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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킹 Oct 23. 2024

비다의 눈 #5

삶과 죽음의 노래 1권

포그나르               


모든 시작은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19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나 대학 강단에서 첫 강의를 마친 그 순간, 한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타뉼로 음베키로 소개하였다. 그의 피부는 흑단처럼 짙고 매끈했으며, 얼굴의 윤곽은 날카롭고 강인했다. 특히 광대뼈는 높은 산등성이처럼 도드라져 그를 단호하고 결단력 있는 인상으로 만들었다. 검은색 코트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고, 가슴에는 오래된 시계 사슬이 반짝였다.      
그는 누렇게 변색한 표지를 한, 낡은 책 한 권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페이지들은 갈라진 가장자리로 바스락거리며, 작은 먼지들을 공중으로 흩날렸다.     
“이 책을 봐주시겠습니까? 교수님.” 그의 목소리는 낮고 진지했다. 나는 책을 받아들며 그의 요청에 일말의 호기심을 느꼈지만, 이내 일축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도 그저 다른 이의 명성에 기대어 돈을 벌려는, 또 다른 사기꾼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그는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며 책을 넘겨보았다.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적힌 글자와 그림들. 나는 카시우비아어임을 알아챘다. 희귀하고, 거의 잊힌 동유럽의 방언. 그는 내가 동유럽 언어와 방언 전문가라는 소문을 듣고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 책의 내용이 지난 100년간 일어난 가장 충격적인 사건들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제1차 세계대전,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냉전, 중국 문화대혁명,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9/11 테러까지 말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오히려 이 책이 틀림없이 가짜라고 판단했다. 세상에는 사람을 현혹하는 수많은 가짜 예언서와 예언자들이 가득하였으므로.     
나는 책 내용보다는, 잉크의 흔적을 먼저 면밀히 살폈다. 고대 문서에서만 발견될 법한 특유의 갈색빛을 띠고 있었다. 제법 그럴싸하게 만든 모조품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나의 의심을 알아챈 듯, 덧붙였다.      
“이것은 철 갈로산 잉크로 쓰였습니다. 당신도 아시겠지만, 그 특유의 색깔과 질감은 현대 기술로는 재현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종이의 표면을 만졌다. 오래된 비단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거친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 책은 1,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타뉼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파피루스와 철 갈로산 잉크를 사용한 이 책이 현대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을 교수님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진정성과 그 책의 진위에 대한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교수님, 물론 저는 압니다. 당장 믿기 어렵다는 것을.” 그는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제발 하루에 10분이라도 좋으니, 꼭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흥미를 느끼신다면 꼭 저에게 연락 바랍니다. 왜냐하면 저는 교수님에게 나머지 아홉 권의 책을 더 드릴 생각입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교수님의 완벽한 해석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의 암울한 미래가 곧 닥칠 테니까요.”      
이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운명의 실타래가 엮이는 순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예언서의 내용을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책을 펼치고 분석하는 시간은 나에게 있어 거의 의식처럼 되어갔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지나가는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 문서 속에서 나는 세상의 파멸이 점점 가까워져 가는 과정을 차례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마치 내가 그 예언 속에 포함된 일부분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매일매일, 나는 종말의 징후와 갈등의 소용돌이가 가득한 미래의 장면들을 목격하며 두려움에 휩싸였다. 동시에 아마겟돈 전쟁을 막기 위한 그의 저항운동을 돕기 시작했다.      
- 릴리안 나리의 <참회록> 중 -               

어김없이 악몽 같은 밤을 보낸 뒤, 지수는 몽롱한 상태로 눈을 떴다. 철문이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순간, 눈을 감은 채 고통스러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강렬한 햇살이 좁은 창살 틈으로 쏟아져 들어와, 음습한 그의 숙소를 환하게 밝혔다. 그러나 그 빛은 결코 따뜻하거나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고 냉혹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추는 듯했다.     

숙소는 마치 인간성의 잔재조차 잃어버린 듯한 혼돈 그 자체였다. 눅눅한 땅바닥에는 수많은 노예가 서로 뒤엉켜 있었다. 더럽고 악취가 나는 그들은 한때 인간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고통 속에 몸부림쳤다. 온갖 오물이 뒤섞여 있어 숨을 쉴 때마다 코를 찌르는 냄새가 진동했다.      

철문이 완전히 열리자, 무거운 금속 소리에 모든 노예가 움찔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감시자였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지만, 차가운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한 손에 긴 회초리를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노예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회초리의 끝이 바닥에 닿자,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켰다. 고개를 들거나 감시자와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더 큰 불행이 닥쳐올까 봐, 노예들은 잔뜩 몸을 움츠렸다.      

감시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의 회초리가 공중에서 아찔한 곡선을 그리며 날아오르며 쉭 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청소 시간이다, 이 더러운 굼벵이들아!"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붕에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마치 하늘이 터져버린 것처럼 갑작스럽고 잔혹하게 노예들을 덮쳤다. 그들은 차갑고 거센 물살에 휩쓸려 구석으로 처박혔다. 바닥은 순식간에 물에 잠겼고, 지수는 발버둥 치며 가까스로 균형을 잡으려 했으나, 물의 힘에 압도되어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물의 압력에 떠밀려 구석으로 내몰린 노예들은 서로에게 부딪히며 쌓여갔다. 몇몇은 갈증에 지친 나머지 재빨리 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러나 입안에 퍼지는 짠맛에 그들은 곧바로 고개를 젖히고 물을 뱉어냈다. 그것은 바닷물이었다.     

짠물은 사정없이 그들의 상처 난 피부에 스며들어 불에 그슬린 듯 뜨겁고 화끈거렸다. 특히 쇠사슬에 묶인 발목이 참혹한 상태였다. 거친 금속이 피부를 파고들어, 이미 여러번까지고 덧난 상태였기에 소금물이 닿을 때마다 그들은 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바닥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서서히 빠져나가자, 감시자는 다시금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두 줄로 서라!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 알겠나! 자, 빨리빨리!"      

노예들은 감시자의 명령에 따라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쇠사슬에 묶인 발목을 질질 끌며, 그들은 혼란과 두려움 속에서 빠르게 줄을 맞췄다. 바닥에는 아직 물이 남아 있어 미끄러웠고, 어떤 이들은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며 줄을 서기 위해 애썼다. 지수도 재빨리 몸을 일으켜, 가능한 한 빠르게 열에 서려고 노력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몇몇은 늦게 움직이거나 잘못된 줄에 서고 말았다. 감시자의 눈은 매섭게 그들을 놓치지 않았다. 회초리가 공기를 가르며 날아올랐고, 쉴 새 없이 그들의 몸에 내리꽂혔다. 노예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쓰러졌다. 하지만 곧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마침내 노예들은 두 줄로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들의 몸은 고통으로 가득했지만, 이제는 숨소리조차 억누르며 감시자의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숙소 안은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처럼 무겁고 고요했다. 감시자는 그 침묵을 깨며 천천히 그들 사이를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망치질 소리처럼 규칙적이고 무거웠다. 그는 노예들의 지친 얼굴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오늘은 귀하신 분들이 너희들을 보러 올 것이다.” 감시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그분들에게 선택받느냐 못 받느냐가 곧 너희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알겠느냐?” 그의 목소리는 마치 차가운 쇠사슬처럼 노예들의 목을 조여왔고, 그들은 두려움에 몸을 움츠렸다.      

감시자는 잠시 멈추고, 말없이 노예들을 바라보았다.      

“죽기 싫으면….” 그는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말을 이었다,      

“최대한 그분들에게 상냥한 미소를 짓기 바란다.” 그의 목소리에는 냉혹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노예들은 그 말의 의미를 뼛속까지 깨달으며, 눈을 깜빡였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 미소를 짓는 것, 그것은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생존의 본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숙소 근처 광장에 임시 무대가 세워졌다. 바닷가 근처라서 그런지, 멀리서 바람에 실려 오는 뱃고동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갈매기들도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낮게 비행하며 광장을 내려다봤지만, 이곳에서 벌어질 잔혹함을 알 리 없었다. 광장 주변은 울긋불긋한 장식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깃발과 천 조각들이 형형색색 바람에 펄럭였고 장식물들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치 축제 시장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노예들은 일찍 광장에 도착해,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무대 앞에서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췄다. 오늘 그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자신을 데려갈 주인을 만나는 것. 그것은 단순한 소원이 아닌, 생존을 위한 간절한 염원이었다.     

지수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검은 안개처럼 퍼져나갔다. 선택받지 못하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설령 선택받는다고 해도 그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두 개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과 같았다. 한쪽은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죽음의 공포였고, 다른 한쪽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끝없는 속박의 길이었다.     

지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심장은 두려움에 빠르게 뛰었다.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과 어차피 끝나지 않을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단지 조금 더 견딜 수 있는 날들이 주어지는 것뿐이었다.      

광장은 서서히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고, 노예들은 점점 더 긴장감에 휩싸였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시원하게 스쳤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위안도 주지 못했다.      

마침내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인파가 몰려들면서 광장의 공간은 더욱 좁아졌다. 그러나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노예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행색을 하고 있었다. 비록 몸에는 옷을 걸쳤지만, 오래되고 낡아 군데군데 해져 있었고, 먼지와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고된 삶의 흔적이 묻어 있었고, 말라붙은 피부는 오랜 시간 햇볕에 그을려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웠다.      

아울러 구경꾼들의 얼굴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대 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한 호기심을 감추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 무대에 자신이 서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들의 눈빛은 무심하고, 때로는 냉혹해 보였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대화는 끊임없이 웅성거렸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뒤엉켜 알아듣기 어려운 소음이 되어 광장에 울려 퍼졌다.     

한편, 무대 한쪽에 마련된 귀족들의 자리는 눈에 띄게 고요했다. 그곳은 화려한 장식과 깔끔한 천막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텅 비어 있었다.      

잠시 후, 반짝이는 금색 실로 장식된 검은색 턱시도를 걸친 경매사가 단상에 올라섰다. 그는 마이크를 손에 쥐고는 가볍게 몇 번 클릭하며 음성 테스트했다. 그리고 주변을 유심히 살피며 경매장 안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에 있는지 세심하게 점검하였다.      

곧이어, 광장 속 인파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길을 내어주었고, 그 사이로는 화려하게 장식된 오픈카들이 귀족들을 태우고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치 한 편의 장엄한 퍼레이드를 보는 듯했다. 귀족들은 화려한 장식과 우아한 자태로 단상에 착석했다. 그들의 복장과 자세는 그들이 지닌 권력과 부를 드러내며, 단상 위에 모여 앉은 모습은 그들만의 왕국을 뽐내는 듯 보였다.      

그 속에는 지수의 주인인 알렉세이도 있었다. 그의 모습은 더욱 이목을 끌었다. 그의 복장은 금박이 새겨진 검은색 정장으로 귀족의 품위와 세련됨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이 하사받은 노예들을 한번 흠칫 쳐다보았다.      

이윽고 알렉세이는 경매사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제스처는 이곳에서 그가 가장 중요한 결정권자임을 의미했다. 경매사는 차분하면서도 확고한 목소리로 경매의 시작을 알렸다.     

"자, 이제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관례대로 여자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광장의 소음 속에서, 벌거벗은 여자 노예들이 단상에 이끌려 나왔다. 그들은 중요 부위를 손을 감싼 채, 수치심과 고통이 혼합된 얼굴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경매사는 가까이에 있는 여자에게 다가서더니,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그녀의 모든 것을 살펴보았다. 그의 시선은 냉정하고 계산적이며, 결코 동정의 표정은 없었다.      

“푸른 눈, 갈색 머리.” 그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했다.      

“키는 160cm 정도, 젊은 여자에다가 골격이 단단함.” 경매사는 그녀의 팔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골격의 두께와 강도를 점검했다.      

“골반 구조로 보아 아이 생산 가능성 우수함.” 경매사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자는 100유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가 나무망치를 꽝 내리치며 선언했다.      

그 순간, 한 관중이 느닷없이 소리쳤다.      

“우리 마누라 좀 팔아줘여!”      

이내 군중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또 다른 누군가가 맞장구쳤다.      

“내 마누라는 그냥 공짜로 가져가셔!”      

군중들은 다시 한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경매장은 어수선한 축제의 한 장면처럼 변모했다.     

“자자, 농담은 집에 가서 하시고 시간 없으니 빨리빨리 진행하겠습니다.” 경매사가 언성을 높여 외쳤다. 그러자 웃음은 잦아들었고, 모든 시선이 다시 단상 위의 여인에게 집중되었다. 사실, 경매장에 모인 관중 대부분에게 노예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노예들이란 그들의 손에 닿을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100유니는 커녕 10유니조차 모으기 힘든 것이 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들에게 노예 경매는 잠깐의 오락, 고통스러운 일상 속의 작은 탈출구에 불과했다. 아무도 진지하게 이 경매에 참여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며, 그저 귀족들의 유희를 지켜보는 관객으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고 있었다. 결국, 대부분 노예는 이미 운명이 결정된 상태였다. 그들의 최종 목적지는 귀족들에게 선택받아 팔려나갈 운명이었다.      

그때, 단상의 귀족 석에서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자, 첫 번째 입찰이 나왔습니다! 110유니, 110유니 없습니까? 임신이 가능한 여자입니다!”      

잠시의 정적 속에서 다른 귀족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경매사는 즉각 반응했다.      

“아, 네,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얄팍한 아첨이 깃들어 있었다. 경매는 다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자, 그럼 120유니, 120유니 없습니까?”     

다시금 귀족들 사이에서 손이 번갈아 가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입찰은 서서히 치열한 경쟁으로 바뀌었다.      

“130유니, 140유니, 150유니…” 경매사의 음성은 점점 더 빠르게, 더 강렬하게 울려 퍼졌고, 그와 함께 입찰의 가격도 빠르게 상승했다. 마침내, 가격은 320유니에 도달했다.      

단상의 한쪽에서, 알렉세이는 그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미소가 서려 있었고, 그의 눈은 만족스러운 빛으로 빛났다. 이번에 하사받은 노예들이 예상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것에 더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마침내 경매사가 망치를 탕탕탕 세 번 두드리며 외쳤다.      

“320유니에 발렌틴 드라코 경에게 팔렸습니다.” 군중들 사이에서 탄식과 함께 수군거림이 퍼져나갔다. 일반인들에게는 일 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     

여자 노예들의 경매가 끝나자, 경매장의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경매사는 여전히 활기찬 목소리로 다음 경매를 이어갔지만, 관중들의 관심은 점차 식어갔다. 남자 노예들에게는 여자 노예들처럼 높은 가치를 기대할 수 없었다. 낙찰가가 100유니를 넘기는 일은 드물었고, 그보다 낮은 가격에서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높은 가격을 기록한 이들은 신체가 건장하고 골격이 단단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고된 노동에 투입될 예정이었다. 혹은 강인한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받은 자들이었다.      

경매사도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목소리는 점차 기계적으로 변해갔다. 몇 번의 빠른 입찰 후, 경매가 종료될 때마다 경매사의 망치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지만, 그 속에는 어떠한 기대감도, 열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침내 경매가 모두 끝났다. 귀족들은 서둘러 광장을 빠져나갔다. 관중들도 썰물처럼 흩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떠들썩했던 광장은 이제 빈 껍데기처럼 조용해졌다.      

광장 한가운데, 우두커니 남아 있는 이들은 팔리지 못한 노예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감시자들뿐이었다. 남은 여자 노예들은 대부분 임신이 불가능한 늙은 여자들이었고, 남자 노예들은 작고 왜소한 이들이었다. 지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낙오된 노예들의 표정에는 불안과 공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경매에 남겨졌다는 것의 의미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음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 세상에서, 그들은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 신세였다. 다시 말해 다른 이들의 식탁에 오를 고기일 뿐이었다. 지수는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응시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절망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그가 속한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 내렸고, 지금 그는 그 잔해 속에서 꺼져가는 의지를 붙잡으려는 허망한 시도를 했을 뿐이었다.      

*************     

아이기스는, 한껏 멋을 낸 영감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마겟돈 이후의 황폐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눈부시게 화려한 건물이었다. 복도는 온통 은은하게 빛나는 대리석으로 덮여 있었다. 잃어버린 세월 속에서 이곳만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을 밀고 들어선 홀은 왕국의 보물 창고와 같았다. 벽을 따라 늘어선 수많은 조각상은 각기 다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스 신화 속 영웅들, 로마의 황제들, 그리고 동방의 신비로운 신들까지, 전 세계에서 약탈한 조각상들이 혼재해 있었다. 조각상의 재료도 대리석, 청동, 금 등 다양했으며, 조명에 반사된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쳤다.     

홀의 중앙에 배치된 도자기들은 또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거칠게 빚어진 고대 그리스의 암포라부터, 섬세하게 채색된 페르시아의 도자기들까지, 그릇과 항아리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문양과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이 깃들어 있었고,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그곳에서 벌어진 슬픈 이야기를 전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 화려한 홀은, 불타버린 세상의 모든 희망을 품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 화려함은 어딘가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어지럽게 진열된 보물들은 그들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 얼마나 잔혹하게 이곳에 모여들었는지를 떠올리게 했다. 아이기스는 이 아름다움 속에 감춰진 어둠을 자각하면서, 이곳 주인에 대한 의문과 경각심을 느꼈다.      

홀을 지나자 접견실이 나타났다. 접견실은 마치 왕궁의 알현실처럼 꾸며져 있었다. 중앙에는 단으로 이어지는 붉은 카펫이 길게 펼쳐져 있었고, 그 끝에는 높고 웅장한 단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상 위에는 쇠로 된 왕좌가 놓여 있었다. 노인은 천천히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은 다음,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아이기스를 흠칫 쳐다보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이기스는 금방 눈치챘다. 아이기스도 노인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단상 쪽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무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한 인물이 단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중년의 남성으로, 전형적인 러시아인의 풍모를 지녔으며 강철처럼 단단하고 위엄 있는 기운을 내뿜었다. 그는 검은 가죽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와 소매에는 금색 자수가 놓여 있었고, 커다란 은색 버클이 허리를 고정하고 있었다.      

알렉세이가 단상에 서자, 무사들은 일제히 그의 양옆에 늘어서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노인은 신의 현현이라도 본 듯 경외감에 가득 차서 연신 고개를 숙였다.      

"위대하신 알렉세이 경을 오늘 이렇게 알현할 수 있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떨림 없이 단호했으나, 그 속에는 깊은 존경과 두려움이 배어 있었다. 아이기스도 영감을 흉내 내며 고개를 더욱더 깊이 숙이며, 복종과 감사를 표현했다.     

알렉세이의 눈길은 노인을 스치고, 이내 아이기스에게로 향했다. 그 눈빛에는 강렬한 만족감을 그려냈다.      

이윽고 알렉세이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이번 대회에서 아이기스가 우승을 거두어 나의 가문을 빛내고, 그로 인해 우리의 힘을 이 땅에 자랑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무척 기쁘게 생각하오."      

“황공하옵니다!” 노인이 크게 외쳤다.     

알렉세이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 그대의 안목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소. 아이기스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결정이었으며, 그로 인해 오늘 이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다주었소."      

노인은 알렉세이의 칭찬을 받자 감동을 한 듯,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의 어깨는 알렉세이의 말에 경의를 표하듯 더욱 낮아졌고, 그의 눈에는 진심 어린 충성과 기쁨이 깃들어 있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소인은 아이기스를 보자마자 곧바로 알아챘습니다. 에실론 신스텍의 걸작품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에실론이 어떤 기업입니까? 아마겟돈 이전 최고의 로봇 공학 기업이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에실론은 정보통신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였던 타뉼로 그룹의 인공지능 딥블루를 탑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경험과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전투하면 할수록 아이기스의 능력 상승은 한계를 두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 여기! 아이기스의 몸뚱이를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수많은 전투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기!”     

영감은 신이 난 듯, 아이기스의 몸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온몸을 뒤덮은 수많은 흠집과 긁힌 자국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날카로운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 자국, 포탄의 파편이 남긴 깊은 상처, 그리고 수없이 많은 총알이 스쳐 간 흔적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마치 복잡한 지도처럼 아이기스의 몸을 덮고 있지 않습니까? 소인이 판단컨대, 이것은 단순한 기계가 아닙니다. 전장에서의 경험과 역경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진화해온 최고의 생명체입니다. 그러니 주인님의 의지대로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랄 뿐입니다.”     

알렉세이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고, 눈빛은 한층 더 밝아졌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내 안 그래도 그래서 자네를 호출한 거네. 드디어 왕의 승인을 받았다네."     

이 말을 듣자마자 노인의 얼굴은 순식간에 놀라움과 기쁨으로 빛났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알렉세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온몸으로 감격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 말이 정녕 사실이옵니까?" 그의 목소리는 떨렸고, 그 안에는 억눌렀던 기대와 희망이 터져 나오는 듯했다. 노인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알렉세이는 노인의 반응을 보고, 자신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드디어 포그나르를 치기로 결정이 났다네!"     

그의 말은 전쟁의 나팔 소리처럼 접견실에 울려 퍼졌다. 영감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더니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살아생전 고향 땅 한번 밟아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마침내 이런 날이 오는군요."     

그러나 알렉세이는 다시 엄숙한 표정을 되찾으며, 목소리를 낮추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속단은 금물일세." 그의 말은 날카롭게 접견실의 공기를 가르며, 노인을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왜냐하면 포그나르를 점령한 샤크라는 단순히 포악한 자들이 아니라, 지능까지 갖추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다네."     

알렉세이의 말속에는 샤크라가 단순히 힘만으로는 상대할 수 없는, 교활하고 치명적인 상대임을 경고하는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전투 로봇의 활약이 절실하다네." 그의 시선은 다시금 아이기스를 향했다.      

"알겠는가? 자네가 그동안 관리했던 최고의 검투사 로봇들을 모두 이번 전쟁에 참여시킬 것이네."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과 확신이 넘쳐흘렀다. 노인은 알렉세이의 말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 전투는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미래를 결정짓는 전쟁이 될 것이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세르펜티아의 다음 대권은 온전히 알렉세이에게로 넘어 올 것이 자명하였다.     

*************     

로봇 조립 작업장으로 돌아온 영감은 서둘러 그의 직원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밤샘 작업을 지시했다. 알렉세이 경의 지시대로 그는 최대한 많은 전투 로봇을 생산해야만 했다.      

축구장만 한 크기의 작업장은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부서진 로봇은 수리하고 기존 로봇에게는 무기를 장착하는 작업이었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 기계가 회전하는 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한데 어우러져, 거대한 심장의 고동처럼 작업장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이곳저곳에서 수리를 기다리는 로봇의 잔해들이 쌓여 있었고, 기술자들은 그 부서진 금속 덩어리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녹슬어 있던 팔과 다리들은 다시 강철처럼 단단해졌고, 손상된 회로들은 숙련된 손길에 의해 재배선 되었다.      

아이기스는 작업장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축구장만큼 넓은 공간이 마치 전쟁의 전초기지처럼 움직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로봇의 잔해들이 부활하고, 차가운 기계들이 생명을 얻어 무장된 전투 로봇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보며, 아이기스는 영감의 능력에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의문이 있었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영감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님, 도대체 언제 이런 기술을 배우신 건가요? 어떻게 이렇게 완벽하게 로봇을 다룰 수 있는 겁니까?”     

영감은 아이기스의 질문을 듣고서 잠시 멈춰 서더니 미소를 지으며, 특유의 느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말이지, 전부 다 야매로 배운 거지 뭐! 하하하!” 영감은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아버지가 고물상을 했었거든. 그러니까 어릴 적부터 난 그곳에서 버려진 것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놀았어. 고철 더미 속에서 낡고 부서진 로봇 부품들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법을 익혔지.”     

영감의 눈빛이 과거를 떠올리는 듯 반짝였다. “그때는 그저 시간이나 때우는 놀이에 불과했어. 아이러니하게도, 아마겟돈 이전에 난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어. 빈둥거리며 살아가는 게 전부였지.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나니, 그때의 놀이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거야.”     

아이기스는 그 말에 감탄의 눈으로 영감을 쳐다봤다.      

“인생이란 참 묘하지 않나? 별 볼 일 없는 고물상 주인의 아들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나.”     

아이기스는 영감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호기심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았다. 로봇의 하드웨어에 대한 지식은 고물상에서 얻었다고 해도, 소프트웨어는 전혀 다른 분야였다. 프로그래밍과 같은 복잡한 기술을 영감이 어떻게 익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영감님, 소프트웨어 파트는 어떻게 배우신 건가요? 그건 고물상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영감은 그 말을 듣자마자 크고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 그는 허리를 잡고 한참을 웃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하하하, 난 그딴 거 몰라!"      

아이기스는 당황한 얼굴로 영감을 쳐다보았다. 그가 기대했던 대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다. 영감은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냥 모든 프로그램은 초기화시키는 것뿐이야. 뭐 어려울 게 있나? 재부팅. 그거 하나면 충분하지!"     

영감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사실, 나도 프로그래밍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어쩌겠나. 전쟁이 모든 걸 휩쓸어가 버렸지. 소프트웨어에 능통한 이들은 거의 다 죽었고, 남은 사람들도 대부분 흩어졌어. 이제는 씨가 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 순간, 아이기스는 조용히 영감에게 다가가 묻기 시작했다. “혹시 예지수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영감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지수? 아니, 금시초문인데… 왜?”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이기스를 바라보았다.     

아이기스는 영감의 반응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혹시 예전에 10대 해커가 미국 국방성을 해킹한 사건 들어보신 적 없으신가요?”     

그 순간, 영감의 표정이 갑자기 밝아졌다. 마치 오래된 기억의 퍼즐이 맞춰진 듯, 그는 이마를 딱 치며 외쳤다. “아하! 그거 말이군! 10살짜리 꼬마가 미국 국방성을 해킹해서 UFO 관련 문서 수만 건을 인터넷에 올렸다는 그 사건, 맞지?”     

아이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사건입니다. 그 해커가 바로 예지수예요.”     

아이기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영감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지수는 17살 때 MIT에서 세계 최초로 양자 역학을 응용한 인공지능 개발에 성공한 인물입니다. 바로 제 몸에 박혀 있는 AI가 그분의 작품입니다.”     

영감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눈이 이제는 놀라움과 기대감으로 빛났다.      

"정말로? 그가 그런 일을 해냈다고? 그런데 뭐? 살아 있기라도 한 건가?"     

아이기스는 영감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예지수는 현재 노예로 여기에 잡혀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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