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현기증, 혹은 정오의 사이렌
정오. 시간의 흐름이 잠시 그 숨을 멈추고 제 꼬리를 무는 우로보로스(Ouroboros)의 형상으로 화하는 순간, 경성(京城)의 모든 소음과 활력이, 마치 연금술사의 도가니 속에서 용해되는 비금속(卑金屬)들처럼, 하나의 거대하고 단일한 진동으로 수렴되는 시간. 나는 미쓰코시 백화점의 옥상, 서구 문명의 오만함과 식민지의 체념이 뒤섞여 기묘한 냄새를 풍기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 두개골의 협소한 극장 안에서 안개처럼 부유하던 스물여섯 해의 생애에 대한 몽롱한 반추는, 저 멀리 식민지 금융자본의 심장부인 조선은행 꼭대기에서 울려 퍼지는 정오의 사이렌 소리에 의해 무참히 찢겨나갔다. 그 소리는 단순한 공기의 파동, 즉 음파(音波)의 물리적 전달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존재의 가장 깊은 심연,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의 지층 아래 화석처럼 굳어 있던 모든 기억의 퇴적물을 뒤흔드는 거대한 지진과도 같았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잊고 있던 옛사랑의 편지함에서 우연히 발견한 말린 꽃잎의 희미한 향기, 그 미세한 후각적 자극만으로, 이미 빛바랜 시간의 양피지 위에 박제된 줄 알았던 사랑의 모든 감각적 세목(細目)들—그녀의 목소리가 지녔던 미묘한 떨림,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던 어느 여름날 오후의 햇살, 그녀의 손가락이 내 손등에 남겼던 찰나의 서늘함—을 통째로 되살려내듯, 나에게 있어 그 기계문명의 날카로운 포효는 그러한 감각적 계시(epiphany)의 방아쇠였다.
아, 이 현기증. 세상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발밑의 콘크리트가, 저 아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도시의 풍경이, 그리고 내 두개골 속에 갇힌 생각의 파편들마저 일제히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녹아내리는 듯한, 끔찍하고도 황홀한 착란. 그것은 마치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처럼, 나의 모든 과거가 현재의 이 순간으로 무한히 회귀하여 나를 덮치는 듯한 실존적 공포였다.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겨드랑이 밑에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피부의 감각, 즉 말초신경의 미세한 전기 신호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절단된 사지(四肢)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환상통(幻想痛)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때 내게 있었으나, 나 스스로의 지적 나태와 세상의 무자비한 중력에 의해 퇴화해버린 인공의 날개, 그 날개가 돋아났던 자리에 남은 희미한 흔적,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흔의 기억이었다.
날개. 그 단어가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순간, 사이렌 소리가 촉발한 기억의 홍수는 둑을 무너뜨리고 걷잡을 수 없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개념을 상실하고,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이 현재를 집어삼키며 눈앞에 생생한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의 자의식을 상실하고, 오직 아내에게 기생하는 하나의 그림자, 하나의 부속물로 전락했던 그 시절, 33번지라 불리던 기묘한 유곽의 7호실, 그 볕 들지 않는 윗방에서 시작된 이야기였다. 그곳은 나의 에덴동산이었고, 동시에 나의 지옥이었다.
제2부: 33번지 7호실, 세계의 축소판이자 나의 자궁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 질문은, 내가 거울 앞에서 나의 피골이 상접한 얼굴, 마치 엘 그레코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성자처럼 길게 늘어진 나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마다, 혹은 담배 연기 자욱한 방 안에서 무위(無爲)의 시간을 보내며 나의 지성이 녹슬어가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저주와도 같은 독백이었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그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품었던 방법적 회의처럼 명석한 것이 아니라, 카프카의 주인공이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했을 때 느꼈을 법한, 실존적이고 부조리한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내 정신이라는 이름의 시체를 차가운 해부대 위에 올려놓고, 그 내부를 들여다보는 유일한 관객이자 집도의였다. 이 지독한 자기 능멸의 희극 속에서 나는 기묘한 쾌감을 느꼈다. 육신이 섬유질을 모두 잃어버린 해초처럼 무기력하게 침대 위에 늘어져 있을 때, 역설적이게도 나의 정신은 더욱 날카롭고 투명하게 빛을 발하며 스스로를 관조했다. 그것은 마치 오랜 시간 불과 수은 속에서 단련된 연금술사의 현자의 돌처럼, 가장 비천한 물질(prima materia) 속에서 가장 순수한 정수(quinta essentia)를 추출해내는 과정과도 같았다.
내가 거주하던 공간, 33번지 7호실의 윗방은 나의 이러한 정신 작용을 위한 완벽한 실험실이자 자궁이었다. 그곳은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차단된, 나를 위한 작은 우주, 즉 마이크로코스모스(microcosmos)였다. 열여덟 가구가 마치 거대한 벌집의 방들처럼 다닥다닥 어깨를 맞대고 늘어선 그 건물은, 그 자체로 인간 군상의 욕망과 고독이 응축된 바벨탑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나 나의 방에는 빛이 들지 않았다. 아랫방과의 경계를 이루는 얇은 장지문 틈으로 간신히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의 입자들을 제외하면, 그곳은 영원한 황혼, 혹은 새벽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 침침한 어둠과, 언제나 적당히 눅눅하게 유지되는 습도, 그리고 바깥세상의 소음이 한 꺼풀 걸러져 몽롱하게 들려오는 그 고요함은, 나의 병든 육체와 과열된 정신을 위한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행복이나 불행 따위의 세속적인 척도로 나의 상태를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 사유하는 것, 그 자체로 완전한 상태였다.
나의 세계는 그 윗방으로 한정되어 있었지만, 나의 감각은 얇은 장지문 너머의 세계, 즉 아내의 공간인 아랫방으로 끊임없이 확장되었다. 아랫방은, 나의 어두운 왕국과는 대조적으로, 언제나 희미하게나마 햇빛이 드는 곳이었다. 아내가 외출하고 나면, 나는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아랫방으로 넘어가 그녀가 남긴 흔적들을 탐험하곤 했다. 그 탐험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녀의 화장대가 있었다. 화장대 위의 각양각색의 화장품 병들은, 아랫방의 유일한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반사되어 마치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영롱하고 신비로운 빛을 발산했다. 나는 그 빛의 향연에 매혹되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돋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유일한 장난감이자, 나의 지성을 상징하는 도구였다. 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 햇빛을 모아 검은 종이를 태우던 그 순수하고도 잔인했던 유희에 몰두했다. 평행으로 쏟아지던 무심한 광선들이 나의 돋보기, 나의 의지라는 볼록렌즈를 통과하여 마침내 하나의 초점(focus)으로 응축되는 과정. 그 초점이 종이 위에 닿아, 처음에는 희미한 갈색 반점을 만들다가, 이내 아지랑이 같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마침내 검고 작은 구멍을 뚫어버리는 그 짧은 순간의 초조함과 긴장감. 그것은 나에게 파괴의 쾌감, 즉 프로이트가 말한 죽음의 충동(Thanatos)과 맞닿아 있는 강렬하고도 도착적인 희열을 선사했다. 나는 그 작은 구멍을 통해, 마치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무(無)에서 유(有)를, 아니 유에서 무를 창조하는 전능감을 맛보았다.
그 유치한 불장난에 싫증이 나면, 나의 탐험은 후각의 세계로 옮겨갔다. 나는 화장품 병의 마개를 하나씩 열고 그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것은 단순한 화학적 향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체취와 뒤섞여 그녀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녀의 영혼의 파편이었다. 어떤 병에서는 장미의 농밀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고, 나는 그 향기를 통해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녀의 화려한 외출과, 그녀가 만났을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또 다른 병에서는 백단향(Sandalwood)의 차분하고도 신비로운 향기가 났으며, 나는 그 향기 속에서 그녀의 내면에 숨겨진 고독과 슬픔의 그림자를 어렴풋이 감지하곤 했다. 벽에 걸린 그녀의 화려한 옷가지들—부드러운 실크 블라우스, 몸의 곡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원피스—은 나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했고, 나는 그 옷을 입은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점잖지 못한 상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나는 그녀의 물건들을 통해, 그녀라는 존재를 하나의 텍스트로 삼아 끊임없이 해독하고 재구성하는 유희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가장 흥미롭고도 난해한 연구 대상이었다.
제3부: 은화와 지폐, 관계의 변태(變態)
아내는 나에게 자유로운 외출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그것은 명시적인 금지라기보다는,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처럼, 보이지 않는 시선과 암묵적인 합의에 가까웠다. 나는 바깥세상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고, 그녀는 나의 무능과 무기력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때때로, 마치 변덕스러운 신이 인간에게 은총을 베풀듯, 나에게 50전짜리 은화 한 닢을 던져 주었다. 그 은화가 내 손에 쥐어지는 순간의 감각,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무게는 나에게 실존의 감각을 일깨워주었다. 나는 그 돈을 돼지 저금통의 좁은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짤랑’ 하고 울리는 그 소리는 나의 유폐된 삶 속에서 유일하게 발생하는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저금통의 열쇠는 언제나 그녀가 가져갔다. 그것은 우리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명확한 상징이었다. 나는 생산하지 못하는 자, 오직 그녀의 처분에 의해 존재를 허락받는 자였다.
어느 날,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값비싼 옥으로 만든 누깔잠 한 쌍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곳에 놓이게 된 경위에 대해 나는 묻지 않았다. 다만 나는 돼지 저금통을 흔들어 보았다. 예전보다 확연히 가벼워진 무게는, 나의 의혹이 단순한 망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의 게으름, 혹은 진실과 마주하는 것에 대한 나의 병적인 두려움은 그 명백한 사실을 파헤치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나는 그저 모르는 척, 다시 나의 어두운 왕국으로 돌아와 눈을 감아버렸다. 무지(無知)는 때로 가장 안락한 피난처가 되어 주었다.
그녀에게 내객(來客)이 있는 날이면, 나의 세계는 극도로 긴장하며 수축되었다. 나는 장지문 틈에 귀를 대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들의 대화에 병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낯선 사내의 낮고 굵은 목소리, 그리고 그에 응답하는 아내의, 평소와는 다른, 어딘지 모르게 교태 섞인 웃음소리. 그 소리들은 나의 상상력 속에서 온갖 추잡하고 퇴폐적인 풍경들을 그려냈다. 그들은 대체 왜 그녀에게 돈을 주고 가는 것일까? 그것은 단순한 동정의 대가인가, 아니면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육체와 욕망이 교환되는 어떤 미지의 거래에 대한 보수인가? 내 머릿속은 해결할 수 없는 의문들로 가득 차, 마치 과열된 엔진처럼 윙윙거렸다. 그러나 나는 결코 그녀에게 묻지 않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그 모든 고통스러운 의심과 질투는 마치 간밤의 악몽처럼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망각은 나의 생존 방식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내 안에서 무언가가 부서져 내렸다. 그것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참을 수 없는 충동이었다. 나는 아내가 준 5원의 지폐를 손에 꼭 쥐고, 처음으로 나의 의지로 문밖으로 나섰다. 밤의 경성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였다. 현란하게 명멸하는 네온사인의 인공적인 불빛, 정처 없이 떠도는 군중들의 소음, 자동차의 경적 소리, 그리고 온갖 음식 냄새와 매연이 뒤섞인 혼탁한 공기는, 나의 밀실 속 감각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나는 그 감각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금세 극심한 피로감에 휩싸였다.
자정을 훌쩍 넘겨, 거의 탈진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미닫이를 열자, 그곳에는 내가 상상 속에서만 그려왔던, 그러나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낯선 남자와 뒤엉켜 있는 아내의 모습.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황급히 내 방으로 도망치듯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이 격렬하게 요동쳤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잠시 후, 아내가 내 방으로 들어와 잠든 척하는 나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얼굴에 서린 차가운 분노와, 경련하듯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그 순간, 나의 손에 쥐어져 있던 5원의 지폐가 생각났다.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떨리는 손으로 그 축축한 지폐를 그녀에게 건븄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처음으로 아내의 방, 그녀의 이불 속에서 잠을 깼다. 그녀의 체취와 화장품 냄새가 뒤섞인 그 낯선 온기 속에서, 나는 지난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의식을 잃기 전, 내가 그녀의 차가운 손에 5원의 지폐를 쥐여주었던 것이 희미하게 기억날 뿐이었다. 그러나 그 기묘하고도 도착적인 순간에 느꼈던 형언할 수 없는 쾌감, 즉 내가 그녀의 ‘손님’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그 도착적인 안도감과 희열의 정체를, 나는 비로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그 밤을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무위도식하는 기생충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가장 기묘한 고객이 되었던 것이다.
제4부: 아달린, 혹은 독이 든 성배
그날 이후, 밤의 외출은 나의 일과가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충동적인 일탈이 아니라, 정교하게 계획된 의식(儀式)이었다. 나는 자정이 넘기를 기다려 집에 돌아왔고, 매번 아내에게 돈을 건넸다.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그녀도 묻지 않았고, 나 또한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그 지폐는 우리 사이의 새로운 계약을 상징하는 성물(聖物)과도 같았다. 그러면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자신의 방, 자신의 침대에 재워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밀하고도 강렬한 기쁨이었다. 나는 그녀의 고객이 됨으로써, 비로소 그녀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완벽한 아이러니인가.
어느 날 저녁, 아내는 나를 위해 푸짐한 저녁상을 차렸다. 이틀을 꼬박 굶은 후의 만찬이었다. 나는 식탁 위에 차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과 생선구이를 보며, 이것이 혹시 예수가 제자들과 나누었던 최후의 만찬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그러나 신의 벼락은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는 식사를 마친 나에게 돈을 쥐여주며, 이제는 더 늦게 돌아와도 좋다고, 전보다 훨씬 다정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그 다정함 속에서, 나는 나의 자유가 실은 더 정교하게 설계된 구속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사실을 예감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나의 밤은 경성역 2층의 티룸에서 흘러갔다. 나는 탁자 위에 식어빠진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목적지를 향해 떠나고 도착하는 기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기차가 내뿜는 우렁차고 구슬픈 기적 소리는, 내게 모차르트의 교향곡보다 더 깊은 영혼의 울림으로 와 닿았다. 그것은 떠남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결코 떠나지 못하는 자의 절망이 뒤섞인 비가(悲歌)였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느 밤, 나는 우산도 없이 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물에 빠진 생쥐처럼 축축했고, 오한이 들었다. 그날도 아내에게는 어김없이 내객이 있었다. 나는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의식을 잃고 쓰러졌고, 그 후 며칠을 지독한 감기로 앓아누웠다. 열에 들떠 몽롱한 의식 속에서, 아내는 매일 나에게 하얀 정제약 한 알을 주었다. 그녀는 그것이 아스피린이라고 했다. 그 약을 먹으면 이상하게도 고통이 가라앉고, 견딜 수 없는 깊은 잠이 쏟아졌다. 나는 그녀의 간호 속에서 기묘한 평온함을 느꼈다.
그렇게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 날 오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아내의 방으로 넘어갔다가, 나는 화장대 밑 구석에 떨어져 있는 작은 약 갑을 발견했다. 아달린(Adalin). 그 위에 선명하게 찍힌 상품명. 그것은 당시 신경쇠약 환자들에게 흔히 처방되던 강력한 수면제의 이름이었다. 약 갑에는 열 개의 약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그중 네 개의 공간이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매일 밤 먹어온 것은 단순한 해열제인 아스피린이 아니라, 나를 깊은 잠 속에 가두어 두기 위한 치명적인 수면제였다는 끔찍한 진실. 그녀의 다정함은, 나를 그녀의 세계로부터 완벽하게 격리시키기 위한 독이 든 성배였던 것이다.
제5부: 추락, 그리고 비상을 향한 마지막 절규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나는 집을 뛰쳐나왔다. 배신감,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깊은 허무함. 나는 주머니 속에 남아있던 아달린 여섯 알을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모래알처럼 씹어 삼켰다. 씁쓸한 약의 맛이 혀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공원 벤치에 지친 몸을 눕혔다. 죽음이 나를 어둡고 안락한 잠 속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기이하게도 머리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의 서늘한 명철함.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스, 맬서스… 내 머릿속을 떠돌던 지식의 파편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졌다. 우리 부부는 애초부터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였다. 나는 그녀의 육체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는 나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오해하고,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면서도, 기묘한 방식으로 서로에게 기생하며 함께 걸어가야만 하는 비극적인 운명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그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나의 무능과 오만, 그리고 그녀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의 어리석음을 용서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본 것은, 다시는 보아서는 안 될, 모든 희망을 파괴하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아내는 매무새가 심하게 흐트러진 채 낯선 남자와 뒤엉켜 있었고, 문 앞에 선 나를 발견하자 이성을 잃은 짐승처럼 달려들어 내 팔의 살을 물어뜯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 사이에는 더 이상 용서도, 화해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주머니에 남아있던 몇 푼의 돈을 우리의 깨어진 계약을 위한 마지막 정산금처럼 문지방 밑에 몰래 밀어 넣고, 그 지옥 같은 집을 영원히 뛰쳐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미쓰코시 옥상에 서 있다. 정오의 사이렌 소리는 멎었고, 끓어오르던 세상은 다시 일상의 소음 속으로 가라앉았다. 내 스물여섯 해의 생애는 이제 한 편의 부조리극처럼 막을 내렸다. 욕망도, 희망도, 그 어떤 감정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빈 폐허.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다시 한번, 겨드랑이 밑에서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이 솟아올랐다. 아, 그것은 한때 내게 있었던, 그러나 잃어버렸던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리. 퇴화해버린 기관의 아련한 기억.
나는 잃어버린 날개를 향해, 산산조각 나버린 희망의 파편들을 향해, 그리고 이 모든 절망의 무게를 딛고 다시 한번 저 높은 곳으로 비상하고픈 내 안의 꺼지지 않는 마지막 욕망을 향해,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저 오탁(汚濁)과 위선으로 가득 찬 거리를 넘어, 저 잿빛 절망의 하늘을 넘어, 눈부신 태양을 향해, 날아 보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