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킹 Oct 22. 2024

비다의 눈 #4

삶과 죽음의 노래 1권

검투사    

           

아마겟돈 이후 지중해 최대의 해적단이 된 <블랙 세르펜트>. 그 수장은 러시아인 세르게이 볼코프였다. 그는 흑해 연안의 공업도시에서 일곱 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볼코프의 가족은 전형적인 러시아 마피아 가문이었다. 그의 형들은 모두 조직의 일원으로서 범죄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세르게이도 그들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형들과 달리 조직에 소속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마을의 사채업자로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폭력과 협박을 일삼았다. 당시 러시아의 경제적 불안정은 사채업이 번성할 수 있는 토양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행위는 경제적 약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세르게이의 폭력적인 방식은 그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또 다른 예시였다.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요구했던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대가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채무자의 아내나 딸을 범하기도 하였다. 세르게이의 외모는 그의 범죄적 성향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잘생겼다고 알려졌다. 이는 그가 물리적인 힘뿐만 아니라, 매력적인 외모를 통해서도 사람들을 조종하고 지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그의 외모와 잔인함 사이의 불일치는 역사적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중성'의 상징으로, 당시의 사회적 혼란과 모순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세르게이 볼코프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곡점은 그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찾아왔다. 세르게이는 그날도 한 채무자의 딸을 호텔로 끌고 가 강제로 범하고, 바로 옆 레스토랑에서 홀로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삶에서 일상적이었고, 그는 자신이 범한 행동에 대해 거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은 예외였다. 그는 상상치 못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자신이 조금 전 범했던 여성이 오층 베란다에서 투신하여 그가 보는 앞에서 땅바닥에 떨어져 즉사한 것이었다. 이 사건은 세르게이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것의 여파는 단순한 심리적 충격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친척 중에 공산당 간부가 있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다.      
세르게이 볼코프의 운명은 그가 투옥될 위기에서 극적으로 벗어나면서 또 한 번 바뀌었다. 그를 감옥에서 구해낸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가족, 특히 흑해 연안 최대 마피아 보스였던 맏형의 영향력이었다. 감옥 대신 세르게이는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었던 때였다. 두 나라 간의 갈등은 결국 전면전으로 치닫게 되었고, 세르게이는 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마피아 시절의 냉혹함을 그대로 적용했다. 그는 두려움 없이 적과 맞서는 강인한 전사였다. 그는 전투에서의 비범한 능력을 인정받아 빠른 속도로 진급했다. 5년간의 전쟁 기간 수많은 해상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었고, 그의 이름은 러시아 해군 내에서 널리 알려졌다. 전쟁이 끝난 후, 세르게이는 그가 속한 사회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범죄 세계와 군사 세계를 모두 경험한 인물로서, 두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3차 세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세르게이는 이미 흑해에서 명성이 자자한 함장이었다. 전쟁의 불길이 전 세계로 번지자, 세르게이는 이 혼란을 기회로 삼아 자신의 주변을 믿음직한 부하들로 채우며, '친위부대'를 결성했다. 그는 러시아 해군의 잠수함과 구축함을 비롯한 여러 첨단 함선을 확보했고, 이를 통해 막강한 해상 전력을 구축했다. 그는 이 함대의 지휘권을 통해 바다 위에서 독립된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세르게이는 이듬해 지중해로 진출했다. 지중해는 고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졌으며, 아마겟돈의 혼란 속에서도 이 지역의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해적 전술과 기습 작전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며, 지중해 전역에서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의 함대는 지중해의 주요 항로를 장악했고, 이를 통해 상업적 이익을 독점하고, 자신의 세력을 더욱 강화했다. 결국 세르게이는 지중해의 여러 해상 요충지를 장악했다.      
아마겟돈 이후, 탄생한 첫 번째 왕국이 바로 세르게이 볼코프가 지중해의 마요르카섬을 기반으로 세운 세르펜티아(Serpentia)였다.     
- 릴리안 나리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중 -                

아이기스는 느닷없이 깨어났다. 그의 시야는 아직 흐릿했지만, 이상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장소였다. 그것은 마치 미래와 고대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세계 같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      

돌을 거칠게 깎아 만든 방이었다. 한편에는 투박한 고대의 검과 창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다른 쪽에는 복잡한 회로가 얽힌 전자 장비들이 섞여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은은한 조명이 그의 전신을 비추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낯설기 그지없었다.     

별안간 그의 귀에 거대한 함성이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군중이 단체로 외치는 듯한 소리였다. 아이기스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방 전체를 울리는 진동을 느껴졌다.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 고개를 돌리자, 비로소 거울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낡은 검투사 헬멧이 그의 머리를 덮고 있었고, 어깨에는 번쩍이는 갑옷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허리에는 큼지막한 가죽 벨트가 둘려 있었고, 다리는 투박한 금속 부츠로 무장되어 있었다. 옆구리에는 낡은, 검투사의 방패와 날이 선 검이 매달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의 날렵한 로봇 신체와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의상이었다.     

아이기스는 혼란스러웠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 오게 되었는지, 이 장소가 어디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전투 모드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몸은 그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갑옷과 장비가 그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 순간, 무거운 철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이기스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문을 통해 들어온 것은 한 노인이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활기차고 명료했다. 은빛 수염은 짧고,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그가 입고 있는 검은 로브는 고대 로마의 마술사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그가 내딛는 발걸음은 무척 경쾌해 보였다.     

노인은 아이기스를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침내 깨어났군! 우리의 전사님!”      

그는 아이기스를 향해 손을 벌리며 말했고,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환영의 기색이 넘쳤다. 아이기스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묵직한 갑옷에 갇혀 있다는 느낌에 익숙해지려 애쓰면서도, 눈앞의 상황이 현실인지 의문을 품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어디죠?”     

노인은 그의 물음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아이기스에게 낯설지만 묘하게 안심이 되는 느낌을 주었다.      

“아하! 여기는 콜로세움이여!” 노인은 활기차게 외쳤다. 하지만 이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하하하, 물론 진짜 콜로세움은 아니고... 그와 비스무리하게 만든 경기장이라고 보면 되!”     

노인은 주변을 둘러보며, 오래된 친구에게 오랜만에 반가운 소식을 전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말하자면 고대 로마의 검투사 경기장을 고대로 본떠 만들었지. 헤헤헤. 그러니까 최강의 전투 로봇이 싸우는 곳이라고 보면 되! 그리고 너는, 아이기스 너는, 그 전사로 오늘 데뷔하는 거야! 알겠지? 무슨 말인지?”      

아이기스는 노인의 설명을 들으며, 자신이 처한 상황의 비현실성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이 공간은 과거와 미래,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듯한 세계였다. 그리고 이 세계에서 자신이 맡아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점차 명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아이기스는 그저 또 하나의 싸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 싸운단 말입니까?”     

노인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주인을 위해 싸우는 거지! 너는 엄청 복 받은 거야! 너의 주인이 이곳 세르펜티아 왕국의 가장 힘 있는 귀족이거든.... 한마디로 국왕의 오른팔. 다음 군주로 오를 인물이지! 그러니 너가 열심히만 싸워주면 내가 정성껏 관리 및 수리해 줄거고 그럼 너는 두 번다시 고물 폐기장에 들어갈 일이 없다는 거지!”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아이기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덧붙였다.      

“주인의 이름은 알렉세이 드미트리예비치야! 잘 외워둬!”     

노인은 계속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우리 국왕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출신이고 현재 왕국의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고 있어. 어때? 그 분의 명예를 위해 싸우고 싶지?”     

아이기스는 노인의 말을 들으며 그가 놓인 위치와 상황의 무게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했다.      

*************     

경기의 규칙은 단순했다. 전투 로봇이 착용한 모든 전자 장비와 무기는 금지되었다. 오직 고대 검투사들의 전통적인 도구만이 허용되었다.      

문이 열리자,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그들의 환호는 광란의 파도처럼 경기장을 휘감았고, 뜨거운 열정과 흥분이 가득했다. 아이기스는 그 열기와 소음 속에서 감각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천천히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장에 들어서면서, 그는 눈 앞에 펼쳐진 장대한 전투의 무대에 압도되었다. 모든 것이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케 했다.      

아이기스의 손에는 투박한 검 하나만이 쥐어져 있었다. 검의 손잡이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날은 뚜렷하게 파여 있었다. 이 도구는 그가 익숙한 전자기술과는 완전히 다른, 원초적인 힘을 요구했다.     

경기장의 바닥은 땅과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이전 전투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먼지와 흙이 뒤섞인 바닥은 전투의 격렬함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이기스는 검을 꽉 쥐며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다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결심과 불안이 교차했다. 경기장 안에 있는 모든 검투사는 각자의 주인을 상징하는 휘장을 두르고 있었다. 싸움은 단 하나의 검투사가 가려질 때까지 계속될 예정이었다.      

잠시 후, 공중에서 거대한 쌍 나발 소리가 울려 퍼지며 콜로세움의 공기를 흔들었다. 그 장대한 음향이 모든 관중의 소음 위로 높이 떠 오르자, 잠시 전장이 침묵에 잠겼다. 수만 명의 관중은 그 순간, 마치 모든 것이 정지한 듯 조용히 숨을 죽이고 새로운 긴장감이 퍼졌다.     

콜로세움의 주변, 경기장의 네 모서리에는 거대한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다. 깃발은 검은 독사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고, 바람에 의해 그 거대한 이미지가 흩날리며 격렬하게 흔들렸다. 깃발의 검은색과 독사의 상징은 권력과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헤드라이트가 순간적으로 콜로세움의 중심부에 있는 중앙 단상으로 집중되었다. 모든 이목이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단상에는 백발의 왕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순백의 은빛으로 빛났고, 고풍스러운 왕좌에 앉아 그의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왕의 주변에는 여러 명의 귀족과 왕족, 그리고 부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상은 화려하고, 반짝이는 장신구로 장식되어 있으며, 귀족의 권위를 한층 부각했다.     

왕은 조용히 검은 손수건을 가슴에서 꺼내어 천천히 떨구었다. 손수건이 공중에서 부드럽게 떨어지며, 마침내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폭죽이 콜로세움 주변에서 하늘로 힘차게 솟구쳤다. 경기장은 다시 소음과 환성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경기장 안에는 수십 명의 전투 로봇 검투사들이 신중하게 발을 옮기며 서로를 경계하고 있었다. 각각의 로봇들은 저마다의 독특한 디자인과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크기와 형태, 제조사와 연도는 모두 달랐다. 어떤 로봇은 인간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또 어떤 로봇은 동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곤충처럼 두꺼운 외골격을 지닌 것도 있었다. 이들은 천천히 움직이며 서로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이기스도 그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이동하며, 자기 감각을 최대한 세밀하게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의 모든 센서와 프로그램이 전투에 집중된 상태였다.      

그 순간, 경기장 안의 공기가 갑자기 한쪽으로 쏠렸다. 아이기스는 눈앞에서 위협적인 그림자를 느끼며, 시선을 급하게 돌렸다. 그의 왼쪽, 거대한 크기의 로봇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 로봇은 양손에 쥔 두 자루의 도끼에 모든 힘을 모아 아이기스에게 휘둘렀다. 아이기스는 신속하게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했다. 그의 금속 몸체가 날카로운 도끼날과 스치며 쇳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아이기스는 숨을 고르며, 재빠르게 반격의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다른 로봇들도 일제히 움직이며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기장은 순식간에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몸뚱이가 부서지는 소리가 합쳐져 엄청난 굉음이 퍼졌다. 경기장은 삽시간에 연기와 먼지로 뒤덮였다. 아이기스는 그 혼잡한 전투 속에서도 냉철하게 자신을 보호하며, 위협적인 공격을 피해 가고 있었다. 그의 모든 감각이 전투의 복잡한 흐름 속에서 날카롭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관중들은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 격한 동작으로 모두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로 몰입한 채 목청을 다해 자신이 응원하는 검투사를 외쳐댔다. 전투 로봇들이 서로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충돌하는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관중들의 함성은 점점 더 커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공포와 흥분이 뒤섞인 광란의 소리로 변해,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진동을 일으켰다. 전투와 관중의 함성이 하나가 되어 경기장은 살아있는 듯한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움직임을 삼켜버릴 듯한 위압감을 자아냈다.     

전투가 절정에 다다르자, 쓰러지는 로봇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그들은 속절없이 먼지 가득한 바닥에 뒹굴었다. 그들의 강철 몸체는 조각조각 나고, 절단된 부품들이 운동장에 너저분하게 흩어졌다. 부서진 팔과 다리, 찢어진 전선, 깨진 센서들이 마치 전장의 유물처럼 바닥을 뒤덮었다. 한때 강력했던 전투 기계들이 이제는 단지 금속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었다.      

그러자 경기장을 빙 둘러, 어둠 속에서 조용히 대기하던 컬렉터 로봇들이 잽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서진 로봇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날카롭고 신속했으며, 눈앞의 잔해를 처리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흩어진 조각들과 숨을 거둔 로봇들을 재빠르게 끌어모았다. 그리고 운동장 밖으로 가차 없이 끌고 갔다.      

아이기스는 전투가 시작된 이래, 방어에 주력하며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에 집중하고, 적의 공격을 최소화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을 예측하고, 몸을 비틀어 피하거나 방패로 막아내며 철저히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특히 여러 로봇이 한꺼번에 덤벼들 때는 더욱 신중해졌다. 아이기스는 그 상황에서 돌진하거나 무리하게 싸우기보다는, 한 발씩 뒤로 물러서며 상대의 공격을 흡수하거나 회피하는 쪽을 택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전략적 움직임이었다. 그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지금 무리하지 않는 것이 최선임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전투의 격렬함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아이기스는 침착함을 잊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방어 전략은 효과적이었고, 그는 치명적인 위기를 몇 번이나 피하며 살아남았다. 전투는 점점 장기전으로 접어들었고, 그동안 수많은 로봇이 부서져 나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이기스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수히 많았던 검투 로봇들이 이제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졌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더 이상 수십 대의 로봇들이 뒤엉켜 싸우는 광경은 없었다. 이제 전장은 처음의 혼돈에서 벗어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적의 수가 줄어들수록, 전투의 양상도 달라질 것이 분명했다.      

아이기스는 이제 공격적인 전략으로 작전을 전환했다. 그가 선택한 순간은 절묘했다. 살아남은 로봇들은 대부분 치열한 싸움 속에서 이미 상처를 입었거나,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다. 이제야말로 아이기스가 반격에 나설 때였다. 그는 주위를 면밀히 살피며, 먼저 다치고 속도가 느려진 로봇들을 목표로 삼았다. 아이기스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들에게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다.     

아이기스의 움직임은 놀랄 만큼 신속하고 강력했다. 그의 강철 팔이 적들을 향해 내리칠 때마다, 공기는 마치 짧은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흔들렸다. 부상한 로봇들은 그의 맹렬한 공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들은 끝까지 저항해보았으나, 아이기스의 엄청난 힘과 속도 앞에서 무의미했다. 한 번의 타격이 적의 방어를 무너뜨리고, 두 번의 타격이 그들을 완전히 파괴했다. 부서진 금속과 전선이 아이기스의 공격에 따라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는 매번 목표를 향해 직선으로 돌진하며, 강철 같은 주먹과 무기를 이용해 적들을 가차 없이 부수기 시작했다. 그의 공격은 계산적이면서도 날카로웠고, 적의 약점을 빠르게 파악해 치명타를 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한때 전장에서 위협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로봇들이 이제는 하나둘씩 그의 공격 앞에 무너져 내렸다.     

관중들도 아이기스의 실력에 점점 매료되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한마디로 예술이었다. 하나하나의 공격이 정확하고도 강력했으며, 또한 예측불허였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응원했고, 그의 공격이 성공할 때마다 함성은 더욱 커졌다. 관중들은 아이기스가 펼치는 놀라운 전투 기술에 매료되었고, 그들의 시선은 오직 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아이기스가 적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때마다, 관중석에서는 놀라움과 경탄의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이제는 그의 검이 날카롭게 내려칠 때마다 경기장 전체가 그에게 반응했다. 수만 명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마치 거대한 물결이 일렁이듯, 경기장 안을 울렸다.      

왕과 귀족들도 아이기스의 놀라운 실력 앞에서 점차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왕은 아이기스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한 자세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왕의 주위에 앉아 있던 귀부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아이기스의 전투 능력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마침내 경기장에는 단 세 명의 검투 로봇만이 남게 되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모습과 전략으로, 이제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이들 세 로봇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감이 감도는 순간을 공유하고 있었다.     

첫 번째 로봇은 바로 처음부터 아이기스를 집요하게 공격해왔던 거대하고 육중한 로봇이었다. 이 로봇은 압도적인 크기와 무게를 자랑했다. 그의 몸체는 티타늄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표면은 수많은 전투의 상처로 뒤덮여 있었다. 그의 팔과 다리는 두꺼운 금속판으로 덮여 있어 마치 거대한 탱크처럼 움직였다. 강력한 힘과 내구성을 바탕으로 전장을 휩쓸었고, 그의 양손에 쥐어진 두 개의 거대한 도끼는 마치 전장의 파도를 가르듯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그의 눈에는 빨간 광선이 번뜩였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울릴 듯한 진동이 퍼져나갔다. 그 거대한 몸집은 마치 움직이는 요새 같았으며, 그의 존재만으로도 전장에 있는 자들에게 압도적인 위압감을 주었다.     

두 번째 로봇은 사마귀를 닮은, 날렵하고도 독특한 형태의 로봇이었다. 그는 다른 로봇들과는 확연히 다른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길고 날카로운 앞다리가 특징이었으며, 그것은 사마귀의 낫처럼 가늘고 예리했다. 그 다리는 순식간에 적을 찌르고 베어낼 수 있을 만큼 빠르고도 치명적이었다. 그의 몸체는 가벼운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어 매우 유연하고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다면체로 이루어진 붉은 색의 작은 렌즈들로, 주변을 감지하고 적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로봇은 민첩성과 속도를 이용해 적의 약점을 노리며, 빠르게 공격하고 다시 거리를 벌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그의 동작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유려했다.     

그리고 아이기스가 있었다. 그의 몸은 다른 두 로봇에 비해 상대적으로 균형 잡히고도 단단한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아이기스의 외장은 전투의 흔적으로 여기저기 상처와 흠집이 나 있었지만, 그의 파란 눈에서는 결코 흔들림 없는 냉정함이 느껴졌고,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전장의 공기는 긴장으로 가득 찼다.      

세 명의 검투 로봇이 서서히 원을 그리며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의 긴장은 전장의 공기를 찢을 듯한 팽팽함을 만들어냈다. 서로를 주시하는 눈빛 속에는 의심과 경계, 그리고 기회를 엿보려는 본능이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전술과 속성을 지닌 전사들이었지만, 이제 최후의 승자를 가릴 결전 앞에서 모두가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먼저 움직이는 자가 승리할지, 아니면 패배할지를 말이다.     

아이기스는 두 로봇의 시선을 주의 깊게 살피며,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전장의 모든 움직임을 분석하며, 적들이 언제 움직일지를 예측하였다. 그러나 그 순간, 두 로봇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아이기스를 향해 돌진했다. 그들은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도를 이해한 것처럼,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먼저, 거대한 로봇이 단박에 무게를 실어 달려들었다. 그의 거대한 몸집이 엄청난 힘과 속도로 아이기스를 향해 돌진하며, 그가 쥔 두 개의 거대한 도끼가 번쩍였다. 그것은 마치 철의 폭풍처럼 아이기스를 향해 내리쳐졌다. 공기를 가르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났다. 아이기스는 그 육중한 힘을 전신으로 느끼며,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공격을 막아냈다. 그러나 엄청난 충격이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아이기스는 한 발짝 뒤로 밀려났지만, 그는 단단히 서서 균형을 잡았다.     

동시에, 사마귀 로봇은 그 특유의 날렵한 동작으로 아이기스의 옆구리를 노렸다. 낫 같은 다리가 번개처럼 빛을 내며 아이기스를 향해 내려 찔렀다. 아이기스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지만, 사마귀 로봇의 공격은 집요하고도 끈질겼다. 그는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며, 여러 각도에서 아이기스를 공격했다. 그의 공격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날렵했다.      

아이기스는 이들의 공격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방어하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았다. 거대한 로봇의 힘과 사마귀 로봇의 속도가 한꺼번에 그를 압박했지만, 그는 자신의 속도와 힘을 정확히 조절하며 공격을 피하고 방어했다. 그의 방패는 정확히 거대한 로봇의 공격을 막아냈고, 그의 몸은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공격을 유연하게 피했다. 그들은 아이기스를 고립시키고, 그의 모든 방어를 무너뜨리려 했다. 하지만 아이기스는 단순히 수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하면서도, 틈을 노려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거대한 로봇의 몸통을 가르며,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려 사마귀 로봇의 공격을 막아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졌고, 관중들은 숨죽이며 이 전투의 결말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아이기스는 거대한 로봇과 사마귀 로봇의 끊임없는 공격에 점점 지쳐갔다. 그들의 집요한 공격으로 아이기스의 움직임은 점차 둔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상처로 인해 점점 더 피로해졌고, 결국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공격이 그의 방어를 뚫고 말았다. 사마귀 로봇의 날렵한 앞다리가 번개처럼 그의 옆구리를 찔렀고, 철판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이기스는 흙바닥에 무기력하게 나뒹굴었다. 그의 몸은 충격으로 인해 움찔했고, 관절이 부서지며 오일이 흘러나왔다. 그의 시스템은 혼란에 빠졌고, 파괴된 부위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희미해져 가는 시선으로 거대한 로봇을 바라보았다. 그 육중한 로봇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기스를 마무리 짓기로 결심한 듯, 거대한 도끼를 높이 들어 올렸다. 한 번의 타격으로 아이기스를 두 동강 내겠다는 기세였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본능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다리가 거대 로봇의 눈을 내리 찌른 거였다. 사마귀 로봇의 공격은 정확하고도 치명적이었다. 거대 로봇의 눈에 스파크가 튀고 끔찍한 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눈에서 붉은 광채가 사라지며, 그 거대한 몸집은 잠시 흔들렸다. 도끼를 높이 들어 올린 채, 그는 치명적인 고장을 일으킨 듯 앞으로 휘청거렸다. 아이기스를 향해 내려치려던 도끼는 허공에서 멈춰 섰다.     

그 순간, 아이기스는 남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벌떡 일어났다. 그는 빠른 속도로 거대한 로봇의 손목을 향해 자신의 검을 힘껏 내리쳤다. 도끼를 쥔 팔에 아이기스의 검이 닿는 순간, 불꽃이 튀었다. 그의 검은 단단한 금속을 파고들어 로봇의 팔을 한 번에 절단해버렸다. 절단된 팔은 힘없이 허공으로 날아가, 검은 그림자를 그리며 땅에 떨어졌다. 절단된 팔에서는 스파크와 함께 기름과 윤활유가 흘러나왔고, 거대한 로봇은 그 충격에 몸이 뒤틀렸다.      

그 순간,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앞다리는 거대 로봇의 복부를 향해 깊숙이 찔러 들어갔다. 금속을 베어내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로봇의 몸통이 두 동강 났다. 결국 거대 로봇은 깊은 신음을 내뱉으며 무너져 내렸다. 그의 거대한 몸집은 땅을 울리며 무겁게 쓰러졌고, 철제 골격과 부품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흙바닥을 덮었다. 그의 눈에 남아 있던 마지막 붉은빛은 서서히 사그라졌고, 그가 쥐고 있던 도끼는 땅에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남은 두 로봇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쓰러진 거대 로봇의 잔해를 바라보았다. 전장은 다시금 침묵에 휩싸였고, 공기는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이제, 이들 둘만이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기스의 몸은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그의 시스템은 과부하에 걸린 듯 끊임없이 경고음을 내뿜었고, 부서진 부위에서는 스파크가 흩날렸다. 이를 파악한 사마귀 로봇은 그를 향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었다. 사마귀 로봇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빠르고 날렵했다. 마치 공기를 가르며 날아다니는 맹수처럼, 그는 아이기스의 부상 부위를 정확하게 겨냥하며 끊임없이 찔러댔다. 아이기스는 최대한 방어하려 했지만, 사마귀 로봇의 속도와 날카로운 타격은 점점 더 그를 압도했다. 그는 도저히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고, 점점 더 사마귀 로봇의 공격에 밀려났다.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다리가 그의 외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고, 아이기스의 움직임은 점점 둔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충격에 아이기스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금속 몸체는 땅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고,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위로 사마귀 로봇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눈은 결정적인 승리를 앞둔 전사의 눈빛이었다.      

아이기스의 마지막 저항이 무력해진 것을 확인한 그는, 이제 이 전투를 마무리 짓기 위해 마지막 공격을 준비했다. 사마귀 로봇은 아이기스의 눈을 향해 날카로운 앞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가 내리쳤다. 하지만 그 순간, 아이기스의 마지막 본능이 작동했다. 아이기스는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순식간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다리는 그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은 아이기스는, 손상된 팔을 들어 올려, 그 끝을 사마귀 로봇의 몸통을 향해 내질렀다. 그의 팔이 사마귀 로봇의 몸통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금속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사마귀 로봇의 몸통이 꿰뚫렸다. 사마귀 로봇의 날카로운 다리는 허공에서 멈췄고, 그의 몸은 충격에 휘청거렸다.      

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관중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벌떡 일어났다. 아이기스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손에 쥔 검을 마지막 힘을 다해 휘둘렀다. 검의 끝이 사마귀 로봇의 목에 닿는 순간, 마치 종이처럼 갈라지며, 그의 얼굴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목에서 검은 오일이 벌컥벌컥 솟아올랐다. 사마귀 로봇의 몸체에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이기스는 천천히 일어나 다시 한번 강력한 일격을 가했다. 사마귀 로봇 내부의 기계 부품과 유체가 쏟아지며 그는 바닥에 뒹굴었다.      

경기장은 한순간에 고요해졌다. 아이기스는 절단된 로봇의 잔해 위에 서서, 깊은숨을 내쉬며 승리의 순간을 맞이했다. 아이기스는 자신의 검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전장을 차분히 바라보며 자신이 이 전투를 끝낸 것을 실감했다.     

이내 엄청난 함성이 콜로세움을 뒤덮기 시작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군중들은 폭발적인 환호를 터뜨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폭죽이 하늘로 솟구쳤다. 이 모든 것이 얽히고설켜 거대한 파도처럼 콜로세움 전체를 휘감았다.      

귀족 석에서 숨죽이며 경기를 지켜보았던 알렉세이의 반응은 그 누구보다 격렬했다. 그는 평소의 냉정함을 완전히 잊은 채,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의 긴장과 불안이 모두 풀린 듯, 그의 얼굴에는 기쁨과 안도의 미소가 가득했다. 알렉세이는 자기 전사가 이룬 승리에 주변의 귀족들과 손을 맞잡고 흔들며 감격스러워했다.     

곧 시상식이 거행되었다. 부서진 로봇들의 잔해는 신속하게 치워졌고, 단상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임시 계단이 설치되었다. 아이기스는 천천히 그리고 당당하게 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강철 발이 계단을 밟을 때마다, 금속의 울림이 경기장에 퍼졌다. 그 소리는 마치 승리의 북소리처럼 들려왔다.     

아이기스가 단상에 올라서자, 그는 차분히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알렉세이 가문의 휘장이 단상 주변에서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짙은 붉은 색의 휘장은 마치 불꽃처럼 공중에서 춤을 추며, 그가 속한 가문의 영광을 상징하고 있었다.      

아이기스의 은빛 몸체 위로 휘장이 드리워졌다. 그는 이제 단순한 전투 로봇이 아닌 알렉세이 가문의 자랑이자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왕은 마이크를 잡고, 천천히 그리고 위엄있게 말했다.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하고 형제와 다름없는, 위대한 드미트리예비치 가문의 최고 검투사에게, 영광의 우승을 선포하노라!"      

그 순간, 알렉세이의 얼굴에는 깊은 감동과 자부심이 서렸다.      

왕의 선언이 끝나자마자, 관중들은 다시금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함성은 끝없이 이어졌고, 경기장은 다시 한번 환희로 가득 찼다.     

뒤이어 경기장 한쪽에 우승자에게 주어질 전리품들이 차례차례 진열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눈부신 금과 은으로 가득 찬 상자였다. 금은보화 사이에는 아름다운 보석들이 흩어져 있었다. 사파이어, 루비, 에메랄드, 다이아몬드가 빛을 받아 오색찬란한 빛을 뿜어내며, 화려하게 빛났다.      

그 뒤를 이어, 덩치가 큰 짐승들이 등장했다. 두툼한 근육을 자랑하는 황소, 거대한 멧돼지, 사슴, 심지어 원숭이까지 끌려 나왔다. 모두 귀한 음식이었다.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인간 노예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쟁 포로였다. 반나체 상태인 노예들은 체념한 눈빛으로 경기장에 줄지어 섰다. 그들의 손목과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이들 노예는 그들의 유용성이나 가치를 주인에게 증명하지 못한다면, 음식으로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아이기스는 눈을 돌려 노예들이 서 있는 쪽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하나같이 피부는 상처로 얼룩져 있었고, 햇볕에 그을려 거칠어져 있었으며, 뼈마디는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얇은 옷자락은 그들의 말라비틀어진 몸을 간신히 가리고 있었으며, 그 옷은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낡은 천 조각처럼 찢어지고 너덜거렸다.      

노예들의 얼굴은 슬픔과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들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살아갈 의지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마치 그들 안에 남아 있는 희망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사라져버린 듯한, 깊고도 끝없는 절망의 표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이기스의 시선은 무리 속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눈을 가진 한 노예에게로 향했다. 그 노예는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고, 오히려 강렬한 눈빛으로 아이기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단순한 절망이나 체념과는 달랐다. 그 속에는 깊은 슬픔과 고통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의지, 혹은 사라지지 않은 기억의 불꽃 같았다.     

아이기스는 그 순간, 그의 시스템 어딘가에서 맺혀있던 한 이름이 떠올랐다.      

‘예지수.’      

막혔던 과거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기억의 잔해 속에서 부서진 퍼즐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가듯, 그 이름은 아이기스의 마음속에 선명히 자리 잡았다.      

그를 설계하고 프로그램한 존재. 그를 창조하고 세상 밖으로 내보낸 이. 아이기스는 자신이 겪은 모든 전투와 그 과정에서 잃어버린 정체성이 한순간에 되돌아오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무자비한 전투 로봇이었던 아이기스는 그와 얽힌 수많은 기억의 파편 속에 서 있었다.     



이전 03화 비다의 눈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