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주인의 시험 (The Misty Master)

by 남킹


부제: 열쇠가 나의 마음을 열어줄까

벨벳 신부의 폐허가 된 성을 등지고 걸어 나온 시드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전의 꿈들과는 그 본질부터가 달랐다. 'Flaming'의 세계가 무한한 감각의 증식과 리좀적 확장의 공간이었다면, 'The Velvet Bride'의 세계가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섞인 관능적 소멸의 영역이었다면, 이곳은 그 모든 구체적인 형태와 색채, 감정이 거세된 순수한 추상의 공간이었다. 사방은 짙은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안개는 습기나 온도를 가진 물리적인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고, 거리감을 소거하며,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형이상학적인 안개, 에드문트 후설이 말한 '판단 중지(epoche)'의 상태가 시각적으로 구현된 듯한 공간이었다.

바닥도 하늘도 없었다. 그는 마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인물처럼, 안개의 바다 위에 홀로 떠 있는 무한히 작은 점에 불과했다. 소리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자신의 심장 박동과 혈액이 혈관을 흐르는 소리만이 내면에서부터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곳에서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모든 방향이 동일했고, 모든 지점이 중심이었다. 이곳은 외부 세계가 아니라, 순수한 사유가 펼쳐지는 정신의 내부 공간, 데카르트가 모든 외부 감각을 차단하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일한 확실성에 도달했던 그 고독한 사유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안개 낀 주인'이 서 있었다.

그는 'Flaming'의 세계에서처럼 트위드 재킷을 입은 교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어떤 구체적인 형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주변의 안개보다 조금 더 짙은 농도를 가진, 인간의 형상을 한 안개의 집합체처럼 보였다. 그의 모습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시드의 생각의 흐름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고 일렁였다. 그는 외부에서 온 침입자가 아니었다. 그는 시드 자신의 일부, 그가 오랫동안 외면하고 억압해왔던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자아, '초자아(Superego)'의 현현이었다.

“돌아왔군.”

주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입을 통해 나오는 음파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드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반박할 수 없는 명료함을 지닌 생각의 파동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냉철한 사실 인식만이 존재했다.

“감각의 낙원에서도, 욕망의 심연에서도 안식을 찾지 못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너 자신을 마주하는 것.”

"당신은 누구지? 정말로?" 시드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안개 속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나는 너의 일부다. 나는 질서를 갈망하는 너의 의지이며, 혼돈 속에서 패턴을 찾아내려는 너의 지성이다. 나는 네가 쓴 노래의 무질서한 환각 속에서도 완벽한 라임과 박자를 찾아내려 애쓰는 너의 또 다른 얼굴이다. 너는 나를 피해 도망쳤지만, 인간은 결코 자신의 그림자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주인의 말이 사실임을 시드는 직감했다. 그가 느꼈던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것에 대한, 스스로의 정신을 해부하고 그 안의 황폐함을 직시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시험을 시작하겠다.” 주인의 목소리는 선언처럼 울렸다. “이곳은 질문의 공간이다. 너는 너 자신에게 질문하고,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진실되게. 그것만이 이 안개를 걷어낼 유일한 방법이다.”

주인이 손을 들자, 주변의 안개가 꿈틀거리며 하나의 거대한 체스판과 같은 격자무늬 바닥을 만들어냈다. 흑과 백의 사각형이 무한히 펼쳐진, 이성과 논리의 공간이었다. 시드는 백색 칸 위에, 주인은 검은색 칸 위에 서 있었다. 이것은 유희가 아니라, 존재를 건 정신의 대결이었다.

첫 번째 질문: 사랑에 대하여

“너는 ‘율리아’를 찾아 헤매고 있다.” 주인이 첫 수를 놓았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체스판 위에 투명한 유리로 된 '여왕(Queen)'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너의 모든 꿈의 여왕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묻겠다. 네가 찾는 ‘율리아’는 무엇인가? 기억인가, 이상인가, 아니면 네가 잃어버린 너 자신의 일부에 대한 알리바이인가?”

질문은 날카로운 메스처럼 시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파고들었다. 그는 율리아를 떠올렸다. 케임브리지의 햇살 속에서 웃던 소녀, 그의 음악에 영감을 주던 뮤즈, 그의 혼란을 잠재워주던 안식처. 그러나 그 이미지들은 모두 과거의 파편들이었다. 안개 낀 주인의 질문 앞에서, 그 아름다운 이미지들은 사실 그가 현실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이상화된 우상,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싹텄다.

"그녀는… 실재했어." 시드가 힘겹게 대답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그의 앞에도 유리로 된 '왕(King)'의 형상이 나타났다. "우리의 사랑은 진짜였어."

“진짜라고? 무엇이 진짜를 구성하는가?” 주인의 반격은 즉각적이었다. 유리로 된 '비숍(Bishop)'이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며 시드의 왕을 위협했다. “너의 뇌세포에 저장된 전기화학적 흔적인가? 아니면 너의 노래 가사 속에 박제된 문학적 수사인가? 너는 그녀라는 ‘실체’를 사랑했나, 아니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너 자신’의 모습을 사랑했나? 그녀는 너의 위대한 예술을 위한 아름다운 제물이 아니었는가?”

시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자신의 예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괴물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창조성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현실의 그녀를 보는 동시에, 그녀를 소재로 한 노래와 그림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의 체험자인 동시에, 그 체험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재구성하는 예술가였다. 그 이중성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주었을까. 어쩌면 그녀가 떠난 것이 아니라, 그가 먼저 그녀를 자신의 예술 속에 가두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모르겠어." 시드의 왕이 한 칸 뒤로 물러났다.

“그것이 첫 번째 진실이다.” 주인의 목소리는 판결처럼 냉정했다. “너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관념을 앓았을 뿐이다.”

두 번째 질문: 창조에 대하여

체스판의 풍경이 변했다. 흑백의 사각형들이 녹아내리며, 거대한 오선지로 변했다. 음표들이 메뚜기 떼처럼 허공을 날아다녔다.

“너는 세상에 없던 소리를 만들어냈다.” 주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그의 위치에 거대한 지휘자의 보면대가 나타났다. “너는 새벽의 문을 열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각의 우주를 보여주었지. 그렇다면 묻겠다. 그 창조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순수한 예술적 충동이었나, 아니면 세상의 주목을 갈망하는 나르시시즘이었나? 너는 진리를 노래했나, 아니면 너의 혼돈을 아름다운 소음으로 포장하여 팔았나?”

시드는 자신의 음악을 떠올렸다. UFO 클럽의 무대 위에서, 그의 손가락이 기타의 현 위를 미끄러지며 만들어내던 소리의 폭포수. 그것은 분명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소리였다. 그 순간에는 어떤 계산도, 의도도 없었다. 오직 순수한 창조의 희열만이 존재했다.

"그건 진짜였어. 내 영혼의 소리였다고." 시드가 외쳤다. 그의 발밑에서 아름다운 화음이 울려 퍼지며 허공을 떠다니는 음표들을 끌어모아 하나의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영혼이라고?” 주인의 지휘봉이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아름답던 멜로디는 순간 귀를 찢는 불협화음으로 변했다. “그렇다면 묻겠다. 그 영혼의 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너는 무엇을 사용했지? LSD, STP, 수많은 화학물질들. 너는 약물의 힘을 빌려 인위적으로 지각의 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그 음악은 너의 것인가, 아니면 화학 분자의 작용이 만들어낸 우연한 산물인가? 너는 창조주였나, 아니면 그저 약물이 연주하는 악기에 불과했나?”

올더스 헉슬리는 『지각의 문』에서 메소칼린이 예술적 영감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했지만, 동시에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위험성을 경고했다. 시드는 바로 그 위험에 잠식당했다. 처음에는 약물이 그의 창조성을 위한 도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약물 없이는 단 하나의 음표도 떠올릴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문을 열었지만, 그 문을 다시 닫는 법을 잊어버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무질서한 감각의 홍수 속에서 그의 자아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나는… 더 깊은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야." 그의 목소리는 변명처럼 들렸다.

“아니. 너는 두려웠던 것이다.” 주인의 지휘봉이 그의 심장을 겨눴다. “너의 재능이 고갈될까 봐. 평범해질까 봐. 그래서 너는 지름길을 택했다. 그러나 예술에서의 지름길은 언제나 지옥으로 통하는 법이지. 너의 창조성은 너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너를 파멸시킨 저주였다.”

시드는 주저앉았다. 오선지는 찢어진 악보처럼 갈가리 흩어졌다.

세 번째 질문: 자아에 대하여

주변의 풍경이 다시 변했다. 이제 그들은 수많은 거울로 이루어진 미궁 속에 서 있었다. 거울들은 시드의 모습을 각기 다른 각도에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비추고 있었다. 천재 뮤지션 시드, 길 잃은 소년 시드, 약물에 취한 시드, 광기에 잠식된 시드. 수백 명의 시드가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주인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거울 속에서 동시에 울려 퍼져, 시드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이 수많은 허상들 속에서, 진짜 너는 누구인가? ‘시드 배럿’이라는 이름은 무엇인가? 타인들이 만들어낸 신화인가, 아니면 네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인가? 껍데기를 모두 벗겨냈을 때, 그 안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는가?”

이것은 가장 근원적이고 잔인한 질문이었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한때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저 키스 배럿이었다. 케임브리지 출신의,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사랑하는 청년. 그러나 핑크 플로이드의 성공과 함께, ‘시드’라는 신화가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아니라 그의 신화를 소비했다. 그는 저항하려 했지만, 결국 그 신화의 무게에 짓눌려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는 이제 거울 속에 비친 어느 모습이 진짜 자신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어쩌면 진짜 ‘나’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의 개념처럼, 자아란 그저 수많은 인연과 관계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일지도.

"나는…"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거울 속의 이미지들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

“너는 모른다.” 주인의 목소리가 최후의 판결을 내렸다. “너는 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너는 텅 비어 있다. 너의 마음은 자물쇠로 잠겨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열쇠가 있다 한들, 열고 들어갈 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안개 낀 주인이 나를 무너뜨릴까(Will the misty master break me)."

율리아의 경고가 현실이 되었다.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의 논리적 자아는 그의 모든 신념과 자기기만의 껍데기를 남김없이 벗겨내고, 그의 존재가 텅 빈 허무 위에 서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사랑, 창조, 자아. 그가 자신의 삶을 지탱해왔던 세 개의 기둥은 모두 환상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거울들이 와르르 깨지기 시작했다. 미궁이 붕괴하고 있었다. 그는 무너져 내리는 자신의 정신 세계 속에서 홀로 절규했다.

"열쇠가 나의 마음을 열어줄까(Will the key unlock my mind)."

그의 절박한 외침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바로 그 순간, 모든 붕괴가 멈추었다.

주변의 풍경은 다시 처음의 안개 낀 공간으로 돌아와 있었다. 안개 낀 주인은 여전히 그의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에는 이전의 냉철함 대신, 희미하지만 분명한 연민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 주인의 목소리는 이제 시드의 머릿속이 아닌, 외부에서 들려오는 실제 음성처럼 들렸다. “그것이 바로 열쇠다.”

"무슨… 뜻이지?" 시드가 흐느끼며 물었다.

“너는 방금 너 자신의 입으로 ‘열쇠’를 말했다. ‘나의 마음을 열어줄까?’라는 질문. 그것 자체가 바로 열쇠다. 지금까지 너는 답을 찾으려 애썼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멈추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 그것이 바로 텅 빈 허무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나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지만, 그 말의 진정한 의미는 ‘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는 뜻이었지.”

주인은 시드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더 이상 안개가 아니었다. 희미하게 살갗의 온기가 느껴지는, 실체를 가진 손이었다.

“너는 무너지지 않았다, 시드. 너는 비로소 시작점에 선 것이다. 모든 거짓된 신념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너는 이제 너 자신의 집을 지을 수 있다.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너만의 답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

시드는 망설였다. 그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더 이상 환상 속으로 도피하지 않고, 고통스럽고 불확실한 현실을, 분열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오는 발걸음이 너를 따라잡을까(Will the following footsteps catch me).” 주인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발걸음은 너를 파괴하려는 추적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와 함께 걸어가려는 너 자신의 또 다른 그림자의 발걸음이다. 이제 그만 도망치고, 너의 그림자와 화해할 시간이다.”

시드는 천천히 손을 들어, 주인의 손을 잡았다. 두 개의 손이 맞닿는 순간, 주변을 가득 메웠던 짙은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안개 너머로, 희미하게 새로운 풍경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초원처럼 보였다. 그러나 'Flaming'의 현란한 환각의 초원이 아니었다. "푸른 들판에 차가운 비가 내리는(Green fields, a cold rain is falling)" 현실의 들판. 아름답지만 동시에 쓸쓸하고, 생명력 넘치지만 동시에 유한한, 바로 그가 떠나왔던 현실의 풍경이었다.

그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얻은 것은 명쾌한 해답이나 구원이 아니었다. 그가 얻은 것은 자신의 혼돈을 직시하고, 그 혼돈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작은 용기, 그리고 질문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는 힘이었다.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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