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퍼 벨트

by 남킹

산기슭에 이른 에리스는, 후들거리는 두 발을 힘들게 편 채, 하늘과 맞닿아 있는 눈 덮인 나르산을 쳐다봤다. 산 정상에서 가파른 사면을 따라 서늘한 구름 융단이 음울하게 휘어져 뱀처럼 흐르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테티스도 얼굴 전체를 뒤덮고 있던 땀과 빗물을 두 손으로 한번 훔치고는 멈추어 선 채, 조용히 그의 군주가 향한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폭우는 그쳤지만 바람은 더 세어졌다.


풍향이 걷잡을 수 없이 변전 되며, 강하게 그들의 붉게 물든 얼굴을 강타했다.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앞으로 더 힘들어질 겁니다." 테티스가 에리스에게 다가가며 걱정스러운 듯 속삭였다. 곧은 콧날과 범접하기 어려운 풍채를 지닌 에리스였지만, 보름 동안 이어진 겨울 산행에 그의 몸과 마음은 쇠진할 데로 쇠진해 있었다.


불안한 그의 눈동자에, 어쩌면 이룰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위구심이 잠겨있었다. 그러한 모습을 옆에서 물끄러미 바라다봐야 하는 테티스에게도, 어느새 불안한 미래가 안겨준 두려움과 진퇴양난에 처한 그들의 삶이 전하는 거북살스러움이 전신에 속속들이 박혀있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결국, 돌아갈 곳은 산의 품속뿐이라는 것을. 그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라는 것을.


"아마 열흘은 더 가야 할 겁니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테티스는 포도주가 든 술통을 에리스에게 건네면서 말을 이어갔다.


"호흡을 얕게 자주 하십시오.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점점 공기가 더 희박해질 겁니다. 지금도 이미 많이 줄었지만 말입니다." 에리스는 한 모금의 술을 꿀꺽 삼키고는 거친 탄식과 함께, 술통을 테티스에게 돌려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좁은, 곁가지 오솔길로 천천히 굳은 발을 떼기 시작했다. 빽빽이 들어찬 침엽수림 사이로 쉭쉭 거리며 세찬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그들 앞에 예리한 검은 돌들이 박힌 가파른 비탈길이 나타났다.


그 순간, 테티스는 그의 짙은 청녹색 눈을 바라봤다. 그는 에리스가 아직 목을 가누지 못하던 아기였을 때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세찬 폭우가 쏟아질 것만 같았던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우거진 나무들이 차양처럼 빼곡히 길을 덮고 있던 무수한 숲을 뚫고, 시녀와 함께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가, 낡은 오두막에 유배되어있던 그에게 당도했다.


낮이었지만 밤처럼 어두웠다. 천둥의 울림이 들려왔고, 끝없이 펼쳐진, 투명에 가까운 푸른 헤라 호수의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때리고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그녀는 안기듯이 그에게 아기를 맡기고는, 털썩 주저앉더니 혼절하듯 옆으로 쓰러졌다.


푸른 경고등이 황색으로 바뀌었다. 주변은 사라지고 공간은 서서히 밝아온다. 몽환이 떠나고 인식이 다가온다.


인식은 언제나 고통을 수반한다.


현실이 제공하는 따분함. 시간이 엿가락처럼 끈적거리며 늘어난다. 이제 겨우 8년을 이곳에서 살았는데, 80년을 산 듯하다.


“나비님, 세툰 카스트 영역 4,5,8,2 황색 접점에 대한 보안 조치는 마이너스 2로 격하되었습니다. 새로운 지정은 발급하지 않아도 됩니다. 비보호 조처 조령 59 다시 2 조항에 따르면….”


나는 묵음 버튼을 누른다. 내 앞, 뒤, 옆에 지나치게 많은 버튼이 깜빡인다. 3 개의 인공 태양은 이제 붉은 빛으로 점멸을 알린다.


하루가 다 간 것이다.


엄격히 적용되는 보편 태양계 속 지구 시간. 24시간. 50분의 휴식과 10분의 작업이 4번 반복, 40분의 운동과 20분의 휴식이 3번 반복. 비상사태만 없다면 절대로 이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벗어날 수 없다.


모든 것은 완벽하게 자동화되어 있다. 즉, 인간은 그냥 형식상, 단 하나만 필요하다.


그러므로 항상 외롭다.


17 광시(光時, light-hour) 떨어진 태양계 변방은 늘 그렇듯이 텅 비어있다. 주변 1 광시 내로 아무것도 없다. 즉, 1,079,252,848,800m 내에 나만 존재한다.


이곳, 필레몬으로 명명된 QB572-1 소행성은 사실 인간 탐욕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던 곳.


그런데 지름 150km의 울퉁불퉁한 이 돌 뭉치에 청록색의 그란디디어라이트(Grandidierite) 보석이 깨알같이 박혀있음이 알려진 것이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목성계 영역 천문학자 마몬 박사는, 2116년에 제정된 <카이퍼벨트 영역 최초 발견자 보호 법령>에 따라 이곳이 온전히 자신의 영토임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주권 보장 발령 이틀 전에 살해당했다. 이후 8명의 주인이 17년 사이에 바뀌었다. 결국, 채굴권은 태양계 최대 식민 제국의 보호를 받는 <톰 브라이스> 광물회사로 넘어갔다.


나는 지구를 벗어나기 전, 18년을 교도소 독방에서 보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형수였다.


지나치게 가난하고 폭력적이었던 유년 시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세상은 이제 지나치게 잘 사는 극소수의 인간과 처절하게 가난한 대다수 사람으로 나뉘었다.


나는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할 바에야 차라리 외로움이 낫다고 생각했다.


황색 경고등이 푸른색으로 바뀌었다. 나는 다시 증강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공간은 사라지고 주변은 서서히 밝아온다. 인식이 떠나고 몽환이 다가온다. 몽환은 언제나 욕망을 수반한다.

환상이 제공하는 긴장감. 긴박한 시간이 찾아온다.


죽음이 당연시되던 세상으로. 나는 다시 살기 위해 애쓴다.


나는 헉헉거리며 검은 돌들이 박힌 가파른 비탈길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폭설이 눈 앞을 가린다. 테티스가 어느새 내 옆을 따르기 시작한다.


나는 테티스의 보호 아래 25년을 살았다. 그리고 나의 왕국을 되찾기 위하여 정령의 땅, 나르산을 지금 오르고 있다.


어느 게 현실이고 꿈인가?


알리칸테는 언제나 맑음 - 2023-12-15T201449.538.jpg
길에 내리는 빗물 - 2023-12-21T163629.9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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