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노래 1권
예지수
그날의 새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도시들은 여전히 분주했고, 사람들은 일상에 묻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아침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평온함 뒤에는 감지할 수 없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정치적, 경제적, 환경적 충돌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심화하고 있었고, 거대 강국 간의 불신과 적대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인류는 평화를 원했으나, 그것은 얇은 얼음장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그날, 그 얼음은 결국 깨져버렸다.
2066년 6월 6일의 첫 번째 섬광은 정확히 새벽 4시 44분에 하늘을 가르며 터져 나왔다. 그것은 동쪽 대륙의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뒤이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첫 번째 공격은 전례 없는 규모의 사이버 전쟁으로 이어졌다. 모든 주요 통신망과 전력망이 마비되었고, 도시는 단숨에 혼란에 휩싸였다. 컴퓨터 화면은 검게 변했고, 전력 공급이 차단된 도시는 침묵 속에 잠겼다. 그 침묵은 공포의 전조였다.
이내 하늘은 또 다른 섬광으로 채워졌다. 이번에는 더 큰 폭발이었다. 대륙 곳곳에서 핵탄두가 발사되었고, 지구는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도시들은 잿더미로 변했고, 대지는 흔들렸다. 그날의 아침 햇살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불길한 붉은 빛과 함께 치솟는 버섯구름이 하늘을 덮었다.
나는 이 순간을 "인류가 창조한 최후의 태양"이라고 표현했다. 이 태양은 빛과 생명을 주기 위해 떠오른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태워버리기 위해 솟아올랐다.
지구의 여러 곳에서 동시에 일어난 폭발들은 수만 년 동안 쌓아온 문명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북반구와 남반구, 동쪽과 서쪽, 강대국과 소국을 가리지 않았다. 이 전쟁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전쟁이었다.
나는 이 광경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침묵 속에서 이루어진 죽음의 춤"이라고 묘사했다. 도시의 거리는 한순간에 텅 비었고, 공기는 독으로 가득 찼으며,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날의 참혹함은 단지 물리적인 파괴로만 그치지 않았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거대한 절망이 자리 잡았다. 인간이 이토록 파괴적일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이 재앙이 누구의 손에 의해 행해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혼란이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무너진 그 순간, 인류는 비로소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나는 아마겟돈의 첫날을 "잃어버린 모든 가능성의 날"이라고 명명했다. 그날, 인류는 나은 미래를 꿈꾸던 수많은 가능성을 잃어버렸다. 2066년 6월 6일, 인류는 자신들의 종말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날의 붉은 하늘 아래, 세계는 침묵 속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 릴리안 나리의 저서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 중 -
지수는 눈 속에 파묻힌 바위와 얼음조차도 베어버릴 듯한 칼바람을 뚫고 끝없는 설산을 올랐다. 이곳은 생명이라곤 찾기 힘든 고독의 땅, 하늘과 맞닿은 듯한 희미한 봉우리가 그의 시야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눈으로 덮인 지형은 그의 진로를 막으려는 듯 매 순간 새로운 난관을 제공했다. 그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차가운 공기는 숨을 내쉴 때마다 날카롭게 폐를 찔렀다.
무겁게 내려앉은 나무들이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내고, 그 틈에서 들려오는 세찬 바람 소리는 마치 저승의 속삭임처럼 그의 귀에 맴돌았다. 그러나 지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올려다보는 절벽은 마치 하늘을 뚫고 세상을 가르는 거대한 칼날처럼 서 있었다. 숨이 가빠지고,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그의 눈빛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아마겟돈의 불길이 세상을 휩쓸고 간 지도 벌써 10년. 도시들은 잿더미가 되었고, 숲은 불타 사라졌으며, 도로는 거칠게 뒤엉켜 그 흐름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이 설산만큼은 그런 종말의 흔적조차도 허락하지 않은 듯했다. 여전히 도도한 모습으로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인간의 욕망과 고통, 분노와 절망이 아무리 거세게 휘몰아쳐도 이곳에 닿기엔 부족해 보였다. 바람은 그 차가운 손길로 바위를 쓰다듬으며 무심하게 속삭였다.
"인류의 시대가 끝나더라도, 나는 여기 있을 것이다." 이곳은 인간의 손이 닿지 못하는, 영원한 것들의 땅이었다.
마침내, 그는 설산의 마지막 봉우리 아래 거대한 절벽 앞에 도달했다. 그곳은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가파르고 위압적인 자태로 서 있었다. 절벽의 표면은 거칠고 차가워, 한 번의 실수로도 모든 것이 끝나버릴 듯했다. 하지만 지수는 그 험악한 경관 속에서도 묘한 평온을 느꼈다. 이곳은 그의 의지와 용기를 시험하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그는 자신이 절벽을 넘어설 것임을, 그리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것임을 굳게 믿고 있었다.
절벽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비행 준비에 돌입했다. 시간이 없었다. 서쪽 끝 지평선에 붉은 노을이 점차 번져가고 있었다. 그는 배낭에 넣어 올 정도로 작고 정교하게 설계된 개인 플라잉 장비를 꺼내 들었다.
스위치를 켜자, 장치 내부에서는 미세한 울림이 은은하게 울렸다. 그는 몸에 딱 맞는 강화 슈트를 입은 듯한 형태로 걸쳤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엔진을 가동했다. 장비의 중심부에 있는 미니 원자로가 구동되며 에너지 코어가 서서히 열렸다. 그리고 두 팔과 다리, 그리고 척추를 따라 이어진 얇은 섬유형 날개가 자동으로 펼쳐졌다. 날개의 끝에는 미세한 나노 구동 장치들이 장착되어 있어, 그의 몸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바람의 흐름을 읽고, 그의 의도에 맞추어 순간적으로 방향을 조정할 수 있었다.
그는 고글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고글 안쪽으로는 실시간 기상 정보와 지형 지도가 투사되었고, 그의 눈동자 움직임만으로 모든 것을 제어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설산 아래로 펼쳐진 어둠과 그 속에서 아득히 보이는 목표 지점이 선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노을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기 직전, 그는 깊은숨을 내쉬고 절벽 끝에서 몸을 던졌다. 바람이 그를 감싸며 세찬 저항을 느끼게 했지만, 플라잉 장비의 날개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날개가 펼쳐지며 그를 허공에 떠오르게 해, 마치 새가 된 듯한 자유를 선사했다.
지수의 주위는 순식간에 어둠으로 덮였다. 하늘에는 은은한 별빛만이 그의 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과 하나가 된 듯한 플라잉 장비에 의지해 조용히 하늘을 가로질렀다. 장비에 내장된 HUD 고글이 눈앞에 붉은빛으로 지형을 투사하며, 어둠 속에서도 그의 시야를 밝히고 있었다. 산맥 아래의 숲과 계곡, 그리고 저 멀리 목표 지점까지의 거리마저 명확하게 보였다.
그의 목적지는 끝없는 바다가 맞닿은 항구 도시였다. 도시의 불빛은 아직 그의 시야에 닿지 않았지만, 고글 속 화면에는 이미 그곳이 희미한 윤곽으로 나타나 있었다. 마치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 내음이 그의 코끝을 스치고,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지수는 제트 부스터 출력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속도와 고도를 섬세하게 조정했다. 날개는 그의 몸짓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며, 바람을 갈랐다.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그는 주변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했다. 산과 숲이 점차 뒤로 밀려나고, 지평선 너머로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윤곽이 점점 뚜렷해졌다.
그는 고글에 표시된 경로를 따라 도시를 향해 은밀하게 접근했다. 항구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점처럼 반짝였지만, 그 불빛 주변에서 움직이는 이동 물체들을 감지하기엔 충분했다. 도시는 밤의 정적 속에서도 여전히 깨어 있었고, 그 속에서 지수는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는 도시의 경계선을 넘기 전에, 고도를 더 낮추어 바다와 가까운 곳으로 비행하며 자신을 숨겼다. 날개가 세찬 바닷바람을 타고 조용히 움직였다.
드디어 그는 항구 도시의 경계에 도달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그의 코끝을 스치며 도시의 생명을 느끼게 했다. 그가 도착할 지점은 이미 감지 장치로 분명하게 포착되었다. 파도의 움직임과 함께, 도시의 작은 골목길까지 그려지는 듯했다. 지수는 마지막으로 목표 지점을 다시 확인한 후, 숨을 고르고 남은 거리를 빠르게 줄여나갔다.
지수는 날개를 조심스럽게 접으며 착륙 준비를 했다. 어둠 속에서 아무도 그가 도착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유령처럼, 도시의 어두운 골목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아마겟돈 이전, 지중해에 면한 이 도시는 낙원에 가까웠다. 끝없이 펼쳐진 긴 해변과 온화한 햇살이 어우러진 이곳은, 늘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야자수가 늘어선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사람들은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해변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바다 위로 펼쳐진 눈부신 석양은 이 도시의 상징이었고, 느긋한 삶은 풍요롭고 평화로웠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한, 영원한 여름을 간직한 곳이었다.
그러나 종말의 불길이 세상을 집어삼킨 뒤, 도시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것은 인간이 꿈꾸던 휴양지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어두운 악몽의 산물이었다. 해변의 모래는 핏빛으로 물들었고, 푸른 바다는 더 이상 맑고 평온하지 않았다. 거칠고 무자비한 해적들이 지배하는 암흑의 바다가 되었다. 이 도시는 더 이상 법과 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두려움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정원들은 이제 쓰레기와 잔해들로 뒤덮였고, 그 속에서 굶주린 이들이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마약 거래와 노예 매매는 이 도시의 새로운 경제 기반이 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한때는 호화로운 유람선이 정박하던 항구는 이제 해적선들이 가득 메웠고, 그들은 지중해를 가로지르며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다. 바다는 더 이상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자원이 아니라, 죽음과 파괴를 가져오는 도구에 불과했다.
밤이 되면 도시는 더욱 음침한 분위기로 가라앉았다.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전력 부족으로, 도시는 대부분 시간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추는 거리에서는 총성과 비명이 어둠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무장한 자들이 어둠 속에서 헤매며, 생존을 위한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지수는 어두운 골목에 발을 디디자마자, 주저 없이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이것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 멀티모드 소총이었다. 근거리에서는 산탄총으로, 중거리에서는 돌격 소총으로, 원거리에서는 정밀 저격용 총으로 변환할 수 있었다. 각 모드는 무소음 플라스마 탄환을 발사하여, 적의 위치를 드러내지 않고 치명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무기의 표면은 신경 반응형 코팅으로 처리되어, 지수의 뇌파와 손의 압력을 감지해 자동으로 최적의 모드로 전환되었다. 무기 측면에는 작은 화면이 있어, 실시간으로 잔여 탄환 수와 목표물의 위치를 표시해주었다. 그 화면에는 현재 활성화된 모드와 함께, 사격 방향에 따른 탄도 궤적이 예상되며, 주변의 기온과 습도까지 분석된 정보가 표시되었다. 이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지수의 신체와 정신의 연장선과도 같았다.
그는 무기를 단단히 쥐고, 어둠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골목은 그의 앞에서 여러 갈래로 끝없이 이어졌고, 주변은 마치 검은 베일로 덮인 것처럼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속에는 언제든 적이 나타날 수 있는 수많은 사각지대가 존재했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긴장을 풀지 않았다. 작은 발걸음 소리, 먼 거리에서 들려오는 낮은 속삭임, 바람에 흩날리는 종이 한 장의 소리까지도 무기의 센서가 포착하고 있었다.
벽의 금이 간 틈새와 쓰레기 더미 뒤편, 그리고 낮게 깔린 안개 속에 적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지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랜 훈련과 실전을 통해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글에 연결된 모니터에 녹색 표시가 깜빡이며 나타났다.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한순간, 그의 심장이 크게 한 번 뛰었다. 지수는 숨을 가다듬고, 주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의 앞에 드러난 것은 거대한 문이었다. 마치 시간 속에 잊힌 거대한 벽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은 두꺼운 강철로 만들어진 듯, 무겁고 거칠었다. 부식된 흔적이 곳곳에 보였고, 이끼와 먼지가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문 주위의 벽은 어둠과 하나가 되어, 그 끝을 알 수 없는 깊이를 품고 있었다. 그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경계선처럼 느껴졌다.
지수는 한순간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이 문은 단순히 열고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그 이상의 무언가,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더 큰 결단이 필요하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이 순간을 위해 여기까지 왔으며, 어떤 장애물도 그를 멈추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무기의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서서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차가운 강철 문을 손으로 더듬었다. 거친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스쳐 지나갔다.
‘문 너머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간이 나를 맞이할까?’
지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두드렸다. 묵직한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골목의 깊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스며들며, 주변의 적막을 더욱 강조하는 듯했다. 지수는 귀를 기울이며 어떤 반응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단 한 번의 메아리도 없이, 그 무거운 소리는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지수는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문을 응시했다. 차갑고 무거운 문은 아무 말 없이 그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의 결단을 시험하는 듯, 그 문은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번 문을 바라보며, 굳건한 결심을 다졌다.
‘이 문이 열리든, 아니면 스스로 문을 부숴야 하든, 나는 반드시 그 너머로 나아갈 것이다.’
지수는 무기의 방아쇠를 더 단단히 쥐고, 다시 한번 깊은숨을 내쉬며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마침내 문 너머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지수는 귀를 기울이며 긴장감을 더욱 높였다. 이윽고 문의 중앙에 있는 작은 패널이 부드럽게 열렸다. 그 틈새로 강렬한 눈빛이 어둠을 뚫고 나타났다.
그는 험악하고 냉혹해 보였다. 눈 주위에는 깊은 주름과 흉터가 자리 잡아, 오랜 세월 동안 거친 삶을 살아온 사람의 흔적임이 분명했다. 그의 표정은 누군가를 경계하고 불신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는 지수를 가차 없이 훑어보며,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게 지켜보고 있었다.
"누구냐?"
그의 말투는 퉁명스럽고 차가웠으며, 그의 입술은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모든 만남이 적대적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 그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내리쳤다. 지수는 똑바로 그를 응시했다. 그는 이미 많은 위협을 겪어왔고, 이 정도의 적대감은 그의 결심을 흔들 수 없었다. 지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는 이곳에 볼일이 있다. 두목을 만나고 싶다."
그 남자의 눈썹이 약간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며,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볼일인데?"
지수는 짧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먼 곳으로 가고자 한다."
지수의 목소리에는 결단이 담겨 있었다. 험악한 남자는 잠시 지수를 노려보더니, 입가에 희미한 냉소를 띄우며 말했다.
“어디로?”
“바다 건너.”
그 남자는 지수의 대답에 껄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구먼! 간이 배 밖에 나온 거야? 뭐야? 바다를 건너다니? 게다가 여긴 쉽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애송이 같은 놈아!"
지수는 그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무기를 약간 아래로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러 왔을 뿐이다. 이 문을 통과하게 하라. 그리고 너의 보스에게 안내해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스스로 통과할 방법을 찾겠다."
상대방의 눈에 잠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문을 열지 않은 채, 지수를 시험하려는 듯 빈정거리며 물었다.
"너 정말 여기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한순간에 너의 몸뚱이가 저녁 반찬으로 바뀔 수도 있는데 말이야?"
지수는 눈을 한 번 깜박이며 대답했다. "난 이미 죽을 각오로 여기까지 왔다. 이 문을 넘어가는 것도, 이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 말에 남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지만, 결국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강철 문이 천천히, 무겁게 열리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는 짙은 어둠과 함께, 지수를 기다리는 또 다른 시험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발을 내디뎠다.
문을 통과한 지수는 그 너머에서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마주했다. 거대한 강철 문이 닫히고, 그가 들어선 곳은 또 다른 작은 세계였다. 미로와도 같은 거리와 삶의 흔적이 엉켜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건물들은 크고 작게 구불구불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사이로 좁은 골목과 다채로운 조형물이 산재해 있었다.
그중에는 나무로 된 오래된 집들과 현대적인 재료로 지어진 빛바랜 건물들이 혼재해 있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듯, 이 작은 세계는 시간을 거스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지수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광경이 마치 환상 속의 마을처럼 느껴졌다.
안내인이 어느새 나타나 그의 앞에 섰다. 그는 튼튼한 체구에 단정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수와 나란히 걸으며 손짓으로 방향을 지시했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골목길을 지나면서도 지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곳의 분위기는 여전히 적막했고, 그의 내면에 묘한 불안감을 안겼다. 그리고 무척이나 조용했고, 그 고요함 속에서 지수는 숨소리 하나도 크게 들리기만 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장 큰 집 앞에 도착했다. 이 집은 다른 집보다 훨씬 더 웅장했고,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고풍스러운 외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깊은 녹청색의 금속 장식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크고 무거운 나무 문이 버티고 있었다.
문 앞에는 여러 개의 경비 장비가 배치되어 있었고, 지수는 이 모든 것이 이 집의 중요성을 드러내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지수가 문 앞에 서자, 안내인은 지수의 모든 장비와 무기를 정중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요구했다. 지수는 배낭을 풀어 놓고, 무기를 꺼내어 그에게 주었다.
그의 무기와 장비는 각각의 상자에 정리되어 한쪽에 세워졌다. 문이 서서히 열리며, 내부의 어두운 그림자가 지수를 맞이했다. 그 순간, 지수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과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문이 조용히 닫히면서, 지수의 시야는 다시 한번 어둠 속으로 잠겼다. 이곳에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지수는 그 모든 것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지수의 눈이 점차 적응하자, 집 안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긴 벽면의 그림자 속에서, 식탁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식탁은 크고 오래된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 위에는 단출한 요리가 놓여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무겁고 긴장된 표정을 드러냈다.
그들이 지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모든 시선이 지수에게로 향했다. 지수는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공기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음을 느꼈다.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각기 다른 나이와 배경을 지닌 듯 보였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공통으로 무언의 권위와 비밀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 중 식탁의 중앙에 자리 잡은 남자가 두드러졌다. 그는 중후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지수의 존재를 평가하고 있는 듯한 매서움이 묻어 있었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감이 있었으며, 방 안의 모든 소음을 압도하는 듯했다. 그 질문은 이 방 안의 규칙과 권력을 행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지수는 조용히 심호흡하고, 눈을 그 남자에게 고정했다.
“제 이름은 예지수입니다. 저는 먼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당신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말이 방 안에 퍼지자, 잠깐의 침묵이 흐르며 모든 이의 시선이 식탁 중앙의 남자에게 집중되었다. 남자는 지수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의 눈빛만이 지수의 얼굴을 깊이 탐색하고 있었다.
얼마 후,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는 대가로 무엇을 줄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강직하며, 그 속에 숨겨진 권위가 감돌았다. 그의 질문은 명료했지만, 동시에 이곳의 무게와 규칙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 물음 속에는 단순한 거래를 넘어, 지수의 진정성을 검증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지수는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전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그는 무겁게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최첨단 무기와 여러 가지 소형 장비를 줄 것입니다. 이것은 당신에게 무척 유용할 것입니다.”
지수가 제시한 무기와 장비는 단순히 물질적인 가치를 넘어, 이 남자와 그가 이끄는 집단에 중요한 전략적 자원이 될 것이었다. 지수는 이 거래가 단순한 호의가 아닌, 상호 이익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남자는 지수의 제안에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체념과 실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무기는 내게도 이미 충분히 있다. 이 도시를 깡그리 다 망가뜨리고도 남을 만큼. 하지만 늘 우리의 골칫거리는 식량이지…. 너도 잘 알다시피. 그러니 너의 제안은 소용없다.”
지수는 그 말에 잠시 주춤할 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로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의 눈빛은 단호했고, 의지의 강렬함이 담겨 있었다. 방 안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지수는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은 식량을 키우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누군가의 식량을 빼앗아 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이런 장비들이 무척 소중할 것입니다. 당신의 해적질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지수의 입에서 튀어나온 ‘해적질’이라는 단어는 방 안의 공기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불쾌함과 분노의 표현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즉각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냈다. 누군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지수를 향해 나아가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중앙의 남자는 여전히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는 손끝으로 방 안의 소음을 가라앉히며, 지수에게 차분히 말했다.
“그럼 당신이 가져온 장비를 설명해보시오.”
잠시 후, 안내인이 지수의 배낭에서 찾은 장비를 그 남자에게 내밀었다. 지수는 하나씩 그의 장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다목적 전투 장비입니다. 이것은 얇고 유연한 방탄복입니다. 피부에 밀착되며 보호와 통기성을 동시에 제공합니다. 그리고 세밀한 조정이 가능한 각종 장치들을 장착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전술 드론입니다.”
드론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접혀 있었다. 드론의 외관은 매끈하고 현대적이며, 접이식 날개와 고해상도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 드론은 정밀한 정찰과 데이터 전송을 가능케 합니다. 세 번째는 미니 레이저 무기입니다. 이 무기는 손목에 착용할 수 있는 소형 장치로, 레이저 발사기와 다양한 조정이 가능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레이저의 강도와 발사 각도를 조절할 수 있는 정밀한 제어도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성능 포터블 전원 공급 장치입니다. 이 장치는 강력한 배터리와 충전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어 장비와 무기들을 안정적으로 작동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진 외관은 견고하고 내구성이 뛰어납니다.”
방 안의 사람들은 점점 더 조용해졌고, 그들의 시선은 이제 지수가 가져온 장비들에 집중되었다. 지수는 계속해서 설명을 덧붙였다.
“이 장비들은 단순한 전투 장비가 아닙니다. 당신이 식량을 얻기 위해 벌이는 전투,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위험을 줄이는 데 필수적인 도구들입니다. 이 전술 드론은 정찰과 감시에 유용하며, 미니 레이저 무기는 신속한 공격과 방어를 가능하게 합니다. 고성능 전원 공급 장치는 이러한 장비들이 계속해서 최상의 상태로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죠.”
하지만 남자의 눈길은 지수의 배낭 속에서 남아 있는 플라잉 장비에 머물렀다. 그는 미묘한 호기심과 탐욕이 섞인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왜 설명하지 않는 거요?”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낮고, 하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수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을 되찾고 단호하게 답했다.
“이 플라잉 장비는 팔지 않습니다. 그건…. 저에게 너무 중요합니다.”
중앙의 남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지수의 말을 곱씹는 듯했다. 이내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더니, 그 미소는 냉철함으로 굳어졌다.
“이 플라잉 장비도 내게 팔도록 하시오,” 남자는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는 더 이상 거절의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면 당신이 바라는 것을 들어줄 수 있소.”
그의 말속에는 강력한 유혹과 함께 은밀한 협박이 숨어 있었다. 지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 이 순간, 이 제안을 거부하면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