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노래 1권
노예
종말 이전, 인류는 풍요로움에 도취해 있었다. 시장의 진열대는 항상 싱싱한 과일과 신선한 채소, 고기, 빵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식탁에는 풍족한 음식이 넘쳐났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필요 이상의 음식을 소비하고 낭비하였다. 음식은 마치 공기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는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꺼내 먹는 일이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배가 불러도 더 많은 음식을 쌓아두곤 했다. 음식이란, 단지 손을 뻗기만 하면 언제나 거기 있었다. 아무도 그 풍요로움이 갑자기 사라질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재앙의 날이 닥친 후, 전 세계는 순식간에 황폐해졌고, 식량 공급망은 붕괴했다. 세상은 피와 뼈, 썩은 냄새로 가득한 무덤이었다. 한때 번성했던 농경지는 메마른 땅으로 변했고, 바다와 강은 오염되어 물고기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도시는 잿더미가 되었고, 남은 것은 불타버린 건물뿐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눈을 뜨자마자 먹을 것을 찾는 일에 매달렸다. 수확물은커녕 한 줌의 곡식조차 구하기 어려운 현실이 도래한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가장 야만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굶주림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었다. 생존 본능이 이성을 압도하고, 도덕과 윤리는 사라졌다. 한때 우리가 버리던 음식 쓰레기는 이제 목숨을 건 쟁탈의 대상이 되었다. 빵 한 조각을 위해 사람들은 서로의 목을 조였다. 살아남기 위해 동포, 친구, 형제, 부모를 죽여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 조각의 고기, 한 모금의 물을 위해 사람들이 칼을 들고, 서로를 찢어발기는 일은 더 이상 드문 일이 아니었다. 죽은 자의 시체에서 남은 살점을 떼어먹는 일이 더 이상 상상 속의 악몽이 아니었다. 식인은 이제 더 이상 금기시된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이 되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고 자만했다. 식량이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 당연함이 사라진 지금,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있다. 아마겟돈은 우리에게 굶주림이 무엇인지, 음식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식량은 곧 생명 그 자체였고, 음식을 가진 자가 모든 것을 지배했다. 음식은 곧 권력이었다. 남은 식량을 움켜쥔 소수의 자는 군림하는 자들이 되었고,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은 절망 속에 빠져들었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돈이나 금이 아닌 음식이 모든 것을 결정했다.
노예제도는 자연스럽게 부활했다. 음식을 가진 소수의 주인은 배고픔에 지친 이들을 노예로 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단지 하루라도 더 연명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팔았다. 인간은 이제 극소수의 주인과 대다수의 시종, 노예로 분류되었다. 주인들은 자신들의 식량을 지키기 위해 무장한 경비를 두고,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여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식량을 지키지 못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굶주림과 죽음뿐이었다.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를 잡아먹고, 식량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죽였으며, 살아남기 위해 다른 이들의 종이 되었다. 주인은 노예를 가진 자였고, 노예는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자였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자는 단지 식량을 가진 자들뿐이었다. 나머지는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 릴리안 나리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중 -
지수는 새벽빛이 희미하게 퍼질 무렵,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배에 올랐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동틀녘의 풍경은 그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눈을 들어 바라본 곳에는 한눈에 보아도 압도적인 설산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이 거대한 산은 마치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수호자처럼 하늘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그 정상 부근, 눈 덮인 산의 끝자락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절벽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위엄과 공포를 동시에 자아내는 모습으로 지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바로 그곳에서 플라잉 장비를 착용하고 뛰어내리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감정이 다시금 그의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그 순간의 짜릿한 공포와 동시에 밀려오는 자유로움, 그리고 거칠게 맞이하던 바람의 속삭임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생생했다.
“잘 봐두기를 바라오. 앞으로 당분간은 어둠만 맞이할 테니깐요.” 지수 곁으로 선장이 조용히 다가왔다. 그의 목소리는 깊은 속삭임처럼 낮고 무게감이 있었지만, 그가 지닌 온화한 표정은 상반된 인상을 주었다. 마치 동네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선장의 이런 모습에 순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날 짧게 나눈 인사에서 느꼈던 낯섦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는 선장을 향해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했다.
“앞으로 며칠 신세 좀 지겠습니다, 선장님.”
지수의 말은 예의 바르게 들렸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약간의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선장은 그 점을 눈치챘는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지수는 선장의 이런 태도에 조금 놀랐다. 비록 작은 배지만, 명색이 해적선의 선장이라기엔, 그의 푸근한 생김새는 상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아무쪼록 편히 지내길 바라오,” 선장은 지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 손길은 마치 오래된 친구가 건네는 위로 같았다. 지수는 그 손길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내가 듣기론 저 산에서 내려왔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선장이 지수에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지한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지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선장은 그의 반응에 더욱 관심을 보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래, 어떠했소? 저곳에서의 삶은?"
지수는 선장의 질문에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순간 배가 천천히 항구를 떠나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그들은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다. 배는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이 나아갔다. 물결은 거의 움직임이 없었고, 맑은 수면 위로 하늘이 고요하게 드려졌다. 마치 이 세계가 거꾸로 펼쳐진 것처럼, 바다는 또 다른 하늘이 되어 그들 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지수는 선장의 질문을 다시 곱씹으며,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설산을 다시 바라보았다. 저곳에서 보냈던 험난했던 날들과 고독 속에서 자신을 마주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선장은 지수의 침묵 속에서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무게를 어렴풋이 이해한 듯했다. 그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고, 대신 지수의 표정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는 여전히 잔잔한 바다 위를 조용히 나아가고 있었고, 바람은 그들 주위로 부드럽게 불어왔다.
"선장님, 혹시 저 절벽을 이곳에서는 뭐라고 부르는지 아시나요?" 지수는 어색한 침묵을 깨기 위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알다마다요. 늘 저 절벽을 등대 삼아 항해를 하니깐요. 모를 수가 없죠. 저곳을 우리는 '비다의 눈'이라고 부른다오."
"'비다의 눈'이라고요?" 지수는 놀란 듯 다시 물었다.
"네, 비다의 눈." 선장은 천천히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경외감이 깃들어 있었다.
"가만 보시면 알게 될 거요. 저 절벽이 마치 우리를 지켜보는 것처럼 생겼잖소."
지수는 선장의 말을 따라 절벽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 거대한 바위는 수많은 세월의 풍화로 인해 눈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절벽의 중앙 부분은 마치 날카롭게 조각된 눈동자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그 주위로 희미하게 빛나는 얼음과 눈은 눈꺼풀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단순한 자연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치 고대의 신화 속 거인이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아, 네…. 그러고 보니…." 지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거인이 눈을 부릅뜨고 우리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장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바로 그거요. 비다의 눈은 우리에게 길을 인도해주는 수호자 같은 존재요. 때로는 저 눈이 우리를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덕에 우리가 안전하게 항해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
지수는 선장의 말을 들으며,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비다의 눈에 얽힌 전설 혹시 들어 보셨소?" 선장이 지수에게 물었다.
"전설요?" 지수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선장은 가만히 지수를 바라보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표정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생동감이 담겨 있었고, 그의 눈빛 속에는 전설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은은한 빛이 비쳤다.
"옛날 옛적, 우리의 조상들은 거대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갔다오. 그 전쟁의 이름은 '라그나로크'라고 불렀소. 모든 것이 파괴되고, 신들과 인간 영웅들마저도 죽음에 맞섰던 그 전쟁에서, 비다라는 인물이 있었다오." 선장은 눈으로 절벽을 쳐다보며 계속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비다는 결국 그 전쟁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인간 전사였소."
선장의 목소리는 전설 속의 세월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각 단어와 문장이 생동감 있게 울려 퍼졌다.
"비다는 마침내 죽음의 세계에 들어가 그곳의 신과 마주쳤소. 그리고 죽은 동료들에게 다시 생명을 부여해 줄 것을 신에게 요청하였소."
"어떻게 해서요?"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장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비다는 죽음의 신에게 자신의 희생과 무한한 용기를 바쳤다오."
비다는 탑 꼭대기에 묶였다. 그곳은 암흑과 절망으로 가득 찬 지옥의 심장부였다. 비다의 살점은 까마귀들의 먹이가 되었다. 날카로운 부리가 그의 살갗을 쪼개며, 내장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비다의 몸은 천천히 허물어져 갔다. 결국 그는 앙상한 뼈대와 눈알만 남게 되었다. 그의 눈알은 탑의 어둡고 음침한 공기 속에서 빛을 잃어갔고, 이따금 공허하게 주변을 바라보았다. 그가 겪고 있는 고통은 끔찍한 형벌의 상징이었다. 바람은 그의 앙상한 뼈를 휘감으며, 그가 겪었던 고통의 기억만을 소리 내어 전하는 듯했다.
"그 전설 속에서 비다는…." 선장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풀어갔다.
"그가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눈이 마치 빛을 발하듯이 세상을 지켜보았다고 하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부르게 되었지. 절벽의 형상이 마치 그의 눈처럼 보인다는 것은, 비다가 다시 세상을 지키는 수호자의 상징으로 여긴 거요."
지수는 선장의 전설을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마치 오래된 바다의 신화처럼 지수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편에는 내내 떠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선장의 모습과 말투, 그 온화한 태도는 지수가 해적이라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지수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장님을 사실 처음 볼 때부터 줄곧 느껴온 건데요… 결례가 아니라면… 선장님은 전혀 해적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지수의 말을 들은 선장은 재밌다는 듯 지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비밀을 들킨 듯한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선장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은 마치 파도에 부서지는 햇볕처럼 따스하고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해적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이지?"
선장은 바다의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는 깊은숨을 내쉬고 나서 지수를 향해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 아마겟돈 이전에 옥스퍼드의 대학원생이었다면 당신은 믿겠소?"
지수는 그 말을 듣고 눈을 크게 뜨며 선장을 바라보았다.
"그럼?" 지수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물었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은 오래된 기억을 떠올리며 느끼는 씁쓸한 향수와도 같았다.
"나는 역사학자가 되고 싶었소. 내 지도교수가 릴리안 나리였소. 그 유명한 역사학자 말이오."
그 순간, 지수의 가슴 속에서는 놀라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릴리안 나리. 그 이름은 지수에게도 익숙했다. 지수는 한 때, 그녀가 해석한 ‘파벨 예언서’를 부적처럼 지니고 다녔다. 그 책은 이 세상에서 오직 ‘사피엔티아의 형제’들에게만 허락되었다. 그러므로 지수는, 그녀를 본 적은 없지만, 늘 가슴에 품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럼 어쩌다 이렇게?" 지수의 질문에 선장은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가 역사에서 배운 것이 무엇이겠소? 철학의 시대에는 철학자가, 영웅의 시대에는 전사가, 중세시대에는 신부가, 자본주의 시대에는 사업가가 필요했지. 그리고 지금, 종말의 시대에는 해적으로 살 수밖에 없지 않겠소?"
그의 말에는 깊은 체념과 함께, 어느 정도의 수긍이 섞여 있었다. 마치 시대의 흐름에 저항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학자와 해적은 괴리가 꽤 심한 것 같습니다만…." 지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지 않소." 선장은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의 전공이 나를 지금의 위치로 이끌었소." 지수는 눈을 깜빡이며 선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전쟁의 역사를 공부했소." 선장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전쟁의 모든 것, 전쟁의 배경부터 전략, 실행, 과오, 결과, 영향까지…. 사실 인간의 역사가 곧 전쟁의 기록 아니겠소?" 그의 목소리는 점점 깊어졌고, 그 안에는 무거운 진리가 담겨 있었다.
"인류는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몇 안 되는 생명체 중 하나요. 그러니 익숙할 수밖에는요.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매일 치르는 전쟁은 지금까지의 모든 전쟁 방식이 혼합되어 있소. 단순한 돌팔매질에서 최첨단 로봇 싸움까지, 그 모든 것이 여기에 녹아 있는 셈이오."
선장은 고개를 들어 먼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수많은 전쟁과 죽음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그림자가 어렸다.
"어쩌면 나는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인물 일게요. 왜냐하면 전쟁 박사였으니까."
그때였다. 바다의 평온함을 찢는 듯한 날카로운 경고음이 배 전체에 울려 퍼졌다. 지수는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졌고, 경고음이 무슨 의미인지 채 이해하기도 전에 선장이 크게 외쳤다.
"서둘러 내려갑시다! 여기서부터는 공해상이요!"
선장은 지수를 앞세우며 재빨리 상황실 쪽으로 대피했다. 두 사람은 좁은 통로를 따라 빠르게 이동했다. 지수는 점점 더 심장이 빨리 뛰는 것을 느꼈다. 선실에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문을 단단히 닫았다. 선장의 표정은 여전히 긴장되어 있었고, 지수는 그의 옆에서 그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어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선실 밖에서는 여전히 경고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바다는 거칠어지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안전한 곳에 있었지만, 지수는 선장의 말처럼 이곳이 단순한 바다가 아니라, 끊임없는 전쟁터임을 깨달았다.
벽면을 가득 메운 모니터들이 지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각 모니터는 다양한 각도에서 찍힌 화면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들의 모습, 하늘을 나는 드론들의 실시간 촬영 영상, 그리고 레이더 화면에서 반짝이는 신호들까지. 그 모든 정보가 그의 눈앞에서 조각처럼 이어져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냈다.
선장은 조용히 모니터 앞에 서서 상황을 주시했다. 그는 빠르게 화면을 훑으며 필요한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갑자기 한 화면에 깜빡이는 신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적의 배로 보이는 신원 미상의 함선이 접근 중입니다," 상황실 요원이 긴박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선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즉시 모니터를 향해 손을 뻗어 화면을 확대했다. 화면 속 함선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며, 그림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선장은 곧바로 마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모든 전투 요원들은 즉시 전투 준비에 들어가시오." 선장의 목소리는 침착하면서도 강렬했다. 그의 말은 배 전체에 울려 퍼졌다.
"포탑 준비! 전투 드론, 즉시 발진 대기 상태로 들어가시오. 경계 강화 최고로 격상하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배 전체가 분주해졌다. 모니터에 비치는 화면 속에서도 승무원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 부서의 요원들은 선장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갔다. 배의 갑판 위에서는 포탑이 천천히 회전하며 목표를 조준하고 있었고, 드론들이 날개를 펼치며 이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장은 여전히 모니터를 주시하며, 적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적의 의도를 꿰뚫어 보려는 듯, 화면 속 함선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결단력이 엇갈렸다.
그런데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배를 덮쳤다. 선실의 모든 것이 일순간 기울어졌고, 배 전체가 마치 거대한 손에 휘둘리는 작은 장난감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지수는 비틀거리며 가까운 벽을 붙잡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금방이라도 배가 산산조각이 날 것만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선장은 지수에게 외쳤다.
"이곳은 위험하니 지하 선실로 내려가는 게 좋겠소." 지수는 고개를 끄덕였고, 부하가 곧바로 그의 옆으로 다가와 계단 쪽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에도 배는 계속해서 흔들렸다. 발밑에서는 쇠로 된 계단이 삐걱거렸고, 손잡이를 꽉 잡지 않으면 한순간에 미끄러질 것만 같았다. 파도는 잔혹하게 배를 때리고, 그 충격은 지하까지 전달되었다. 지수는 흔들리는 배의 동요 속에서 마치 바닥이 그의 발밑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지하 선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는 칸막이로 구분된 작은 방들이 여러 개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각 방은 철제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고,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수는 안내원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사이에도 배는 계속해서 요동쳤다. 천장에서는 금속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음산한 음악처럼 들렸다.
선실의 공기는 무겁고 축축했다. 어둠이 곳곳에 깃들어 있어, 지수는 바다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동굴처럼 느껴졌다. 배의 외부에서 들려오는 굉음은 바다의 괴물이 배를 통째로 삼키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지수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안내원의 뒤를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그는 결국 안내원이 이끄는 대로 한 선실 앞에 도달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비로소 그는 잠시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폭음과 충격파가 끊임없이 선실을 흔들어 대었고, 벽과 바닥은 무너져 내릴 듯 떨렸고, 그 흔들림은 절망적인 선율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이곳이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전장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선실의 조명은 전투의 혼란 속에서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한순간에는 강렬한 빛으로 선실을 가득 채우더니, 다음 순간에는 심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마치 빛과 어둠의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듯, 지수의 시각과 감각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수는 두려움과 함께 애써 심호흡을 하며, 이 모든 것이 지나가기를 기원했다. 폭발과 충격이 연속적으로 밀려오며, 그와 같은 작은 공간 속에서 이 모든 공포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상황은 그의 정신과 신체를 철저히 시험하고 있었다.
지수는 갑작스러운 구토의 충동에 몸이 휘청거렸다. 그의 속은 바다의 거친 파도처럼 요동쳤고,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는 속에서 일어나는 역겨운 느낌을 억누르기 위해 입을 단단히 틀어막았다.
선실의 문을 급히 열고, 지수는 힘겹게 복도로 나섰다. 복도의 조명이 위아래로 깜빡이며, 지수의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바닥이 꿈틀거리며 그를 잡으려는 듯, 지수는 힘을 다해 화장실을 찾으려 애썼다.
복도 끝에서 화장실의 표지를 발견했을 때, 지수는 마치 생명의 빛을 본 듯한 안도감과 함께 달려갔다. 그는 문손잡이를 꽉 움켜잡으며, 마지막 힘을 다해 문을 열었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자, 지수는 화장실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지수는 화장실에서 몸속의 모든 것을 다 토해낸 뒤, 기운이 빠진 채로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그의 몸은 힘없이 비틀거렸고, 발걸음은 무겁고도 불안정했다. 하지만 복도로 나서자마자, 지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기묘하고도 불안한 음색으로, 고통과 절망이 뒤섞인 듯한 신음이었다. 긴장감이 그의 몸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지수는 복도의 양옆에 나란히 붙은 선실의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창문은 좁고 어두운 공간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지수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내부는 극도로 협소했다. 선실 안의 공기는 혼탁하고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선실의 벽면은 좁고 축축하며,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지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좁은 방 안에는 벌거벗은 인간들이 서로 몸을 맞대고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들은 극도로 밀착된 채로 서로의 몸에 의지하며, 불편하게 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신음은 비통하고 절망적이었다. 소리는 공허한 공간 속에서 더욱 증폭되었고, 지수의 귀를 찌르는 듯했다. 지수는 그 장면을 보고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지수는 복도에서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는 상태로 서 있었고, 그의 눈은 그 끔찍한 장면에서 벗어나려 애쓰면서도 여전히 그 장면에 붙잡혀 있었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공포에 압도된 그는 자신이 이 끔찍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복도의 불안정한 조명 속에서, 그는 이 괴기한 현실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수가 끔찍한 장면에 압도된 채 복도에 서 있을 때, 갑자기 그는 팔이 따끔함을 느끼고 돌아보았다. 어느새 흰 가운을 입은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차가운 금속 주사기를 지수의 팔에 꽂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마스크로 가려져 있지만, 눈빛만으로도 강렬한 공포가 느껴졌다.
“편히 주무실 겁니다.” 남자가 말했다.
지수는 혼란스러움 속에서 팔을 홱 빼내려고, 주사기를 세차게 쳤다. 그러나 그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지고 있었다. 지수는 힘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표정에는 감정이 없었고, 무심한 일상의 일부분처럼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수의 동공은 점차 풀려갔고, 시야는 두 겹, 세 겹으로 번져나가며 점점 멀어졌다. 모든 것이 흐려지고, 방금까지의 공포와 혼란이 점점 먼 기억처럼 사라져 갔다. 그의 몸은 무겁게 가라앉았고, 심장의 뛰는 소리는 고요하게 흩어졌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꿈같은 악몽처럼, 또는 잃어버린 기억 속의 장면처럼 그의 의식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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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선실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의 손과 발에 차가운 쇠사슬이 채워져 있었다. 지수는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누구 있나요?”
잠시 후, 부하가 나타났다. 그는 창을 통해 지수가 깨어났다는 것을 확인하고 무전기를 들어 뭔가를 전달하는 듯 보였다.
얼마 뒤, 선실의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더니, 선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하고 단정했으나 그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선장은 지수와 눈을 마주하자, 표정이 애처로움으로 바뀌었다. 지수는 선장을 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다급히 외쳤다.
“선장님, 왜 제가 이렇게 묶여 있나요?” 지수는 선장이 그를 구해줄 것이라 기대하며 손을 뻗으려 했지만, 쇠사슬이 그의 몸을 단단히 제한하고 있었다.
선장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그의 눈에서 진심 어린 애도와 동정의 빛을 감추지 못한 채 천천히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당신은 이제 노예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깊은 한숨처럼 무겁고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