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유니콘의 초원 (Flaming)

by 남킹


부제: 야호! 너는 날 볼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지

시간의 강가에서 도망친 시드가 뛰어든 세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질서 위에 구축된 공간이었다. 그곳은 논리와 인과율이라는 척추가 제거된, 오직 순수한 감각과 연상의 흐름만이 유일한 물리법칙으로 작용하는 환각의 평원이었다. 공기는 더 이상 산소와 질소의 혼합물이 아니라, 색채를 머금은 젤리처럼 밀도와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라일락의 보라색과 민트의 초록색이 섞인 맛이 흘러 들어왔고, 내쉴 때는 나비 떼처럼 작은 빛의 입자들이 흩어져 나갔다. 이곳은 시드 자신이 쓴 노래, 'Flaming'의 가사가 건축 자재가 되어 빚어낸, 그의 가장 순수하고도 위험한 창조성의 영토였다.

그는 안개 낀 이슬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안개 낀 이슬 속에서 쉬면서(Lazing in the foggy dew)". 그 이슬은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존재처럼 그의 피부에 달라붙어 속삭였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의 노래 가락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외계 행성의 풍경을, 미래에 발명될 새로운 단어들을. 이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고, 정보는 선형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 무수한 가능성의 형태로 떠다니다가 의식의 그물에 걸려드는 방식이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리좀(rhizome)'이라 명명했던, 중심도 위계도 없이 무한히 연결되고 확장되는 사유 체계가 이곳에서는 현실의 모습으로 구현되어 있었다.

하늘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은 하늘과 땅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그는 자신이 구름 속에 있는지, 구름 위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푸른 하늘에 뜬 구름 속에서(Alone in the clouds all blue)". 주변의 모든 것이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푸르렀다. 그는 발밑의 푸른 솜을 밟으며 걸었다. 발자국이 남는 대신, 그가 밟은 자리에서는 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걷는다는 행위가 운동이 아니라 연주가 되는 세계. 그는 문득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숨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시간의 강에서 그를 쫓던 천산갑의 위협은 이 압도적인 감각의 유희 속에서 희미한 기억의 얼룩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때, 그의 앞에 한 존재가 나타났다. 눈처럼 하얀 털에, 이마에는 나선형의 뿔이 달린, 신화 속의 동물 유니콘이었다. "유니콘 위에 타서(Sitting on a unicorn)". 유니콘은 전설 속의 동물처럼 신비롭거나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주인을 기다려온 늙은 개처럼 온화하고 조금은 지친 눈으로 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수천 년 동안 인간 아이들의 꿈속을 여행하며 쌓인, 순수한 상상력의 연대기가 담겨 있었다.

유니콘은 아무 말 없이 시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드는 망설임 없이 그 등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자마자, 유니콘은 네 발로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아니, 솟아올랐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았다. 주변의 푸른 구름 세계가 아래로 가라앉았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상대성의 원리가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듯했다. 유니콘의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움직이는 명상과도 같았다.

그들은 색채의 강과 소리의 폭포를 지나 날았다. 시드는 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은 끝없는 초원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풀 대신, 빛을 내는 꽃들이 자라고 있었다. "미나리아재비들이 빛을 담는 것을 보면서(Watching buttercups cup the light)". 수십억 송이의 미나리아재비들이 작은 잔(cup)처럼 하늘을 향해 피어나, 허공에서 내리는 빛의 이슬을 받아 담고 있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작은 태양처럼 스스로 빛을 발하고 있어, 초원 전체가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보였다. 그 빛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것은 감정을 가진 빛이었다. 어떤 꽃은 기쁨의 노란빛을, 어떤 꽃은 슬픔의 푸른빛을, 또 어떤 꽃은 명상의 보랏빛을 발하고 있었다. 초원은 거대한 감정의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유니콘은 그 미나리아재비 초원 한가운데에 내려앉았다. 시드는 유니콘의 등에서 내려, 빛을 내는 꽃들 사이에 섰다. 그는 손을 뻗어 노란빛을 내는 미나리아재비 한 송이를 만졌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벨벳처럼 부드러웠고, 그의 손바닥으로 작은 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따뜻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는 문득 이 세계가 주는 환상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곳에서는 고통도, 상실도, 추적자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감각의 향연만이 존재했다.

그는 꽃밭 사이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민들레꽃 위에서 자면서(Sleeping on a dandelion)". 그의 등 밑에는 푹신한 민들레 솜털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하늘(이라고 추정되는 곳)에서는 민들레 홀씨들이 눈처럼 흩날렸다. 홀씨 하나하나가 작은 낙하산이 되어, 속삭임을 실어 날랐다. 어떤 홀씨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잊혀진 경구를, 어떤 홀씨는 아마존 밀림 나비의 날갯짓 패턴을, 또 어떤 홀씨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그의 노래의 멜로디를 속삭였다. 그는 지식과 감각이 분리되지 않은 이 세계의 완전함 속에서 모든 긴장을 풀었다. 눈을 감자, 그의 의식은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초원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는 더 이상 시드가 아니었다. 그는 빛을 내는 미나리아재비였고, 노래하는 민들레 홀씨였으며, 푸른 구름 그 자체였다. 완전한 합일(合一)의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평온을 깨는 이질적인 감각이 끼어들었다. 그것은 소리도, 색깔도, 냄새도 아니었다. 그것은 ‘시선’이었다.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있다는 명백하고도 불쾌한 감각. 그는 눈을 떴다. 주변의 풍경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 모든 색채와 형태의 배후에 숨어서 그를 관찰하는 차가운 지성이 느껴졌다. 마치 생물학자가 현미경으로 미생물의 움직임을 관찰하듯,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분석하고 기록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야호! 너는 날 볼 수 없지만(Yippee! You can’t see me)". 시드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그것은 어린아이의 숨바꼭질 외침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깊은 불안과 공포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사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관찰실, 혹은 감옥일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외침에 대답하듯,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이전의 꿈들처럼 신비롭거나 위협적이지 않았다. 지극히 평범하고, 약간은 피곤한 톤의, 영국 중산층 억양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지(But I can you)."

동시에, 시드는 자신이 더 이상 꽃밭에 누워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얗고 텅 빈 방, 사방의 벽이 거대한 스크린으로 이루어진 방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가 방금까지 체험했던 유니콘과 미나리아재비의 초원은 이제 스크린 위에서 상영되는 한 편의 영상에 불과했다. 유니콘은 어색한 컴퓨터 그래픽처럼 보였고, 미나리아재비의 빛은 조악한 조명 효과임이 명백했다. 그는 속은 것이다.

"불공평해, 너는 내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No fair, you can’t hear me)." 시드는 스크린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스크린 속의 그는 여전히 환상에 취해 민들레꽃 위에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할 수 있어(But I can you)." 다시 목소리가 대답했다. 목소리는 이제 더욱 가까이, 그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시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평범한 트위드 재킷에 뿔테 안경을 쓴, 대학 교수나 정신과 의사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그의 표정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냉철한 지성과 분석적인 호기심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누구… 죠?" 시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가 '안개 낀 주인(Misty Master)'이라 부를 존재다." 남자가 대답했다. "혹은 그대의 이성, 논리, 현실 원칙이라 불러도 좋겠지. 나는 그대가 이 환상의 세계로 도피할 때마다, 그대의 뒤를 쫓아 모든 것을 기록하고 분석하는 관찰자다."

시드는 혼란스러웠다. '안개 낀 주인'이라면 율리아가 경고했던, 더 신비롭고 위협적인 존재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너무나 평범하고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더 큰 공포감을 자아냈다. 그는 이 꿈의 세계에 속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외부 세계의 법칙을 이곳으로 끌고 들어온 침입자였다.

"왜 나를 따라오는 거지?"

"그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안개 낀 주인이 대답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대를 '치료'하기 위해서다. 그대의 정신은 지금 매우 불안정한 상태다. 아름답지만, 위험하지. 나는 그대의 환상이 어떤 구조와 문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파악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열쇠를 찾아, 굳게 닫힌 그대의 마음을 열 수 있을 테니."

그의 말은 합리적이었고, 심지어 시드를 돕고자 하는 선의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시드에게는 그것이 가장 끔찍한 폭력으로 다가왔다. 이 환상의 세계는 그의 마지막 피난처였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피난처마저 해부하고 분석하여, 현실의 척박한 언어로 번역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비의 날개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기 위해 핀으로 고정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다.

"그때까진, 널 건드리지 않겠지만(Too much, I won’t touch you)." 주인이 말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 "나는 그대가 이 세계를 충분히 경험하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그대의 무의식이 스스로를 충분히 드러낼 때까지. 하지만 명심하게."

그는 시드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는 소독약과 낡은 종이 냄새가 났다.

"그 뒤에는 할 수도 있어(But then I might)."

그의 손이 시드의 어깨를 향해 뻗어왔다. 그 손이 닿는 순간, 모든 환상이 깨지고 끔찍한 현실의 냉기가 그의 영혼을 얼려버릴 것만 같았다. 시드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내게서 떨어져!"

그 순간, 방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크린의 영상들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로 변했고, 벽과 천장에서 균열이 생기며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시드의 격렬한 저항이 이 이성적이고 통제된 공간의 구조를 파괴하고 있었다.

안개 낀 주인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안경을 고쳐 쓰며 나지막이 말했다. "저항이 거세군. 예상했던 바다. 하지만 이 또한 분석의 데이터가 될 뿐."

방의 붕괴는 멈추지 않았다. 바닥이 꺼져 내리며, 그 아래로 시커먼 심연이 입을 벌렸다. 시드는 비명을 지르며 추락했다. 추락하는 그의 귓가로 안개 낀 주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도망치든, 나는 따라갈 것이다. 그대의 다음 꿈속에서 다시 보지."

시드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떨어지며 생각했다. 율리아의 경고는 옳았다. 천산갑보다 더 무서운 추적자는 바로 자신의 정신을 이해하고 구원하려는 '이성' 그 자체였다. 그는 다시 도망쳐야 했다. 이성과 논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더 깊고, 더 혼란스럽고, 더 관능적인 꿈의 세계로. 그곳이라면, 저 차가운 분석의 시선을 잠시나마 멀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의식이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매일 밤 불을 끄고 기다리던 존재, 위험하지만 달콤한 망각을 약속하는 존재, 벨벳 신부가 기다리는 고성(古城)으로. 그는 이성의 빛이 닿지 않는 가장 깊은 욕망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고 있었다. 추락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그것은 선택이자, 저항이었다. "헤이, 호, 시작해 보자(Hey, ho, here we go) / 그리도 높게(Ever so high)". 추락이 곧 비상(飛上)이 되는 역설 속에서, 그는 다음 꿈의 막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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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최종 병기 _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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