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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로보로스의 길

by 남킹

제1장: 잿빛 하늘의 잔상 (殘像)

엔트로피의 법칙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잿빛 하늘 아래, 대화재(大火災)라 명명된 인류 최후의 발작 이후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진공의 시간 속에서, 첸샤 교역소의 인공태양은 그 수명을 다한 기계장치의 관절처럼 삐걱거리며 녹슨 궤도를 따라 기울고 있었다. 한때 생명의 요람이었던 이 행성은 이제 지질학적 시간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묘비에 불과했으며,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우주적 무상함의 법칙을 증명하는 한낱 각주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즉 소멸의 과정을 잠시 유예받은 자들은 과거의 유령들이 남긴 잔해, 그 거대한 배설물을 파먹으며 신경 말단에 겨우 생존의 신호를 전달하고 있었다. 플라즈마 동력원의 희미하고 신경질적인 윙윙거림과 합성 단백질 구이가 타는 역한 냄새, 그리고 인간의 체취가 뒤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늙은 행상인 라오 허는 자신의 사이버네틱 노새, '바오베이(寶貝)'의 짐을 풀었다.

그의 얼굴은 옛 전쟁의 유산인 방사선이 남긴 켈로이드성 흉터로 달의 뒷면처럼 울퉁불퉁했고, 세대를 거슬러 유전된 왼손잡이라는 형질은 오른손잡이의 효율성을 기준으로 설계된 이 잔혹한 신세계에서 또 하나의 원죄와 같은 저주였다. 그의 오랜 동료인 자오는 이미 손목에 이식된 데이터 패드로 오늘의 처참한 정산을 마치고 있었다. 그들의 장사는 글렀다. 종말 이후의 인간들에게 사치란 생존이라는 절대 명제 외의 모든 것이었고, 라오 허가 평생의 기술로 짜낸 수제 직물 따위는 이제 그 용도조차 기억나지 않는 전설 시대의 유물일 뿐이었다.

"거둘 시간이야, 라오." 자오가 공허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교역소의 금속 벽을 맴도는 바람 소리처럼 무심했다. "내일은 지촨의 시장으로 가야지. 거기선 혹시 모르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도, 붓는 시늉이라도 해야 다음 끼니를 걱정할 수 있으니."

"밤새 걸어야 할 걸세. 저 오염된 황무지를." 라오 허의 대답은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삭아 문드러진 것이 기침과 함께 새어 나오는 것에 가까웠다.

"달은 뜨겠지. 적어도 하늘의 자비는 아직 거둬지지 않았으니."

라오 허의 마모된 시선이 시장 한구석, 폐기된 수송 컨테이너를 개조해 만든 임시 주점에서 새어 나오는 소란으로 향했다. 그 소음의 중심에 젊은 녀석, 동이 있었다. 그는 대화재 이후의 오염된 유전자 풀에서 기적처럼 건져진 존재인 듯, 방사능의 낙인 하나 찍히지 않은 말쑥한 얼굴과 혹독한 환경이 빚어낸 단단한 체격을 지녔다. 그 압도적인 젊음, 그 존재 자체가 뿜어내는 생명의 포효가 라오 허의 석회화된 심장을 까닭 없이 짓눌렀다. 동이는 주점의 작부, 아마도 유전 정보를 조작해 특정 욕망에 부응하도록 '생산'되었을 그 여자와 시시덕거리며 발효시킨 합성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제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이 세계에서 저토록 태평하게 생명을 낭비하고 있었다. 라오 허는 자신도 모르게 위장에서부터 뜨거운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늙은 수컷의 질투가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소멸해가는 육신과 저 약동하는 생명 사이에 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 시간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폭력에 대한 원초적인 절망감이었다.

그는 녹슨 기계처럼 삐걱거리는 무릎을 일으켜 주점으로 들어갔다. 악취와 소음,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공간을 가로질러 동이의 뺨을 후려쳤다. 저주받은 왼손이었다. 쩍, 하는 마찰음과 함께 동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의 젊은 눈에 순간 치욕과 분노의 불꽃이 튀었으나, 그는 아무 말 없이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그 텅 빈 저항, 이해할 수 없는 순응이 도리어 라오 허의 마음을 불편하게 찔렀다. 자신이 저지른 폭력의 무의미함, 젊음에 대한 자신의 추악한 시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묵묵히 받아내는 저 젊음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깊이가 그를 혼란 속에 밀어 넣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한 짓이 갓 태어난 신(神)의 뺨을 때린 것과 같은 신성모독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제2장: 야광조(夜光藻)의 바다에서 부르는 옛 노래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의 감각이 무뎌진 라오 허에게 동이가 헐레벌떡 뛰어와 그를 찾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다급함이 서려 있었다.

"선생님, 바오베이가 통제 회로를 끊고 날뛰고 있어요!"

라오 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오베이는 단순한 짐승이나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화재 이후 반평생을 함께 전장을 누빈 전우였고, 핏줄보다 진한 교감을 나눈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낡은 금속 외골격과 유기체 신경 조직이 결합된 그 생체 기계는 주인의 목소리 톤만으로도 미세한 감정의 차이를 표현할 줄 알았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바오베이는 출력 과부하로 외골격이 붉게 달아오른 채 포효하고 있었다. 주변의 부랑아들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암컷 노새 로봇을 끌고 와 바오베이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암컷 로봇은 조악한 발정기 페로몬을 내뿜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다.

"저놈의 짐승이, 늙은 주제에 발정이라니. 고철이면 고철답게 얌전히 삭을 것이지!"

아이들의 잔인하고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라오 허의 흉터 깊숙이 송곳처럼 박혔다. 그는 바오베이의 광기 어린 몸부림 속에서, 자신의 기억 저편에 봉인해두었던 잊혀진 욕망의 그림자를 보았다. 한때 자신에게도 있었던, 모든 것을 불사를 수 있었던 젊음의 열병. 그 열병의 잔재가 이제는 늙고 병든 기계의 오작동으로만 나타나고 있었다.

자오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묵묵히 돕는 동이의 도움으로 겨우 짐을 챙겨 길을 나섰을 때, 밤은 이미 우주적 침묵처럼 깊었다. 지촨까지는 칠십 리 길. 방사능에 오염된 황무지와 고대의 괴수처럼 쓰러져 있는 고가도로의 잔해를 넘어야 했다. 그때, 하늘에 이지러진 달이 떠올랐다. 대기 중에 부유하는 미세 독성 먼지에 산란된 달빛은 세상을 비현실적인 푸른색으로, 마치 태아의 꿈속처럼 물들였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이 죽음의 땅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옛 전쟁의 유전 공학이 낳은 돌연변이 식물, '야광 조(夜光藻)' 밭이었다. 수만, 수십만 개의 야광 조 이삭들이 달빛의 특정 파장에 반응하여 스스로 은은한 인광(燐光)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의 바다는 소금을 뿌린 듯, 혹은 은하수를 통째로 땅 위에 옮겨놓은 듯 장엄했다. 라오 허는 이 절대적인 아름다움 앞에서 언제나 무장해제되었다. 이곳은 현실과 꿈의 경계였고, 죽음과 생명의 경계였다.

"꼭 이런 밤이었지."

그의 입에서 이야기가, 기도가 아닌 고백이, 마치 샘물이 솟듯 흘러나왔다. 자오는 수백 번은 더 들었을 그 이야기였지만, 아무런 말 없이 침묵으로 경청했다. 이 야광 조의 바다와 푸른 달빛 아래에서는, 그러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격에 맞았다.

"대화재 직전, 아직 세상이 제정신이었을 때였네. 나는 젊었고, 이곳 첸샤가 아니라 '웨량완(月亮灣)'이라는, 이름 그대로 달빛이 강물처럼 흐르던 곳에 물건을 대러 갔었지. 달빛이 유독 교교하게 밝은 밤이었어. 한여름의 더위를 피해 개울가로 나갔는데, 삐걱거리는 물레방앗간에서 웬 처녀가 흐느끼고 있었네. 웨량완 제일의 미인이라 불리던 여자였지.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자손으로, 늙은 고리대금업자에게 팔려갈 신세였던 게야. 처녀의 울음소리만큼 사내의 마음을 근원부터 무너뜨리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그 밤, 마치 세상의 종말을 예감한 마지막 아담과 이브처럼 서로를 탐했네. 내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껴본 완전한 충만감, 존재의 합일이었어. 그녀의 살결은 갓 짜낸 비단에 달빛을 적신 듯했고, 땀과 눈물로 젖은 그녀의 몸은 푸른 달빛 아래 바쳐진 신성한 제단처럼 빛났지.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곳, 영혼의 핵을 향해 파고들며, 이 우주 속에서 고독한 두 존재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불가능한 증명을 하려 했네. 시간과 공간이 녹아내리는 하룻밤의 영원이었다네. 그녀의 내부에서, 나는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보았어."

그의 목소리는 야광 조의 빛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약속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어. 그녀의 운명에 나를 엮을 용기가 없었고, 그 완벽한 하룻밤을 현실의 추레함으로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게지. 어리석고 비겁한 젊음이었어.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대화재가 모든 것을 삼킨 후였네. 그녀의 생사는 알 길이 없었지. 그 하룻밤의 기억, 그 영원의 파편 때문에, 나는 평생 이 지긋지긋한 길 위를 떠나지 못하는 걸세. 이 잿빛 황무지 위에서 그 밤의 환영을 되새김질하며 살아가는, 기억의 노예가 된 게야."

이야기가 끝나자 야광 조의 빛마저 숨을 죽인 듯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동이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야광 조의 빛처럼 미약하지만, 그 안에 단단한 핵을 품고 있었다.

"저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달이 차기도 전에 저를 낳고 집안에서 쫓겨나셨다고 합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은 죄로."

라오 허와 자오는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이 삭막하고 메마른 세상에, 그런 구시대의 낭만적인 출생의 비밀이라니. 마치 대화재 이전의 낡은 소설책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동이는 흔들림 없이 진지했다.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이곳 지촨까지 흘러들어와 온갖 험한 일을 겪으셨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맞은 제 뺨의 상처가 아니라, 세상이 어머니의 가슴에 새겨놓은 상처를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라오 허의 이야기에 상심했던 탓인지 그의 어조는 한풀 꺾여 있었다. 그는 라오 허의 낭만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픔을 조용히 고백하고 있었다.

제3장: 강을 건너는 자, 운명의 등을 지고

일행이 지독한 화학약품 냄새를 풍기는 오염된 강에 다다랐다. 문명의 핏줄이었을 거대한 철교는 오래전에 척추가 끊긴 괴수처럼 중간이 끊겨 있었고, 유독성 폐기물이 기름띠처럼 떠다니는 강물에 허리까지 몸을 담가야만 건널 수 있었다. 늙고 지친 라오 허는 미끄러운 강바닥의 돌을 헛디뎌 급류에 휘말렸다. 죽음의 예감이 그의 전신을 차갑게 감쌌다. 그 순간, 동이가 번개처럼 그의 팔을 낚아채 자신의 등에 업었다.

"괜찮으십니까, 선생님."

젊은이의 등은 활화산처럼 뜨거웠다. 앙상하게 마른 자신의 몸과 대조적인 그 견고하고 따뜻한 감촉에 라오 허는 깊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체온이 아니었다. 꺼져버린 줄 알았던 자신의 혈관 속으로 새로운 피가 수혈되는 듯한, 원초적인 생명의 교감이었다. 늙고 소멸해가는 자신이, 젊고 약동하는 생명의 힘에 의해 부양되고 있었다. 아비가 아들을 업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아비를 업고 죽음의 강을 건너는 이 도착적인 장면 속에서 라오 허는 기묘한 평온을 느꼈다.

"어머니의 고향은... 원래부터 지촨이었나?" 차가운 강물 속에서, 라오 허는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 질문은 그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운명이 시킨 것이었다.

"아닙니다. 똑똑히 말씀해주신 적은 없지만, 어릴 적 잠결에 잠꼬대처럼 읊조리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웨량완'이었다고... 그곳의 달빛은 비단결 같았다고..."

쿵. 라오 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시간의 톱니바퀴가 거꾸로 돌며 그의 존재를 과거의 어느 한 점으로 강렬하게 빨아들였다.

"웨량완? 그럼... 그, 네 아비의 성(姓)은...?"

"그것까진 모릅니다. 어머니도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저 하룻밤의 인연이었다고만..."

라오 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동이의 등은 세상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이자 가장 안락한 안식처였다. 그는 이대로 시간이 멈춰, 영원히 이 젊은 생명의 온기에 기대고 싶다는, 성스럽고도 도착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죄가, 자신의 유일했던 영광이, 이제 자신의 생명을 부축하고 있었다.

강을 모두 건넜을 때, 라오 허는 흠뻑 젖은 몸으로 땅에 섰다. 달빛이 그의 흉터 깊은 얼굴 위로 흐르며, 강물에 젖은 것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를 반사했다. 멀리 지촨의 주막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동이가 지친 바오베이의 고삐를 다독이며 채찍을 고쳐 쥐었다.

그 순간, 라오 허는 보았다.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채, 오직 그 장면만이 영원처럼 그의 망막에 각인되었다. 동이의 채찍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의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익숙하게,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왼손잡이.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카오스 속에 숨겨진 코스모스의 질서였고, 잔혹한 운명이 던진 가장 아름답고도 무자비한 해답이었다. 평생을 저주하며 살아온 자신의 형질, 이 비효율적이고 불완한 육체의 증거가, 자신의 죄와 영광의 유일한 상징이, 저 젊고 완벽한 생명 속에 고스란히 재현되어 있었다. 아둔하고 어둡던 라오 허의 눈에, 동이의 왼손은 멸망한 세계의 잿빛 지평선 위로 떠 오르는 새로운 태양처럼 선명하게 박혔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영원을 완성하는 우로보로스의 고리처럼, 그의 과거는 그의 미래를 낳았고, 그 미래는 이제 그의 현재를 구원하고 있었다.

"지촨으로... 서둘러야겠네." 라오 허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늙은 행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막 자신의 길을 발견한 순례자의 목소리였다. "동이, 자네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겠나?"

나귀가 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바오베이의 목에 달린 방울 소리는 밤의 황무지 위로 그 어느 때보다 청명하게, 마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하늘의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그러나 라오 허의 마음속에는, 반평생을 그를 비추던 공허하고 차가운 달이 지고, 자신의 피와 살로 빚어진, 생명의 온기를 품은 새로운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길은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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