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시간의 경계가 흐릿한 여명, 아직 어둠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흑해의 검푸른 물결이 오래된 선체의 목재를 어루만지는 나직한 속삭임을 나는 기억한다. 그 소리는 마치 망각된 자장가처럼, 차갑고도 다정했다. 신혼여행. 아내와 나는 한 달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부유하듯 튀르키예와 루마니아의 낯선 도시들 사이를 떠돌았다. 그녀의 이름은 엘리프였다. 눈부신 햇살 아래 빛나는 에게 해처럼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 우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오래된 성벽 아래서 비잔틴의 영광과 오스만 제국의 쓸쓸한 퇴락을 함께 목도했고, 부쿠레슈티의 고색창연한 대성당 첨탑 아래서는 서로의 감춰진 과거 조각들을 조심스레 꺼내어 맞추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가능성으로 가슴을 채웠다. 금색 실로 수놓은 듯한 석양 아래, 그녀의 웃음소리는 루마니아 평원의 바람 소리에 섞여 내 귓가에 영원히 남을 각인처럼 새겨졌다.
5월의 마지막 날들이 안개처럼 스러져 갈 무렵, 우리는 마치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흑해의 작은 외딴섬에 닻을 내렸다. 늦봄의 오후,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나른했고, 섬은 짙은 안개 베일에 싸여 신비로운 자태를 감추고 있었다. 그 이름조차 생경한 섬. 그러나 기이하게도, 그곳에서의 시간, 잔잔히 밀려와 부서지던 파도 소리, 안개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엘리프의 미소, 우리가 나누었던 어리광 섞인 아양과 풋풋한 거드름, 그 모든 감각의 파편들이 마치 어제 일처럼, 혹은 영원히 반복되는 꿈처럼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다.
하늘은 납빛으로 무겁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바람은 마치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거대한 회색 구름의 장막 아래, 섬은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듯 짙푸른 원시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섬 주민은 백 가구를 넘지 않았고, 그들은 모두 해안선을 따라 완만하게 휘어진 만(灣)에 터를 잡고 있었다. 대부분은 거친 바다와 평생을 씨름해 온 어부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섬에는 발 디딜 만한 평지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들쑥날쑥 솟아오른 기암괴석과 그 위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작은 돌집들, 수백 년 혹은 그 이상의 풍파를 견뎌낸 듯한 고목들, 그리고 섬의 심장부를 가르듯 깊게 파인 협곡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시선을 강탈한 것은 섬의 서쪽, 마치 신의 분노를 사 추락하다 멈춘 듯한 아찔한 절벽 위에 홀로 서 있는 낡은 등대였다. 하얀 회벽은 세월의 때를 타 누렇게 바래 있었고, 검붉은 녹이 슨 철제 난간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져 내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듯 좁고 험준했다. 아슬아슬한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뱀처럼 구불거리며 이어진 오솔길은, 혈기 왕성한 젊은이라 할지라도 금세 가쁜 숨을 몰아쉬며 혀를 내두를 만한 극한의 난코스였다. 그러나 그 길을, 팔순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등대지기 알페르노는 매주 한 번씩, 당나귀 등에 식료품과 생필품을 싣고 묵묵히 오르내렸다. 그의 굽은 등에는 섬의 역사만큼이나 깊은 고독과 책임감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이 섬에 대한 단서는 내가 런던의 어느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한, 양피지에 희미하게 기록된 고문서에서 비롯되었다. '유혹의 노스렁게일(Nosthrungeil)'이라 불리는 이곳, 그 심장부에 신비로운 '레스피로디비노(Respiro Divino, 신의 숨결)' 동굴이 잠들어 있다는 기록. 고문서는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그 단편적인 기록만으로는 동굴의 정확한 위치나 그것이 품은 심오한 의미를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내 고고 언어학자로서의 직감, 아니, 그 이상의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이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절벽 위의 고독한 등대, 그리고 그 아래 깊숙이 숨겨져 있을 미지의 동굴. 그곳에 내 이름 '아르미르'가 열세 번이나 언급된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II
알페르노 영감을 처음 목격한 것은 이튿날 이른 아침이었다. 엘리프와 나는 섬에서 유일하게 문명의 형태를 갖춘, 호텔과 식당, 그리고 잡화점을 겸하는 3층짜리 낡은 석조 건물의 2층 베란다에서 느긋한 아침 식사를 즐기고 있었다. 갓 내린 진한 터키식 커피의 쌉쌀한 향과 오븐에서 막 꺼낸 따끈한 빵의 구수한 냄새, 그리고 이 지역 특산물인 염장 청어 요리의 짭짤하면서도 비릿한 풍미가 뒤섞여 아침 공기를 채웠다. 해안가에서 불어오는 미풍에는 바다의 날것 그대로의 냄새가 실려 와 코끝을 간질였다. 테이블 옆, 밤새 내린 비로 생긴 작은 웅덩이에서는 재빠른 제비 한 마리가 물방울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즐겁게 목욕을 하고 있었다. 엘리프는 그 모습을 보며 아이처럼 맑게 웃었고, 나는 그 웃음소리에 잠시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었다.
바로 그때, 나는 호텔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노인을 발견했다. 눈처럼 하얗게 센 머리카락, 오랜 세월의 무게와 고된 노동으로 단단하게 굽은 등, 그리고 마치 고대 지도의 협곡처럼 깊게 파인 주름들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마치 섬 그 자체의 의인화처럼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바로 등대지기 알페르노임을 직감했다. 심장이 가볍게 뛰었다. 나는 엘리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서둘러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1층으로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영감님."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그러나 약간의 흥분을 감추며 말을 건넸다.
"뉘신가?" 알페르노는 걸음을 멈추고, 낯선 이방인을 향해 무심한 듯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빛은 흑해의 심연처럼 깊고 헤아리기 어려웠으며, 표정에는 오랜 고독과 세상사에 대한 무관심이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수많은 주름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그의 얼굴은 마치 풍파에 깎인 해안 절벽 같았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기이한 기품을 발견했다. 그것은 세속적인 부나 권력과는 다른 종류의 것, 마치 잊혀진 왕조의 마지막 후예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고결함과 내면의 강인함이었다.
"아, 네. 저는 아르미르라고 합니다.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 중입니다." 나는 엘리프가 있는 2층 베란다를 잠시 올려다보며 말했다.
"축하하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겠지." 알페르노는 짧게 대답하고는, 마치 내 존재를 잊은 듯, 낡은 카운터 앞에 놓인 자신의 일주일 치 식료품 꾸러미를 능숙하게 챙기기 시작했다. 거칠고 투박했지만, 그의 손놀림은 나이에 비해 놀랍도록 단단하고 민첩했다. 수십 년간 척박한 자연과 싸우며 외로운 등대를 지켜온 자의 흔적이 역력했다.
"저... 영감님께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만..." 나는 그의 옆모습과 미세한 표정 변화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내 심장은 다시금 불안과 기대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섬에 온 진짜 목적, 레스피로디비노 동굴을 찾아야 한다는 강렬한 열망이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부탁?" 그의 목소리에는 미미한 의구심이 스쳤다.
"네. 다름이 아니라... 영감님께서 지키시는 등대를 꼭 한번 구경하고 싶습니다." 나는 최대한 순진한 호기심을 가진 관광객인 척 연기했다. 그의 경계심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안 될 말이네." 그의 대답은 단호했다.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는 곳이야. 길도 험하고, 절벽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지... 더구나 부인과 함께 오르기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 그는 내 뒤, 베란다의 엘리프를 향해 턱짓을 했다.
"아닙니다. 저 혼자 갈 생각입니다. 아내는… 아내는 호텔에서 쉬면서 기다릴 겁니다."
"혼자? 방금 신혼여행이라고 하지 않았나?" 알페르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깊은 눈이 처음으로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노인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본능이 무언가 표면 아래 숨겨진 것을 감지한 듯했다. 그의 시선은 마치 탐침처럼 내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네. 그렇습니다만..." 나는 더 이상 그의 예리한 눈빛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제 진실을 말해야 할 때였다. 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레스피로디비노'라는 곳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알페르노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 남아있던 온화함의 기색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눈빛은 빙하처럼 차갑게 얼어붙었고, 굳게 다문 입술은 화강암처럼 경직되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는 돌연 엄숙하고 위압적으로 변했다. 마치 천 년 동안 봉인된 성지의 문을 지키는 수호자처럼, 범접할 수 없는 존엄함이 그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당신… 우연히 이 섬에 발을 들인 것이 아니로군." 그의 목소리는 이제 파도에 씻긴 조약돌처럼 단단하고 차가웠다.
"네, 영감님. 저는 아르미르, 고고 언어학자입니다. 주로 출처나 연대가 불분명한 고문서를 연구하고 있지요. 오래된 기록 속에서 이 섬과 '레스피로디비노'에 대한 언급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그 동굴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순수한 학문적 탐구심에서입니다."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그러나 내 이름에 얽힌 개인적인 이유는 숨긴 채 말했다.
알페르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꿰뚫어 볼 듯 응시했다. 그의 침묵은 어떤 대답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마치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 숨겨진 동기와 불안까지 남김없이 읽어내는 듯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내 진심, 혹은 적어도 내가 보여주고자 하는 진심이 그에게 전달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고, 오직 낡은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만이 우리 사이의 긴장을 채우고 있었다.
III
끈질기고 지루한 설득의 시간은 오전 내내 이어졌다. 처음에는 마치 철옹성처럼 완고하게 거절하던 알페르노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내 간절함과 학문적 열의에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여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내가 발견한 고문서의 복사본 일부 – 레스피로디비노와 섬에 대한 묘사 부분만을 – 보여주며, 이것이 단순한 관광객의 치기 어린 호기심이 아니라, 잊혀진 역사의 한 조각을 복원하려는 학자로서의 진지한 탐구임을 거듭 강조했다. 동굴의 신성함이나 비밀을 훼손할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직 기록하고 이해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내 설명 뒤편, 마음 한구석에서는 고문서에 얽힌 또 다른, 훨씬 개인적이고 강렬한 호기심이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낡은 양피지 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13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하는 나의 이름, '아르미르'. 이것이 과연 역사의 장난 같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운명적인 속삭임, 나를 이곳 흑해의 외딴섬으로 이끈 보이지 않는 손길일까?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야말로 나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이었다. 이 의문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을 넘어,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 무렵, 알페르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나의 끈질긴 청을 받아들였다. 그의 눈빛에는 여전히 경계심이 서려 있었지만, 체념과 일말의 이해가 섞여 있는 듯했다. 그는 그러나 한 가지 엄중한 조건을 내걸었다. 동굴을 목격한 후에는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말고 즉시 섬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질문도, 기록도 최소화하고, 그곳에서 본 것을 함부로 발설하지 말 것.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오히려 안도하며 기꺼이 그 조건에 동의했다.
우리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점심 – 딱딱한 빵과 치즈, 그리고 올리브 몇 알 – 을 서둘러 마친 후, 등대를 향한 가파른 산행을 시작했다. 나는 노인의 어깨에 걸린, 보기에도 묵직한 짐 꾸러미를 보고 자연스럽게 나누어 지겠다고 제안했다. 그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다. "내 평생의 업이오. 젊은이의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네." 그의 목소리에는 자존심과 익숙한 고독이 묻어났다. 하지만 결국 나의 거듭된 고집과, 어쩌면 이방인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에 밀려, 그는 마지못해 짐의 절반 가량을 내게 넘겨주었다. 침대 널빤지를 엮어 만든 듯한 투박하고 조악한 지게는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돌덩이처럼 단단한 식료품과 기름통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다. 나는 팔순 노인의 상상 이상의 근력에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매주 이런 무게를 짊어지고 저 깎아지른 듯한 절벽 길을 오른다니, 그의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그의 등대지기로서의 삶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문명과 단절된 채 홀로 보내는 무수한 밤낮, 사나운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외로이 등대의 불빛을 지키는 고독한 의무, 그리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러나 묵묵히 이어져 온 헌신.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등대처럼 느껴졌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오히려 기운 넘치는 듯 가볍게 웃어 보이며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앞만 보고 걸었고, 표정은 시종일관 무심하고 심드렁해 보였다. 하지만 때때로, 그는 마치 혼잣말을 하듯, 혹은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를 돌아보지 않고 나직하게 말을 건네곤 했다. 주로 이 섬의 이름 없는 야생화나 기암괴석에 얽힌 전설, 등대의 건립과 관련된 오래된 역사, 그리고 그가 겪었던 폭풍우 이야기 등이었다. 그의 말은 투박했지만, 그가 말을 이어갈수록 나는 그의 목소리 톤에서 이 섬과 등대에 대한 묘한 애착과 깊은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장소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분신,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하는 듯한 친밀함과 숙명적인 연결이었다.
숨 막히는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2시간이 넘도록 가파른 바위투성이 산길을 올랐고, 마침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등대 앞에 도착했다. 무거운 회색빛 하늘이 금방이라도 비를 뿌릴 듯 우리 머리 위를 낮게 덮고 있었다. 등대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낡고 황량했지만, 그 자체로 거대한 위엄을 풍기고 있었다. 나는 마치 심장이 터질 듯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알페르노는 그런 내 지친 몰골을 흘깃 곁눈질하더니, 그의 주름진 입꼬리를 아주 희미하게,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살짝 올렸다. 그 찰나의 미소는 마치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하다' 혹은 '아직 멀었다, 젊은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선, 저 위 산 정상까지 올라가시오. 여기서 30분 정도 더 가야 할 거요. 정상에 서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뉠 텐데, 바다 쪽으로 급격히 꺾어지는 아주 좁은 길을 찾아 내려가야 하오. 자세히 보면 바위틈에 푸른색 헝겊 매듭이 보일 것이오. 그 매듭이 당신을 동굴 입구까지 인도할 거요. 명심하시오, 매우 조심해야 하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니. 경사가 아주 심하고 길이 미끄럽소."
여전히 거친 숨을 헐떡이는 내게, 알페르노는 다시금 그의 본래의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다음의 주의사항을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일러주었다. 그의 눈빛은 경고 이상의, 어떤 심오한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동굴 속으로 대략 100미터쯤 발을 들여놓으면, 공간이 넓어지면서 두 갈래 길이 나타날 것이오. 그 갈림길 중앙 벽면에, 아주 섬뜩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을 거요. 그 경고문을 반드시 읽고, 그 뜻을 존중하시오. 절대로, 절대로 어느 길로든 더 깊이 들어가지 마시기를 바라오. 호기심이든, 탐욕이든, 그 어떤 이유에서든 말이오. 그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간 자들 중,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소."
그의 마지막 말은 마치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내 등골을 관통하며 오싹하게 만들었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겪었을까? 그들은 과연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들의 운명은 내게 닥칠 미래의 예고편은 아닐까? 나는 순간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불길하게 뛰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내딛은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내 안의 '아르미르'를 향한 부름은 공포보다 강렬했다. 나는 굳은 결심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때마침, 여름을 재촉하는 소박하고 가느다란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친 육신을 간신히 일으켜 세운 뒤, 다시금 천근만근 무거워진 발걸음을 산 정상을 향해 옮기기 시작했다. 등대는 이제 내 등 뒤로 서서히 작아지고 있었다. 돌아보니, 알페르노는 등대 입구의 낡은 문틀에 기대어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비바람 속에 홀로 선 그의 모습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고대 신화의 한 장면처럼, 비장하고도 웅장하게 느껴졌다. 그는 단순한 등대지기가 아니었다. 그는 경계의 수호자였다.
IV
그렇게 30여 분, 빗줄기는 어느새 굵어졌다가 다시 가늘어지기를 반복하며 내 옷을 흠뻑 적셨다. 마침내 나는 안개와 비구름을 뚫고 산꼭대기, 섬의 정수리에 섰다. 발아래 펼쳐진 광경은 숨 막힐 듯한 장관이었다. 나는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세상의 끝에 선 듯한 경탄의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대담하고 독창적인 상상력을 지닌 화가라 할지라도, 눈앞에 펼쳐진 이 압도적인 풍경의 장엄함과 신비를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하리라.
저 멀리, 아득한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가 경계 없이 하나로 녹아들어 희미하고 몽환적인 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끝없이 펼쳐진, 비에 젖어 더욱 깊고 짙어진 청록색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간간이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수면 위를 비출 때면, 바다는 마치 수천수만 개의 에메랄드 조각을 흩뿌려 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바람은 마치 거장의 섬세한 붓질처럼, 파도 위에 미세하고 변화무쌍한 선들을 끊임없이 새기고 있었다. 훅, 하고 바다의 짠 내음과 젖은 흙냄새, 그리고 소나무와 삼나무의 진한 솔 향기가 뒤섞인 바람이 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저 멀리 해안선 가까이에서는, 하얀 포말의 뱃길을 남기며 느릿느릿 움직이는 작은 어선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거대한 푸른 화폭 위에 찍힌 작은 점처럼 아스라이 보였지만, 각자의 고독한 항로를 따라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해안선을 따라서는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용의 등줄기처럼 제멋대로 솟아 있었고, 그 산들의 허리춤과 골짜기 사이사이에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돌집들과 오래된 교회당의 첨탑이 희미하게 보였다. 가파른 비탈에 뿌리내린 강인한 나무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깊은 계곡이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수백 년 전에 멈추어 버린 듯한 태고의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이곳 정상은 마치 하늘과 맞닿은 거대한 성벽 위의 망루와 같아서, 시선을 어디로 돌리든 멀리 잿빛 항구와 점점이 떠 있는 배들, 그리고 섬의 작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마을 한가운데, 십자 도로 옆에 자리 잡은, 우리가 머무는 낡은 호텔의 선명한 갈색 지붕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다. 그때, 쉼 없이 날갯짓하며 까옥, 까옥 울어대는 갈매기 두 마리가 마치 무심한 안내자처럼 내 머리 위를 스치듯 낮게 날아갔다.
나는 잠시나마 엘리프를 떠올렸다. 오늘 아침, 내가 등대로 향하기 전 작별 인사를 나눌 때,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애틋한 그리움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너무 오래 걸리지 마요, 아르미르. 당신 없는 시간은 너무 길게 느껴지니까." 그녀의 따뜻한 체온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 그런데 이상하게도, 지금 이 순간, 안개 속 풍경처럼 그녀의 얼굴 윤곽이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동자 색깔, 웃을 때 입가의 주름, 그녀 특유의 향기… 늘 나의 부실한 기억력이 문제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기이한 망각이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되었더라? 그녀의 두 눈은 정말 에게 해처럼 투명한 푸른빛이었던가, 아니면 짙은 밤색이었던가? 왜 이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확신할 수 없는 걸까? 마치 그녀에 대한 기억이 편집된 필름처럼 군데군데 끊겨 있는 느낌이었다. — 그저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젯밤 호텔 옥상에서 나누었던 원초적인 쾌락의 기억뿐이었다. 드물게 자물쇠가 채워지지 않은, 녹슨 철제 옥상 문을 몰래 통과한 우리는,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별빛 아래서, 세상의 모든 시선을 벗어나 자유롭게 서로를 탐닉했다. 다양한 자세로, 속삭임과 숨결을 나누며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엘리프는 속삭였다. "이 섬, 마음에 들어요. 뭔가… 비밀스럽고 강렬해요." 그러자 나 역시 이 거칠고 불편한 섬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좋아했기에.
고문서에서는 이곳을 '유혹의 노스렁게일(Nosthrungeil)'이라고 명명했다. 그 의미심장한 이름처럼, 만약 발밑에 도사린 아찔한 절벽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금기의 장벽이 없다면, 이 순간 당장이라도 저 매혹적인 푸른 심연 속으로 몸을 던지고픈 충동적인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노스렁게일. 알페르노 영감에게 슬쩍 물어본 바로는, 이 지방의 오래된 토착 신앙에 뿌리를 둔 용어로, 천국과 지옥이라는 이분법적인 내세관에서 벗어나 좀 더 복잡하고 세분된 믿음 체계에서 파생된 개념이라고 했다. 극단적인 절제와 검소함, 금욕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이 섬 주민들에게 '노스렁게일'은, 인간 내면의 억누를 수 없는 욕망 – 즉, 이성이 아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하고픈 충동을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이 사후에 머무르게 된다는, 일종의 연옥과도 같은 형벌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유혹에 굴복한 자들의 종착지. 나는 불현듯 불안감에 휩싸였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강렬한 이끌림 또한, '노스렁게일'의 유혹은 아닐까?
V
나는 바다를 사랑한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나의 꿈속에는 늘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끝없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대양의 품속에, 나는 마치 해초나 작은 부유물처럼 아무런 저항 없이 몸을 맡기고 떠다녔다. 그 꿈속에서는 불안이나 공포 대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깊은 평온함과 충만함, 그리고 모태로 회귀하는 듯한 완전한 행복감이 나를 감쌌다. 그 꿈은 깨어난 후에도 오랫동안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나를 위로해주곤 했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막연하게나마, 내 삶의 마지막 장, 그 에필로그는 반드시 바다가 보이는 작은 섬에서 그려내리라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다짐해왔다. 창문을 열면 비릿한 바다 내음 섞인 바람이 불어오고, 나지막한 언덕 하나만 넘어도 눈부시게 펼쳐지는 짙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곳. 그 바다 위에 점점이 박혀있는 크고 작은 배들의 고독한 실루엣. 바람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일상의 배경음악이 되는 곳. 굳이 특별한 설렘이나 기대를 품지 않아도, 그저 눈만 들면 언제나 그 자리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투명한 하늘과, 그 하늘과 맞닿아 같은 색으로 빛나는 바다. 태초에 신이 모든 생명체를 물에서 빚어냈듯이, 나는 그 거대하고 심오한 물의 존재 앞에서 경외심을 느끼며 신의 섭리를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사치스럽고 감상적인 상념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전에 동굴 탐사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엘리프에게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의 불안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동시에,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는 저 미지의 동굴, 레스피로디비노가 마치 사이렌의 노랫소리처럼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부름처럼 느껴졌다. 나는 서둘러 마음을 다잡고, 알페르노가 알려준 동굴로 향하는 길을 찾아 나섰다.
알페르노 영감의 말대로, 정상에서 바다 쪽으로 급격하게 꺾어지는 좁디좁은 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길은 너무나 협소해서, 마치 거대한 바위의 틈새를 비집고 나아가는 듯했다. 성인 남성 한 명이 겨우 어깨를 스치며 지나갈 정도의 폭이었다. 길을 따라 바위틈이나 나뭇가지에 푸른색 낡은 헝겊 조각으로 만든 매듭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묶여 있었다. 마치 길 잃은 영혼을 위한 이정표처럼. 나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조심스럽게 절벽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발밑으로는 날카롭게 솟은 바위들과 아찔하게 깊은 절벽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작은 돌멩이 하나라도 굴러떨어지면 까마득한 아래까지 메아리치며 사라졌다. 단 한 번의 실수, 한순간의 방심이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한 채, 나는 숨 막히는 하산을 계속했다.
약 20여 분간의 위태로운 하강 끝에, 나는 마침내 절벽 중턱, 무성한 덩굴과 잡목 사이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동굴 입구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스스로의 비밀을 감추려는 듯, 바위의 깊은 주름 속에 파묻혀 있어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결코 눈치챌 수 없을 법한 모습이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습하고 차가운 바람이 동굴 입구를 통해 안으로 빨려 들어가며, 마치 고대 악기가 내는 듯한 낮고 신비로운 휘파람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소리는 나를 안으로 초대하는 듯, 혹은 경고하는 듯 모호하게 울려 퍼졌다.
VI
굵직한 빗방울이 잠시 쏟아지다가 이내 가느다란 안개비로 변했고, 그러다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구름이 걷히며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젖은 바위와 나뭇잎들을 눈부시게 비추었다. 섬의 날씨는 마치 변덕스러운 여인의 마음처럼 예측 불가능하게 급변했다. 혹은 섬 자체가 거대한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처럼, 스스로 호흡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듯 느껴졌다. 나는 젖은 옷을 털어내며, 우거진 잡목 가지들을 헤치고 천천히 동굴 입구로 몸을 들이밀었다. 입구는 예상보다 훨씬 더 비좁았다. 건장한 체격의 내가 겨우 어깨를 비틀고 몸을 구겨 넣어야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깥세상의 모든 소음과 빛이 일시에 차단되었다. 갑작스러운 적막과 어둠이 좁은 공간을 순식간에 지배했다. 잠시 동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오직 내 거친 숨소리와 불안하게 고동치는 심장 박동만이 귓가에 증폭되어 울렸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눈은 서서히 칠흑 같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희미하게나마 동굴의 윤곽이 드러났다. 침묵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나풀거리는 바람의 미세한 움직임 사이를 넘나들며 공간을 채웠다. 바닥은 평탄하지 않았고, 크고 작은 날카로운 돌들이 불규칙하게 삐져나와 있어 발 디딜 때마다 조심해야 했다. 한 번은 발을 헛디뎌 하마터면 발목을 심하게 접질릴 뻔했다. 다행히 나는 이런 탐사를 대비해 배낭에 강력한 휴대용 랜턴을 챙겨왔었다. 랜턴을 켜자, 한 줄기 강렬한 빛이 어둠을 가르며 전방을 비추었다. 빛이 닿는 곳까지는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석회암 동굴의 모습이었다. 폭은 딱 한 사람이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통로가 안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동굴 벽은 오랜 세월 동안 스며든 습기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랜턴 빛을 받아 매끄럽게 반짝였다. 군데군데 푸른빛과 흰빛을 띤 이끼류가 자라고 있었고,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내려 바닥의 작은 웅덩이에 부딪히며 또렷하고 규칙적인 소리를 만들어냈다. 뚝… 뚝…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흐름을 재는 메트로놈처럼,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나는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알페르노 영감의 말대로, 약 100미터쯤 – 실제 거리인지 체감 거리인지는 불분명했지만 – 안으로 들어가자, 좁았던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며 제법 널찍한 원형의 광장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훨씬 높아졌고, 기이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광장의 끝, 정면에는 마치 거대한 괴물의 두 눈처럼, 비슷한 크기의 어두운 구멍 두 개가 나란히 입을 벌리고 나를 유혹하듯 응시하고 있었다. 두 구멍 사이, 편평하게 다듬어진 듯한 벽면에는 붉은색 안료로 쓰인 듯한 오래된 경고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어와 유사하지만 약간 변형된 형태의 문자였다. 나는 랜턴 빛을 비추며 조심스럽게 해독했다.
'이 경계를 넘지 말라. 감히 들어간 자, 돌아오지 못하리니. 영원히 길 잃은 자들의 수: 33'
서른세 명. 그 숫자가 망치처럼 내 머릿속을 강타하며 차갑게 울렸다. 서른세 명의 사람들이 이 미지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빛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왔을까? 그들도 나처럼 오래된 고문서의 수수께끼나 자신의 이름에 얽힌 비밀에 이끌렸을까? 아니면 단순한 호기심, 혹은 금지된 것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갈망 때문에 이 경고를 무시했던 것일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동굴의 일부가 되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것일까?
그때, 두 개의 구멍 중 오른쪽 구멍에서부터 미세하지만 신선하고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마치 동굴 깊은 곳 어딘가에 외부 세계와 연결된 통로가 있거나, 혹은 동굴 자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 순간, 기이하고 형언할 수 없는 신묘함에 사로잡혔다. 마치 시간이 멈추고 공간이 왜곡되며, 나의 모든 감각이 일시에 마비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의식이 잠시 흐릿해지며, 내 존재가 이 동굴의 일부, 즉 차가운 돌이나 축축한 이끼처럼 생명이 없는 무생물이 되어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저 눈앞의 어둠과 벽면의 경고문을 응시할 뿐, 어떤 감정이나 생각도 없이, 텅 빈 관조의 상태. 그러다 아주 서서히, 꿈결처럼 아득하게 자연의 오케스트라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동굴 벽을 스치는 바람의 속삭임, 그리고 아주 멀리서, 심해로부터 울려오는 듯한 희미한 파도 소리가 하나의 신비로운 선율로 합쳐져 내 영혼을 부드럽게 감쌌다. 광장의 공기는 이제 두려움이나 불안 대신, 설명할 수 없는 차분함과 성스러운 믿음의 기운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낡은 가죽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고문서 복사본을 꺼내어 랜턴 빛 아래 펼쳤다. 그것은 빛바랜 양피지 위에 고대 산스크리트어로 빼곡하게 적힌 시 형식의 문서였다. 나는 미리 표시해 두었던, 레스피로디비노 동굴과 관련된 구절을 찾아 천천히, 경건한 마음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Dwé gúhe (두 개의 구멍)
Dwé pralobhane (두 개의 유혹)
Dwé jagati (두 개의 세상)
Dwé mānavā (두 개의 인간)
Śubhaṁ aśubhaṁ ca (선과 악)
Tathā dwé manasi (그리고 두 개의 마음)
Sukhaṁ duḥkhaṁ ca (쾌락과 절망)
Ānandaḥ śokaśca (행복과 슬픔)
Mokṣaḥ vināśaśca (구원과 파괴)
Tathā ékaṁ satyam (그리고 하나의 진실)
Hé Armir, tvaṁ kim icchasi? (아르미르야,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Laghimne śraddhayā, tubhyaṁ kuśalaṁ vakṣyāmi.
(가벼움에 대한 예의로 그대들에게 안부를 전한다.)
Kevalaṁ tyāgasya bhāreṇa, plavamānā ātmānaḥ hṛdayāni ca.
(단순한 벗어 던짐의 무게로 부유하는 영혼과 가슴)
Sugandhi cumbanaṁ darśanaṁ vyākhyāti nirdiśati ca.
(향기로운 입맞춤은 보여줌을 수식하고 진단하니)
Gurutvaṁ parāvr̥tya bandhanasya cakrarathe nipīḍya raktaṁ sr̥jati.
(무거움은 돌아서 속박의 굴레 마차에 받혀 피를 쏟는다.)
Tat asti <kiṁcit na> (그것은 <아무것도)
Tat asti <kiṁcit na> iti prati mārgaḥ asamasthala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님>으로 향하는 거친 도로.)
Yatra uṣṇatā nīcatāyāḥ dāsī bhavati,
(뜨거움이 비열함의 노예가 되고)
Pratīkavat tīkṣṇā tvak tava skhalati,
(상징처럼 따가운 당신의 피부는 흐느적거리는)
Mandāyāḥ jaḍatāyāḥ sthāne vikṣipyate,
(한심함이 어눌하게 눌려 있는 곳의 공간으로 흩어지고)
Idānīṁ nr̥tyaṁ prasārayan bhrāntigītaṁ mama sthāne vartate kevalam,
(이제 춤을 퍼트리는 망상 곡이 나를 대신할 뿐)
Tasmāt śarīraṁ kampayāmi.
(그러므로 몸을 흔든다.)
VII
정확히 1년 전, 런던 대영박물관의 먼지 쌓인 고문서 보관소 구석에서, 나는 우연히 이 빛바랜 양피지 뭉치를 발견했다. 관리자조차 그 존재를 잊고 있었던 듯한, 분류되지 않은 낡은 책 더미 속에서였다. '레스피로디비노 동굴'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장문의 산스크리트어 시에는, 놀랍게도, 그리고 운명처럼, 나의 이름 '아르미르'가 총 13번이나 명확하게 언급되어 있었다. 그 첫 시작은 방금 읽은 것처럼 '아르미르야,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였고, 시의 가장 마지막 구절은 섬뜩하게도 '아르미르야, 너는 정녕 죽기를 원하느냐?'로 끝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수백 번, 아니 수천 번도 더 이 불가사의한 시를 읽고 또 읽으며 그 의미를 파헤치려 애썼다. 각 단어와 문장의 숨겨진 뜻을 음미하고, 문맥 속에서 내 이름이 가지는 상징성을 해석하려 밤을 지새웠다. 그 순간부터 내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라섰다. 내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 온 고대 문헌들, 인류의 잊혀진 지혜와 역사 속에, 바로 '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강렬하고 개인적인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과연 수천 년 전 누군가의 예언인가? 아니면 시간의 왜곡 속에서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인가? 혹은 다중 우주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또 다른 '아르미르'의 기록인가? 이 질문들은 더 이상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 내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실존적인 수수께끼가 되어 나를 이곳, 흑해의 외딴섬, 레스피로디비노 동굴 앞까지 이끌었다.
동굴 안의 공기는 차갑고 축축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온몸은 설명할 수 없는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미지의 불길이 피어올라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붉은 글씨의 경고문을 응시했다. '33'. 서른세 명의 실종자. 그들의 침묵하는 경고가 뇌리를 맴돌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너무나도 명확하게, 마치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것처럼,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이 과연 이성적으로 옳은 선택인지, 혹은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무모한 모험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고대의 목소리, 내 이름을 부르는 저 깊은 어둠 속의 속삭임에 나는 이미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중력에 이끌리고 있었다.
나는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혹은 신탁을 받은 순례자처럼, 굳은 결심으로 천천히 오른쪽 구멍을 향해 몸을 숙였다. 단 하나의 진실,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서…
구멍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좁고 낮았다. 나는 배낭을 앞으로 밀어 넣고, 무릎과 팔꿈치를 사용하여 포복 자세로 기어가야만 했다. 때때로 날카롭게 돌출된 바위에 옷이 찢어지거나 맨살이 긁혀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숨 막히는 폐소공포증이 엄습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전진했다. 그런데 점점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갈수록, 기묘하고 불가사의한 감각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마치 태아가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아늑하고 원초적인 안정감. 동시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두려움과 짜릿한 흥분이 기묘하게 공존했다.
구멍의 벽면은 놀랍게도 차갑지 않고 미지근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살아있는 유기체의 내부, 그 따뜻한 내벽을 따라 기어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 부드럽고 미묘한 온기는 나를 더욱 깊숙한 곳으로, 동굴의 심장부로 이끄는 듯했다. 랜턴의 빛이 비추는 전방은 여전히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시간 감각은 완전히 마비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어갔을까, 십수 분 혹은 그 이상이 흘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정체 모를 세찬 바람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강하게 불어 올라왔다. 마치 심연의 입구가 열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이상할 정도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중력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듯한, 비현실적인 부유감. 나는 당혹감과 함께 기묘한 희열을 느끼기 시작했다. 동시에 통로의 폭과 높이가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이제는 허리를 잔뜩 구부정한 자세로나마 간신히 걸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전진을 경고하듯, 날카롭고 불쾌한 경적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어디에서 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는 물리적인 음파가 아니라 마치 내 두개골 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처럼 느껴지며 동굴 전체를 불길하게 진동시켰다. 그리고 뒤이어, 어디선가 희미하게 거리의 주정뱅이가 부르는 듯한 구슬픈 노랫가락이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술기운에 흔들리며 부르는 듯한, 슬픔과 깊은 그리움,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뒤섞인 남자의 노래가 환청처럼 울려 퍼졌다.
“어둠이 깔리면… 모든 게 흐릿해지지… 사랑도, 약속도… 부서진 유리 조각처럼…”
칠흑 같은 어둠이 다시 나를 집어삼켰다. 랜턴은 분명히 켜져 있었지만, 그 빛은 마치 무력하게 흡수당하는 것처럼 주변의 짙은 어둠을 뚫지 못했다. 극도의 긴장과 피로 속에서, 나의 모든 오감은 병적으로 예민해지고 감정의 기복은 극심해졌다. 이 어둠 속에서 내가 기대했던 것은, 어쩌면 섬뜩하고 요사스러우며 끔찍한 수수께끼,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심장을 격렬하게 두근거리게 만드는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극적인 사건 대신, 마치 늙고 교활한 마법사가 은밀하게 주술을 걸듯, 나의 의식은 서서히 마비되어 넋을 잃고 맥없이 무너져 내리려는 상태가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사고와 감정이 정지된, 완전한 백지상태처럼. 푸줏간 갈고리에 걸린 차가운 고깃덩어리처럼, 그저 무력하게 매달려 있는 존재.
그러나 이내, 아침이 오면 언제나 거짓말처럼 밤의 악몽이 흩어지듯이, 내 안의 혼란스러운 소용돌이가 잦아들며 기이한 적요가 찾아왔다. 마치 격렬한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고요함처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던 지난밤, 아니 방금 전까지의 모든 감정의 파편들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소리 없이 바깥세상을 향해 외치던 내면의 갈망이 잦아들었다. 나는 잠시 동안, 내가 방금 겪었던 그 강렬하고 혼란스러운 경험의 흔적에 대해 가벼운 진저리를 쳤다. 마치 끔찍한 꿈에서 깨어난 직후처럼.
VIII
나는 누구인가? 아르미르. 고고 언어학자. 신혼여행 중인 남편. 엘리프를 사랑하는 남자. 그러나 동시에 고문서 속 13번의 호명에 이끌려 미지의 동굴 속을 헤매는 탐험가. 이 모든 정체성이 갑자기 희미해지고 뒤섞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나’는 과연 진짜 나인가? 내 기억은 온전히 나의 것인가? 신혼여행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왜 사랑하는 아내의 얼굴조차 선명하게 떠올리지 못하는 걸까? 엘리프는 정말 존재하는 인물인가, 아니면 이 동굴, 혹은 고문서가 만들어낸 환상인가?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는 학문적 탐구심이었을까, 아니면 내 이름에 얽힌 비밀을 풀고, 어쩌면 잃어버린 나 자신을 찾기 위함이었을까?
이런 극도의 혼란과 실존적인 의문 속에서도, 나의 발걸음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동굴 깊숙한 곳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갑자기 동굴의 형태와 질감이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거칠고 축축했던 자연 그대로의 암석 벽면은 사라지고, 대신 놀랍도록 매끄럽고 차가운, 마치 흑요석이나 연마된 금속처럼 반들반들한 표면의 벽이 나타났다. 이것은 결코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없는, 명백히 인공적으로 가공되고 세련되게 다듬어진 구조물처럼 느껴졌다. 벽면에는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음각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내가 아는 그 어떤 고대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미지의 상형문자 혹은 상징 체계처럼 보였다. 빛을 비추자 문양들은 푸른빛 혹은 금빛으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점점 통로는 더욱 넓어지고 천장도 높아졌다. 어느새 나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똑바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서 이상하리만치 깊고 공허한 울림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텅 빈 공간이 내 발아래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숨 막힐 듯 광활하고 거대한 원형의 지하 광장으로 들어섰다. 랜턴의 빛이 닿지 않을 정도로 천장은 까마득히 높이 솟아 있었고, 돔 형태의 벽면 전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조각상과 부조, 그리고 앞서 보았던 기하학적인 상형문자들이 마치 은하수처럼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웅장함과 정교함은 인간의 솜씨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광장의 정중앙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듯한 둥글고 거대한 제단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제단 너머로, 또다시 두 개의 어두운 통로 입구가 보였다. 마치 운명의 갈림길처럼.
놀랍게도, 이곳에도 첫 번째 분기점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이, 두 개의 작은 구멍이 나란히 뚫려 있었다. 하지만 이번 구멍들은 첫 번째 것들보다 더 작고, 더 깊고 어두워 보였으며, 그 안에서는 어떤 바람이나 소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두 구멍 사이의 벽면에는, 이번에는 붉은색이 아닌, 차갑게 빛나는 은색 금속판 위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역시 고대 문자로 새겨져 있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 첫 문장은 놀랍게도 성경의 한 구절, 요한복음의 말씀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문장들은 성스러운 사랑의 메시지와는 정반대로, 지극히 염세적이고 절망적인 세계관을 냉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지혜의 시대이자 동시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그것은 믿음의 시대이자 동시에 불신의 시대였다.
그것은 빛의 계절이자 동시에 어둠의 계절이었다.
그것은 희망의 봄이었으나 곧 절망의 겨울이었다.
우리 앞에 모든 것이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우리 모두 천국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모두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미래가 만개한 장미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발밑에서 썩어가는 낙엽 더미였다.'
나는 그 싸늘하고 예언적인 말들을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곱씹으며 읽어 내려갔다. 각각의 단어는 마치 차가운 망치처럼 내 가슴을 묵직하게 두드렸다. 마치 오래전부터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숨겨져 있었던, 인류의 본질에 대한 어둡고 불편한 진리를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오싹하고 끔찍하며 더럽고 추악한 풍경이 온 세상에 홍수처럼 넘쳐흘렀다.
오만과 편견, 반목과 질시가 독버섯처럼 널리 퍼졌다.
서로를 향한 증오가 낳은 끔찍한 폭력의 단면을 세상 모두가 두려움 없이, 혹은 무감각하게 지켜보았다.'
그 문장들은 마치 어떤 거대한 문명의 붕괴나 세계적인 전쟁, 혹은 인류 전체의 도덕적, 영적 몰락을 암울하게 묘사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것은 단순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반복되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 그 파괴적인 욕망과 어리석음에 대한 영원한 은유일 수도 있었다.
'단지 우리의 예정된 멸망이 몇백 년, 혹은 몇천 년 지연된 것뿐이다.
찬란한 광명을 필연적으로 상쇄할 불경하고도 거대한 운명의 그림자.
모든 것은 그렇게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와 매한가지로.
두 갈래 길은 다시 네 갈래로, 네 갈래 길은 다시 여덟 갈래로, 여덟 갈래는 또다시 열여섯 갈래로… 그렇게 미궁은 끝도 없이 분열하고 확장되리라.
하물며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간의 욕망이 그러할진대, 이 무한한 갈림길 속에서 대체 그 누가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마지막 문장은 특히나 강렬하고 절망적인 예언처럼 다가왔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스스로를 무한히 분열시키고 확장시켜, 결국 스스로 만든 복잡한 미로 속에서 영원히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는 경고. 이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동굴의 미로가 아니라, 인간 정신의 심층, 영혼의 여정에 대한 깊은 통찰이자 섬뜩한 암시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돌아올 수 없다는 단언은 거의 저주에 가까웠다.
IX
그러나 나는 이미 너무 깊이 들어와 버렸다. 이제 와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공포와 불안감 속에서도, 내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강렬한 매혹과 탐구심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 이름을 13번이나 부르며 이곳까지 이끈 고대의 메시지가 궁극적으로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 그 마지막 비밀의 문을 열어야만 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눈앞의 두 개의 어두운 통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왼쪽 통로는 아래쪽으로 완만하게 내려가는 내리막길처럼 보였고, 오른쪽 통로는 반대로 약간 위쪽을 향해 경사져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내가 가진 고문서, 그 산스크리트 시에는 이 두 번째 갈림길에 대한 구체적인 단서나 지침이 없었다.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문득, 내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미르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고문서의 첫 문장이자,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잊혀진 역사에 대한 지식? 명예? 아니면 단순히 이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성취감? 혹시 엘리프에 대한 불확실한 기억 너머의 진정한 사랑? 아니면 이 모든 혼란과 불안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해답을 찾기 위해 내 내면의 심연을 깊숙이 들여다볼수록, 나는 오히려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고 점점 더 깊은 의문의 안갯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거대한 지하 광장 전체가 낮은 진동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면에 빼곡히 새겨져 있던 기하학적인 상형문자들이 일제히 스스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처음에는 별빛처럼 희미했지만, 순식간에 점점 더 강렬해져 갔다. 에메랄드빛, 사파이어빛, 루비빛, 그리고 순수한 황금빛이 서로 교차하고 뒤섞이며 광장 전체를 눈부시게 채웠다. 마치 오로라가 동굴 안에서 장엄하게 펼쳐지는 듯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중앙에 놓인 검은 제단 위에서는 희뿌연 연기 같은 것이 안개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멋대로 꿈틀거리며 서서히 응축되더니, 점차 흐릿하지만 분명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반투명하고 윤곽이 불분명했지만, 머리, 몸통, 팔다리를 갖춘 인간의 형태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형상은 마치 순수한 빛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숨을 죽인 채,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 신비로운 존재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 빛의 형상이 입을 여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말은 마치 텔레파시처럼 직접 내 의식 속으로, 내 마음속으로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연령을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이고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다.
"아르미르… 마침내 이곳까지 당도했구나. 우리는 그대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노라."
"당신…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질문을 던졌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대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대는 나의 잃어버린 조각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의 의식, 하나의 거대한 존재에서 갈라져 나온 무수한 파편들이다."
나는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대가 읽은 그 고문서, 그것은 바로 그대 자신이 쓴 것이다. 다른 시간, 다른 차원, 다른 생애 속의 그대가 남긴 기록이다."
"그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가 썼다고요?" 나는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이 동굴은 단순한 지하 공간이 아니다. 이곳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통로, 무수한 현실들이 교차하는 넥서스(Nexus)다. 그대가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대는 전혀 다른 현실, 다른 가능성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혹은 그대의 과거로,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여행할 수도 있다."
"그럼… 33명의 행방불명된 사람들은…?" 나는 간신히 물었다.
"그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소멸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단지… 다른 현실, 다른 시간선을 선택했을 뿐이다. 그들 중 일부는 그대가 과거에 알았던 사람들이다. 아니, 어쩌면 미래에 그대가 '될'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마치 내가 딛고 서 있는 현실이라는 단단한 기반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제 아내… 엘리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그대가 '이곳'에 오기 전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대가 인식하고 있는 방식으로는. 그대 기억 속의 그녀는, 그대가 거쳐 온 무수한 현실 중 하나의 조각, 다른 가능성에서 흘러들어온 잔상일 뿐이다."
순간, 퍼즐 조각들이 맞춰지듯 모든 것이 섬광처럼 이해되기 시작했다. 내 삶 곳곳에 존재했던 설명할 수 없는 불분명한 부분들, 기억의 공백과 왜곡들, 그리고 무엇보다 고문서에 내 이름이 반복해서 적혀 있었던 이유. 그것은 예언이나 우연이 아니라, 무수한 시간과 차원을 넘나드는 ‘아르미르’라는 존재의 여정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 저는… 저는 제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존재란 말입니까?" 내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늘게 떨렸다.
"그대는 아르미르다. 그 이름 자체가 그대의 본질이자 여정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다, 아르미르. 왼쪽 통로는 그대가 떠나왔던 세계, 혹은 그 세계와 가장 유사한 현실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러나 명심하라. 그 세계는 그대가 기억하는 것과 완전히 같지 않을 수도 있다. 작은 균열이나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다. 오른쪽 통로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가능성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곳에서 그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도, 혹은… 소멸할 수도 있다."
나는 깊은 혼돈과 선택의 무게 앞에 압도당했다. 내가 알던 세계가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면,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나의 기억, 나의 사랑, 나의 감정들은 과연 진짜인가? 무엇이 실재이고 무엇이 허상인가?
빛의 형상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 목소리에는 심판이나 강요가 아닌, 깊은 연민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 "모든 선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모든 길은 결국, 아주 먼 길을 돌아 다시 하나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아르미르. 그대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주 전체가 그대의 여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 말을 끝으로, 빛의 형상은 서서히 그 윤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광장을 가득 채웠던 눈부신 빛들도 하나씩 사그라들며 원래의 어둠으로 돌아갔다.
나는 두려움과 경외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내가 들어왔던 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기어 들어왔던 좁은 통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매끄러운 벽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세상으로 향하는 출구는 이미 닫혔다. 내 앞에는 오직 두 개의 어둡고 침묵하는 통로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왼쪽으로 가야 할까, 오른쪽으로 가야 할까?
내 앞에는 이제 거부할 수 없는 선택만이 남아있었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뒤틀렸을지도 모르는 과거의 세계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완전히 새로운 현실, 미지의 운명을 향해 나아갈 것인가? 모든 것은 이제 오롯이 나의 의지, 나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광장의 마지막 불빛마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내 손에 들린 랜턴의 희미한 빛만이 두 개의 검은 심연을 아슬아슬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폐부 깊숙이 차갑고 오래된 공기를 들이마시고, 운명을 향해, 마침내 한 발짝을 내디뎠다.
X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찰나였을까, 영겁이었을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순간적인 현기증과 함께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 밀려왔다가 잔잔히 가라앉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내가 머물던 호텔 방의 풍경이었다. 낡았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침대, 빛바랜 벽지,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따스한 햇살. 그리고 코끝을 간질이는, 이 섬 특유의 짭짤한 바다 내음.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려, 아르미르 씨."
나지막하고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천천히,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방 한쪽 구석, 낡은 나무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앉아 있는 알페르노 영감을 발견했다. 그는 여전히 특유의 과묵하고 엄숙한 표정이었지만, 그의 깊은 눈 속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희미한 이해와 인간적인 연민의 빛이 담겨 있는 듯했다.
"무슨…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영감님?" 나는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입 안이 바싹 말라 있었다.
"당신은… 그 동굴 입구 근처에서 기절한 채로 발견되었소. 내가 혹시나 해서 당신을 찾으러 가보지 않았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르지."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동굴…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기억은… 경고문을 본 것뿐입니다."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광장에서의 일, 빛의 형상과의 대화, 두 개의 통로 앞에서의 고뇌… 그 모든 것이 꿈이었던가? 아니면…
알페르노는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창문 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잿빛 바다를 향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주름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망설이는 듯 보였다. "…모두가 그렇소.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오."
"돌아온… 사람들이요? 저 말고 또 누가…?" 나는 놀라서 되물었다.
"그렇소. 당신이 처음은 아니오. 내가 이 등대를 지킨 긴 세월 동안, 저주받은 경고를 무시하고 들어갔던 서른세 명의 어리석은 자들 외에, 기적처럼 돌아온 이들이 일곱 명 있었소. 당신까지 포함해서 말이오. 하지만 그들 역시 당신처럼, 동굴 안에서의 기억은 완전히 잃어버린 채였지. 마치… 영혼의 일부를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처럼 말이오."
나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내 기억 속에서는 빛의 형상과의 대화, 두 개의 통로, 그리고 마침내 내가 내디뎠던 그 결정적인 발걸음까지 너무나도 생생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마치 칼로 잘라낸 듯 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초현실적인 경험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단순한 환각? 아니면 동굴이 보여준, 혹은 빼앗아간 기억의 파편?
"제 아내는… 엘리프는 어디 있습니까? 그녀는 괜찮은가요?"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불안감이 심장을 죄어왔다.
그 순간, 알페르노의 표정이 아주 미묘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변했다.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당혹감과 함께 깊은 연민이었다. "아내… 말이오? 아르미르 씨, 당신은… 이 섬에 처음부터 혼자 왔었소."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과 함께 세상이 잠시 암전되는 듯했다. 아내에 대한 기억이 그토록 흐릿하고 불확실했던 이유. 빛의 형상이 내게 속삭였던 말.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다른 현실의 조각이라고. 그것이… 진실이었단 말인가? 내 신혼여행, 엘리프와의 추억, 그녀의 웃음소리, 그녀의 체온… 그 모든 것이 나의 망상, 혹은 다른 차원에서 흘러들어온 기억의 편린이었단 말인가?
"그럼… 그럼 제가 여기 온 진짜 이유는…"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당신은 스스로를 고고 언어학자라고 소개했소. 오래된 고문서에 언급된 '레스피로디비노 동굴'을 연구하고 그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말이오." 알페르노는 차분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나를 이곳까지 이끈 것은 바로 그 고문서, 그리고 그 속에 불가사의하게 반복해서 등장하던 내 이름, '아르미르'였다. 어쩌면 엘리프라는 존재는, 이 섬과 동굴이 내게 건넨 또 다른 형태의 유혹, 혹은 시험이었을지도 모른다.
"알페르노 영감님,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겁니까?"
"꼬박 사흘이었소."
"사흘이라고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동굴 속에서의 경험은 아무리 길게 느껴졌어도 몇 시간에 불과했던 것 같았는데. 그 사흘 동안 내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의식을 잃은 동안, 당신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렸소. 알아들을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언어 같았지만… 가끔씩, 아주 고통스럽게, 당신의 이름… '아르미르'를 부르기도 했지." 알페르노는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천천히, 아직 힘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 멀리, 수평선 위로는 어선 한 척이 석양을 향해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었다. 붉은 노을빛을 받은 갈매기들이 그 주위를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영감님… 혹시 제가… 동굴 안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창밖 풍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지막하게 물었다.
알페르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 속에서 나는 그가 내 질문의 숨겨진 의미를, 어쩌면 동굴의 비밀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마침내 그가 깊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선택이라… 누구나 그 갈림길 앞에서 자신만의 선택을 하게 되어 있겠지. 하지만… 그 선택의 결과가 무엇인지 온전히 안다는 것은… 아마도 신의 영역일 것이오. 인간에게 허락된 것은 선택 그 자체뿐일지도 모르지."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레스피로디비노 동굴이 간직한 가장 심오한 진실, 혹은 가장 잔인한 비밀일지도 모른다. 선택의 결과를 결코 확신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간다는 것.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시오, 아르미르 씨?" 알페르노가 조용히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더 이상 경계심 대신, 한 인간의 여정에 대한 조용한 관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창밖의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과연 내가 떠나왔던 그 세계로 무사히 돌아온 것일까? 아니면 이것은 내가 선택한 또 다른 현실, 미묘하게 뒤틀리거나 완전히 새로운 세계일까? 어쩌면 나는 평생 그 답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잃어버린 기억, 혹은 존재하지 않았던 기억의 공백 위에서.
"계속…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나는 마침내,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직 찾아야 할 것들, 알아내야 할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으니까요." 어쩌면 그것은 나 자신을 찾아가는 영원한 여정의 또 다른 시작일 터였다.
알페르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내가 그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본, 진심 어린 미소였다. 주름진 눈가에 따뜻함이 어렸다. "좋은 선택이오, 아르미르. 모든 위대한 여행이 그렇듯, 하나의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법이니까."
나는 다시 한번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해가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저물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늘은 짙은 주홍빛과 보랏빛으로 장엄하게 물들었고, 잔잔한 바다는 그 신비로운 색채를 거울처럼 고스란히 반사하고 있었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세계가 경계 없이 만나, 하나의 완벽하고도 숨 막히는 조화를 이루어내는 듯했다.
내일, 나는 이 비밀스러운 섬을 떠날 것이다. 새로운 나를 향한, 혹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그 여정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또 다른 레스피로디비노, 또 다른 갈림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중요한 문제일까? 모든 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진다고, 그 빛의 존재는 말하지 않았던가.
나는 폐부 깊숙이 바다 내음과 저녁 공기가 뒤섞인 신선한 숨을 들이마셨다. 이것이 내가 선택한 현실이든, 동굴이 돌려보낸 꿈의 잔영이든, 혹은 그 무엇이든 간에,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과 내 안에 다시 차오르는 미지의 가능성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아르미르야,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고문서의 첫 문장이 메아리처럼 다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이제 나는 그 질문에 대한 어렴풋한 답을, 아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아마도… ‘앎’ 그 자체일 것이다. 나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한 끝없는 탐구. 그것이 바로 나의 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