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교향곡

by 이상역

오월은 가정의 달이다. 오월에는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이 한꺼번에 들어있다. 일 년 중 오월에만 가정을 위하고 다른 달에는 가정을 위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신록의 계절 오월은 가정마다 누군가를 위한 행사로 바빠진다. 올해는 토요일이 어린이날이라 대체 휴무로 내주 월요일도 공휴일로 지정되어 토요일부터 삼일 간이 연휴다


연휴가 끝나는 이튿날이 어버이날이라 미리 아내와 연휴 기간에 고향과 충주에 가서 어머니와 장인을 찾아뵙자고 했다. 그러나 교통 체증이 심해 아내가 서울에서 내려올 수 없어 나 홀로 어머니를 찾아갔다.


지난주에는 걷기를 하다 종아리 근육을 다쳐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했다. 고향 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자는데 한밤중에 비가 오는 소리가 잠결에 들려왔다.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히자 가랑비가 소리 없이 부슬부슬 내린다. 그동안 종아리 근육 파열로 걷기를 조금씩 해왔다. 모처럼 고향 집에서 우산을 펴 들고 집을 나서본다.


가랑비가 내리는 길에 들어서자 마을 주변의 산자락에 안개가 진득하게 깔려 마중을 나왔다. 가랑비와 안개가 이끄는 대로 고향 마을을 벗어나 아랫마을로 향했다.


가랑비가 내리는 주변에는 안개가 연기처럼 꾸역꾸역 솟아오른다. 산자락 계곡의 풋풋한 잎사귀는 비에 젖어 청량하고 맑기만 하다. 가랑비가 신록에 스며들자 마치 청소를 한 것처럼 깨끗하게 다가온다.


어제 보았던 것도 밝은 모습으로 변했고 녹색과 연두색은 더 옅은 색으로 채색되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자 온 세상이 달라지고 신선해졌다. 도시와 시골의 차이는 녹색과 연두색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다.


신록이 우거지고 안개가 인도하는 길을 따라 내려가자 아랫동네 삼거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친구가 하우스에서 일을 하고 있을지 몰라 하우스 입구를 바라보자 트럭이 한대 놓여 있다.


하우스로 걸어가서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친구가 부인과 함께 수박 솎기를 하고 있다. 수박 솎기는 줄기에서 수박 하나만 남겨두고 다른 것은 모두 솎아내는 작업이다.


친구가 수박 솎기는 밑에서 서너 번째 수박 하나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해 준다. 하우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얼마 후 수박 솎기 비닐하우스 한 동의 작업이 끝나서 하우스 밖으로 나왔다. 하우스 밖에 나와 의자에 앉아 친구와 커피 한잔을 마셔가며 세상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친구는 초중고를 같이 다녀 공유하는 추억이 많다. 초등 시절 현충사로 수학여행을 가다 천안쯤에서 버스에서 내려 선생님이 친구들에게 고속도로를 가리키며 이것이 경부고속도로라고 설명하시던 모습이 떠올렸다.


그리고 현충사에 가서 이순신 장군의 칼과 거북선 등을 구경하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이어서 삽교천에 가서 바다를 구경하고 다른 친구들에게 고속도로와 바다를 구경했노라고 자랑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고향은 고속도로와 바다를 만날 수 없는 곳이다. 그 시절엔 천안이나 아산은 초등학생이 버스를 타고 갈 수 없던 아주 먼 곳이었다.


또 다른 기억은 고향의 읍사무소에 다니던 시절 친구와 셋이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이종 동생과 태종대와 해운대를 구경하고 사진도 찍고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를 먹던 이야기도 나누었다.


친구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그때 부산에 가서 하루를 어디서 유숙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친구가 셋이서 부산 이모 집에 가서 하루를 잤다고 말을 해준다.


친구와 지난 시절에 대하여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는데 봄비와 함께 추억도 대지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친구가 다른 하우스의 수박 속기를 해야 해서 친구가 솎아낸 수박 몇 개를 비닐봉지에 넣어 손에 들고 헤어졌다.


친구와 헤어지고 한 손에는 비닐봉지를 다른 손에는 우산을 받쳐 들고 고향 집으로 터벅터벅 올라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지나간 추억의 한 자락을 이야기하며 공유했다.


고향 집으로 가는데 안개가 산허리를 감싼 모습과 가랑비는 아까보다 줄어든 채 내리고 있다. 친구의 하우스를 출발해서 윗상거리 작은 다리에 이르자 친구 어머니가 텃밭에서 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머니께 큰소리로 인사를 드리자 반갑게 맞아주며 다가오신다. 그리고는 불쑥 아저씨가 삶의 고비를 간신히 넘기셨다며 죽이나마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웃으시며 말씀을 건넨다.


아주머니는 아저씨에게 만약을 위해 자식에게 할 말이 있으면 미리미리 해두라고 하셨단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삶을 마감하기 전에 한 마디씩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나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서운했던 것은,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 말씀조차 듣지 못한 것이다. 아주머니와 아침에 길가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지고 다시 고향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친구와 아랫마을 친구 어머니를 만나서 인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에는 성장하던 시절의 추억도 들어 있고, 생명을 마감하는 인생의 슬픈 곡조도 들어있다.


마치 오월의 봄소식을 알리는 전원교향곡처럼 고향에서 추억과 생명에 대한 노래를 불러본 하루다. 고향으로 가는 산자락에는 연초록과 안개가 배경음악으로 깔려 있고 계곡에서 휘파람새가 불어대는 휘파람 소리는 봄의 교향곡처럼 들려왔다.


봄날에 연초록의 신록과 하얀 안개가 산허리를 감고 있는 오솔길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산자락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저 멀리 깊은 계곡에서 전원교향곡이 심연의 바다에서 철썩철썩 파도를 치며 웅장한 소리로 들려왔다. 그 교향곡에는 나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계절의 여왕 오월. 신록의 계절 오월. 가정의 달 오월. 봄의 전원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오솔길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자 머릿속에는 지나간 푸른 오월의 옛 노랫가락이 뭉실뭉실 떠오르는 아침이다.

keyword
이전 13화고향의 옛길을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