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은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이 되리니(푸시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시절 남해안에 수학여행 갔을 때다. 그때는 삶의 의미에 대해 깊게 고민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러다 관광용품을 파는 상점에 걸린 패넌트에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푸시킨의 詩가 심장을 파고들듯이 의미의 깃발을 펄럭이며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친구들과 남해안 일대를 바쁜 일정에 쫓겨 여행지를 돌다 보니 재미도 없었고, 버스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다녀서 피곤했다. 게다가 그때는 시에 대한 아름다움도 의미도 운율도 제대로 알지를 못했다.
그런데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페넌트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클로즈업되어 나부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마라….’라는 시구는 마치 내 삶을 대변하듯 마음을 세차게 끌어당겼다.
나는 푸시킨의 詩가 적힌 페넌트를 사서 집에 가져와 건넛방 벽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방을 나가고 들어올 때나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주며 힘들 때마다 그 시를 소리 내어 읊조렸다.
특히 비가 오는 날은 방바닥에 누워 처마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들어가며 시를 읽으면 빗물 소리와 함께 녹녹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 마치 시인이 곁에 앉아서 내 마음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시구를 소리 내어 읽으면 읽을수록 인생을 달관한 듯이 시속에 빠져드는 묘한 여운이 생겨난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편안하다. 왜 이 시는 사람의 마음을 이다지도 편안하게 하고 한을 대변하는 듯이 다가올까.
내가 살아온 지난날이 나를 속여서일까 아니면 삶이 정말로 나를 속여서일까. 푸시킨이 어떤 시인인지 한번 꼭 만나보고 싶다.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듯이 인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도 푸시킨처럼 인생의 희로애락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하는 멋진 시인이 되고 싶다. 그리고 시인의 노래처럼 내 삶도 슬픔 뒤엔 즐거움이 오고, 우울한 것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는 시인의 시구를 닮아간다.
지금에 와서 지난 시절의 우울하고 힘들고 슬펐던 시간이 그리운 추억이 되어간다. 마치 내 삶을 훤히 들여다보는 시인에게 마음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표현이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다. 하나의 문장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듯이 시는 사람의 마음을 구원하는 생명의 피조물이다.
이 시는 소리 내어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더불어 손에 들고 있는 무언가를 내려놓으라는 속삭임으로 들려온다. 정말로 삶이 무엇인지 속이는 삶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들어오는 시에 심취하는 마음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하다.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살아온 세월을 먼 하늘로 훨훨 날려 보낼 수 있다는 든든한 마음이 솟아난다. 그리고 가슴 한구석에는 내가 살아온 삶에 속았다는 착각에 위안도 된다.
인생을 한 편의 멋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런 사람은 푸시킨처럼 인생을 달관하며 구름에 달 가듯이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낯설고도 먼 이국인 러시아에서 한국까지 자신의 멋진 시를 전한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일까. 나도 푸시킨처럼 시 한 편으로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멋진 시인이 되고 싶다. 비록 그런 삶이 나를 속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