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모리

by 남킹


아마겟돈

et implevi eum spiritu Dei, sapientia et intellegentia et scientia in omni opere (Biblia Sacra Vulgata, Liber Exodus, 31 31:3)

그를 하느님의 영으로, 곧 재능과 총명과 온갖 일솜씨로 채워 주겠다. (불가타 성경, 탈출기, 31장 31:3)



서늘한 기운에 잠을 깼다. 밖은 소란스럽고 안은 얼었다. 아난다는 맞은편 벽에 붙은 온도계를 쳐다봤다. 영하 5도. 며칠 새 2도 더워졌다. 좋은 징조다. 겨울이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탁한 물방울이 얼은, 작은 창으로 옅은 햇살이 반사되고 있다. 새벽 2시 17분. 오랜만에 긴 잠을 잤다. 킹조지섬에 도착한 후 일주일 만이다. 완전히 차단된 세상의 안락함을 느꼈다. 그는 검은 방한복을 걸치고 모든 창의 커튼을 조심스레 천천히 걷어 젖혔다. 바싹 마른 이파리 하나가 유리에 앙상하게 붙어있다. 좁은 컨테이너가 윤곽을 드러냈다.


그는 사방에 난 둥근 창을 통하여 바깥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태양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하늘에 박혀있다. 세상은 눈부시게 맑다. 구름이 없는 텅 빈 곳. 사실, 섬에 도착하여 흐린 날을 맞은 기억이 없다. 대지는 붉은 먼지와 연기로 가득하다. 인간이 만들어 낸 부유물. 제주도 절반밖에 되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외롭고 추레한 곳에 있는 이 섬에, 지금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아메리카 땅끝에서, 호주나 뉴질랜드에서 혹은 아프리카 남단에서, 끝도 없이 피난민들이 밀려들고 있다.


남극.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곳.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대륙. 하지만 이제 이곳이 인류가 구원받을 마지막 비상구가 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아직은.


그는 길고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이곳에서 꼬박 20시간을 보냈다. 먹지도 않은 채. 사실, 배고픔보다 더한 고통은 수면 부족이었다. 안전 가옥을 발견하기까지 꼬박 닷새가 걸렸다. 그동안 한순간도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공포가 세상에 깔렸다.


무법천지. 그야말로 세상은 살아 있는 지옥이 되었다. 오염된 세상에서 살기 위해 도망쳐 온 이들은, 이곳에서 매일 작은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무정부 상태. 수많은 국적의 다양한 인종이 좁은 곳에 모여, 살려고 발버둥 쳤다. 턱없이 부족한 음식. 살아 있는 모든 것은 허기진 인간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동족까지도.


그는 긴장을 멈추지 않은 채, 마스크를 쓰고, 문의 손잡이를 천천히 돌렸다. 딸각하며 잠금장치가 풀렸다. 열린 틈새로 찬바람이 몰려왔다. 하지만 따스하다고 느꼈다. 여름이 아니라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한여름에 이곳에 왔다면, 사흘을 넘기기가 힘들게 얼어 죽었을 것이다. 아니면 흑야(黑夜) 속에 굶주려 죽었거나.


새벽이지만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어둠이 없는 세상. 한때 남극의 맨해튼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이제 홍콩의 야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무질서와 소음이 흘러넘쳤다. 대기는 각종 냄새로 카랑카랑하게 메워졌고, 포장되지 않은 마른 땅에는, 사람들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먼지가 풀썩거리며 올라왔다. 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아 보였다.


사람들은 <헬케크>라는 방독 마스크를 언제나 쓰고 다녔다. 거의 모든 얼굴 부분이 투명 변종 아크릴로 가려졌다. 그래서 사실, 수많은 인종이 지나가지만 모두 반짝거릴 뿐, 낯설기만 하다. 동시에 모두 낯이 익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많은 지나다니는 거리로만 경유지를 잡았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은 항상 외투 주머니에 꽂혀있다. 주머니에는 <콜트 아나콘다> 권총이 장전된 채 들어있다. 아직 사용해보지는 않았다. 사실, 누군가의 서재 벽에 장식용으로 걸려 있던 거라 발사되는지조차 모른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그를 지켜 줄 유일한 도구임은 틀림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언덕바지가 나타났다. ‘세렝게의드탑’ 그가 기억하는 장소였다. 그는 그곳을 바라보며 줄곧 왼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바다가 나타났다. 남극의 바다. 아직까지는 그 짙은 푸른 빛을 간직한 채, 눈이 아플정도로 번뜩거렸다. 하지만 시간 문제였다. 곧 어둠이 덮칠 것이다. 음울한 허탈감이 어느새 다가왔다.

점점 사람과 자동차, 바람속에 붕붕대며 날아가는 드론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그는 가장 번잡한 곳에 있는 대형 야외 레스토랑에 이윽고 발길을 멈췄다. 그의 목적지. 하지만 식당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산만하고 높았다. 녹슨 철골과 목재가 사방을 빙 둘러 거칠게 둘러싸고 있어 차라리 요새처럼 느껴졌다. 조잡한 식당 간판이 없다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 틀림없다. <엉클 톰스 캐빈 레스토랑>. 입구에는 건장한 흑인들이 무장한 채, 머뭇거리는 행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섬뜩한 경고문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경고: 수상한 행동 시 바로 골로 보냄.> <이유 없이 오래 머뭇거리는 자, 바로 발포함.> <무기 발견 시 바로 대응 사격함.> <죽기 싫으면 그냥 지나갈 것.> <너를 위한 고기는 없다. 다만 네가 고기가 될 뿐.>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얼핏 설핏 흘러나왔다. 미치도록 향긋한 냄새였다. 냄새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유혹을 참지 못하고 입구에서 서성거렸다. 그들 대부분은 후리후리하고 마른 몸매였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들어가지를 못하고 있다. 막무가내로 들어갔다간, 총알로 벌집투성이가 된 채, 누군가의 스테이크용 고기로 식탁에 오를 것이다. 음식을 받으려면 가치 있는 뭔가를 제시하여야만 하였다.


돈은 소용이 없다. 휴지나 마찬가지였다. 귀금속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그냥 반짝이는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모든 금융 시스템은 파괴되었다. 물물교환만이 남았다.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온 것이다. 음식을 먹으려면 뭔가를 재배하거나 사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은 남극이다. 땅 대부분은 평균 1.6km 두께의 얼음 속에 갇혀있다. 그나마 땅이 드러난 극소수의 몇 안 되는 지역은, 일 년 내내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이다. 재배할 수 없는 곳. 결국, 사냥밖에 남지 않는다.


피난민들이 이곳으로 몰리기 시작하면서, 남극을 삶의 터전으로 살았던 수많은 생물이 사냥감으로 사라졌다. 인간이 쉽게 포획할 수 있는 펭귄, 물개, 바다표범, 바다사자가 우선 사라졌다. 뒤이어 대형 고래가 자취를 감췄다. 남극을 풍요의 바다로 수 놓았던 크릴도 거의 씨가 말랐다. 뒤이어 크릴을 주식으로 하는 물고기 대부분이 자취를 감췄다. 텅 빈 바다가 된 것이다. 인간이 머문 자리는 언제나 죽음과 황폐함이 대신했다.


음식의 풍요 속에 늘어나는 몸무게를 걱정하던 세상은, 불과 1년 만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이 오염되고 황폐해졌다.


모든 것은 갑자기 한꺼번에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인구 천만 이상을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카라치, 상하이, 델리, 라고스, 이스탄불, 도쿄, 뭄바이, 모스크바, 상파울루, 베이징, 톈진, 킨샤사, 광저우, 선전, 카이로, 자카르타, 라호르, 서울, 멕시코시티, 벵갈루루, 뉴욕, 런던, 방콕에 핵폭탄이, 13분 간격으로, 차례로 터졌다. 2066년 6월 6일이었다. 200억의 인류가 풍요롭게 살던 지구는, 한순간에 치명적인 방사능으로 뒤덮였다.


다음날, 인구 백만 이상의 모든 도시에 울긋불긋한 풍선들이 수도 없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늘을 빼곡히 뒤덮은 풍선들.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에 펼쳐진 대단한 장관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풍선이 터졌다. 어린이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독가스가 내려왔다. 신경가스인 사린, 타분, 소만이 온 도시를 강타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거리는 시체와 그들이 남긴 분비물로 범벅이 되었다.


사흘째, 숲이 있는 모든 지역에 드론이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흘 낮, 밤을 가리지 않고 움직이는 모든 것에 노란 액체를 뿜었다. 사람들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변종 에볼라 바이러스였다. 바이러스는 사람과 동물을 가리지 않고 공기를 통하여 쉽게 전염되었다. 감염된 대부분 인간이 사흘 안으로 죽었다.


엿새째, 지구는 이제 거대한 공동묘지가 되었다. 모든 죽은 것은 썩고 악취를 풍겼다. 잊혔던 전염병이 다시 창궐했다. 디프테리아, 성홍열, 장티푸스, 콜레라, 탄저병, 파라티푸스, 파상풍, 패혈증, 페스트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사능과 독가스, 치명적 바이러스가 대륙 대부분을 덮었다. 오염물질은 바람을 타고 서서히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남은 청정 대륙. 남극으로.


이레째, 지구는 누군가에 의해 완전 초토화되었다. 국가 대부분은 기능을 잃었다. 무정부 상태의 폭력과 약탈이 만연했다. 수많은 사람이 매일 살해하고 살해되었다. 지구 생물 대부분이 멸족하였다. 인간도 예외 없이 극소수만 살아남았다. 공포가 모두를 통제하고 혼란과 반목, 약탈과 은둔, 반성과 냉혈함만이 남았다.

사람들은 이 <종말의 일주일>을 <아마겟돈>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엑소더스>가 시작되었다. 바다로 나갔다. 사람들은 살육과 오염된 대륙을 벗어나기 위하여 무작정 배에 올라탔다. 그들은 누구도 목적지를 알지 못했다. 단지 오염이 덜 된 곳으로만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상당수는 굶주림과 탈수, 풍랑으로 바다에서 생을 마감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본능적으로 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들 중 일부는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에 정착했다. 하지만 난민을 모두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땅이 부족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묶기 시작했다. 그리고 얕은 곳을 중심으로 주거 공간을 세우기 시작했다. 길도 만들었다. 소문은 빠르게 번졌다. 세상의 바다를 떠돌던 이들이 앞다투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흉측하지만 거대한 해상 도시가 건설되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이곳을 물의 도시 <베네치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식당 입구 손잡이를 잡았다. 극도의 배고픔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흑인 한 명이 총구를 그에게 향한 채 천천히 다가왔다. 턱없이 부족한 음식. 세상은 이제 음식을 가진 자가 권력이 되었다. 소문이 맞는다면, 이 식당을 운영하는 이들은, 식료품이 가득한 컨테이너 배를 강탈한 해적들이다.

“볼 일이 있는 거야?” 녀석은 빈정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총구를 그의 얼굴 가까이 들이댔다. 아크릴에 반사된 빛이 아만다의 눈을 강하게 쑤셨다.

“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정보를….”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꽉 주며 버티고 섰다. 살려면 먹어야 하고 먹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니면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주어야 한다. 석유, 무기, 여자 혹은 그와 맞먹는 정보.

“정보라? 무슨 정보지?” 놈은 이제 총구를 그의 헬케크에 바싹 갖다 붙인 채,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요량으로 째려보고 있다.

“엄청난 양의 식품에 관한….” 순간, 녀석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스치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고 감지했다.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섬에 도착 후, 첫 식사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노아의 방주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 머리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 까뮈, <페스트> 중에서

정문을 지나자 텅 빈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의외의 광경이었다. 야외 식탁에 빙 둘러앉아 숯불에 갓 구워낸 고기를 허겁지겁 뜯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상상했었다. 적어도 식탁이나 주방은 갖추어져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무것도 없다. 그냥 먼지 나는 공간일 뿐이다. ‘도대체 식당 입구에서 맡았던 향긋한 바비큐 향기는 뭐란 말이냐? 가짜였나?’ 순간, 낭패감을 동반한 절망이 솟구쳐올랐다.


그의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렸다. 뒤따르던 안내원이 부축하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난다는 그에게 의지한 채, 비정형으로 흩어져 있는 컨테이너형 안전 가옥 중 한 곳에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그리고 마스크를 벗은 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맞은편 사람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는 중간에 앉은 이를 알고 있다. 자세가 꼿꼿하고 엄격하다. 그리고 좌우에 흰머리가 한움큼씩 덮여있다. 그가 이곳의 우두머리임이 틀림없다. 아난다는 직감적으로 확신했다. 그라면 충분히 지옥에서라도 살아남을 위인이었다. <프라이스 다즈>. 일명 <검은 곱사등>. 기형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림받고 뉴욕 뒷골목을 전전하던 그는, 뉴욕 최대 마피아 중간 보스 따까리가 되어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였다. 살인까지도. 그는 영리하여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은 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여 보스의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보스의 죄를 대신하여 감옥행을 자처하는 대단한 충성심을 보였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글을 깨우친 그는, 도서관 책장 절반을 덮고 있는 법률 서적과 판례집을 몽땅 읽어 버렸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이 세상에 등장했다. 그는 동료의 법률적 자문을 아낌없이 제공하여 신뢰를 쌓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출판하여 명성을 구축하였으며, 언론을 이용하여 유명인으로 등극하였다. 7년 뒤, 모범수로 출소한 그는 이미 스타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며칠을 굶은 거지?” 보기 드물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가 물었다. 냉담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일주일 전 여기 온 이후로 쭉….” 그는 잠시 아난다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러자 그의 앞에 반쯤 탄 고기 한 덩어리, 나이프, 포크가 놓였다. 그는 입맛을 다시며 보스를 쳐다봤다.

“사람고기는 아니니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난다는 고기를 손으로 꽉 집어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접시를 비우는 데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고기 한 덩어리가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텅 빈 접시만큼 이 세상에 고통스러운 게 있을까? 그는 접시에 미련을 거두지 못한 채 프라이스를 애원하듯 쳐다봤다.

“정보가 있다고?” 그의 목소리는 전문 변호사답게 명료하고 깐깐하였다. 이제 먹은 밥값을 제공할 차례가 된 것이다. 아난다는 가슴 주머니에서 간이 <3D 프로젝터>를 꺼내 접시 위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버튼을 누르고 공간 인증키에 두 손바닥을 살며시 댔다. 잠시 딸깍거리더니 녹색 광선이 접시에서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한 장의 사진이 공간에 띄워졌다. 황량하기 짝이 없는 돌무더기 중앙에 콘크리트로 된 길쭉한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화성의 초기 개척 사진처럼 보였다. 아난다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다음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음, 보시는 사진은 북극의 노르웨이령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섬에 있는 스발바르 국제 종자저장고입니다. 일명 <북극의 노아의 방주> 혹은 <최후의 날 저장고>로 불리고 있습니다. 약 500만 개의 지구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고 추산됩니다. 일반인에게 공개된 유일한 저장고입니다.” 변호사는 그의 말뜻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저장고가 있다는 말인가?” 아난다는 잠시 뜸을 들이며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곧 알려드리겠습니다. 다음을 보시죠. 엘리아! 다음 화면.” 이번에는 유선형의 길고 아름다운 배가 공간에 띄워졌다. 대형 유조선의 축소 모형이었다.

“선박명 : <게으른 바다>. 2044년 4월 4일에 코리아 현대 중공업에서 극비리에 건조된 <세비어 7724 모델>. 백만 톤에 육박하는 재화중량톤. 동력은 원자력. 58년 주기의 핵연료 교체….”

“요점이 뭔가?” 변호사의 표정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당신이 잘 알고 있는 배니까. 당신이 탈취한 그 배니까.

“아 네, 엘리아! 다음 화면.” 프로젝터는 잠시 깜빡이더니 한 장의 문서를 공간에 띄웠다. 그곳에는 깨알 같은 글씨와 복잡한 지도가 뒤섞여 표시되어 있다. 줄과 선, 그림과 글이 혼재한 공간. 아난다는 그 공간의 한곳을 찍으며 말했다.

“엘리아! 확대. 좀 더 확대. 그리고 마크.” 이제 좌중의 어느 누가 봐도 선명한 두 개의 숫자가 굵은 글씨로 나타났다.

‘-71.377282, -4.783315’

“뭔가?” 프라이스는 조급한 듯, 얼굴을 화면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선박의 최종 목적지입니다. 경도와 위도죠. 엘리아. 다음 화면.” 화면은 이제 하얀 대륙으로 변환되었다. 눈으로 덮인 남극 대륙. 세상에서 다섯 번째로 큰 땅. 남극점을 중심으로 화면은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대륙의 한 곳. 그곳이 붉은 점으로 깜빡거렸다.

“저곳은?” 변호사는 성마르게 아난다를 쳐다봤다.

“그렇죠. 선박의 최종 목적지는 남극 대륙의 한 절벽 해안입니다. 당신이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공해상에서 마주친 배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간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냉혹한 전문가의 표정에 놀라움과 당혹함이 섞여 있다.

“배는 아르헨티나의 최남단 도시 <우슈아이야>에서 남극으로만 항해했습니다. 그동안 줄곧. 20년이 넘도록. 어마어마한 식품과 유용한 장비를 싣고 말이죠. 한마디로 남극의 노아의 방주죠.” 드디어 변호사의 얼굴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정말인가? 이게 사실이란 말인가?”

“네, 적어도 제가 얻은 정보는 그렇습니다.” 아난다는 흔들리는 몸을 곧추세우며 확신을 주어 말을 했다.

“확인이 필요한 것은 당연히 알겠지?” 프라이스의 목소리가 좁은 공간에 메아리쳤다.

“네.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보스는 급히 부하를 주변으로 불러 모으더니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의 명령이 떨어진 듯 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문서에 표시된 좌표를 복사하더니 서둘러 나가 버렸다. 부하가 모두 사라지자 그는 벌떡 일어나 두 손을 아난다에게 펼쳤다.

“우리가 가진 비행 장비로 한 30분 정도면 그곳에 도착하여 확인 작업을 할 수 있을 걸세. 자, 마침 이런 날을 위해 준비해 둔 만찬이 있다네. 자네를 초대하고 싶네. 나를 따라오게. 식탁으로 안내하지.” 프라이스는 앞선 듯 가더니 갑자기 멈칫거리며 발걸음을 멈췄다.

“아, 참. 자네 이름이 뭔가?”

“본명은 예지수입니다.”

메멘토 모리

어찌 내가 편히 쉬며, 어찌 내가 평화를 누리랴? 절망이 내 마음 속에 있거늘! 내 형제가 지금 된 것을 보라. 나 또한 죽고 나면 이 같이 될 것이다. 죽음이 두렵다!

- <길가메시 서사시> 중에서

식당은 밝고 좁았다. 의자는 낡았지만, 식탁은 반짝거렸다. 원형 식탁 중앙에 눈부시게 밝은 리튬 강화 형광등이 사과 형상으로 빛을 발하였다. 아난다는 변호사의 맞은편 자리로 안내되었다. 보스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녀가 각각 자리를 잡았다.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음식이 나왔다.


그동안 잊혔던 음식이 눈앞에 펼쳐졌다. 도대체 <아마겟돈> 후, 채소와 과일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런데 아난다의 눈앞에 야채 샐러드와 노란 호박죽이 놓였다. 순간, 꿈을 꾸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흥분과 기대, 감탄과 조급함이 뒤섞인 묘한 환영 속에 갇힌 듯하였다. 그의 허기진 육체가 음식 향기에 심하게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라지고 입속이 침으로 가득했다. 배고픔은 인간의 동물적 특성을 극대화 시킨다. 고상한 문화적 취향이나 예술적 감흥은 이미 종말을 고하였다.


“자 우선, 들게나….” 아난다는 잽싸게 숟가락을 쥐고 호박죽이 담긴 그릇을 한 손으로 잡은 뒤, 빠르게 퍼먹기 시작했다. 놀라운 맛.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맛이다!

“통조림 제품이라 그다지 맛은 없을 거야.” 프라이스의 말은 마치 빈정거리는 듯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하지만 그게 뭐 대수냐? 지금 그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하다. 한 그릇의 탄수화물이 너무 오래되어 기억조차 불분명한 탐식의 즐거움을 끄집어냈다. 오래전, 가족의 식탁을 당연하게 채우던 음식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해서 아무런 느낌도 감동도 느낄 수 없었던 그 사소한 것 한가지가, 지금 그를 휘어잡고 기쁨 속으로 이끈 것이다.


아난다는 입에 담긴 죽을 음미하며, 어느새 야채 샐러드에 줄곧 눈을 두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신기한 듯 손으로 샐러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거의 원형에 가까운 육지의 채소를 본다는 것은, 작금의 상황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남극은 물론이려니와 그가 가까스로 탈출하였던 해상 도시 베네치아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베네치아>는 바다에 세워진 배의 도시답게, 거의 모든 음식이 생선, 조개류 그리고 해초류로 이루어졌다. 사실, 극단적으로 작은 크기의 땅에 서 있기조차 힘들만큼의 무수한 피난민들이 몰려들었으니, 땅을 일구어 작물을 재배한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든 이들의 삶은 수렵과 채취였다. 물고기를 낚고 천혜의 산호초 바다를 마구 파헤쳐 단백질 덩이를 구했다.


물론 약탈도 성행했다. 선상에서 매일 크고 작은 전쟁이 벌어졌다. 인근 바다의 자원이 점점 고갈되면서 그 강도는 더해갔다. 그런데도 도시의 크기는 급속도로 커졌다. 아난다가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는 도시가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대해져 버린 뒤였다. 베네치아는 아비규환이었다. 하긴, 이제 세상은 어디를 간들 모두 지옥이었다.


그가 탄 배는 태평양에서 40일을 표류하였다. 방향은 남쪽이었지만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운 좋게 덜 오염된 땅을 만나기만 소원하였다. 그는 중국 상하이에서 <5월의 꽃(五月之花)>이라는, 다소 매력적인 이름의 배에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몰래 승선할 수 있었다. 도시에 도착하였을 때, 배에 탄 102명의 인원 중 절반만이 살았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약속의 땅이 아니었다. 생존자는 도착하자마자 삼삼오오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방식으로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만 했다.


아난다는 멸망이 시작된 후, 줄곧 혼자였다. 두려운 인간은 뭉치기 마련이다. 세력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 생존 확률을 높이려고, 본능적으로 적과 아군으로 편을 가르고 선택을 하거나 강요받았다. 하지만 그는 죽음이 그다지 두렵지 않게 되었다. 그의 이십 대는 혼란과 광기 혹은 까닭 모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하며, 소위 <이기적인 자아 상실>을 자행하였지만, 서른 즈음에는 욕심을 내려두고 내면의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는 평온함을 애써 보듬을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하였다.


물론, 가족 - 부모와 여섯 동생 – 과의 헤어짐은, 무엇보다 큰 아픔과 상실이었다. 그는 가족을 생각하며 지독한 그리움과 외로움에 몸서리를 쳐야만 했다. 그리고 모두 살아 있기만을 간절히 기도하곤 하였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궁금했다. 차가운 구치소 면회실에서의 마지막 대면 후, 그는 줄곧 그녀의 영롱한 눈길에 맺힌 따스한 사랑의 눈길을 갈구하였다. 내면의 선한 마음을 일깨워주던 그 아름다움 말이다.


“지수야, 내일은 그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도록 노력해주겠니?” 어머니는 그에게 따스한 빵조각이 든 접시를 내밀며 지긋한 눈길로 그를 쳐다봤다.

학창 시절, 아난다는 어린 동생이 당하는 불의를 결코 참지 못하였다. 그는 다소 과격하고 어느 정도 폭력적이었으며 좀 더 집요하였다. 어느 날, 동생의 지능 헬멧과 스마트 폰이 망가진 걸 목격했다. 하지만 동생은 두려운 듯, 그의 강요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절대 불지 않았다.


범인을 찾는 일은, 솔직히, 그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는 15살이 되기 전부터 해커였다. 과정은 간단하였다. 또래의 다른 이들처럼, 온라인 3D 게임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는 절대로 이기지 못하는 무적의 상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나중에는 궁금하였다. 그는 집요하게 파헤치기 시작했다. 떠돌아다니는 간단한 해킹 정보부터 시작하여, 점점 고단위의 기술을 습득해나갔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게임 서버에 마침내 침투한 그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허탈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무적의 상대는, 당연하게도, 관리자 계정이었다.


물론, 그의 계정도 관리자 등급으로 몰래 올렸다. 며칠은 즐거웠다. 하지만 그의 속을 가득 채우던 게임의 즐거움이 급속도로 사라지는 것을 겪고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혼란은 당혹감으로 다가왔고, 뒤죽박죽인 상태로 며칠을 보낸 뒤, 마침내 그는 그가 진정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건, 시스템 침투. 해킹 그 자체였다.


아난다는 동생의 스마트 폰을 분석하였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범인이 나왔다. 녀석은 한 학기 내내 동생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우선, 녀석의 계정에 침투하여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기를 사용 불능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학교 시스템에 침투하여 녀석의 모든 성적을 낙제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아난다는, 녀석이 다니는 스포츠 클럽에 찾아가, 흠씬 두들겨 패고는 절대 내 동생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아 내고 말았다. 나중에 집에 와서 발견한 사실이지만, 얼마나 세게 주먹을 휘둘렀던지, 오른손 새끼손가락이 부러져있었다. 하지만 감히 병원에 갈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이 일로 한 달간의 정학처분을 받았다. 당연하게도. 다행인 건, 폭행만 발각되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분노를 산 것이다. 아버지는 지역의 명망 있는 도의원이었다. 그리고 다음 선거가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악재였다. 경쟁 후보자들의 공세가 나날이 거세졌다. 하루아침에 그는 지역의 망나니로 사람들의 입밖에 오르락내리락했다. 아버지의 엄명으로, 그는 한 달 동안 집안에 꼼짝없이 갇혀 지냈다.


마침내, 정학이 풀리고 선거도 끝났으며 – 아버지는 가까스로 재선에 성공했다. - 주변의 관심도 멀어졌을 때쯤, 그는 집 밖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묘한 해방감과 아울러 그가 가진, 남들과 뭔가 다른 재능에 벅차오르는 환희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집에서 보낸 한 달은,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우선, 그는 아버지의 재선을 살짝 도왔다. 침투가 거의 불가능해 보였던 선거 시스템을 그는 3주 만에 풀었다. 그리고 약간의 필터링을 통하여 결과를 유리하게 바꾸었다. 물론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선거 판세가 거의 박빙이었기에, 누가 이겨도 그다지 의심이 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의 해킹 지식은 한 달 전보다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힘을 지닌, 해킹 모임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그가 열여섯이 되던 시점부터 줄곧 지켜보았고, 평가하였으며, 마침내 그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오프라인을 제외한, 실로 다양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 지식 공유의 즐거움을 함께하였다.


모임의 메시지 처음과 끝은, 항상 <Memento mori (네가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제목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아난다는 13번째 회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초청장 마지막 글귀에서, 그가 모임의 공식적인 마지막 회원이 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로소 오랜 기다림 끝에 완전한 모임이 완성되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를 위대한 붓다의 제자 아난다로 명명합니다. <Memento mori>.’

데쓰웜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요,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이다. -스탈린

“적당히 들게나. 메인요리가 아직 있으니….” 프라이스는 느긋한 표정으로, 옅은 미소를 담은 채, 아난다를 바라봤다. 그의 말은 일종의 신호처럼 들렸다. 부산하던 식탁 위의 손동작들이 일제히 멈췄다. 아난다는 샐러드에 포크를 찌른 채, 보스의 표정을 살피며, 입속에 담긴 음식을 천천히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의 죽 그릇은 이미 깔끔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변호사의 두툼한 입술이 살짝 벌어지기 시작했다. 아난다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만찬을 끝내기 위해 좀 더 구체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추가 정보를 이제 내놓아야 할 때인 것을.

“그래, 말해보게. 자네도 느낄 수 있을 테지만, 놀라운 소식은 무척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법이지. 그리고 궁금한 것을 담아 두기란 여간 힘들지 않은 법이고. 만찬은 길지만, 나의 조급함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네. 우선, 어떻게 이런 정보를 입수했나?” 방안의 시선이 일제히 예지수에게로 모였다. 긴장이 다시 몰려왔다. 모든 게 얼어붙은 듯 차가운 정적이 일 순 이어졌다. 그런데도 모처럼 만에 유기물을 받아들인 그의 육체는, 영양분을 짜내기 위해 부산을 뜬다. 그는 정신줄을 잡아당기며 평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마겟돈 이전에 저는 중국 공안 당국에 체포되어 알 수 없는 곳에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죄목이 뭔가?” 보스는 의자를 살짝 끌어당겨 자세를 고치며 아난다에게 물었다. 그의 얼굴에서, 법정에 선 변호인의 자긍심이 언뜻 느껴졌다.

“죄목은 없습니다. 단지 제가 소속된 모임이….”

“무슨 모임인가?” 그의 모습에 익숙함이 묻어났다. 무척 낯익은 그 모습.


<프라이스 다즈의 법정>. 소셜 네트웍 영상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 구독 뷰어 10억. 그는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의 명성을 더해 줄 사건을 선별하고, 법정과 사건 현장 구석구석을 누비며, 명석한 두뇌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영특한 추리로, 사건을 해결하고 누명을 풀어주고 선한 이를 돕고 악한 이를 벌 주곤 하였다. 특히, 7회 영상은 그를 당대 최고의 변호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집행을 불과 닷새 남겨둔 사형수의 무죄를 입증한 것이다. 13년의 억울한 옥살이 끝에 말이다.


그는 15년 전 발생한 2건의 강간 살인 사건의 현장을 기록과 진술에 따라 재구성하며, 당시 수사관들이 놓쳤거나 의도적으로 숨겼던 증거들을 찾아내어, 좀 더 진보한 과학 기술에 접목하였다. 특히, 그는 피의자, 피해자 혹은 증인들의 인터뷰를 능숙하게 진행하였으며, 그가 질문을 던질 때쯤이면, 언제나 카메라 앵글을 그의 눈에 집중하게 하였다. 반짝이는 눈. 마치 진실을 이미 모두 알고 있으니, 인제 그만 사실대로 실토하라는 듯한 눈빛. 그 강렬함에 시청자들은 노예처럼 매료되었다.


그 눈빛을 지금 예지수는 보고 있다. 영상이 아닌 현실에서.

“사피엔티아(지혜).” 그러자 프라이스는 잽싸게 그의 말을 반복했다.

“사피엔티아? 그럼 그 <사피엔티아>란 말인가? 네가?”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어수룩한 모습 속에 감추어진 명석한 두뇌가 강렬하게 움직이는 듯,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아난다는 천천히 그를 주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째인가?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의 눈빛은 이제 심각함으로 물들었다.

“마지막입니다.”

“그럼. 13의 형제인가?”

“...네.”

“그럼, 자네가 아난다?”

“네...”

“중국에는 왜 갔는가?” 그는 이제 마치 심문하는 형사가 되었다. 진실을 꼭 찾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뭉친.

“끌려갔습니다. 제주도에서.”

“그럼 제주도에서 납치되었단 말인가? 무엇을 해킹했길래?”

“고비사막에 있는….” 다시 그는 예지수의 말을 가로챘다.

“데쓰웜?”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네, 데쓰웜.”

“그 데쓰웜 말인가?”

“네.” 아난다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보스는 의자를 밀어내고 식탁을 젖히며 그의 옆에 자리했다. 그의 눈은 이제 열정으로 이글거렸다.

“말해보게. 그곳에서 캐낸 정보가 이것만은 아니겠지?”

“네, 극히 일부분입니다. 아주 길고 큰 프로젝트의...”

“우리의 만찬이 무척 길어지겠군.” 그는 입구에 대기 중인 부하를 불렀다.

“메인을 가져오게. 아주 근사하게 말이야. 아끼지 말고. 귀빈이 오셨네.”

8의 형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 예수(요한 복음서 12:24-25)

정보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가치 있는 거였다. 유목민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오아시스의 위치 정보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최고의 천으로 여겨지는 비단이 한낱 미물의 벌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중국이 세상에 감추어야 할 최고의 정보였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양한 형상의 음식이 식탁을 채웠다. <풍요의 시대> 때, 요리 앱에서나 봄 직한 화려한 색상의 음식들. 이런 것을 <종말의 시대> 때 마주하리라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아난다는 눈이 휘둥그러진 채 그들을 쳐다봤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여기서 항상 이렇게 먹을 거라는 착오는 하지 말기 바라네. 평소에는 통조림 반 통이 고작 이라네. 그것조차 일 년 이내에는 다 소진되겠지만 말이야.” 변호사는 예지수의 어깨를 톡톡 치며 눈짓으로 음식 들기를 권유하였다. 아난다는 순간적으로 무엇부터 맛보아야 할지 모를 정도의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들면서 그냥 듣게나.” 보스는 포크로 고기 조각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비정한 깡패 집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정보의 중요성을 깨우쳤기 때문이었지. 누가 나의 적이고 동지이며, 누가 유익하고 해로운가를 아는 것부터 시작해서, 누구의 세력이 더 크고 위험하며, 어느 집단이 더 유익하고 오래 갈 것인지를 파악하기 위하여 나는 무척 많은 시간과 인맥을 투자하였다네.”

아난다는 우선 가까이에 차려진 음식부터 조금씩 맛보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서둘지 않게 되었다. 천천히 보고 음미하고 느끼며 감탄하게 되었다. 어느새 그는 불어나는 몸무게를 고민하던 가벼운 시절로 떠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정보의 탐닉은, 내가 세상에 무척 알려진 인물로 등장하면서부터 그 영역이 한없이 넓어졌다네. 나는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정보뿐만 아니라, 단지 호기심만으로도 비싼 대가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네. 그중에는 허황한 것도 많았지. 9.11 테러 음모나 가짜 달 착륙부터 51구역 UFO, 셰익스피어 미스터리, 파충류의 세계 지배설까지, 혹은 심지어 흑인을 통제하기 위하여 에이즈가 만들어졌다는 설까지 온갖 종류의 음모설을 정보의 범주에 예외 없이 포함하곤 하였지. 모르겠어. 내가 왜 그렇게 하였는지는. 나의 직업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만을 가치로 받아들이게끔 숙련시킨단 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자신의 포도주잔을 가져와 단숨에 마셔버렸다. 순간적이지만 그의 입이 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잔에 와인을 다시 채우고 예지수를 돌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나는 닥치는 대로 정보를 끌어모았지. 물론 그중에, 전혀 상식적이지 않거나 뜬구름 잡는 듯한 허황한 이야기는 분류하여 저장한 채, 그냥 흘려버렸겠지. 고비사막의 데쓰웜도 그중의 하나지. 그냥 전설이잖아. 그렇지?”

아난다는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려 그에게 동조를 표시했다.

“그래. 그랬지. 중국과 러시아 정부가 공동으로 비밀리에 데쓰웜을 조사하다 탄로 났다는 우스갯소리가 들렸을 때도 그냥 웃고 넘겼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니까 말이야.” 그는 한쪽 손을 아난다의 어깨에 지긋이 대고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듯. 아난다는 천천히 입안의 음식을 모두 삼킨 뒤, 와인을 비우고 보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데쓰웜은 대량파괴 무기의 저장소였습니다. 적어도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그는 흔들리는 프라이스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힘없이 내뱉었다.

“그리고 적어도….” 아난다가 다시 말을 꺼내자 마자, 다시 그의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래, 적어도 뭔가?”

“적어도 16개의 데쓰웜이 더 있었습니다. 각 대륙의 오지에...”

“그럼 뭔가? 자네가 보기에는 각 국가가 단합해서 세상을 파괴하기로 작당을 했다는 건가?” 보스의 음성이 올라갔다. 떨림도 느껴졌다. 믿기지 않는 현실. 아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뽑은 정부가 자국민을 몰살하였다? 그것도 한 정부가 아닌 여러 정부가 단합해서? 그래, 적어도 우리의 상식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인간 일수도, 인간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아닐수도 있다? 그 뜻은?” 프라이스는 이제 고기 씹기를 잊고 아난다에게 몰입한 듯 보였다.

“인간을 창조주로…”

“AI?”

“저희가 밝혀야 할 숙제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들은 이미 저희를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마겟돈이 시작되기 며칠 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저희 형제 모두가 구속되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말이죠.”

“13명 모두?”

“네 13명.”

“자네는 멤버 모두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알고 있는가?”

“아뇨. 아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만 알고 있습니다. 제게 연락을 하는 이는 오직 한 사람이죠.” 변호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비로소 뭔가를 조금 이해하는 듯한 몸짓.


“어느 날, 나의 폰에 이상한 메시지가 뜨더군. 알다시피 우리는 광고의 홍수 속에 살잖아. 하루에도 수십 통의 원하지 않는 메시지를 받곤 하지. 아니지….” 그는 이 대목에서 씁쓸한 듯, 그의 좁은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슬픈 표정으로 아난다를 쳐다봤다.

“광고의 홍수 속에 살았었지. 그게 불과 일 년 전인데….” 그래. 불과 1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남극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오염되고 파괴되었다. 그 남극 또한 머지않아 오염될 것이다. 설령 오염의 강도가 작더라도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추운 곳이다. 여름이 오기 전, 거주자 대부분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메시지는 싱겁기 짝이 없는 거였어. 어마어마하게 큰 유령선이 남극 바다를 떠돌고 있다는 것과 그 속에는 온갖 종류의 통조림이 가득하다는 것이지. 웃기지 않은가! 유령선과 통조림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미스터리 축에도 들지 않는 황당한 거였지. 그래서 그냥 지워버렸지. 그런데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오더군. 수신 거부도 소용없더군. 내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여 거부하였지만, 언제나 그 메시지는 내 핸드폰에 자리하고 있는 거야. 호기심이 들더군. 나는 전문가를 불러 수신자를 추적했지. 그리고 내가 알아낸 정보는 단 한 개였어.”

그는 말을 멈춘 채 아난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예지수는 그의 진지한 속삭임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의 손과 입, 뇌는 끊임없는 탐식의 판타지에서 허우적대고만 있었다.


“8의 형제. 라후라.” 아난다가 속으로 이름을 외치는 순간, 프라이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결과적으로는 <8의 형제>가 나를 살렸지. 굶주림에서 말이야. 그리고 극소수의 운 좋게 살아남은 피난민들 속에 가장 큰 세력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도록 만들었지. 지금 이 순간 지구상에서 나보다 더 많은 음식을 소유한 이는 없으니까 말이야.”

아난다는 코펠 잔에 담긴 와인을 홀짝거렸다. 시큼한 향기 속에 담긴 알코올이 지친 식도를 타고 뜨겁게 내려갔다. 그는 잠시 멈칫거리더니 다시 고기 조각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무슨 고기인지는 물어보기 전에는 알 길이 없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네. 라후라가 제게 유일한 연락책입니다.” 그는 와인을 비우고 빈 잔을 식탁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메시지

무채색의 공간. 더러운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저 멀리, 시선의 끝에 폭풍의 형상이 도사린다. 에리스는 길게 한숨을 쉰다. 지금은 그 무엇이든 삶을 어렵게한다. 대기, 바람, 구름, 정적, 외로움, 바짝마른 이파리. 모든것은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사물과 형상, 기억은 아픔과 슬픔으로 만 맺어진다. 종말의 시대는 그런것이다. 우리가 원래 만들어진대로 파괴로 이어진다.

시야는 가려지고 두 손은 묶였지만, 끝없이 내려간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난다를 급습한 이들은 다소 거칠지만, 배려가 느껴질 정도의 강압을 행사했다. 꽤 지루한 시간 후, 엘리베이터는 쿵 하며 멈췄다. 그는 그의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최대한 바깥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서늘한 기운. 웅하는 기계음. 알 수 없는 중국어. 규칙적인 발소리. 가끔 들려오는, 덜컥거리는 마찰음. 마침내 그는 어떤 장소에서, 결박과 안대가 풀렸다.


그의 맞은편에는 두 명의 아시아인이 앉아 있었다. 방은 좁고 형광등은 눈부셨다. 깔끔한 제복을 한 이가 중국어로 뭐라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앉은, 머리가 벗겨진 이가 한국어로 통역을 하였다.

“우리는 당신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여기에 당분간 가두어 두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러니 불편하겠지만, 우리의 지시대로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의 지시대로 하지 않는다면 무척 불행한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그들은 말을 끝내자마자 서둘러 나가버렸다.


텅 빈 곳. 책상과 의자 그리고 냉장고가 보였다. 사방은 모두 흰색이었다. 창문은 없고 문이 두 개 있었다. 한쪽 문은 잠겨있고 다른 쪽은 이곳보다 절반 크기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간이침대와 침구류, 변기와 TV만 있었다. 어디선가 약하게 환풍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뿐이었다.


냉장고에는 다양한 음식이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햄버거류와 같은 인스턴스 음식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TV 시청뿐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 방송이었다. 그나마 한류 드라마가 방영되었지만, 드라마를 혐오하는 터라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채널을 CNN으로만 줄곧 고정해 버렸다. 시간을 알 수가 없었다. 뉴스 진행자가 내뱉는 첫마디로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었다.

“굿모닝”, “굿이브닝”


아난다를 방문하는 이는 딱 한사람이었다. 냉장고의 음식이 바닥을 드러낼 때쯤이면, 신기하게 그는 나타났다. 그리고 서둘러 음식을 채우고는 나가버렸다. 아난다는 그에게 중국어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로 인사를 해 보았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예지수의 짐작으로, 30일 정도가 흐른 뒤, 그는 TV로 세상이 망해가는 영상을 접하고 있었다. 앵커와 기자들의 목소리는 점점 암울하고 거칠어져 갔다. 하늘은 점점 검어졌고 도시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너졌다. 거리는 시체로 채워졌고, 차는 불탄 채 뒹굴고 있었다. 어린이는 절규하고 어른은 망연자실한 채 비틀거렸다. 그리고 엿새쯤 지난 뒤, TV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도 빈 화면뿐이었다.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이 끊어진 것이다.


그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의 유일한 방문자를 기다릴 수밖에는.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암흑뿐이었다. 알 수 없는, 무척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방의 모든 전기가 나갔다는 것을 어느 날 깨달았다. 냉장고는 텅 비었고, 공간은 빛 한 톨 들어오지 않는 어둠이었다. 공포가 단숨에 그를 덮쳤다. 그는 후들거리는 발과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어가며 이제, 필사적으로 이곳을 탈출하려고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발견했다. 잠겨있던 그 문이 열려있다는 것을. 바보같이, 첫날, 아난다는 그 문이 잠겨있는 것을 확인한 후, 더는 확인을 하지 않은 거였다. 그는 흥분한 채, 방을 빠져나와 필사적으로 도움을 외치며 미로 같은 공간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깊이의 지하였다. 희미하게 비추는 비상등 속으로 그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무척 많은 시간을 헤맨 끝에, 겨우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밖은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고 숲이었으며, 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었다. 입으로 굴러 들어오는 달콤한 빗물을 흡입하며, 흐린 시야에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으로 힘들게 발을 내디뎠다. 예지수는 이곳이 어디인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중국의 어느 한 지역인 것만은 확실하였다. 한자로 된 팻말이 눈에 띄었다. 그는 이제 어디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걸어 아스팔트 길로 나왔다. 길은 넓었지만, 여전히 혼자였다. 인적이 사라진 곳. 부서진 차들이 눈에 들어왔다. 반듯이 포장된 세상 속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흉물스러운 것들이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다. 불에 탄 흔적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배고픔이 마구 뒤섞여 내딛는 걸음을 무겁게 눌렀다. 사람이 그리웠다. 누구던, 아무나 그냥 마주치기를 바랐다. 하지만 시커멓게 반쯤 그을린 집터를 찾기까지, 그는 사람의 흔적을 전혀 볼 수 없었다.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있었다. 대문을 힘겹게 열어젖힌 곳. 각자의 표정과 몸짓으로, 그들은 뒤엉켜있었다. 아난다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며, 그들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정적과 침묵이 갇힌 곳. 고약하고 역겨운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다르지만 공통적인 것. 그들 얼굴이 어떤 형태를 띄웠든지 간에, 하나 같이 공포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고야>의 그림,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의 표정이었다. 그는 그때 깨달았다. 지금 그는 지옥의 변방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아난다는 절망과 공포 속에 집을 뛰쳐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어느새 늘 그를 채우던 기우가 그의 앞에 현실로 나타났다. 창조와 파괴. 인간은 알면 알수록, 경이로움과 기괴함의 양면을 지닌 묘한 존재였다. IT의 놀라운 발전은, 그에게, 정복해야 할 높은 벽의 시스템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벽의 뒷면에 감추어진 추악한 진실도 선사했다. 모임의 목표는, 파고들수록 점점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건 세상에 드러난 수많은 테러 집단 혹은 테러 지원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찌 보면 조각의 작은 한 면이었다. 그들은 국지적이고 피상적이며 순진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악의 몸통. 그 뿌리는, 당신이 매일 접하는 해맑게 웃음 짓는 이웃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혹은 당신의 손으로 뽑은, 당신을 대표해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친절하고 상냥한 의원일 수도 있었다. 점점 더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그는 느꼈다. 점점 더 그들을 팔수록, 점점 더 노출되었고, 점점 더 우리는, 우리가 획득한 지식에 의하여, 놀라움과 불안 속에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즈음, <8의 형제>에게서 오는 메시지는, 당연하게도 다급하고 내용도 무척 무거웠다.


아난다는 도시로 점점 발걸음을 재촉했다. 배고픔보다 더한 공포가 그의 지친 몸을 휘어잡았다. 그는 뛰기 시작했다. 비가 다시 내렸다. 흐린 시야 속으로 도시가 점점 다가왔다. 점점 더 많은 인간이 눈에 띄었다. 파괴된 차와 찢어진 건물더미. 그 사이에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껏 살아 있는 자는 그뿐이었다. 그는 마침내 건물 더미에 털썩 주저앉았다. 겨울비는 더욱 세졌다. 추위가 몸 전체를 흔들어 젖히기 시작했다.


그는 라후라가, 통신이 끊기기 전, 다급하게 보낸 <메시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렴풋이 삶의 여정을 추론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속에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무엇이든, 지금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의 모습 속에 그가 해야 할 유일한 길임을.


‘<Memento mori>. 아난다. 나의 형제여. 예상대로 세상은 이제 우리를 가두기 시작했소. 불행한 시대지만 애정은 언제나 간직하길 바라오. 내 삶은 애초에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 부디, 살아 있기를 바라오. 대양 한가운데, 배들의 무덤으로 가시오. 누군가 인도할 것이오. 명심하시오. 우리가 얻은 게 어쩌면 마지막 구원일 수도 있음을. <Memento mori>.’

40억년의 지구 역사에서 5번의 대멸종이 있었다. 6500만년전, 5번째 대멸종, K-Pg 멸종에서 공룡이 모조리 사라졌다. 지구에 운석이 충돌하면서 모든게 변했다. 생태계는 완전히 리셋되었다.

저명한 생태학자 폴 에를리히 미국 스탠퍼드대 명예교수는 2015년 “인류에 의해 제6의 대멸종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아난다 앞의 음식이 어느새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처음, 눈으로 마주한 음식은 무척 많은 양이었다. 마르고 작기까지 한 그가 아무리 열심히 내 몸에 채워 넣어도 십 분지 일도 못 넣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알고 있었다. 앞으로 무척 많은 날 동안 굶주릴 수 있다는 것을. 집요하게 배고픔의 신호를 보내왔다.


그는 이제 취기도 느꼈다. 비록 와인 몇 잔이었지만, 영양 결핍으로 부실해진 육체는 약간의 알코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이제 포만감과 배고픔, 알딸딸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품게 되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불쑥 들어왔다. 그는 보스의 귀에 낮은 소리로 속삭이며 아난다를 유심히 쳐다봤다. 눈빛이 섬뜩하게 위압적이었다. 변호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청년은 빠른 발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쿵’하고 닫힌 문소리와 함께 정적이 찾아 왔다. 그는 한동안 문을 바라보더니 내게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우수가 느껴졌다.

“잘 알다시피, 식품을 가득 담은 배가 우리 해안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 게다가 피난민 대부분은 굶주리고 있고….”

“그렇다면?” 아난다의 질문에 프라이스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소. 지키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소. 턱없이 부족한 식량. 세상의 생존자들은 모두 이곳으로 몰리고 있으니, 그들 모두의 목표는 오직 하나. 우리란 말이오. 매일 총질이지. 당연하게도. 지키는 자와 뺏으려는 자.” 그는 와인을 거칠게 그의 잔에 따르더니 쭉 들이켰다.

“조금 전에 부하 2명이 사망했소. 이번 주에만 4명이 죽었소.” 보스의 빈 잔은 급하게 다시 채워졌다.

“패러독스. 이건 분명한 패러독스요. 우리가 가진 음식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하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남은 식품을 급속히 소진하고 있소.”

“그렇다면?” 아난다는 이제 또렷하게 그의 눈을 주시했다. 변호사가 그의 질문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현명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그렇소. 나는 시간이 촉박하다는 것을 감지하고 만찬을 준비했소. 8의 형제, 라후라를 위해서 말이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번은 그가 나를 찾을 것으로 믿었소. 어쩌면 나를 다시 살려주리라 기대하면서 말이오. 그가 어디 있는지 아시오?” 아난다는 씹는 행위를 멈추었다. 포크와 수저도 고스란히 식탁에 곱게 놓았다.

“그는….” 갑자기 아난다의 목이 메었다. 토할 것처럼 속이 메슥거렸다.

“죽었군요?”

“네.” 그는 가까스로 힘없는 답을 이어갔다.

“그럼?”

“네. 제가 모임의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지? 본적도 만난 적도 없다는 멤버들을?” 아난다는 방한복의 지퍼를 열고 셔츠를 가슴까지 올렸다.

“<라이브 싱크>?” 프라이스는 그를 보며 조용히 외쳤다.

“네.” 아난다는 가슴에 박힌 <실시간 다중 생체 신호 싱크 장비>를 그에게 보였다. 13개의 점멸등 중 오직 한 개만 반짝였다. 마지막 13번째만. 그는 믿기지 않는 듯 예지수의 가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게 어떻게 여태 작동이 되는가? 지상의 모든 통신 시설은 파괴되거나 끊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상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늘?”

“네. 지구 궤도에는 여전히 26,666개의 인공위성, 4개의 우주 정거장이 운행 중입니다. 달에는 9개의 유인 기지가 있고요. 화성에는….”

“사람들이 있단 말인가? 그곳에?”

“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생존해있습니다. 우주에.”

소수의 돈과 권력, 기술을 가졌던 인간들은, 지구에 미래가 없다는 것을 진작에 감지한 듯, 어느 날부터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우선 지구 궤도를 도는 거대한 우주 정거장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달에 그들의 첫 식민지를 세웠다.


그들의 두 번째 식민지는 화성이었다. 그리고 차례대로 태양계에 5개의 식민지를 더 건설하였다.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 가니메데, 칼리스토 그리고 토성의 위성인 엔켈라두스, 타이탄이었다. 그들은 각 식민지에 배타적인 공화국을 설립하고, 지구와의 완전 분리를 선언하였다. 즉, 허락된 소수의 인간과 그들이 만든 인조인간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아마겟돈>이 시작되기 한 달 전에 그들은 우주로 모두 이주하였다. 마치 <대멸종>을 알기라도 한 듯.


소수의 선택된 인간은 다음의 7개 비밀 조직과 알려지지 않은 2개의 단체 중 적어도 한 곳에 속하였다. <프리메이슨>, <일루미나티>, <스컬 앤 본즈>, <장미십자단>, <빌더버그>, <시온파> 그리고 <성당 기사단>.


“자네는 그들 편이었나?” 아난다는 찬찬히 보스의 얼굴을 쳐다봤다.

“아니었구나. 그러니 죽임을….” 그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동시에 죽임을 당했는가?”

“그렇진 않습니다. 적어도 열흘 전까지 <8의 형제>는 살아 있었습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태평양의 한 가운데. 생존자들의 배를 묶어 만든 거대한 인공 섬. <베네치아>에 그가 생존해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다는 것을. 비록 그와의 모든 통신 수단은 끊어졌지만, 그는 유무형의 방법으로 나를 찾을 것이라는 확신을.


아난다는 라후라를 모른다. 그의 본명도 모른다. 그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으니 설령 옆을 스치더라도 알아볼 재간이 없다. 하지만 라후라는 아난다를 알고 있다. 라후라는 예지수가 어설픈 해커 시절부터 줄곧 그를 지켜보았고, 그를 모임에 추천하였으며 자격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했다.


아난다는 라후라를 알고 있다. 그는 비범하고 순수하였다. 그는 인간이 세상에 해한 악을 알고 있고 괴로워했다.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치유의 손길은 작고 외로웠지만, 그는 주저 없이 행하였다. 그는 아주 많은 것을 가진 이가 더욱 큰 것을 원한다는 것에 분노하고 저항하였다. 라후라는 알고 있었다. <풍요의 시대>가 한순간에 사라질 정도의 지나치게 많은 폭력이 세상 곳곳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배들의 섬>에서 3주를 보낸 어느 날, 아난다는 그의 잠자리에 누군가 몰래 두고 간 가방을 발견했다. 가방에는 한 권의 책도 들어있었다. <제목 : 거리의 부랑아에서 최고 변호사가 되기까지> <저자 : 프라이스 다즈> 책을 펼치자 구부정한 등을 한 흑인이 꼿꼿하게 선 채, 활짝 웃고 있었다.


“그런데, 자네는 왜 나를 찾아 왔는가? 설마 빵 한 조각 얻어먹으려고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때였다. 쉭 거리는 잡음과 함께 무전기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들리는가? 쉭. 보스. 들리는가? 쉭. 오버.” 변호사는 황급히 무전기를 잡고 볼륨 다이얼을 올리면서 큰소리를 말하였다.

“잘 들린다. 제임스. 쉭. 그래 그곳에 뭐가 보이는가? 오버.”

“네. 보스. 벽입니다. 거대한 벽이 있습니다. 9층으로 된 벽이 있습니다. 쉭. 오버.”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난다를 바라봤다.

“나를 다시 살리려고 왔구나? 틀림없이 나를 살리려고? 왜 나인가? 비열하고 천한 나를 살리려는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가?” 아난다는 그의 외침 속에 비친 눈물을 보았다. 아난다는 앞에 놓인 빵 한 조각을 떼어 입에 넣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리셋



“나는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 우리가 지금까지 창조한 유일한 형태의 삶은 순전히 파괴적인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 모습을 통해서 삶을 만드는 것이죠.” - 스티븐 호킹

벽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였다. 절벽 전체가 온통 흰 벽이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었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틀림없이 그냥 눈으로 덮인 해안 절벽이었다. 하긴, 감히 누가 이런 극한의 오지에 인조 구조물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변호사 일행과 아난다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들 앞에 펼쳐진 9층으로 나누어진 거대한 작품에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거친 바람이 그들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누구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감상만 할건가?” 보스는 싱긋이 웃으며 아난다의 어깨를 툭 쳤다. 그들은 서둘러 벽 가까이 걸어갔다. 선발대가 그곳에 있었다. 그들 모두 들떠 있었다. 일행은 기쁨으로 모두 얼싸안았다. 어쩌면 세상 모든 이가 오랫동안 배불리 먹어도 될 만큼의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 감히 어느 누가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할 수 있었겠는가?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냉장고. <절망의 시대>에 이것보다 더 희망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들어가는 방법은 찾았소?” 변호사는 무전기를 든 부하에게 들뜬 표정으로 물었다.

“아뇨. 아직….” 부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서둘러 보스 일행을 문 앞으로 인도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벽과는 달리, 문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작고 좁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굳게 닫혀 있었다. 그들은 일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문은, 마치 중앙은행의 대형 금고처럼 단단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중앙에 둥근 원이 있고 그 속에 두 개의 손바닥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다이얼도, 손잡이도 없었다.

“자네는 방법을 아는가?” 보스는 다급하게 아난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제가 아는 것은 위치뿐입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며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아무래도 폭파를 해야 할 듯합니다.”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다른 이의 반박이 곧바로 돌아왔다.

“그건 위험합니다. 위를 보십시오. 온통 얼음 계곡입니다. 폭파와 동시에 무너져 내릴지도 모릅니다.” 일행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거대한 높이의 계곡을 쳐다봤다. 수만 년 동안 눈과 얼음으로 형성된 거대한 빙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듯 위태하게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순, 모두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이 사라졌다. 거대한 자연 앞에 인간은 그저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굳게 닫힌 좁은 문. 끝도 없이 불어오는 폭풍 같은 찬바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아난다는 곁눈질로 보스를 쳐다봤다.


얼어붙은 무리 속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빙벽을 반사한 강렬한 태양 빛에 물들어,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무리의 시선도, 갈구하듯, 대부분 프라이스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거침없는 햇살과 오싹하리만큼 차가운 바람 속에, 그는 이윽고 뭔가를 결심한 듯, 아난다의 손을 잡고 천천히 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단언컨대, 세상에 나만큼 절망 속에 살아나는 법을 체득한 이는 없을게요. 태어나면서부터 버림받고, 온갖 악의 소굴에서 용케도 생명줄을 유지하였으며, 이제 지옥으로 변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잘 버티고 있지 않소? 나는 남들보다 더 똑똑하고, 더 성실하고, 더 노력하고, 더 영악하다는 것에 일종의 자긍심 같은 것을 지니게 되었소. 뭐, 나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곱사등이가 아니겠소.” 그는 아난다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싱긋이 희고 큰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면 왠지 모를 쾌락 같은 게 느껴진단 말이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려움, 곤란, 무서움, 공포 같은 것들이 내게 부여하는 삶의 의미 말이요.”

“그렇다면?” 예지수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당신들이 나를 지목한 이유가 뭐겠소? 나를 이 거대한 창고로 인도한 이유가 뭐겠소?” 그는 이제 확신에 찬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친 바람 속에 유난히 그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아난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종말의 시대를 거뜬히 헤쳐나갈 지도자.’


그는 이제 천천히, 그가 잡은 예지수의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살아남기 위해 내가 터득한 지혜라고나 할까? 내 주위의 적과 친구를 구별하기 위하여, 나는 무척이나 섬세하게 상대방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소. 만찬에서 나의 주의를 끈 것 중 하나는, 당신의 오른손이오.” 그는 아난다의 오른손을 들어 펴보였다. 유난히 휘어진 새끼손가락이 드러났다.


“자, 이제 문에 새겨진 문양을 한번 보기 바라오. 어떻게 생겼는지?” 놀랍게도, 문에 그려진 손바닥 문양에도 새끼손가락이 휘어져 있었다. 좌중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놀란 듯 보였다. 하지만 가장 놀란 것은 아난다였다. 손바닥 모양뿐만 아니라 크기, 손금까지, 복사한 듯, 정확하게 같아 보였다.


‘어떻게 나의 손바닥이 저곳에 그려져 있단 말인가?’ 여러 개의 의문이 동시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가? 왜?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자, 이제 서둘러 당신의 손을 저 문양에 일치시켜 보기 바라오.” 그는 성급한 아이처럼 재촉했다. 하지만 아난다는 주춤거렸다. 믿기지 않는 우연의 일치에 머릿속이 타들어 갈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주위의 눈빛은 강렬하고 냉혹했다. 그들은 예지수의 두 손을 잘라서라도 저곳에 갖다 대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실제로 그렇게 할 인간들이었다. 굶주림은 인간이 단지 동물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


아난다는 천천히 문 앞에 다가가 그의 두 손바닥을 문양에 조심스레 갖다 대었다. 면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차가웠다. 머릿속을 채우던 온갖 의문들이 삽시간에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모든 이의 동작이 긴장으로 멈추었다. 혹한의 바람 속에 그대로 얼어버린 듯하였다. 잠깐의 정적이 공간을 지배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응이 왔다. 딱딱하기만 하던 차가운 면이 어느새 따뜻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물컹거리며 액체로 변하더니 그의 손을 감싸며 손등으로 손목으로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아난다는 급히 손을 빼보려 하였지만, 완전히 달라붙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시에 손이 문 안쪽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그는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곁의 누군가가 예지수의 어깨를 잡았지만 격렬한 스파크와 함께 그는 멀찌감치 튕겨 나가 버렸다. 사람들은 공포에 쌓인 채,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삽시간에 일어난 충격으로, 누구 하나 감히 그를 도울 생각을 못 하였다.


그 사이, 흐물거리는 뜨거운 액체는 점점 그의 몸을 둘러싸더니, 두툼한 방한복을 조각조각 찢어버리고는, 그를 깊은 구멍 속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마치 중력이 사라진 골짜기를 흐르듯 통통거리며, 검은 공간을 떠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뜨거움이 사라졌다. 움직임도 멈추었다. 그의 몸은 액체 속에 굳은 듯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공포가 전신을 덮쳐왔다. 그는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입은 벌어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수술 중 각성> 상태에 빠져 버린 듯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어둠이 사라지고 주위가 밝아졌다. 그는 마치 투명 보석 속에 갇힌 벌레처럼 느껴졌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보스 일행이 어른거리며 보이기 시작했다. 문에 난 틈새로 조심스레 그들이 나타났다. 보스는 무리의 중심에 있었다. 아난다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발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이제 자신을 발견하기만을 바랐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모두 그냥 스쳐 갔다. 마치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이. 아난다는 절망적인 눈길로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그들이 다시 예지수의 시야에 잡혔을 때는, 무거운 식품 상자를 모두 짊어진 채였다. 그들은 모두 축제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의 부재를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쓸쓸함을 느꼈다. 일행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을 나서고 있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이 모두 사라졌다. 사라진 틈으로 남극의 눈보라가 일정하게 들어왔다. 그는 한동안 그곳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를수록 공포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여전히 꼼짝달싹할 수 없게 갇혀있었지만 편안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아난다는 이제 그의 앞에 반사된 흐릿한 그를 볼 수 있었다. <라이브 싱크>의 마지막 점멸등이 서서히 꺼져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사고가 조용히 흩어지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아난다는 점점 안정되었다. 느낌이 줄어들고 고통이 사라졌다. 행복감이 들어오고 그를 누르던 세상의 기우들이 벗겨지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였다. 그는 이제 기억이 모두 사라지기 전, 가방 속에 들어있던 내 형제의 마지막 메시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Memento mori>. 슬퍼하지 마라 아난다여. 나의 형제여. 모든 것은 예정되었네. 세상은 다시 태어날 걸세. 오래전 그때처럼. <Memento mori>.’


그는 그때 깨달았다. 그의 12 형제들이 가까이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는 어떤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9개의 계단이 모두 열리고, 세상의 오염이 모두 걷힌 날, 누군가 우리를 냉동고에서 꺼내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리셋된 세상으로.


아난다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당신의 뜻대로 되었나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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