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영혼

by 남킹


어떤 이야기는 죽음 그 자체보다 무겁다. 삶의 잔해들이 기억이라는 심해에 가라앉아 부유하고, 부서지고, 예기치 않은 형태로 재결합한다. 존재의 파편들은 의식의 조류를 따라 흐르다 서로 부딪히며 새로운 의미의 편린들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연금술이며, 아니룻의 이야기는 바로 그 심연의 연금술 속에서, 망각되지 못한 채 떠도는 무게로서 시작되었다. 그의 현존은 과거의 메아리였고, 미래의 부재였다.

그의 삶을 구성했던 사건들은 시간의 뒤틀린 태피스트리처럼 엮여 있었다. 단락들은 휘어지고 왜곡되었으나, 그 속에서 길어 올린 사유의 실타래는 결코 비약의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그는 알았다, 시간은 단선적인 강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오히려 소용돌이치는 바다와 같아서, 과거와 현재, 심지어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파편까지도 한데 뒤섞여 의식의 해안으로 밀려왔다. 기억은 더욱 그러했다. 안개처럼 자욱하다가도 섬광처럼 터져 나오는 기억의 조각들은 명확한 경계 없이 공간을 넘나들었다. 칼로 도려낸 듯한 선명함과 물에 번진 수채화 같은 모호함이 공존했다. 하여 그의 삶은 꿈결과 같았고, 때로는 꿈이 현실보다 더 농밀한 실재감을 지니고 그를 잠식했다.

삭막한 엘리베이터의 상자 속. 4층 버튼 주위로 탐욕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버튼을 누른 남녀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간의 품격을 좀먹는 듯했다. 세련됨과는 극단적으로 동떨어진, 노골적인 속물근성이 형광등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들의 모습은 단순히 투박하다기보다, 원초적 탐욕에 절어 있었다. 남자는 끈적이는 시선과 축축한 손길로 여자를 자신의 영역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눈동자에는 뿌연 욕정이 기름처럼 번들거렸고, 느슨하게 벌어진 입가에는 희미한 침 자국마저 어렸다. 여자의 육체를 훑는 그의 눈길은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원시적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계산적인 날카로움이 스며 있었다. 순간, 아니룻의 뇌리에 스친 것은 고대 로마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미소년의 이름이었다.

안티노오스의 얼굴. 왜 하필 그 이름이 떠올랐을까.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과 추락한 욕망의 기묘한 병치.

여자는 잘 익은 과육처럼 붉은 입술을 한껏 벌리며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뺨은 인위적인 홍조와 내면의 열기로 상기되었고, 눈은 덜 마른 욕망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고양이처럼 교태를 부리며 남자의 팔뚝에 붉은 손톱을 박아 넣었다. 가느다란 고통이 남자의 얼굴에 잠시 스쳤으나, 그것은 곧 더 큰 쾌락의 예고편일 뿐이었다. 아니룻은 이 모든 광경이 견딜 수 없이 불쾌했다. 신성해야 할 어떤 영역—그것이 비록 낡고 버려진 공간일지라도—에 침입한 야만스러운 침략자들을 목도하는 기분이었다. 아니룻의 시선은 의도 없이 천장으로 향했다. 번들거리는 노란 형광등 커버 안에는 죽은 벌레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마치 그 저속한 장면을 지켜보는 수천 개의 죽은 눈동자처럼. 싸구려 화장품의 인공적인 향기와 저급한 위스키의 알코올 향이 뒤섞여 밀폐된 공간의 공기를 질식시킬 듯 채웠다. 여자가 다시 한번 뱀처럼 몸을 뒤틀었다. 그 몸짓은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치명적인 독사의 움직임을 닮아 있었다.

게으름에 절은 듯, 혹은 무게에 짓눌린 듯, 승강기는 느릿느릿 위층을 향해 움직였다. 총 16층짜리, 한때는 고급을 표방했던 오피스텔. 두 개의 엘리베이터가 건물의 양 날개처럼 배치되어 있었다. 각 엘리베이터에는 네 개의 버튼 패널이 벽면을 따라 붙어 있었다. 그는 오른쪽 엘리베이터를 탔어야 했다. 그쪽이 그가 사는 12층으로 가는 더 자연스러운 경로였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금속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힌 후였다. 아차, 하는 후회와 함께 불길한 예감이 스멀거렸다. 이 왼쪽 엘리베이터는, 4층의 유일한 거주자—저 여자—가 주로 이용하는 통로였다. 그녀의 존재가, 그녀의 저급한 욕망의 파편이 그의 의식 속으로 역겹게 스며들었다.

이 도시의 혈관 곳곳은 이미 오래전에 부패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멍청한 시공사는, 이곳이 온갖 잡동사니 같은 인간 군상들이 뒤섞여 사는 우범 지대라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어울리지 않는 고급 오피스텔을 세웠다. 번영의 환상을 팔려 했지만, 환상은 현실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그들은 단기적인 이익만을 좇았고, 이제 그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곳이 약속했던 고상함과 안락함을 찾아왔던 이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그들의 빈자리는 더 깊은 절망과 무관심으로 채워졌다. 고급스러움을 추구하던 이들의 발길이 끊긴 복도는 이제 언제나 싸늘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었다. 떠나지 못한 넋들, 혹은 떠날 곳 없는 넋들이 복도를 배회하는 듯했다. 아니룻은 종종 그들의 시선, 혹은 그 시선의 잔영을 느꼈다. 당연하게도, 건물 내부는 성한 곳이 남아나지 않았다.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이미 뜯겨나가고 사라졌다. 황량한 폐허의 전조였다.

이 공간은 죽음과 삶의 잔해가 기이하게 혼종된 곳이었다. 공동묘지처럼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빌딩은 이제 낡은 누더기처럼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의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인간들이 이곳에 마지막 터를 잡았다. 만일 그에게 한 줌의 재기 의지라도 남아 있었다면, 결코 이곳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니룻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파멸은 이미 그의 문턱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것만이 흔들리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의 삶은 실질적으로 이미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살아있는 유령이었다.

낮고 신경질적인 쇳소리가 마찰음을 내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4층이리라, 아니룻은 추측했다. 그가 탄 왼쪽 엘리베이터의 패널에는 4층 버튼이 없었다. 대신 5번 버튼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도착을 알렸다. 이 건물에서는 미신이 건축 설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동양에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숫자 4는 왼쪽 엘리베이터에서 삭제되었다. 반면, 복도를 디귿(ㄷ) 자로 돌아야 나타나는 오른쪽 엘리베이터의 패널에는 서양에서 불길하게 여기는 숫자 13이 없었다. 두 개의 엘리베이터, 두 개의 빠진 숫자. 마치 서로 다른 차원, 서로 다른 금기를 가진 두 개의 세계가 이 낡은 건물 안에서 위태롭게 공존하는 듯했다. 숫자의 경계마저 모호해진 이 공간에서, 그는 종종 자신이 사는 12층으로 가기 위해 오른쪽 엘리베이터에서 13층 버튼을 눌러야 하는 아이러니를 겪었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숫자가 가진 고유한 의미마저 해체되는 듯한 감각.

문이 억지로 열리는 듯 신음 소리를 냈다. 여자가 커다란 하품을 하며 휘청 내렸다. 남자는 술에 취한 듯, 혹은 욕정에 지친 듯 비틀거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문은 다시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낡은 쇳덩이는 다시 한번 몸부림치듯 흔들리고 기우뚱거리더니, 이내 부르르 떨었다. 오래된 금속 기계는 마치 희미한 영혼이라도 깃든 것처럼,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는 듯했다. 엘리베이터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멈칫하더니, 다시 위층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긁히고 찌그러진 벽면에는 오래된 거울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간당간당하게 매달려 있었다. 거울은 그 안에 일그러진 엘리베이터 내부의 풍경을 가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공허한 거울이었다. 사물을 제대로 반사하지 못하고, 뿌옇게 흐려져 무엇이 비치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구석에는 언제부터 쌓였는지 모를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쓸모를 잃은 것들, 버려진 욕망의 잔해들. 이곳을 장식한 모든 낡고 해진 것들은 소멸이라는 종착역을 향해가는 과정을 심미적으로, 혹은 처절하게 드러내는 듯했다. 체념과 자포자기의 기운이 바닥에 끈적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어떤 행동에도 삶의 의지가 실려 있지 않았다. 아니룻은 자기 자신을 포기한 지 이미 오래였다. 그는 자신의 영혼마저 이 세상의 순환 고리에서 이탈시켜, 먼지처럼 흩뿌릴 작정이었다. 생명의 윤회를 거부하고, 살아 숨 쉬는 개체로서 다시 잉태될 가능성 자체를 근원적으로 차단하려는 시도. 그것은 존재에 대한, 혹은 존재를 강요하는 이 세계에 대한 그의 마지막 저항 방식이었다. 문득, 패널의 불빛이 그의 공허한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른쪽 패널의 13번 버튼과 왼쪽 패널의 12번 버튼이 동시에 희미하게 반짝였다. 엘리베이터가 12층에 도착하며 정지했다. 기계는 잠시 동안, 마치 자신의 존재 이유를 음미하듯,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적 멈춤 이상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텅 빈 복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잿빛 어둠이 먼지처럼 자욱하게 번져 있었고, 복도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바닥에 나뒹구는 비닐봉지를 휘감아 올렸다. 천장의 낡은 형광등이 불안정하게 깜빡이며 노란 빛을 토해냈다. 까딱, 까딱거리는 그 빛은 마치 죽어가는 생명의 마지막 경련 같았다.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잡동사니들이 복도 구석구석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사물들의 무덤. 누군가 살았던 흔적, 누군가 버리고 떠난 기억의 파편들이 복도를 음울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는 그 잔해들을 헤치며 걸어 나갔다. 마침내 1214호 문 앞에 멈춰 섰다. 1213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 옆 벽면에 희미하게 남은, 무언가를 뜯어낸 자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원래 1213호였음을. 건물의 설계자는 미신을 현실의 공간에 투영하여 불운한 숫자를 지워버렸지만, 그 흔적까지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리 감추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상처의 흉터처럼, 과거의 진실을 희미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낡고 뒤틀린 문. 군데군데 녹이 슬어 붉은 눈물 자국 같은 얼룩을 남긴 손잡이. 그는 버튼식 도어락에 떨리는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주 미세한 떨림이었지만, 그 순간 그의 존재 전체가 그 떨림 속에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8.

그가 기억하는 거의 유일하게 명료한 숫자 조합. 1214호의 각 자리 숫자를 모두 더하면 8이 된다는 단순한 연상에서 비롯된 비밀번호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을까. 그는 이제 그것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그는 현관을 점령하듯 쌓여 있는 낡은 신발 무더기를 힘겹게 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 신발들은 대부분 그의 것이 아니었다. 혹은, 그의 것이었으나 이제는 완전히 낯설어진 과거의 유물들이었다. 방 안은 혼돈 그 자체였다. 갈가리 찢어진 그의 삶이 남긴 마지막 흔적들처럼, 모든 것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자취를 감춘 기억의 더미 위로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다. 버려진 물건들에는 유령조차 스며들기를 꺼리는 듯한 공허함이 감돌았다. 갈라지고, 으깨어지고, 파이고, 마모되고, 더러워진 것들. 한때는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존재했던 가여운 사물들. 그것들은 이제 모두 본래의 쓸모를 상실한 채, 존재의 잔해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아니룻의 눈에는, 그 스스로도 저 사물들과 다르지 않게, 완전히 쓸모없어진 존재로 비쳤다.

무게는 존재의 근원적 증거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 그 무엇보다 가벼웠다. 오래된 침대에 몸을 뉘었을 때, 매트리스는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고, 내려앉은 먼지조차 그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깊은 공허함이 공간을 잠식했다. 그의 존재는 이 세계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았다. 그의 무게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가벼웠다. 시선은 천장으로 향했다. 검은 곰팡이가 핀 얼룩이 불규칙한 곡선을 그리며 퍼져 있었다. 무정형으로 번진 그 자국은 마치 모든 소음을 삼켜버린 듯 음울한 침묵을 자아냈다. 그는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순간적인 즐거움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예고 없이 교차했다. 그의 감정은 오로지 그의 내부에서만 요동칠 뿐, 외부 세계와는 어떤 연결고리도 갖지 못했다. 그것은 철저히 고립된 그의 것이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누런 한 줄기 햇빛은 때로 고통 그 자체였고, 해 질 녘의 가녀린 주황색 노을은 역설적인 안락함을 선사했다. 밤에는 이유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고, 낮에는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는 매번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발작적인 꿈에서 깨어났지만, 허공을 붙잡을 손잡이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의 존재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미궁 속에 갇혀 표류하고 있었다. 그가 머무는 빈 곳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듯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스스로 위축되어 갔다. 머뭇거림과 서성거림이 그의 일상이 되었다. 그의 영혼은 이 세계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채, 경계 위를 위태롭게 떠돌고 있었다.

떠나지도, 머물지도 못하는 가여운 영혼.

"..."

그때,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얇았다. 종이처럼, 혹은 망각의 막처럼 얇은 벽 너머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속삭이는 듯, 혹은 신음하는 듯한 소리.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의 마찰음. 거칠고 불규칙한 호흡. 너무나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음성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여자의 목소리. 목소리는 아니룻의 의식 속에 날카로운 파편처럼 스며들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바로 옆방에 있었다. 4층을 독차지하고 살던 그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봤던 그 남자와 지금, 정사를 펼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벽을 타고 전해오는 미세한 진동이 공기 전체를 흔드는 듯했다. 손끝이 제어할 수 없이 떨려왔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여자는 분명히 4층에서 내렸다. 그의 두 눈이 그 순간을 똑똑히 목격하고 증명했다.

내 눈으로 똑똑히 관찰하지 않았는가! 그 늘어진 철문이 힘겹게 닫히던 순간을!

혼란과 두려움이 뒤엉켜 그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세상이 송두리째 삐딱하게 어긋나 버린 듯한 감각. 그가 존재하는 이 공간이 더 이상 그가 알던 곳이 아닌, 미지의 영역으로 변모해 버린 듯했다. 과거, 그의 몸이 산산조각 나 흩어질 때조차 이 정도의 혼란은 아니었다. 냉엄한 현실 감각이 희미한 상상의 영역을 짓눌렀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이어지는 소음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찢어질 듯 앙칼진 비명. 이것은 결코 절정의 순간을 수식하는 황홀경의 메아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고통의 울부짖음이었다.

벽에 무언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격렬한 사랑과 처절한 절망이 공존하는 듯한 역설적인 소음의 향연. 높낮이가 거칠게 요동치는 호흡 소리. 마치 묵은 기억의 봉인이 풀리며 흐느적거리는 영혼의 마지막 몸짓 같았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그 순간, 육체는 최후의 발악과도 같은 몸부림을 친다. 이전과는 다른, 예사롭지 않은 마지막 여정의 소리. 그러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절망적인 목소리가 벽을 할퀴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뒤따른 것은 깊고 낮은 소음.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근원으로 회귀하는, 낯설고도 궁극적인 여정의 시작.

아니룻은 문득 색깔과 소리가 모두 사라진 무채색의 세계를 상상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절대적인 어둠.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었다. 모든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꽉 들어찼던 어느 오후의 공원. 생기 넘치는 초록과 다채로운 꽃들 속에서, 황량했던 그를 다시 심장이 뛰게 만들었던 한 여인. 그녀가 나타난 순간, 그가 보는 모든 것은 사랑스러움으로 충만해졌다. 그녀는 그의 텅 빈 세계 안으로 들어와 빛이 되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의 무의미했던 삶에 처음으로 의미라는 것을 부여했다.

마치 그의 몸이 텅 빈 그릇이 된 듯, 처음에는 잔잔한 평온함이,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듯 뜸을 들인 뒤, 마침내 주체할 수 없는 행복감이 온몸 구석구석을 가득 채웠다. 그녀를 통해, 비로소 그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존재 이유 그 자체였다.

"당신은 원칙이라는 게 전혀 없어 보여요." 여자가 웃으며 말했을 때, 그는 오히려 당황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는 확고한 신념이나 원칙 없이, 그저 물처럼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그 무방향의 흐름이 결국 그를 그녀에게로 데려왔다. 그녀는 그의 그런 점이 좋다고 했다. 예측 불가능해서, 규정되지 않아서.

사색과 사랑으로 충만했던 날들은 꿈결처럼 아련하게 이어졌다. 세상은 더 이상 고통스럽거나 버겁지 않았다. 환한 빛과 완벽한 조화로움이 형상화되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마치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선 듯한 경험이었다. 아니룻은 이 모든 행복이 언젠가는 사라질 덧없는 꿈이 아닐까,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존재는 너무나 생생했고, 그녀의 사랑은 너무나 확고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당신을 찾아 헤맨 거야. 내 존재의 모든 순간이 당신을 향하고 있었던 거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 모든 것에 당신의 그림자가 이토록 깊이 새겨져 있겠니?" 그녀의 속삭임은 그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진동시켰다. 그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누군가에게 이토록 절실한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의 시작이자 끝, 그의 모든 것이었다.

"터져버릴 것만 같아." 숨이 턱 끝에 걸려 불안하게 대롱거렸다. 그의 안에서 들끓는 감정은 그의 육신이라는 그릇에 온전히 담아둘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뜨거웠다.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하게 증폭되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듯했다.

여인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의 입술에 부드럽게 손가락을 댔다. 그녀의 손길은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섬세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는 어리석은 관념과 불안의 그림자들을 떨쳐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길하고 천박한 현실의 무게는 애써 던져버려야 했다. 바로 그때, 두텁고 녹슨 창문이 삐걱거리며 갈색 바람을 안으로 쏟아냈다. 낡은 창틀은 끄덕 끄덕거리며 열림과 닫힘을 불안정하게 반복했다. 그 순간 그는 극심한 무기력감에 사로잡혔다. 가냘픈 저항의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광경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동적으로 흘러갔고, 바람은 그의 허락 없이 공간을 휘저었다. 가녀린 희망의 길 위에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 공포와 절망이 대지를 질식시키듯 덮쳤다. 이 세계는 개인의 행복 따위를 쉽게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인간은 언제나 근원적으로 낯선 이방인이었다.

진실하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더 진실처럼 행세하는 이상한 고등 동물. 거짓과 탐욕, 폭력과 파멸의 그림자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한때 빛나던 지성과 선한 철학은 점차 힘을 잃고 어둠 속에 잠식되었다. 동족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멸망으로 이끄는 기이하고도 슬픈 생물. 어쩌면 멸종의 순간이 닥쳐와야만, 비로소 지나간 모든 것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아름다웠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인류의 역사는 거대한 아이러니의 연속이었다.

아내가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투명한 눈물이 그의 영혼을 적셨다. 기억 속 그녀의 슬픔은 현재의 그의 고독과 공명했다.

'나의 슬픔, 나의 존재, 나의 모든 것. 결국, 당신뿐이었다. 나는 언제나 당신의 사랑을 갈망하였다.' 그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축축한 감각에 손을 가져갔다. 피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 붉은 핏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실제 피였을까, 아니면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온 슬픔의 응결이었을까.

바로 그때, 낡은 건물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렸다. 지진이었다. 혹은 건물이 마침내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전조였다. 사방의 벽과 천장에서 갈라진 틈새로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특정한 기하학적 형태를 이루던 곡선과 직선들이 뒤틀리고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회색으로 포장되었던 세상의 색들이 부서지며 빛 속을 어지럽게 유영했다. 따사로웠던 감정의 희미한 흔적들. 눈부시게 경이로웠던 과거. 더없이 미천하고 황량한 현재. 암울하고 절망적인 미래. 시간은 그를 철저히 배신했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도 그녀의 기억은 선명했다. 호기심과 애정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길에 그의 얼어붙었던 영혼이 따스하게 녹아내리던 순간. 그녀의 눈은 마치 세상의 모든 빛과 별들을 담고 있는 작은 우주 같았다. 그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목격하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죽음이 끝이 아니잖아요. 영원히 당신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게 아니라, 단지 지금처럼 당신을 보지 못한다는 게 슬플 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기억 속에서 예언처럼 울려 퍼졌다. 그는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여전히 이 폐허가 된 세계를 정처 없이 배회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이 사라진 공간. 가녀린 희망의 길 위에 낮게 드리워진 우중충한 하늘. 세상의 종말은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의 영혼만은 이곳에 남겨두었다. 목적 없이 서성거리는 불쌍한 관념의 조각. 폐허가 된 도시 위를 떠돌며, 그는 여전히 아내의 희미한 흔적을 찾아 헤맸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에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 인력처럼 여전히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듯했다.

2044년의 마지막 날들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염된 검은 바람이 폐허 위를 다시 한번 휘몰아쳤다. 하늘에서는 회색빛 방사능 낙진이 눈처럼 조용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흩날렸다. 인류 문명의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거나, 거의 완성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니룻에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그녀가 그의 곁을 떠났던 바로 그 순간에.

아니룻은 깨진 창문 너머로 펼쳐진 풍경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도시의 폐허. 그것은 마치 세계의 종언을 알리는 거대한 묘비명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어쩌면 새로운 시작, 혹은 영원한 기다림의 시작일 뿐이었다. 아니룻은 자신의 영혼이 더 이상 육체의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여전히 이 파괴된 세계에 어떤 미련처럼 묶여 떠돌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했다. 그는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녀의 영혼을. 혹은 그녀의 영혼이 자신을 찾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신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어요." 바람결에 실려 온 듯,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기억이 만들어낸 환청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시공간을 넘어 전달된 그녀의 진심이었을까? 이제 아니룻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그가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것, 혹은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는 불변의 사실뿐이었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이 파멸했지만,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은 시간과 공간, 심지어 죽음의 경계마저 넘어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것은 엔트로피의 법칙마저 거스르는 듯한, 모든 것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이었다.

마침내 아니룻은 깨달았다. 그의 영혼이 이 황량한 폐허 위를 떠도는 이유를.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영혼이 이 세계의 마지막 중력마저 떨치고 떠나갈 때, 그는 그녀와 함께 떠날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 무너져가는 세계에 유령처럼 남아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떠도는 영혼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부서진 기억 속에는 언제나 그녀가 선명하게 존재했고, 그의 희미해져 가는 영혼 속에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에게 단단히 묶여 있었다. 영원히.

"기다릴게요. 당신이 올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그의 목소리는 검은 바람에 실려 폐허 속으로 힘없이 흩어졌지만, 그 안에 담긴 약속의 무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건물이 다시 한번 거칠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한 진동이었다. 벽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천장이 굉음과 함께 내려앉았다. 세계는 마침내 완전한 종말을 맞이하고 있었지만, 아니룻의 영혼은 그 붕괴의 중심에서 오히려 고요하게,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떠도는 영혼. 기다리는 영혼. 사랑하는 영혼.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소음 속에서, 아니룻은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이 폐허 속 어딘가에서, 혹은 시간의 저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결국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자, 존재의 이유였다.

떠도는 영혼은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의 존재는 소멸되지 않는 사랑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했다. 어떤 이야기보다도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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