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죽음: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무게
고층 아파트의 복도는 밀폐된 인공 온기로 숨 막힐 듯 가득 차 있었다. 피부에 축축하게 감겨드는 폐쇄된 공기의 질감. 나는 광활한 통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 그 거대한 침묵의 파노라마를 응시했다. 바람은 기척조차 없이 스러졌고, 희미하게 부유하는 어스름한 달빛 아래, 지상의 가로수들은 간신히 윤곽선만을 흐릿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저 아래, 검은 벨벳 위 흩뿌려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지상의 불빛들은 미세하지만, 집요하게 명멸하며 각자의 존재를 필사적으로 증명하려는 듯 몸부림쳤다. 밤을 삼키며 빛을 발하는 수많은 상점들, 그 차가운 쇼윈도 안쪽에는 섬세한 조명 아래 견고하게 진열된 명품들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마치 차갑게 응결된 욕망의 순수한 결정체들이,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해동(解凍)의 시간을, 보이지 않는 손길을 갈망하며 견고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도시는 거대한, 형체 없는 불안의 그림자에 깊숙이 잠식되어 있었다. 자산의 크기가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 되어 도시 공간을 무자비하게 구획하고 있었고, 그렇게 나뉘어진 칸칸마다 인간들은 마치 현미경 아래 놓인 미생물처럼, 혹은 거대한 회로 기판 위의 부속품처럼 점점이 박혀 고립되어 있었다. 분배의 명백한 한계가 곧 이 세계의 인식 가능한 한계임을, 그 어떤 철학자의 논증보다도 강력하게 증명하는 듯했다. 거대한 욕망의 응축된 덩어리들이, 실체 없는 유령처럼 밤의 탁한 공기 속을 정처 없이 부유했다. 인간, 그 복잡다단한 정신, 그리고 그것을 담는 동시에 짓누르는 물질. 그 혼돈스러운 삼각관계 속에서 방향을 상실한 나의 하루는 속절없이 빈곤했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가득 찼다. 답답하게 심장을 죄어오는 감각은, 그 실체를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안으로 인해 검푸른 멍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사건 현장, 죽음의 냄새가 농밀하게 밴 공간에 발을 디딜 때면 언제나 그랬다. 수백, 수천 번을 경험했을 터인데도,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더욱 예리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이질적인 불안감이 어김없이 먼저 현장에 도착해 끈질기게 나를 잠식해 들어왔다. 희생자의 마지막 고통, 그 불가해한 심연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불쾌한 감각. 결코 시간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 오히려 세월과 함께 더욱 깊어지는 종류의 감각이었다.
‘젠장, 벌써 25년이다. 강산이 두 번하고도 반이나 족히 변했을 긴 시간인데, 여전히 이 순간은 이토록 낯설고 버겁단 말인가! 이 지긋지긋한 감각의 무게라니!’
침대 위, 그는 두꺼운 이불에 반쯤 파묻힌 채, 마치 오랜 시간 공들여 조각된 석상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죽음. 그 단 하나의 압도적인 느낌이, 그 절대적인 현존이 방 안의 모든 사물과 공기, 빛과 그림자까지도 남김없이 지배하고 있었다. 무상(無常). 삶의 모든 의미와 노력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린 공허함. 징그럽도록 길게 늘어지고 이상하리만치 흐릿하게 번지는 오후의 햇살이, 더러운 창문을 힘겹게 투과해 들어와 정적만이 감도는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이 네모난 공간은, 본연의 기능인 안정감을 제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장식과 사연들, 혼란스러운 기억의 편린들로 어지럽게 가득 차 있었다. 조명은 마치 연극 무대의 한 장면처럼 의도적으로 낮게 드리워져 공간 전체를 어둡고 눅눅하게 만들었으며, 그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침울하고 병적인, 불길한 붉은 기운마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짙은 그림자가 공간의 절반 이상을 게걸스럽게 삼키고 있었다. 나는 스탠드 조명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집중적으로 비추고 있는 바닥의 검붉은 얼룩, 마르기 시작한 핏자국에서 기묘하고도 도착적인 끌림을 느꼈다. 그것은 결코 의도된 장식일 리 없었으되, 역설적이게도 이 부산하고 혼란스러운 집안의 모든 무질서한 분위기를 단번에 장악하며 섬뜩하리만치 완벽한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궁극적인 질서. 코끝으로 비릿하면서도 역설적으로 달콤하게 느껴지는, 철분 섞인 끈적한 냄새가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스며들었다. 생명의 마지막 잔향.
수많은 사진 액자들이 사방에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몇몇은 날카롭게 깨진 유리 조각들과 뒤엉켜 바닥에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조각난 빛들이 깨진 유리 파편 위에서 시리도록 차갑게 반짝였다. 내 앞에 무질서하게 펼쳐진 것은, 한때 누군가의 전부였을지도 모를 삶, 그 격렬했을 갈등과 지독했을 애증의 파편들이었다. 잔해였다. 어딘가 흐릿하고 멍한 표정의 여인이 웅크리고 있는 빛바랜 사진, 그리고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띤 젊은 흑인 남성의 사진이 벽에 아무렇게나, 경멸하듯 처박혀 있었다. 지극히 통속적이면서도 그래서 더욱 가슴 시린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담고 있는 이미지들. 액자를 장식한 싸구려 금속 소품들은 두껍게 내려앉은 먼지에 뒤덮여 본래의 광채를 잃고 더러웠다. ‘ART’라고 큼지막하게 인쇄된, 제법 값나가 보이는 액자는, 그러나 그 속이 텅 빈 채, 마치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허공의 천장만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예술의 부재, 혹은 예술의 무력함. 벽시계의 끝이 둥근 초침은 오전과 오후로 정확히 양분된 기계적인 일상에 깊은 불만이라도 품은 듯, 투박하고 느릿하게, 마치 불평을 늘어놓는 노인처럼 투덜거리며 시간을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손목의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역시나 벽시계와 시간이 맞지 않았다. 늘 이런 식이었다. 아날로그의 시간과 디지털의 시간, 그 미세하지만 명백한 불일치는 나에게 언제나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혼란과 불안감을 야기했다. 나의 시간은 언제나 초 단위까지 지나치게 정확하게, 냉혹하게 흘러갔고, 나를 제외한 이 세상의 시간은 때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느긋하거나, 혹은 제멋대로 날뛰며 종잡을 수 없었다.
다 죽어가는 시든 화분이 소파 옆 구석에 처량하게 놓여 있었다. 오후의 검고 무거운 햇살 아래, 힘없이 속살을 드러낸 시든 꽃술이 마지막 남은 생명의 끈이라도 놓지 않으려는 듯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햇빛조차 제대로 얻지 못한 채 방치된 불쌍한 존재. 주인의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아마도 간신히 얻어 마셨을 몇 방울의 물로 희미한 의식을 지탱하며, 억지로 싹을 틔우고 꽃을 벌려 이 삭막하고 거대한 콘크리트 사막으로의 변형을 온몸으로 막아서려 했던 처절한 고통의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마스크 너머로 답답한 숨을 길게 내쉬며, 바싹 마른 죽은 가지를 손가락으로 톡톡 튕겨 보았다. 공간을 정처 없이 부유하던 빛 속의 미세한 먼지들이 나의 움직임에 놀라 흩어졌다가, 이내 다시 무심하게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마스크 속 입김이 뜨겁고 축축하게 차올랐다.
‘이 죽은 이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었을까? 그의 삶은 어떤 언어로 기술되어야 할까?’
그는 이제 입을 다물었기에, 영원히 침묵한다. 그 무엇도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란, 아이러니하게도 그 완전한 침묵의 존재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의 부재 속에서 그의 언어를 재구성하려 애쓰는 것이다. 그의 이마 정중앙, 너무나 선명하게, 마치 어떤 끔찍한 표식처럼 박혀 있는 총구멍. 그것은 현실의 모든 논리를 초월한 듯, 기묘한 도취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깊이 풀려버린 공허한 눈동자. 그의 마지막 숨결이 희미하게 머물렀을지도 모를, 옅은 분홍빛으로 물든 코끝. 나는 그의 마지막 순간, 그가 세상에 남긴 이야기의 조각들을, 의미의 파편들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으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해답보다는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새로운 의문들만이 점점 더 짙어질 뿐이었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살해당할 만큼, 그렇게나 뒤틀리고 추악한 삶을 살았던 건가? 아니면, 반대로 강렬하고 지배적인 방식으로 누군가를, 혹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파괴하며 괴롭혀 왔던 건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은 그저 우연의 산물, 의미 없는 사건의 연쇄일 뿐인가?’
벽난로.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혐오하고 못마땅해하는 실내 소품 중 하나였다. 불필요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관리는 번거롭기 짝이 없으며, 그을음을 끊임없이 생성하여 호흡기를 괴롭히고, 그러면서도 ‘따스함’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 아래, 정신 건강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나른하고 무기력한 안락함만을 선사하는 위선적인 물건. 게다가, 삼류 멜로드라마 속 진부한 섹스 장면을 미화하는 데 단골처럼 등장하는, 묘하게 뒤틀린 상징성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 벽난로 앞,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발치에, 놀랍게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미술 작품 하나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그 조각품은 더없이 강렬하고 선명한 원색들 – 순수한 하양, 격정적인 빨강, 눈부신 노랑, 깊은 푸른색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오브제들 – 장난감 블록, 깨진 병 조각, 낡은 칫솔, 구겨진 깡통 같은 것들을 기묘하고 부조화스럽게 조합해 놓은 형태였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무의미한 것들의 무작위적인 종합. 그러나 어쩌면 그 무의미함 속에 가장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나는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종잇조각, 테이블 위에 놓인 그것을 응시했다. 거칠게 구겨지고 정체 모를 얼룩이 묻어 있는, 볼품없는 메모지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정성도, 꾸밈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너무나 간결하고 건조한 문장 하나.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이것은… 그가 남긴 유서인가? 마지막 절규인가? 아니면, 또 다른, 더욱 복잡하고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인가?’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방 안의 침묵이 더욱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2. 사랑하는 이에게: 언어의 경계에서
기차가 육중한 금속성의 마찰음을 내며 빈(Wien) 중앙역의 넓고 활기찬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멈춰 섰을 때, 나는 차갑고 간결한 전보 한 통을 받았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남은 형, 루돌프마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담고 있었다. 이로써 나의 형제 다섯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과 이유로, 그러나 결국에는 동일한 종착지를 향해, 이 냉혹하고 부조리한 세상과의 예고 없는 작별을 고한 셈이었다. 기차 문틈으로 예리하게 스며든 차가운 겨울바람이, 애써 봉인해두었던 기억의 파편들, 잊고 싶었던 과거의 상흔들을 세차게 몰아와 잠자고 있던 영혼을 후벼팠다. 날카롭게 벼려진 조각조각난 아픔들이, 무방비 상태의 심장을 사정없이 할퀴고 지나갔다.
플랫폼에 발을 내딛자마자,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상어 떼처럼, 눈부신 플래시 세례와 함께 기자들이 벌떼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은, 내가 지금 이 순간 가장 외면하고 싶은 잔혹한 현실의 무게를, 조금의 자비도 없이 정면으로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형의 죽음이라는 비극 앞에서, 세상이 내게 지우려는 새로운 역할의 무게. 뜨거운 분노가 용암처럼 속에서부터 들끓어 올랐지만, 나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그것을 억눌렀다. 이성을 잃고 속수무책으로 감정의 격랑에 휩쓸려서는 안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비트겐슈타인 박사님! 마침내 유럽 최대 에너지 기업의 유일한 상속자가 되셨는데, 지금 심정이 어떠십니까? 이 막대한 부를 어떻게 사용하실 계획이신지요?”
찰나의 순간, 나는 정말이지 이성을 놓아버릴 뻔했다. 나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은, 그러나 분노로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꾸했다.
“당신의 그 지독하게 천박하고 무례한 질문과 함께, 당신이라는 존재 자체를 지금 당장 구더기가 들끓는 똥통에 처넣고 싶은 심정이오. 알아들었소?”
기자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오랜 경험으로 다져진 능숙함으로 표정을 수습하며 변명조로 말했다. 그는 프로였다. 감정을 배제한 기계.
“아, 죄송합니다, 루트비히… 아니, 비트겐슈타인 박사님. 비난은 얼마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독자들의 뜨거운 요구와 궁금증에 충실했을 뿐입니다. 부디 저를 단순히 속물적인 인간으로만 여기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직업일 뿐입니다.”
나는 그의 가면 같은 얼굴, 그 공허한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이 속해 있는 바로 이 세계와, 어떻게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중이오. 당신들의 언어와 논리, 그 기저에 깔린 욕망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소. 다만… 지금의 내게는, 그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질문에 집중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오. 방금 세상을 떠난 내 형의 죽음 앞에서, 당신들이 떠드는 상속이니 부니 하는 것들은, 먼지 한 톨만큼의 의미도 없소. 그러니 제발 나를 좀 내버려 두시오.”
나는 그들의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시선을 등 뒤로 애써 외면하며, 다음 칸, 미리 예약해 둔 침대칸으로 서둘러 몸을 옮겼다. 역장은 나의 이 곤경과 깊은 슬픔을 말없이 이해한다는 듯, 미리 손을 써둔 상태였다. 그는 나를 이 소란스러운 현실로부터 보호하는 유일한 방법이 외부와의 일시적인 물리적 차단뿐이라는 것을 현명하게 간파했기에, 나의 은밀하고 다급한 청을 기꺼이, 그리고 신속하게 들어주었던 것이다. 칸막이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어떤 낯선 여인이 이미 자신의 침대에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존재가 자아내는 미묘한 어색함과 불편함을 애써 무시하며, 맞은편의 비어 있는 침대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 잠시 눈을 감고 형의 마지막 모습을, 그의 창백했을 얼굴과 공허했을 눈빛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육중한 피로감과 슬픔의 무게가 한꺼번에 덮쳐와, 나는 이내 깊고 혼란스러운 잠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내가 '향기'라고 혼자 이름 붙였던,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는 마냥 즐겁게만 느껴지지 않는 익숙하고도 미묘한 감각에 의해 눈을 뜬 것은, 해가 서쪽 하늘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며 긴 그림자를 드리우는 늦은 오후였다. 창밖으로는 낯설고 황량한 풍경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맞은편 침대의 여인은 여전히 두꺼운 누빈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세상과 단절된 듯 고개를 깊이 처박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하는 존재가 만들어내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이, 마치 작은 가시처럼 나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나는 애써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차가운 창턱에 팔을 괴었다. 쓸쓸하고 메마른 바람이 지상의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겨울 숲들을 부드럽게, 그러나 무심하게 매만지며 흩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역장이 다시 들어와, 형의 장례식 절차가 간략하게 적힌 작은 쪽지를 내게 건넸다. 그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연민과 함께 직업적인 의무감이 뒤섞여 있었다.
“참석하실 겁니까? 아니, 물론 당연히 참석하시겠지요…?” 그의 표정에는 질문이라기보다는 확인에 가까운, 조심스러운 연민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말없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그를 잠시 올려다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도 목구멍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빈까지 가지 마시고, 하르겐(Hargen) 역에서 내리셔서 미리 준비된 자동차로 이동하시는 편이 훨씬 좋겠습니다. 빈에는… 아시다시피, 너무나 많은 기자들이 박사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불필요한 소란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다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짧은 사이, 칸막이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리며 커다란 헤드폰을 낀, 불안해 보이는 젊은이 하나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요란하게 덜컥거리는 강렬한 비트의 리듬에 맞춰,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랫소리가 싸구려 이어폰 밖으로 제멋대로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아프리카 콩고의 어느 허름한 길거리에서나 팔 법한, 구멍 나고 지저분하게 때가 낀 티셔츠 자락에 신경질적으로 코를 문지르고, 얇고 창백한 입술을 불만스럽게 달싹이며 자신만의 소음과 고립된 세계 속에 깊이 숨어들었다. 역장은 그 무례한 침입자를 향해 못마땅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조용히 물러났다. 그 짧고 불쾌한 소란 속에, 맞은편 침대의 여인이 마침내 부스스 눈을 뜨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어머나, 혹시… 비트겐슈타인 박사님이 아니신가요?” 그녀의 목소리는 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맑고 또렷했다.
“저를… 아십니까?” 나는 약간 놀라서 되물었다. 이런 상황은 익숙하면서도 늘 불편했다.
“그럼요. 당연히 알죠. 이 나라 사람치고 지금 당신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어요? 어딜 가나 당신 이야기뿐인걸요. 신문이며 라디오며… 온통 당신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해요.” 그녀는 부드럽고 온화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판단도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바로 그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짧고 강렬한 진동으로 알람을 울렸다. 그녀와 약속된 통화 시간. 나는 약간의 떨림과 복잡한 설렘을 동시에 안고, 조심스럽게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와의 통화. 이 혼란스럽고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나를 붙잡아주고 지탱해주는 희미하지만 강렬한 빛.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꼭 한번 다시 읽고 싶었던, 그녀가 과거에 내게 보냈던 수많은 메시지들, 그 따뜻하고 진실했던 단어들을 잠시 떠올렸다.
“당신이 지금 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왠지 아세요?”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소?” 나는 낮고 잠긴 목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나는 그냥 느껴요. 당신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요. 물론 그냥 우스갯소리예요. 하지만 정말로 그런 착각 같은 것을 하곤 한답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경쾌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잠시나마 나의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
“당신의 기분이 지금 무척이나 좋다는 뜻이겠군요.”
“물론이죠! 세상에, 당신을 직접 만나는 일이잖아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순수한 기쁨과 기대가 넘실거렸다.
“네. 나도 무척 좋습니다. 당신을 만날 생각을 하면, 이 모든 혼란과 슬픔을 아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소. 다만… 내가 가진 자가용 비행기가 아닌, 이 낡고 더럽고 덜컹거리는 기차를, 그것도 비교적 짧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한다는 이 불편한 사실이 좀 아쉬울 뿐이오.” 나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어둠 속 풍경을 바라보며, 약간의 불평을 섞어 말했다.
“괜찮아요.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우리 앞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아주 많은 날들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요.”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따스하게 나를 안심시켰다.
“그건 물론 그렇습니다. 당신은 나보다 훨씬 젊으니까. 시간은 당연히 당신의 편이겠지요.” 나는 씁쓸한 자조를 담아 말했다.
“아,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냥… 오늘 하루에도 아직 오전이라는 시간이 꽤 많이 남았다는 뜻이었어요. 우리가 만나기로 한 오후까지 말이에요.” 그녀는 살짝 당황한 듯, 말을 조금 더듬었다. 그녀의 순수함이 느껴졌다.
“네. 물론 알고 있소. 그냥 해 본 소리요. 나는 늘 이렇게 실없는 말을 불쑥 하곤 하죠.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소. 그냥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이나 되는대로 내뱉는 고약한 버릇이 있소. 그러니 방금 같은 농담도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오.” 자조적인 미소가 희미하게 입가에 번졌다.
“괜찮아요. 저는 다 이해해요. 당신이 그저 제 곁으로, 저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그 사실, 그것 하나만 생각할래요. 그냥… 제가 너무 들떠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어린아이처럼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소. 나 역시도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것은 무척 오랜만이니까. 물론, 회사에 아주 긴 휴가를 내고 어제부터 내가 느끼는 이 복잡한 감정은 뭐랄까… 정확한 단어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종류의 기대감이랄까… 아주 소박하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강렬한 종류의 즐거움이랄까… 아무튼, 평소의 나처럼 냉정함과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로, 오늘 오후의 만남이 간절하게 기다려지오.”
“맞아요. 정말 신기하죠. 우린 오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지만, 마치 아주 오랫동안 알고 지낸 오랜 친구처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서로의 거의 모든 것을 이미 깊이 알고 있잖아요. 편지를 통해서, 전화를 통해서… 정말 신기하게도요.”
“하하하. 정말이지… 이상하고도 좋은, 특별한 하루요. 당신의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데, 당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느끼는 이 기묘한 사실 말이오.”
“그건… 아마도 ‘떨림’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요. 서로를 향한, 조심스러운 떨림이요.” 그녀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낮아졌다.
“네. 그것은 분명 긴장이고, 희망이며,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겠지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걱정이기도 하고. 지금 나는 당신이 아주 오래전에 내게 보내주었던 당신의 사진을, 아주 큰 기쁨과 애틋함으로 다시 꺼내 보고 있소.”
“오래된 사진이요? 아! 혹시 제가 처음 보냈던 그 사진… 맞아요. 저도 기억나요. 잠시만요, 저도 한번 찾아볼게요.”
나는 그녀에게 역시 아주 오래전에 보냈던 나의 젊은 시절 흑백 사진을 휴대폰 화면에 띄웠다. 사진 속의 나는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스물여덟, 서툴고 불안한 풋내 나는 청년이었다.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이 쏜살같이 흘렀구려. 그러니 오래된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나는 그때 겨우 스물여덟이었으니까. 보시오, 이 한심한 모습을. 정말이지 어설픈 풋풋함과 동시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싱그러움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소? 이거 한번 보시오. 지금은 누가 공짜로 준다고 해도 절대 쓰지 않을, 이 검고 크고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뿔테 안경을 버젓이 쓰고 있지 않소. 하지만 저 때만 해도 저건 최신 유행이었소. 정말이오. 그 시절 낡은 영화들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잖소. 멋진 남자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어떤 안경을 끼고 다녔는지. 나는 마치 그 시절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있는 멋 없는 멋 있는 대로 다 부리고 다니길 좋아했었지. 물론, 나 자신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소. 키는 평균보다 작고, 생김새는 지극히 평범하기 짝이 없으며, 몸에는 근육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도 없는, 누가 봐도 영락없는 샌님이었지. 저기 보시오, 마치 심문이라도 받고 있는 듯한 나의 겁먹은 모습을.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하며 혼란스러워 보이는지. 물론 이제 막 성년의 문턱을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지. 다들 그렇지 않소? 젊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불안정하고, 흔들리고, 미숙한 것. 저 시절에는 세상의 그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립된 것 없이, 그저 시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 무기력하게 떠밀려 자신의 진정한 의지나 가치관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이상하고 구불구불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길로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다 길을 잃고 헤매곤 하잖소. 내가 바로 딱 그랬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지만 말이오.”
“그럼… 혹시 후회하시는 건가요? 그때의 선택을, 그 시절을?” 그녀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가라앉았다.
“후회? 물론이오. 당연히, 아주 오랫동안, 지독하고 처절하게 후회했소. 사실 단 한순간이라도 그날의 어리석었던 선택을 후회하지 않은 적은 없었소. 내 인생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어야 할 젊음의 시간을, 그 가능성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린 것이잖소.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 터지며 후회스럽지. 하지만 이제 와서 어쩌겠소? 이미 강물처럼 다 흘러가 버린 일이고, 시간의 두꺼운 퇴적 속에서 모든 날카로운 상처에는 두꺼운 딱지가 앉았고, 그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고 다시 피 흘리기를 수십 번도 더 반복한 뒤에야 비로소 찾아온 세월이 여기 이렇게 있으니.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이지 바보 같았소.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리석고 눈먼 멍청이였소. 내가 사랑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그 거대한 환상, 나는 너무나 순진하게 그것을 의심 없이 믿었고, 결국 그녀가 교활하게 건넨 독이 든 사과를 아무런 의심 없이 덥석 받아먹어 버린 거요. 바로 그거요. 모든 비극의 시작. 나는 교활하고 사악한 마녀에게 완전히 놀아난 것이지.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땐 정말 몰랐소. 세상을 너무 몰랐던 게지.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때로는 상상 이상으로 악의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정말이지 까맣게 몰랐던 겁니다.”
“그날의 진실… 그게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하지만 행여 당신 마음이 다시 다칠까 봐, 그동안 차마 선뜻 물어볼 수는 없었어요.”
“그날의 진실 말이오? 네. 물론 알고 있소.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날의 진실을 궁금해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실, 당신은 내 입에서 그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어떤 극적인 고백이나 충격적인 반전이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소.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하오. 그날의 진실은… 글쎄, 현재까지는 아마도 그녀와 나, 그리고 어쩌면 신만이 알고 있겠지.”
“당신은… 무신론자가 아니셨어요?” 그녀가 진심으로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네. 맞소. 나는 여전히 무신론자요. 신의 존재 따위는 믿지 않소. 하지만 그때는,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는, 절박하게 믿는 척이라도 해야만 했소.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고, 나의 처절한 결백을 단 한 사람이라도 믿어줄 절대적인 존재가 절실히 필요했으니까. 당신도 아시잖소. 나는 그 지옥 같은 곳에 갇힌 첫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입장을 바꾸지 않고 줄곧 나의 결백을 주장하며 일관된 목소리를 내왔다는 사실을. 나를 도울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영향력 있는 이들을 수소문하여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소. 심지어 기독교 알림 연합회 같은 곳도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니까.”
“알겠어요… 아무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제발 이 지긋지긋한 기차가 조금만 더 빨리 달려주기를 간절히 바랄게요.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네. 사랑하오.” 나도 모르게, 진심이 담긴 말이 불쑥 흘러나왔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저도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저의 모든 것을… 어쩌면 저 자신보다 더 잘 아는 당신에게. 하하하.” 그녀의 웃음소리가 다시 한번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그 웃음 속에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네. 그럼 조금 뒤에 봅시다.”
통화가 끊어지고, 희미한 미소가 차가운 창문에 어린다. 등 뒤로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차장의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휴대폰 화면을 전환하여 미리 준비해 둔 디지털 티켓을 찾아 그에게 내보였다. ‘끼익’ 하는 날카로운 인식음과 함께 확인 절차가 순식간에 끝났다. 옆자리의 할머니가 여전히 잔뜩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날카롭게 차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봐요! 여보시오! 도대체 왜 이렇게 맨날 연착이 잦은 거요? 이놈의 기차는 사람 속 터지게 만드는 데는 아주 선수라니까!”
차장은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깊은 피로감이 역력한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답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저도 그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 복잡하고 곤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저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아니, 당신이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다는 거요? 책임자가 누구냐는 말이오!” 할머니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중앙 통제 시스템의 컴퓨터가 알겠지요. 시스템 어딘가에 무슨 문제가 발생했는지. 다만, 그 빌어먹을 시스템은 우리 같은 말단 직원들에게는 그저 명령만 할 뿐입니다. ‘기다려! 현재 지연되고 있으니 무조건 기다려!’ 하고 말입니다. 저희는 그저 따를 뿐입니다.” 차장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어깨를 크게 으쓱하고는 다른 승객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실랑이 같은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며, 나지막이 혼잣말처럼 한마디 거들었다.
“바야흐로… 인공지능이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으니까요.”
순간, 칸 안의 모든 시선 – 할머니, 젊은 남자, 그리고 아까 잠에서 깼던 여인의 눈동자를 포함한 여덟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 시선들 속에는 호기심, 불신, 혹은 미미한 동의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젊은 여인의 두 개의 눈동자가 그 다양한 시선들 사이에 때를 놓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맞아요. 어쩌면 우리는 그저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야만 하는지도 몰라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길을 잃고 혼란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잠에서 깼던 여인이 나지막이,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의 말에 동조했다. 그녀의 눈빛은 깊고 차분했다.
“도대체 다들 무슨 소리들을 하는 거야? 어떤 놈이 시킨다는 거야, 그놈의 정체가 뭐냐고?” 할머니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게 있어요, 할머니. 그냥…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는 법이죠.” 젊은 여인이 다시 부드럽고 나직하게 말했다.
차장은 자신의 큰 머리를 한번 세차게 흔들고는, 마치 이 대화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듯 서둘러 다음 칸으로 건너갔다. 바람이 다시 문틈을 비집고 들어와, 아까 햇살이 잠시 걸터앉았던 빈 의자 위를 차갑게 문지르며 지나갔다.
“하르겐 역에는… 곧 도착하는 겁니까?” 내가 차장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며, 돌아온 역장에게 물었다. 그는 텅 빈 천장을 한번 무심하게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예, 곧 도착할 겁니다. 지금부터 미리 내리실 준비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연착이 워낙 심해서 정차 시간이 예측보다 매우 짧을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그의 경고에 따라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읽던 책을 가방 깊숙이 넣고, 빈 음료수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리고, 시린 이빨 사이에 씁쓸한 맛의 껌 하나를 밀어 넣었다. 차장이 방금 지나간 복도를 따라, 천진난만한 웃음소리를 내며 어린아이 하나가 쏜살같이 뛰어갔다. 나는 다시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잿빛 풍경 속에서, 다가올 만남, 그녀를 생각했다. 짐 정리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두꺼운 외투의 단추를 목까지 단단히 잠그고, 문 쪽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바깥의 싸늘하고 희미한 햇살을 쳐다보며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한번 깊게 했다.
기차가 끼익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속도를 현저히 줄이며 마침내 하르겐 역의 플랫폼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왔다. 예상치 못했던 차갑고 습한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보슬비가, 마치 슬픔처럼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텅 빈 듯 황량한 풍경 속에서,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차가운 겨울비에 흠뻑 젖어 검게 빛나고 있었다. 저 멀리, 나지막한 언덕 아래로 안개 속에 잠긴 도시의 희미한 윤곽이 한눈에 들어왔다. 헛되고 덧없는 욕망들이 서로 뒤엉켜 보이지 않게 꿈틀대는 거대한 유기체 덩어리.
2044년의 어느 쓸쓸하고 음울한 겨울날 오후, 어둡고 무거운 먹구름이 낮은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마치 나의 혼란스러운 과거와 불안한 현재, 그리고 어쩌면 다가올지도 모를 불투명한 미래까지도, 남김없이 집어삼킬 듯이. 기차는 떠났고, 나는 빗속에 홀로 남겨졌다. 새로운 시작, 혹은 또 다른 종착점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