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가(思父歌)

by 이상역

고향에 갈 때마다 어머니를 만나면 가족사에 대한 이런저런 것을 여쭈어본다. 한 가족의 가족사는 직접 겪어본 사람의 생각이 정확해서다.


어머니에게 만날 때마다 아버지의 성격이나 집이나 논과 밭을 어떻게 마련하고, 가족들이 어디서 태어나고 성장했는지 그리고 살아오면서 맺혔던 한이나 설움 등을 물어본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도 점점 줄어간다. 어머니가 언제까지 살아계실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에게 옛이야기를 듣노라면 아련한 옛날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게 된다.


어머니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으면 나의 유년 시절이나 태어나기 이전의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야기는 때로는 자장가로 들려올 때도 있고 아득한 전설처럼 잔잔하게 들려와 잠에 빠지게도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1933년에 태어나고, 두 분 모두 18살이던 1950년 12월 20일에 결혼하셨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고 6.25 전쟁이 일어난 해에 두 분은 결혼을 한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얼굴조차 만나지도 못한 채 이월 화양마을(오양산)에 살던 이모님의 소개로 광혜원에서 육십 리를 가마 타고 잣고개를 넘어 멱수로 시집을 오셨다.


어머니의 친정은 진천 광혜원 회죽리다. 회죽리는 무수저수지 밑에 있는 마을이다. 회죽리는 개방적이고 넓은 뜰을 접한 곳이어서 살기 좋은 곳이다. 시집오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아버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와보셨으면 시집을 오지 않았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광혜원에서 시집을 오고 보니 두메산골 강촌에 먹거리도 변변치 않고, 살림살이도 넉넉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 성격은 그리 살가운 분이 아니다. 어머니가 시집오고 얼마 후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어머니 혼자 아이 육아와 살림살이를 도맡아야 했다.


아버지는 무인의 골격을 가진 분으로 덩치도 있고 키도 크셨다. 키가 커서 그런지 가끔 싱거운 말씀도 하시고 행동은 느리고 약간 수동적이다. 농사는 계획을 세워서 추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이웃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거나 어머니에게 온갖 것을 상의해 가며 지으셨다.


아버지의 유일한 장점은 한번 일을 손에 대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다. 밭을 매거나 쟁기질을 하면 그날 일을 끝내야지 하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지 않았다면 남산골 선비처럼 글이나 읽으며 세월을 보내는 딸깍발이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느긋한 성격과 행동으로 인해 어머니는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는 4형제의 막내셨다. 집안에서 막내는 자기주장이 강한 편이다.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하던 끝까지 옹고집을 부리는 것을 말한다.


아버지는 동네에 함께 사는 형들(둘째 숙부, 셋째 숙부)을 만나면 얼굴을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누려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형들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영향 때문인지 아버지는 집에서 큰형이 하는 행동과 일은 마음에 들지 않아 했다. 그에 따라 큰형은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반대로 아버지는 큰아들을 만만하게 여겼던 것 같다.


아버지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람에 대한 믿음과 관련한 행동이다. 아버지가 믿는 사람은 경운기에 짐을 싣고 갈 때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버지가 믿지 못하는 사람이 경운기를 운전하면 경운기 뒤에 바짝 붙어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온다. 그런데 아버지가 믿는 사람이 경운기를 운전하면 신경을 쓰지 않고 먼저 내려가신다.


그로 인해 큰형이 경운기를 운전하면 운전하는 사람보다 아버지의 잔소리와 걱정이 운전할 수가 없었다. 결국 큰형은 아버지가 농사를 짓는 동안 경운기 운전은 물론 다른 농기계에 손도 대지 못했다.


지금은 아버지가 가족들 곁을 지킬 수 없다. 고향에서 부모님과 겪은 세월은 무심한 바람처럼 지나갔다. 아버지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셨다.


가족이 밭에 나가 김을 매다 자식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버럭 내셨다. 아버지가 화를 낼 때마다 했던 말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상대가 자식이든 다른 사람이던 큰 소리로 “제미! 일하려면 똑바로 하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호미를 가로채서 풀을 뽑거나 김을 이렇게 매라며 시범을 보이셨다. 아버지 앞에서는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대충대충 적당히 하는 행동을 보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셨다.


그러다 일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버지가 쟁기질할 때 소에게 소리치던 말을 자주 들어야 했다. 아버지는 쟁기질하면서 ‘숭안’인지 ‘쑹안’이라는 말을 소에게 자주 했다.


‘숭안’이란 말의 의미가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소로 논을 쟁기질할 때 소가 풀을 뜯어먹거나 딴짓을 피우면 어김없이 “숭안”이나 “제미”라고 소리치며 소고삐를 휘둘러 소의 등짝을 내리치셨다.


아버지는 밭에서 자식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하려면 똑바로 하라.”거나 “그런 식으로 일을 할 거면 집에나 가라.”라는 모진 말을 하면서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혼내셨다.


그렇게 일을 할 때는 당차게 몰아치다가 장날에 장을 보러 가면 제시간에 귀가하지 않고 늦게 귀가하는 날이 많았다. 아버지는 진천 읍내에 나가서 친구를 만나고 마을 이장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많았다.


장날에 집에 귀가할 때는 시내버스나 천안 가는 버스를 타지 않고 청주 가는 버스를 타고 오셨다. 천안 가는 버스를 타면 연평에서 내려 오리를 걸어오면 되는데 굳이 청주 가는 버스를 타고 사석에서 내려 십여 리를 걸어서 온 이유를 모르겠다.


아버지는 장날이면 어김없이 청주 가는 버스를 타고 사석에서 내려서 걸어오셨다. 사석에서 멱수까지 십여 리에는 주막집이 네 곳이나 있었다. 주막집은 사석과 새말과 연평과 아랫상거리에 네 곳에 있었는데 장날마다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지면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어머니와 아랫상거리부터 주막집에 들러 술을 마시는 사람 중에 아버지가 있는지 찾아가며 훑으며 내려갔다. 그러면 아버지는 네 곳 중 한 곳에서 술을 마시거나 다른 사람과 말싸움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면 술에 취한 아버지를 부축해서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모시고 올라왔다.


그렇게 술에 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올라올 때마다 아버지가 밉고 싫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마중을 갈 때마다 나는 커서 술은 절대로 마시지 않겠노라고 수없이 되뇌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식인지라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비슷한 과정을 겪어가며 살아가는 신세다.


삶에서 제일 아쉬운 점은 아버지와 살아생전에 깊은 대화나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마음은 너그러웠지만 자상한 분은 아니셨고 자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다정다감한 분도 아니셨다.


아버지가 삶에서 어떤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고 사셨는지 기록할 만한 것은 별로 없다. 그저 내가 자라면서 보고 느낀 것과 어머니의 기억을 빌려 생각해 볼 뿐이다.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어머니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분이다. 지금까지 어머니는 남편과 여덟 남매의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해결하면서 출가까지 시켰다.


어머니는 가족을 위한 음식이나 군것질을 마련하는데 조금도 어려워하거나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날이 궂은날에 자식이 빈대떡이 먹고 싶다고 하면 빈대떡을 부쳐주시고 생일에는 생일 떡과 먹을거리를 준비해서 가족이 함께 맛보고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지금이야 자식들이 성인으로 자라 모두 출가해서 먹을거리 걱정은 사라졌지만, 어머니 곁에 앉아 지난 시절의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의 사연을 듣노라면 눈물을 뿌리시며 회상에 젖어들곤 한다.


어머니의 눈물과 한숨 속에 어느덧 부모님이 살아오신 지난날은 영광은 먼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간다. 그리고 내가 살아온 날과 시간도 어머니의 한숨과 더불어 데면데면 석양을 넘어가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한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런 흐름 속에 어머니의 기억과 나의 희미한 생각을 더듬어 아버지에 대한 그리운 옛 노래를 이곳에 새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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