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그래, 방이었다. 단지 방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벽들은, 한때 어떤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르는, 그러나 이제는 그저 시간의 때에 절어버린 누런 황토색으로, 질병의 흔적처럼 얼룩져 있었다. 천장은 또 어떠한가. 아, 천장. 저 미세한 균열들. 처음에는 하나의 선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한숨이, 혹은 절망이 뱉어낸 무언의 외침이 그은 상처. 그것이 이제는 도시의 지하철 노선도처럼 복잡하게,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 저 천장이라는 작은 하늘의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저 지도를 따라가면 어디에 닿을까. 낡아빠진 옷장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쪽으로 위태롭게 기울어진 채, 금방이라도 제 안에 품은 초라한 비밀들을 쏟아낼 듯 신음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창문. 도시의 불빛을, 그 소란하고 번잡하며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한 생의 총체를, 한 장의 희미하고 더러운 필터를 거쳐 겨우 한 줌의 빛으로 걸러내고 있었다. 저 빛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 꾸는 꿈에 불과했다.
"너무, 너무 싼 곳인가."
목소리. 내 것이었지만, 이 방의 공기에 부딪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방에 살다 간 무수한 사람들의 공허한 메아리 중 하나가 되어 흩어졌다. 싸구려. 단지 가격의 문제일까? 아니.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에게 합당한 가치의 공간을 찾아내는 법이다. 제니아, 그녀가 웃는다. 빙긋이. 저 미소. 언제나처럼, 그래 언제나처럼 저 미소는 명료한 해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저 미소의 수면 아래에는 어떤 비밀이, 어떤 슬픔이, 어떤 체념의 강이 흐르고 있을까. 그녀가 문을 닫는다. 쿵. 짧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세계는 둘로 나뉜다. 이 방 안의 우리와, 저 문밖의 나머지 모든 것. 그 순간, 그래, 바로 그 순간 시간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멈춰서는 듯했다. 시공간이 그녀를 중심으로, 아니, 그녀의 두툼한 허벅지와 풍만한 엉덩이를 중심으로 수축하고 응결했다. 시선이, 나의 이 비루하고 정직한 시선이 그곳에 못 박힌다. 그녀의 몸. 그것은 내게 언제나 한 편의 시와 같았다. 난해하고, 다의적이며, 읽을 때마다 새로운 구절과 숨겨진 은유를 발견하게 되는, 그래서 영원히 완독할 수 없는.
제니아. 그녀가 커튼 쪽으로 움직인다. 낡고 푸른 빛을 띤 회색 커튼. 그녀의 손길이 닿자,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바다의 기억을 깨운 듯 커튼이 너울거린다. 창이 열리고, 초겨울의 바람이, 차갑고 날카로운 현실의 칼날 같은 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든다. 바람은 커튼을 쓰다듬고, 커튼은 춤을 춘다.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의 느리고 장엄한 물결 같다. 바람은 속삭인다. 그래, 바람은 언제나 무언가를 속삭이지. 오늘 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사랑의 밀어를, 어쩌면 이 허무한 삶을 잠시나마 지탱하게 해 줄 지독한 몰입의 순간들을.
담배. 그녀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하얀 막대. 성냥을 긋는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치직.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불꽃, 생명의 시초 같기도, 종말의 불씨 같기도 한 그 작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잠시 비춘다. 그녀는 깊게, 아주 깊게 연기를 빨아들인다. 폐부 깊숙이 이 도시의 공기와, 이 방의 절망과, 자신의 삶의 무게를 밀어 넣는 의식처럼. 그리고 내뿜는다. 하얀 연기가, 마치 그녀의 영혼이 잠시 육체라는 감옥을 탈출한 듯, 우아한 소용돌이를 그리며 그녀를 감싸고 방 안을 부유한다. 그 연기는 잠시 머물다 이내 공기 속으로, 무(無) 속으로 흩어진다. 사라진 연기 너머로, 미간을 찌푸린 제니아의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하게, 위태롭게 담배 끝에 매달려 타들어 가는 재에 고정되어 있다. 저것이 자신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서서히 타들어가 결국 한 줌의 재로 변해버릴. 그녀의 눈동자. 그 안에는 아득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고여 있었다. 과거의 깊은 상처를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들여다보는 자의 눈빛이었다.
덜컹, 덜컹. 창밖에서 노면전차의 소리가, 마치 잊고 있던 기억처럼 다시 가까워진다. 제니아가 무언가 중얼거린다. 러시아어.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언어. 그 목소리는 전차의 덜컹거리는 반복음에 스며들어 하나의 기묘한 음악이 된다. 그래, 저 소리는 이 도시의 리듬이다. 우리가 서로의 몸을 탐하고, 서로의 고독을 핥을 때마다 어김없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던 저 무심한 도시의 심장 소리. 담배 연기는 이제 제멋대로, 의지 없이, 그저 공기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흩어지며 공간을 채운다. 그 흩어짐 속에서 우리의 존재도, 이 만남의 의미도 함께 희미하게 흩어지는 듯했다.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입꼬리가 그려내는 저 미묘한 곡선. 행복인가? 체념인가? 혹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선 깊은 고독의 자기 위안인가. 그녀의 미소는 언제나 수수께끼다. 설 수 없을 만큼 좁은 이 공간, 침대와 벽 사이의 그 협소한 틈에서, 우리의 몸은 마치 자석처럼 서로를 향한다. 끌림과 충동이, 이성과 본능이 아슬아슬한 춤을 춘다. 나는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쓰다듬는다. 차갑다. 하지만 놀랍도록 부드럽다. 그녀의 피부는 내 거칠고 투박한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다. 마치 이 모든 것을 예견했다는 듯, 혹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듯, 그저 묵묵히 받아들인다. 나는 그녀의 귓불에 키스한다. 저렴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고 서글픈, 아련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친다.
"영화 같아. 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아."
내 목소리였다. 이 어색한 순간을 견디지 못한, 의미 없는 문장의 나열.
"무슨 영화?"
그녀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조소가 섞여 있다.
"삼류영화… 시나리오 따위는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그녀는 언제나 그런 식이다.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자신과 우리의 관계를 한 발짝 떨어져 관조한다. 그 속에는 언제나 자조적인 웃음이 배어 있다. 그녀는 알고 있다. 우리의 만남이 타인의 시선에, 혹은 세상의 통념에 얼마나 진부하고 예측 가능한 클리셰로 보일지를. 가난한 동구권 여자와 돈 많은(그렇게 보이겠지) 아시아 남자. 허름한 모텔 방. 담배 연기. 술. 그리고 섹스. 완벽한 삼류영화의 플롯. 하지만 그녀는 그 클리셰를 경멸하면서도, 기이하게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어떤 안정감을 느끼는 듯했다. 정해진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새큰거리는 그녀의 숨결에 담배 냄새가 짙게 뱄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다리를 벌렸다. 그것은 유혹이라기보다는 허락에 가까웠고, 허락이라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동작이었다. 그녀가 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 하나하나를 얽어 깍지를 낀다. 그녀의 손가락은 언제나처럼 차가웠다. 이 방의 온기와, 내 체온으로도 녹일 수 없는, 그녀 내면의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근원적인 한기.
순간, 그녀가 답답한 듯 눈을 감았다 뜨며 마른기침을 몇 번 터뜨린다. 콜록, 콜록. 그 소리는 단순히 담배 때문이 아닌 듯했다. 그 안에는 깊은, 아주 깊은 피로가, 삶이라는 긴 전투에 지친 패잔병의 투항 선언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담배, 끊어보는 게 어때."
나는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마치 그것을 두 동강 낼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 부러뜨리지는 않고, 허공에서 그런 시늉만 크게 한 다음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일종의 서툰 판토마임. 유치하고,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하지만 그녀는, 놀랍게도, 그 의미를 알아차린 듯했다. 굳어 있던 미간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녀는 나를 빤히, 아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마치 오랜 가뭄 끝에 내린 한 줄기 소나기를 맞는 마른 땅처럼, 애정과 놀라움과 감사함이 뒤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누구에게서도 진정한 관심과 염려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보이는, 그런 특유의 당혹스러움과 감동. 하지만 그 감정은 아주 잠시였다. 곧 그녀의 표정은 다시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이 애정, 이 관심이 과연 내가 받아도 될 만큼 가치 있는 것인가. 혹은 이 또한 곧 사라질 또 하나의 신기루는 아닌가. 그런 의문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간 듯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잖아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녀의 러시아어 억양이 섞인 서툰 영어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과, 동시에 세상의 모든 풍파를 겪은 노인의 성숙함을 기묘하게 담고 있었다.
"사랑해."
그녀가 나를 보며 속삭였다. 내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한국어. 그녀는 그 단어를, 그 의미도 온전히 알지 못할 그 이국의 단어를,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 세공품처럼, 혹은 귀한 보물처럼 소중하게 발음했다. 그 발음은 어설프고 어색했지만, 그 안에 담긴 어떤 절실함, 어떤 진정성만큼은 그 어떤 유창한 언어보다도 깊게 내 마음에 와서 박혔다.
II.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방의 탁자 위에 쌓여 있는 사물들처럼. 저기, 나의 첫 선물이었던 목걸이가, 마치 잠든 작은 동물처럼 단정하게 누워있다.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작은 은으로 만든 별 하나가 달린, 그런 시시한 것.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일부처럼, 잃어버린 별자리 조각처럼 소중히 여겼다. 그녀의 창백하고 가느다란 목에서 그 작은 별은 언제나 희미하지만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의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유물들이 흩어져 있다. 구겨진 담뱃갑, 몇 개 남지 않은 성냥, 기름이 거의 떨어진 라이터, 그리고 어젯밤 우리가 벗어 던진 그녀의 속옷. 이 모든 것들은 마치 고고학적 발굴 현장처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의 지층을, 우리 관계의 역사를 무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마치 그녀가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태어나기 전부터 기다려 온 바로 그 남자인 것처럼, 그런 거만하고 어리석은 착각에 빠진 채, 그녀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지는 물컹하고 따스한 촉감. 그것은 단순한 살의 감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 그 자체의 희열이었고, 존재의 위안이었다. 그녀의 살이, 그녀의 몸이 나를 감싼다. 도대체 신은, 혹은 진화는, 남자를 왜 이토록 불완전하고 모순적인 존재로 만들었을까. 이 삶이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무하며 아무런 목적도 없는지 머리로는 그토록 명료하게 외치면서도, 결국에는 이토록 쉽게, 이토록 속절없이 여자의 부드러운 품속으로 파고들어 안식을 구하고 마는가.
우리의 만남. 그것은 서울이라는 거대하고 숨 막히는 도시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나와,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간과 역사를 품은 도시에서 흘러온 그녀가, 이 낯선 제3의 도시에서 마주친, 지극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길모퉁이에서의 부딪힘, 혹은 낡은 카페에서의 합석. 시작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사소했다. 하지만 이제 그 우연은, 수많은 밤을 이 방에서 함께 보내는 동안, 서서히 필연이라는 무거운 옷을 입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의 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서였다. 삶의 모든 흔적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도톰하게 이어지는 엉덩이의 굴곡. 그 위에는 오래된 상처인지, 혹은 다른 남자가 남긴 흔적인지 모를 흐릿한 자국들. 시간의 흐름을 증명하는 눈가의 희미한 주름들. 나는 언제나, 나의 그 오만한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 그러나 나도 어쩔 수 없는, 비굴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가 나에게 몸을 허락했다는 사실, 이 아름다운 세계를 내게 온전히 내어주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찬 행복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여자가 움직인다. 그녀의 움직임에 맞춰 침대 시트가 서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낡은 침대가 울렁이며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향. 그녀에게서 피어나는 독특한 향이 방 안을 채운다. 시큼하면서도 달콤한, 땀과 체액과 그녀의 영혼이 뒤섞인 듯한 원초적인 냄새.
그녀의 체취. 그것은 언제나 나를 혼미하게 만들었다. 담배와 싸구려 향수, 그리고 그녀만이 가진,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녀 고유의 냄새가 혼합된. 그것은 나를 취하게 만드는 독한 술과도 같았고, 헤어 나올 수 없는 늪과도 같았다. 나는 그 냄새에, 그녀의 존재에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중독되어 가고 있었다.
"아..."
몸속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간 듯, 높낮이 없는 쉰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다. 나는 다시 키스한다. 마치 갈증에 허덕이는 자가 물을 찾듯, 그녀의 입술을 찾는다. 끌리는 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키스하고, 잠시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리고 또다시 키스한다. 이제는 거의 습관이 되어버린, 어쩌면 그래서 더 서글픈, 무의미한 행위의 반복. 나는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온전히 내 것인 양, 소유욕에 불타는 정복자처럼, 그녀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갠다. 그녀가 희미한 한숨을 쉬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얼굴을 돌려 피하기 전까지, 나의 이 이기적인 행위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의 만남은 이미 수십 번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반복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매번 새롭고 낯설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서로에게 결코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 자체를 잃어버렸거나, 혹은 애초에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국이라는 사회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미덕이 아니라 결함으로 배우며 자랐고, 그녀는 냉소적인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러시아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감정을 사치라고 여기며 살아왔을 것이다.
내 혀가 그녀의 메마르고 헤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 그 순간, 그녀는 마치 놀란 작은 동물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녀의 입술은 언제나, 겨울의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마치 그녀의 상처받고 갈라진 내면이 그 입술을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처럼.
나는 싱긋 웃어 보이며,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손을 이불 속으로 넣어 그녀의 잠옷자락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의 몸을 쓰다듬어 올라간다. 우리는 서로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러시아어는 '스파시바'와 '다스비다냐'가 전부였고, 그녀가 아는 한국어는 '사랑해'가 유일했다. 하지만 언어가 막힌 그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더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언어, 몸의 언어로 대화했다. 그 언어는 모든 문화와 국경과 역사를 초월하는, 가장 정직하고 보편적인 언어였다.
그때였다. 모든 감각이 최고조에 달했던 바로 그 순간. 제니아의 휴대폰이, 탁자 위에서 죽은 듯 놓여 있던 그 작은 기계가, 갑자기 날카로운 진동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위이잉. 그 소리는 이 방의 모든 에로틱하고 내밀한 분위기를 단칼에 베어버리는 날카로운 칼날과도 같았다. 제니아는 화들짝 놀란 듯, 거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눈은 핸드폰 액정에 고정되어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받지 않기를,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저 기계가 우리를 갈라놓지 않기를. 하지만 그녀는 이내 결심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우는,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러시아어. 나는 그 언어의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목소리 톤과, 굳어버린 표정과, 불안하게 떨리는 손가락을 통해, 그 통화가 결코 유쾌한 것이 아님을, 그녀를 이 방 너머의 또 다른 현실로, 내가 가닿을 수 없는 그녀의 진짜 삶으로 끌어당기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III.
전화는 끊어졌다. 하지만 그 침묵은 통화음보다 더 무겁게 방 안을 짓눌렀다. 제니아는 한동안, 아주 한동안 말없이, 등을 돌린 채 누워 있었다. 그 시간만큼, 그녀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한,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마치 그녀가 잠시 다른 행성에, 그녀만의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다녀온 듯한 낯섦.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엉거주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괜찮으냐는 말은 너무 상투적이고, 무슨 일이냐는 질문은 너무 무례하게 느껴졌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는 결코 표현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가 존재했다. 그것은 단순히 국적이나 문화, 언어의 차이를 넘어선, 보다 근원적인 무엇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타인의 방에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이었을 뿐, 단 한 번도 서로의 진정한 내면의 방으로 상대를 초대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문 앞에서, 현관에서 서성이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늘한 거리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친 듯이 서로에게 끌렸다. 그것은 마치 서로 다른 궤도를 도는 두 개의 행성이, 어느 순간 서로의 중력에 이끌려 충돌을 향해 돌진하는 것과 같았다. 피할 수 없는, 파괴적일지라도 멈출 수 없는 이끌림.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다. 담배 연기도, 우리의 뒤섞인 체취도, 그 무거운 공기 속에 갇혀 가라앉는 듯했다.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이제는 조금 더 희미해진 도시의 불빛이 그녀의 등을, 드러난 어깨를,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 빛과 어둠의 경계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어느 이름 모를 화가가 그린 명화의 한 부분처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슬픔으로 인해 완성되는 아름다움.
침묵. 그 길고 무거운 침묵 속에서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의 호흡 소리뿐이었다. 들숨과 날숨. 생명이 이어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그 단조로운 소리. 그것은 마치 우리가 나눌 수 있는 유일하고도 마지막 대화 같았다.
"뭐해?"
그녀가,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물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아래에는 미세한 불안의 떨림이 숨겨져 있었다. 마치 내가 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 방을, 그리고 그녀를 떠나버릴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그냥… 시간을 생각했어.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 말이야."
나의 대답은 안개처럼 모호하고 추상적이었다. 사실 나 자신도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은 변하고, 우리의 이 만남도 언젠가는, 어쩌면 아주 가까운 미래에 끝날 것이라는 막연한, 그러나 강력한 두려움이 거대한 손처럼 내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 시간이… 소중한 거야?"
그녀의 질문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날아와 내 가슴에 박혔다. 그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수많은 다른 질문들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지?' '우리의 관계는 대체 뭐지?' 그리고 어쩌면, '나를 사랑하니?'라는, 가장 원초적이고 절박한 질문까지도.
"뭔들 중요하고, 또 뭔들 하찮은 거겠어. 세상에 영원한 건 없으니까. 그냥… 그냥 어느 날 네가 내 속으로, 내 삶 속으로 불쑥 뛰어든 거야. 예고도 없이. 그리고 난… 이 모든 게 어느 순간 멈출까 봐, 네가 사라질까 봐 두려운 거고. 하지만… 하지만 어쩌겠어. 우리 모두 그런 불안과 걱정 속에서 살아가는 거잖아.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말이야."
내 말은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내 감정 상태를, 내 머릿속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이 관계를 어디로 끌고 가고 싶은가.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이 현재의 순간, 그녀와 함께 이 좁은 방에 누워 있는 이 시간만이 유일한 진실이라고, 그것만이 중요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돌아눕는다. 그리고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 한숨 속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슬픔이 담겨 있을까. 그녀의 눈꺼풀이 살포시,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떨리더니, 이내 다시 감긴다. 그녀의 긴 속눈썹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꿈속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힘겹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나는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 비친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3시 47분. 이제 두 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까지. 좁디좁은 새벽의 침대. 단정하게, 마치 모든 감정을 숨기려는 듯 굳게 닫혀 있는 커튼. 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빛이 스며든 곳에, 그녀가 누워있다. 그녀의 실루엣은 마치 한 폭의 정물화 같았다. 시간의 거대한 흐름 속에 우연히 포착된, 덧없고 일시적인 아름다움. 나는 이 그림을, 이 순간을 영원히 내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IV.
모든 것은 찰나다. 거대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삶 전체가 그러하듯, 우리의 만남도, 이 밤도,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모든 감정과 쾌락의 순간들도 결국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나가는 찰나에 불과하다. 매 순간은 이전의 순간과 단절되어 있지만, 우리의 어리석은 육체와 정신은 그 순간의 강렬한 쾌감을 기억하고,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대한 미련을 질질, 아주 질질 끌고 다닌다. 그래, 결국 그런 것이다. 감각이 주는 이 황홀함.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그래서 위험한.
중독.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천만에. 중독이란 내 의지를 완전히 넘어선 것들을 의미한다. 이 찰나의 행복, 이 순간의 육체적 합일이 주는 위안 말고, 대관절 내게, 우리의 이 관계에, 이 허무한 삶에 남은 의미라는 것이 있기는 있을까?
그녀와의 만남은 내게 완벽한 중독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욕망이나 성적인 끌림을 넘어선, 훨씬 더 복잡하고 깊은 차원의 문제였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녀의 슬픈 눈빛,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 그녀의 서툰 영어, 그녀의 독특한 체취,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끊을 수 없는 강력한 약물과도 같았다.
창밖을 본다. 아까보다 도시의 불빛이 더 희미해졌다. 가장 깊은 어둠의 시간,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곧 해가 뜰 것이고, 우리는 마법에서 풀려난 신데렐라처럼 각자의 초라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는 공항으로 가서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를 것이고, 그녀는 그녀의 삶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어쩌면 알고 싶지 않은 그녀의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또 언젠가, 마치 회귀하는 연어처럼, 이 좁고 허름한 방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혹은 저주인 것처럼.
방 안은 우리가 남긴 흔적들로 가득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옷가지들, 공기 중에 부유하는 담배 연기의 희미한 흔적, 우리의 몸부림으로 구겨지고 축축해진 침대 시트. 하지만 내가 떠나고 나면, 아침이 되면, 이 모든 흔적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을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내가 떠나기 전에, 혹은 내가 떠난 직후에, 방을 완벽하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깨끗하게 정리했다. 그것은 그녀만의 의식과도 같았다. 우리의 만남을, 그 격렬했던 밤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듯한.
그리고 나는, 여행 가방을 들고 문을 나서기 직전에, 어김없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의자 위에 단정하게, 마치 백화점 진열대의 상품처럼 잘 포개져 있는 내 속옷과 양말을. 어쩌면 그녀에게 사랑이란, 혹은 애정이란, 이렇게 흩어진 것들을 정리하고, 어지러운 것들을 바로잡아주는 행위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혼란스러운 감정조차도, 방을 정리하는 행위를 통해 함께 정리하려는 듯한, 그런 처연한 의식.
쾌락의 격렬한 파도가 빠져나간 몸이 솜처럼 무겁게 늘어졌다. 이 무거운 육체의 정반대편에, 깃털처럼 가벼운 어떤 행복감이, 혹은 평온함이 놓여 있다. 그것은 마치 영혼이 잠시 육체라는 무거운 껍데기를 떠나, 자유롭게 방 안을 부유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었다.
어스름한 새벽빛 속에서 그녀가 누워있다. 이제 그녀의 호흡은 아까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고르고 규칙적인 숨소리. 마치 깊은 숲속에서 상처를 핥으며 동면에 빠진 작은 동물처럼, 평화롭고 고요해 보였다.
어둑함 속에서, 나는 그녀의 새큰거리는 숨소리를 느낀다. 그 고르고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굴곡진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는다. 서글픈 촉감이 손바닥을 통해 온몸으로 전해진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이 방의 모든 온기를 빨아들인 것처럼 차가웠다. 마치 그녀 내면의 깊은 한기가, 그 어떤 열기로도 녹일 수 없는 영원한 겨울이, 피부 표면으로까지 드러난 듯한 그런 차가움.
창밖으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아직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공기의 질감이 달라져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잠에서 깨어나는 거인의 기지개처럼,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곧 분주한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방의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완벽한 타인이 될 것이다. 서로의 삶이라는 낯선 나라에 잠시 방문했다가 떠나는, 그런 무심한 여행자처럼.
하지만 지금, 바로 이 순간만큼은, 이 좁고 어두운 방 안에서만큼은, 우리는 서로에게 우주에서 가장 가까운, 유일한 존재였다. 비록 그것이 하룻밤의 환상이고, 곧 깨어질 신기루일지라도, 우리는 그 환상을, 이 순간만큼은, 진실이라고 믿고 싶었다.
방은 여전히 좁고, 투박하고, 단순했다. 벽지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우주만큼이나 넓고 복잡하며 무한한 감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역설이었다. 가장 좁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발견하는 무한한 자유와 가능성. 타인의 방 안에서,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자기 자신의 벌거벗은 모습.
그리고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순간들, 이 방의 냄새, 그녀의 체온, 새벽의 빛, 전차 소리,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희미한 추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동시에 나는 믿었다. 그 추억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내 영혼의 어딘가에, 마치 그녀의 저렴한 향수 냄새가 이 방의 낡은 커튼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