밤 9시 5분에 픽업을 가는 애데렐라 엄마였죠.
저는 이번에 큰 용기를 냈어요.
큰맘 먹고 밤 시간에 매주 화요일 강의를 신청했어요.
애 낳고 이 시간에 멀리까지 나온 건 거의 처음이에요.
그것도 4주 연속이라뇨?..

혹시 제가 부럽다고요? 지금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인가요?
11살 딸이라서 가능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당신도 그런 날이 올 거예요.

이 시간에 여기까지 나온 만큼 저도 많이 배우고 성장하는 시간을 보내도록 해볼게요.


글을 다 쓴 후 발표시간 다가왔다. 후덜덜한 마음으로 용기 내서 살짝 손을 들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는 건 여전히 떨렸다. 짧은 글이었지만 끝까지 읽어내느라 애먹었다.

그래도 글도 직접 손으로 써보고 발표까지 해보니 뿌듯했다.

게다가 발표한 사람들이 다 같이 힘차게 박수를 쳐주는 모습에 감동이었다. 너무나도 훈훈했고 아름다웠다.

(역시 글 쓰는 사람들은 그 마음을 잘 안다. 너무나도 착한 사람들만 모인 자리인 듯^^)


화요일 밤 9시 5분, 아이 치어리딩 단 실 앞에 있어야 할 시간에 도서관에서 나왔다.

가을비 내리는 운치 있는 경의선 라인 밤길을 운동화 흠뻑 적셔가며 사진도 찍었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기다리며 물벼락도 맞았다. 빗길을 뚫고 30분 동안 전력질주에서 집에 오니 9시 31분.

그 사이 걱정과 달리 운동 끝나고 집에 무사히 도착해서 샤워까지 다 마치고 드라이기 세팅하고 옷 입을 준비하는 딸을 보니 그제야 긴장감이 풀렸다.

휴...

언제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거니? 엄마 없이도 척척 해내는 걸 보니 기특하기도 하면서 솔직히 서운하기도 했다.

역시 나는 이제 밥만 주면 되는 사람인가?

(그래도 머리까지는 말려줘야지, 머리는 최대한 말리고 빨리 자야 하니까)



정확히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날과 똑같은 느낌이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는다.

여전히 오늘도 남편은 출장을 가서 집에 없고 아이와 단둘이다.

이따가 나는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7시 전에 집을 나설 것이다.

오늘도 너 스스로 잘해줄 거라 믿고 엄마 먼저 출발할 예정이다.

그래, 남은 3주도 빠질 일은 없겠다.

몇 달간 글테기가 와서 너무나도 느슨해진 글쓰기, 나이 먹고 체기가 생겼는지 소화가 제대로 안 돼서 가슴이 답답했는데 잘 되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약처방 한 번 받아보자.

(그것도 무료라니 너무 감사합니다)



덧붙임) 어제오늘 임선경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았다. 책을 직접 읽어보니 왜 강의 제목이 '나이 먹고 체하면 글쓰기가 약' 인지 이해가 더 잘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나조자도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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