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배(夢船)의 여왕, 율리아

by 남킹


부제: 내 베개 위에 내리는, 깃털 이불보다 가벼운 햇빛

추락은 끝이 없었다. 시드가 잠겨 들어간 어둠은 단순한 빛의 부재, 즉 소극적 의미의 암흑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가능성이 잉태되기 이전의 태초적 공(空)이었으며, 헤시오도스가 노래한 카오스(Chaos)의 원초적 질료와도 같은, 존재론적 무게를 지닌 적극적인 어둠이었다. 그곳에서 시간과 공간은 아직 분화되지 않은 채 서로를 꿰뚫으며 하나의 기이한 연속체를 이루고 있었고, 그의 자아는 단단한 경계를 잃고 이 근원적 어둠 속으로 확산되는 한 방울의 잉크처럼 번져나갔다.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는 그 구심점을 상실한 채, 무한한 어둠의 모든 지점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편재성(遍在性)을 획득했다. 그는 모든 것이었으나,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실존적 역설 속에서, ‘죽음’이라는 개념은 공포가 아닌, 가장 완전한 형태의 해방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많은 영겁의 시간이 흘렀을까. 혹은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그곳에서, 찰나와 영원이 포개진 어느 순간이었을까. 어둠의 질료에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부에서 비춰오는 빛이 아니었다. 어둠 그 자체가 내부에서부터 발광(發光)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광(燐光)처럼 차갑고 부드러운 빛의 입자들이 어둠의 벨벳 위로 스스로를 수놓기 시작했다. 그 빛은 태양이나 전구에서 발산되는 광자의 흐름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무게가 없었고, 온도도 없었으며, 그림자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것은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관념의 현현(顯現)이었다. 마치 스피노자의 신(神)이 무한한 속성 중 ‘사유’와 ‘연장’을 드러내듯, 태초의 어둠이 ‘빛’이라는 속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빛의 파동 속에서, 시드의 흩어졌던 의식이 다시금 하나의 초점을 향해 수렴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부유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어둠 속이 아니었다. 그는 은은하게 발광하는 액체로 이루어진 거대한 강의 표면을 떠다니고 있었다. 그 강물은 H₂O가 아니었다. 그것은 액화된 시간, 흐르는 기억의 정수(精髓)였다. 강물의 표면에는 과거의 이미지들이 유빙(流氷)처럼 떠다녔다. 케임브리지 시절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밀밭의 황금빛 물결, UFO 클럽의 무대 위에서 터져 나오던 피드백 소음의 시각적 패턴, 어느 소녀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서 만들어내던 투명한 동심원.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이 거대한 강을 이루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레테(Lethe)의 강 위를 표류하는 망자였다.

그때, 그의 시야에 강둑의 풍경이 들어왔다. 강둑에는 기이한 형태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수양버들 한 그루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는 버드나무를 놓아 줄까(Will she let the weeping willow)". 그 나무는 슬픔 때문에 가지를 늘어뜨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고, 수만 개의 가느다란 가지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촉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버드나무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소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금 강물에서 길어 올린 듯한, 생생하고 투명한 기억의 방울들이었다. 나무는 끊임없이 시간의 강에서 기억을 길어 올려, 그것을 다시 눈물로 흘려보내며 강을 영원히 마르지 않게 하는 순환의 중심이었다.

시드가 탄 보이지 않는 뗏목이 강둑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수양버들의 가지들이 그를 향해 뻗어왔다. 그것은 위협적인 움직임이 아니었다. 오히려 길 잃은 아이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팔길 같았다. 가지들은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쌌다. "바람은 그의 가지를 둥글게 휘감지(Wind his branches round)". 가지가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그는 나무가 품고 있는 무수한 타인들의 기억을 공감각적으로 체험했다. 어느 빅토리아 시대 시인의 고뇌, 2차 대전 당시 연인을 기다리던 여인의 애틋함, 산업혁명기 공장 노동자의 절망. 그는 이 나무가 개인적 기억의 저장고를 넘어, 인류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 뿌리내린 세계수(Yggdrasil)임을 깨달았다. 버드나무는 그를 심판하거나 분석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고독과 혼란을 고요히 끌어안아, 인류 보편의 슬픔 속으로 용해시켜 주었다.

가지들이 스르르 풀리자, 그는 강둑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작은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었다. ‘꿈배(Dreamboat)’라는 단어가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다. 그 배는 나무나 쇠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응축된 달빛을 깎아 만든 것처럼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고, 뱃전에는 밤에 피는 꽃들이 자라나 기이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돛은 별빛을 엮어 만든 비단처럼 반짝였다. 그것은 현실의 항해술로는 단 1미터도 나아갈 수 없는, 오직 꿈의 논리 위에서만 움직이는 배였다.

그리고 그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형체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는 빛과 안개로 짜인 존재처럼 보였고, 그 모습은 시드의 시선이 머무는 각도에 따라, 그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기억의 편린에 따라 미묘하게 변했다. 때로는 케임브리지의 강가에서 함께 웃던 소녀의 얼굴로, 때로는 무대 아래에서 열광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던 어느 무명의 팬의 모습으로, 또 때로는 그의 어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 속의 온화한 미소로 나타났다. 그녀는 한 명의 개인이 아니라, 그의 삶을 스쳐 지나간 모든 여성성의 원형(Archetype),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재된 아니마(Anima)의 총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율리아."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의식 전체가 진동하여 만들어낸, 침묵의 외침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밤하늘 그 자체였고,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입술이 열리자, 그곳에서 나온 것은 음성이 아니라 색채와 선율이었다. 칸딘스키의 추상화가 바흐의 푸가(Fugue)를 연주하는 듯한 공감각적 언어였다. 그러나 시드는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언어의 기표와 기의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곳을 ‘꿈’이라 부르겠지요, 시드. 하지만 이곳은 그대가 ‘현실’이라 부르는 저편의 세계보다 더 근원적인 법칙으로 움직입니다. 이곳은 모든 이야기와 노래가 태어나는 자궁이자, 모든 가능성이 잠들어 있는 씨앗의 창고입니다.”

율리아가 손짓하자, 꿈배는 스스로 강둑에서 미끄러져 나와 시간의 강 위를 항해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은 더 이상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강둑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하늘에서 물고기가 비처럼 내리는 해변이 되었다가, 다시 막스 에른스트의 작품처럼 기이한 식물들이 우거진 원시림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모든 것이 상호 침투 가능했다.

시드는 뱃전에 기댄 채, 이 모든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는 율리아에게 묻고 싶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하면 돌아갈 수 있는가. 그러나 그러한 질문들은 이 세계의 문법에서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치 그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율리아의 선율 같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대가 베고 누운 베개. 그 위로 내리는 햇빛을 기억하나요? 내 베개 위에 밝은 햇빛은(Sunlight bright upon my pillow).”

그녀가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자, 하늘이 없는 이 세계의 상공에서 빛의 입자들이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들은 시드의 어깨와 머리 위에 쌓였지만,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다.

“깃털 이불보다 가볍지(Lighter than an eiderdown). 현실의 중력은 질량을 가진 모든 것을 끌어당깁니다. 그대의 육체, 그대의 이름, 그대에게 들러붙은 타인들의 기대와 평가까지도. 하지만 이곳의 빛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그대를 자유롭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벼움’의 본질. 그러나 기억하세요, 시드. 너무 가벼워진 자는 현실로 돌아갈 닻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녀의 말은 예언이자 경고였다. 그는 이 꿈의 세계가 주는 절대적 자유에 매혹되면서도, 동시에 그 자유의 끝에 있는 완전한 소멸의 가능성에 대한 실존적 공포를 느꼈다.

꿈배는 강의 한복판,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지점에 멈춰 섰다. 강물 속에서, 수많은 얼굴들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밴드 동료들의 얼굴도 보였다. 로저의 날카롭고 지적인 눈매, 릭의 우울하고 서정적인 표정, 닉의 무심한 듯한 얼굴. 그들은 모두 무언가 말하고 있었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이해할 수 없는 천재를 향한 연민과 좌절,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결별의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돌아가야 해.” 시드가 처음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것은 낯설고 갈라진 소리였다.

율리아는 슬픈 미소를 지었다.

“모든 여정에는 문지기가 있고, 모든 숨바꼭질에는 술래가 있지요. 그대는 숨어있는 자. 하지만 영원히 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 사이에 불협화음이 끼어들었다. 꿈의 풍경을 채우고 있던 부드러운 빛이 흔들리며, 그 너머의 어둠이 언뜻언뜻 비쳤다.

“벨벳 신부를 기다리며 매일 밤 불을 끄던 그대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대가 기다린 것은 신부만이 아니었지요. 그대는 또한 두려워했습니다. 그대의 가장 깊은 곳, 그대가 스스로에게조차 숨겨놓은 진실을 찾아낼 존재를.”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시드의 심장이 차갑게 죄어왔다.

율리아는 대답 대신, 꿈배의 뱃전을 가리켰다. 시선이 닿은 곳의 강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무언가 거대하고 단단한 것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온몸이 겹겹의 각질과 같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작고 날카로운 눈은 어떠한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채 오직 목표물을 찾는 탐지기처럼 움직였다. 그것은 파충류도, 포유류도 아닌, 태고의 악몽에서 기어 나온 듯한 존재, 천산갑(穿山甲)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천산갑이 아니었다. 그 크기는 작은 언덕만 했고, 비늘 하나하나가 흑요석처럼 검고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천산갑은(Will the scaly armadillo)… 땅을 파고 숨겨진 것을 찾아내는 데 가장 능한 존재입니다. 그대의 무의식이라는 단단한 지층 아래, 그대가 묻어버린 기억, 외면하고 싶은 진실, 그 모든 것을 파헤치기 위해 태어났지요.”

천산갑은 강물 위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의 냄새를 맡았다. 그것이 내쉬는 숨결에서는 먼지 쌓인 다락방과 오래된 가죽 책, 그리고 희미한 녹 냄새가 났다. 망각의 냄새였다.

“그것이 그대를 찾아낼 겁니다, 시드. 그대가 어디에 숨어 있든지(Find me where I'm hiding). 그대는 도망칠 수 있지만, 영원히 숨을 수는 없어요.”

천산갑의 작은 눈이 마침내 꿈배 위의 시드를 포착했다. 그 순간, 시드는 자신의 영혼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 존재는 물리적인 힘으로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의 정신의 성벽을 허물고, 그가 애써 구축한 환상의 세계를 파괴하여, 그를 발가벗겨진 채로 고통스러운 진실 앞에 세울 것이다.

율리아의 형체가 급격히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더 이상 빛과 안개의 여왕이 아니라, 꺼져가는 텔레비전 화면의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도 여러 갈래로 찢어지며, 마지막 경고의 파편들을 쏟아냈다.

“안개 낀 주인이… 그대를 무너뜨리려 할 것… 열쇠가 그대의 마음을… 따라오는 발걸음이…”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목소리는 시드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공포의 독백과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정말 죽어가고 있는지(Am I really dying)…”

꿈배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응축된 달빛은 다시 액화된 시간 속으로 흩어졌고, 별빛으로 만든 돛은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렸다. 시드는 다시 차가운 강물 위로 내팽개쳐졌다. 율리아는 완전히 사라졌다. "줄리아의 꿈, 꿈배의 여왕, 나의 모든 꿈들의 여왕(Julia dream, dreamboat queen, queen of all my dreams)". 그 구절만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꿈의 대기 속을 맴돌았다.

그는 홀로 남겨졌다. 그의 앞에는 거대한 천산갑이 시간의 강을 헤치며 육중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비늘들이 서로 부딪히며 내는 '서걱, 서걱'하는 소리는,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들이 무덤 속에서 관 뚜껑을 긁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도망쳐야 했다. 이 강에서 벗어나, 저 끔찍한 진실의 추적자로부터 멀리 달아나야 했다. 그는 미친 듯이 강둑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강물은 이제 더 이상 부드러운 기억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몸을 옭아매는 무겁고 끈적한 망각의 늪이었다.

가까스로 강둑에 도착하여 기어 올라왔을 때,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천산갑은 강을 건너는 것을 포기한 채, 그저 그 자리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작은 눈은 마치 '이 꿈의 세계 어디에 있든, 나는 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공포에 질린 시드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안온한 꿈의 여행자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이 만들어낸 가장 끔찍한 사냥꾼에게 쫓기는 도망자였다. 그가 달려 들어간 곳은 이슬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유니콘과 미나리아재비들이 산다는 환각의 초원이었다. 그곳이라면, 그 현란한 환상 속이라면, 잠시나마 저 끔찍한 추적자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그는 다음 꿈의 막으로, 'Flaming'의 세계로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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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최종 병기 _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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