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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택의 쿼카 Apr 02. 2023

#2. 내 몇 년 뒤를 왜 당신이 그리세요

필요한 스킬 : 걸러듣기




후배가 한 명 들어왔다고 치자. 나보다 2살 어린, 갓 학교를 졸업한 친구. 사원증과 명함은 언제 수령하는지가 요새 가장 궁금하다는 그.



"선배님, 혹시 회사생활 하시면서 참고할 만한 조언 같은 거 해주실 수 있어요?"

"회사 사람들 말 걸러 듣기. 지금 내 말도 걸러 듣는 게 좋겠지. “


'얘 뭐라니'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겠지. 나에게 더 부연 설명을 요청할 수 도 있겠지만, 난 더 이상 얘기하지 않을 테다.




"면담 좀 할 수 있을까요, 팀장님?"


첫 퇴사 면담이었다. 절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을 참으며 담담하게 말을 하려다 보니, 기괴한 울음 참는 소리'가 목구멍에서 저절로 울려 퍼졌다. 하고 싶었던 얘기가 물 한 통 수준이었다면, 두어 모금 정도만 얘기했다.



출퇴근길 수없이 머릿속에서 거침없이 시뮬레이션했던 말들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용기 있던 놈은 어디 가고 걱정인형만 남아있었을 뿐이었다.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로 퉁 쳐서 면담이 끝나갈 무렵,

“혹시… 팀 내  불화가 있니?”라는 말 한마디가 다시금  울컥하게 만들었다. 나의 숨겨왔던 말들은 조금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필터링해서 말했어야 하는건가, 싶었을때는 이미 방안에 쏟아져 있었다. 주어 담을 수 없는 걸 알면서도 내 안에서 말들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에 팀장님은 내가 털어놓았던 것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다며 연신 비밀보장을 했다. 그 말을 믿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다음날 오전, 팀원 A) “너 퇴사하고 싶다고 했다며?”



어제 내가 빠진 공장 근처의 치킨집에서 회식을 하며 내 얘기가 나왔나보다. 몇몇 팀원들은 면담한 세부 내용까지 세세히 알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팀장, 팀원 할 것 없이 그냥 다 불러놓고 얘기하는게 나을뻔했다. 아니면 면담을 실시간 라이브방송으로 공유하던지.



모든 건 내 잘못이다.

믿은 것도, 다시금 기대를 한 것도 나의 잘못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면 누구의 잘못이랴.



퇴사하고 싶다 말했으면, “네가 그동안 진짜 힘들었겠구나.“ 이럴 위인들이었다면 애초에 그런 상황으로까지 만들지조차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상황을 개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기대감에 그간 서러웠던 감정까지 얹혔다.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결과를 예측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돌봐줄 수 있는 것은 나 자신 하나뿐이다.

그 누구도 없다.




“잠깐 시간 돼? 얘기 좀 하자.”

올 것이 왔다. 나한테 업무 인수인계를 맡긴 과장이다.


공장 한 회의실에 자리를 잡았다.

아, 예측하지 못하고 움직인 결과는 차갑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군.


”너 힘들다고 했다며? 문제가 뭐야 대체. “

나의 힘듦은 그에게는 문제이다.

수없이 밤에 뒤척거리고, 공장에서는 노트북 메모장에 퇴사의 장점과 단점을 나열해 본 날들. 수시로 들어가 퇴직금을 확인해 본 날들이 그에게는 ‘문제’라는 단어 하나로 귀속되었다.



이젠 여기서 더 이상 입을 열면 안 되겠다고, 그래서 듣기만 했다. 그는 뉴스의 한 기자로 빙의해 요즘 취업난을 설명하기도, 같은 인서울 대학교 출신으로서 경험했던 취준생의 역경 등을 침 튀기게 되짚어 주기도 하였다. 내가 여길 나간다면, 여기 같은 곳은 다시 오기 힘들 수도 있다며.



“지금 1년 있었으니까 3년 지나면 대리 달고, 어? 그다음 과장 달고. 그러면 되잖아~ 뭐가 문제야 대체”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내가 설 수 있는 최선의 자리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든 멀리해야겠다고. 내 가능성의 한계를 짓는 사람이기에.

그리고 이제는 ‘걸러서 듣겠다’고.




꽤나 많은 사회초년생 친구들이 선배들의 말이라는 이유로 커리어 조언을 물먹은 스펀지처럼 흡수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주체적인 판단력은 흐려진다.



하나 덧붙이자면, 커리어 조언 같은 것도 안 구하는 게 좋다. 애초에 커리어는 조언 같은 걸 구해서 완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윤곽 잡는 것부터 스스로 해야 한다. 땅굴 파듯이 깊게 자문하고 독자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언젠간 “나 왜 이렇게 됐지?”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독서다…)



내 몇 년 뒤는 내가 그려야 한다.



내가 그리는 이 소설의 작가는 나다. 내 업무 능력을 평가하는 팀장도, 현재 있는 팀이나 회사에서 떠나면 나에게 <왠지 모를 형용할 수 없는 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모호한 두려움을 주는 선배들도 아니다.



오로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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