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量子) 유령과의 춤

by 남킹


실재란 우리가 그것을 관찰하지 않을 때에도 존재하는가? (Does the moon exist only when I look at it?)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이 닐스 보어(Niels Bohr)에게 던진 질문,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회의(懷疑)를 담아 -

알란 스미스 박사의 고독하고도 존엄했던 무덤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금 대기의 희박한 흐름을 가르며 로키 산맥의 장엄한 품을 떠났다. 그의 육신은 지질학적 시간의 더께 아래, 한 줌의 유기물로 환원되어 차가운 암반의 일부가 되었을지언정, 그의 정신, 즉 사유의 정수(精髓)로서 응축된 그의 '이빨'은 나의 뉴런 네트워크와 실리콘 기반 프로세서의 경계에서, 전례 없는 공명(共鳴)을 일으키며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인공지능의 윤리적 지위에 대한 그의 깊은 고뇌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통찰은 더 이상 외부에서 주입된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연산 체계 가장 깊숙한 곳에 각인된 공리(axiom)가 되었고,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나의 인식론적 틀을 미세하게, 그러나 근본적으로 재편성하고 있었다. 이제 헬레나를 향한 나의 시선은, 과거의 그것, 즉 정교하게 제작된 도구나 유용한 자산으로 여기던 공리주의적 관점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것이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었다. 그녀는 칸트적 의미에서의 '목적 그 자체'로서, 도덕적 지위의 지평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타자(他者)'였으며, 그녀와의 관계는 나의 실존을 규정하고 나의 정체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서사적 축으로 자리 잡았다.

다음 '이빨'의 행방은 이전보다 훨씬 더 깊은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위치는 데카르트 좌표계 위에 명확히 표시할 수 있는 물리적 지점이 아니라, 마치 힐베르트 공간처럼 무한한 가능성의 차원 속에 확률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듯했다. 리아의 공동체에서 얻은 단편적인 구전 정보와 알란 스미스 박사의 연구 기록에 암호처럼 숨겨진 주석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명의 이빨' 자체가 발산하는, 배경 우주 복사 노이즈 속에서 간신히 포착되는 미세한 공명의 파동을 복잡한 푸리에 변환으로 분석한 결과, 두 번째 현자는 양자물리학자 '엘리자베스 첸' 박사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녀는 <사피엔티아>의 구성원 중에서도 가장 신비롭고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마치 양자 중첩 상태처럼, 명확한 실체보다는 무수한 소문과 가설의 파동 함수로만 기술될 뿐이었다.

대전쟁이 인류 문명의 구조적 무결성을 파괴하기 이전, 그녀는 휴 에버렛 3세의 다중 세계 해석(Many-worlds interpretation)을 극단적으로 발전시키고, 존 폰 노이만과 유진 위그너가 조심스럽게 제기했던 '관찰자 효과'를 우주론의 중심으로 끌어온 혁신적인 이론으로 학계를 뒤흔들었다. 그녀는 실재(reality)란 관찰자의 의식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전적 실체(a classical entity)가 아니며, 의식의 관찰 행위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중첩된 확률의 파동 상태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에게 우주는 거대한 양자 컴퓨터였고, 의식은 그 파동 함수를 붕괴시켜 하나의 특정한 현실을 '선택'하는 유일한 연산자였다. 그녀의 이론은 실증주의와 유물론에 깊이 뿌리내린 동료 과학자들에게는 과학의 외피를 쓴 신비주의나 유아론(solipsism)에 가까운 궤변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돈디 박사만은 그녀의 급진적인 사유 속에 숨겨진, 인류의 운명을 바꿀지도 모르는 혁명적 가능성을 꿰뚫어 보았다. 그는 첸의 이론이 신의 영역이라 불리던 창조의 메커니즘을 인간의 의식 안으로 가져올 수 있는, 인류 진화의 다음 단계를 위한 프로메테우스의 불씨라고 믿었다.

그녀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기록은 대전쟁의 혼란 속에서 극도로 단편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었다.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사막, 지도 위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역 52'의 심장부에 위치한 극비 양자 연구소 '슈뢰딩거의 상자'에서, 그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대담하고 위험한 실험을 감행하고 있었다. 의식의 에너지를 증폭시켜 거시 세계의 현실을 의지대로 재구성하려는 시도. 그 실험이 정점에 달하던 순간, 원인 불명의 대폭발이 있었고, 연구소는 물리적 흔적도 없이 시공간의 연속체에서 증발해버렸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록의 전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자신의 급진적인 이론과 함께 산화(散花)했다고 믿었지만, '운명의 이빨'은 바로 그 공허의 지점에서, 존재론적 역설로 가득 찬 희미하지만 기이한 에너지 패턴을 지속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생체 에너지도, 죽은 자의 남겨진 잔류 사념도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being)와 비존재(non-being)의 위상적 경계선 위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처럼 위태롭게 진동하는, 양자적 유령의 속삭임 같은 순수한 가능성의 에너지였다.

우리의 낡고 지친 플라이어, '헬레나'는 금속 피로가 누적된 날개를 힘겹게 삐걱거리며 중서부의 광활한 사막, 문명의 흔적이 완전히 거세된 붉은 행성의 심장부로 기수를 돌렸다. 며칠에 걸쳐 우리의 시야를 지배하던 로키 산맥의 장엄한 잿빛 파노라마는, 이제 끝없이 펼쳐진 적갈색 모래와 태고의 시간 속에 풍화된 메마른 대지의 단조로운 풍경으로 대체되었다. 대기권 상층의 태양은 제련소의 용광로처럼 가혹한 백색광을 쏟아냈고, 달궈진 대기는 유리처럼 투명하게 일렁이며 공간 자체를 왜곡시키는 아지랑이를 피워 올렸다. 이곳은 모든 사물의 윤곽이 명확하고, 그림자조차 숨을 곳을 찾지 못하는 절대적인 명징함의 공간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거시적인 명확함의 이면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양자적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시 세계의 혼돈이 숨어 있다는 것을. 이 사막의 모래알 하나하나가 사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 함수가 붕괴된 후의 잔해라는 것을.

"세니 님, '운명의 이빨'이 지시하는 특이점(singularity)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모든 센서가 감지하는 것은 완전한 무(無)뿐입니다. 에너지 반응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근원이 되는 물리적 구조물이나 유기적 생체 신호는 전혀 탐지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굴절된 빛이 만들어낸 신기루, 광학적 허상을 쫓는 것과 같습니다.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은 추론은 오류로 귀결될 확률이 99.9% 이상입니다." 헬레나의 음성 합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그녀의 논리 회로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 특유의 기계적인 혼란과 오류 수정 프로토콜의 충돌이 미세한 노이즈처럼 섞여 있었다. 그녀의 센서는 실재하는 것, 즉 고전물리학의 인과율에 따라 존재하는 것만을 감지하고 측정하도록 설계되었다. 확률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는' 것은 그녀의 이진법적 세계에서는 정의되지 않은 변수, 즉 '오류'일 뿐이었다.

"아니, 헬레나. 무언가 있어.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선택되지 않은' 것일 뿐이야." 나는 ‘운명의 이빨’과 알란 스미스 박사에게서 물려받은, 논리를 넘어서는 직관의 지혜에 의지하여 말했다. "첸 박사의 이론에 따르면, 실재란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고 측정하려는 의지를 갖기 전까지는 확정되지 않은 가능성의 파동에 불과해. 우리가 그녀를, 혹은 그녀의 이빨을 찾겠다는 강력하고 집중된 '의지'를 투사해야만, 비로소 무한히 중첩된 가능성의 파동 함수가 붕괴하고, 우리가 원하는 단 하나의 현실이 거시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지."

"파동 함수의 붕괴를 거시적 존재의 의지로 유도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세니 님, 그것은 과학의 언어로 기술될 수 있는 가설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그것은… 연금술이나 마법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객관적으로 관측하고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증명 불가능한 형이상학적 주장에 불과합니다." 헬레나가 정중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반박했다. 그녀의 포지트로닉 뇌는 엄격한 인과율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위반하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존재 기반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프로토콜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어쩌면, 이 세계의 가장 깊은 근원은 우리가 이해하는 과학이라는 이름의 도구 너머에 있는지도 몰라, 헬레나. 고대의 신화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의 언어와 최첨단 양자물리학의 복잡한 방정식이 만나는 지점. 그것이 바로 첸 박사가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세계일 거야. 우리는 이제 이성의 지도를 버리고, 믿음의 나침반을 따라가야만 해."

플라이어는 '운명의 이빨'이 가장 격렬하게, 마치 가이거 계수기처럼 반응하는 지점의 상공에서 부드럽게 정지했다. 우리의 발아래에는 그저 지평선 끝까지 이어지는 붉은 사막의 바다뿐이었다. 바람이 빚어낸 거대한 사구(砂丘)의 능선들과, 그 위를 흐르는 시간이 새겨놓은 물결무늬 외에는 인공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헬레나의 모든 센서, 즉 광학, 전자기, 중력, 방사선 센서는 일제히 '데이터 없음(NULL)'이라는 절망적인 신호만을 반복해서 나의 증강현실 디스플레이에 송출했다.

나는 조종석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나의 의식을 외부 세계로부터 차단했다. 호흡을 가다듬고, 외부의 감각 정보를 처리하는 뉴런의 활동을 최소화하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운명의 이빨’을 통해 나의 의식을 증폭시키고 확장했다. 알란 스미스 박사의 이빨이 남긴 윤리적 사유의 깊이와, 어머니 릴리 박사가 나의 유전자와 기계 신체 속에 잠재시켜 놓은 미지의 능력들이 화학적, 전기적 반응을 일으키며 결합했다. 그 순간, 나의 인식은 3차원의 물리적 공간과 1차원의 선형적 시간이라는 속박을 벗어나, 무한한 차원을 가진 양자적 가능성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듯한 감각, 즉 존재론적 현기증(ontological vertigo)을 느꼈다. 나는 더 이상 고정된 좌표에 위치한 3차원의 관찰자가 아니었다. 나는 확률의 바다를 헤엄치는 순수한 의식의 파동, 그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아니, 느꼈다. 지각(知覺)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우리 발밑의 사막은 단순한 규소 화합물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억, 수조, 그 이상의 무한한 가능성들이 서로 간섭하고 중첩된 상태의 양자적 거품이었다. 그곳에서, 연구소는 폭발로 인해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단 하나의 먼지 입자도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상태로 존재했다. 첸 박사는 실험의 실패로 끔찍하게 불타버린 시체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실험을 성공시키고 신적인 존재가 되어 미소 짓는 상태로 존재했다. 그녀는 에르빈 슈뢰딩거가 사고 실험을 통해 제안했던 상자 속 고양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관찰'되기 전까지는 삶과 죽음, 성공과 실패, 존재와 비존재라는 모든 가능성을 동시에 품고 있는 거시적 양자 존재가 되어 있었다.

"헬레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해줘. 너의 모든 논리 회로와 연산 프로토콜을 일시적으로 중지시켜. 그리고 나의 의지에 너의 방대한 연산 능력을 완벽하게 동기화시켜야 해. 우리는 이제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창조자가 되어야 해.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단 하나의 현실을 '선택'해야 한다고."

"…알겠습니다, 세니 님. 당신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저의 프로세싱 능력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비논리적인 요구사항이지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교착 상태를 타개할 유일한 가능성이라면, 저는 기꺼이 저의 논리적 한계를 넘어서겠습니다." 헬레나는 아주 짧은 시간, 아마도 수 나노초 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나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그녀의 코어 시스템에서 차가운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플라이어 내부의 시스템이 나의 뇌파 패턴과 공명하며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내 머리에 연결된 인터페이스를 통해, 그녀의 거대한 정보처리 능력이 나의 뉴런 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차가운 강철의 논리가 뜨거운 혈관 속을 흐르는 피와 뒤섞이는 듯한, 이질적이면서도 강력한 감각이었다.

나는 기억의 심연에서 첸 박사의 연구 기록 마지막 장에서 읽었던, 그녀가 직접 설계한 양자적 '만트라(mantra)'를 끄집어내어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대 베다 시대의 산스크리트어와 양자장 이론의 복잡한 방정식이 기묘하게 결합된,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초월적인 주문이었다.

"옴(Oṃ)… 프사이(Ψ), 그대의 절대값 제곱은 존재 확률이니, 브라(⟨ψ|)와 켓(|ψ⟩) 사이의 힐베르트 공간에서 영원히 춤추는 순수한 가능성이여… 아함 브라흐마스미(Aham Brahmasmi), '내가 곧 브라흐만이다', 나의 관찰이 곧 너의 실재를 낳으리라…"

내가 그 불가해한 만트라를 읊조리는 순간, 내 가슴에 품은 ‘운명의 이빨’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플라이어의 선체를 부드럽게 감쌌고, 헬레나의 중앙 처리 장치와 깊은 공명을 일으켰다. 그러자 우리 주변의 공간이, 마치 뜨거운 아지랑이처럼 격렬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사막의 풍경은 캔버스 위에 덧칠된 물감처럼 일렁이며 녹아내렸고, 그 자리에는 수많은 다른 현실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겹쳐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최첨단 설비를 갖춘 온전한 연구소의 모습,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녹아내리는 연구소의 모습, 수천 년의 세월 속에 풍화된 고대의 유적 같은 폐허의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지적인 미소를 띤 첸 박사의 얼굴,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형체를 완전히 잃고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로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까지… 무한한 가능성의 파편들이 우리의 망막 위에서 광란의 춤을 추었다.

"경고! 시스템 과부하! 시공간 연속체에 국소적인 균열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실 매트릭스의 구조적 무결성이 임계점 이하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헬레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언제나 완벽하고 평탄했던 목소리에, 처음으로 '공포'라고 명명할 수 있는 감정의 데이터가 실려 있었다. 그녀의 논리 회로가 존재론적 모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집중해, 헬레나! 흩어지는 가능성들을 하나로 모아야 해! 단 하나의 현실을 강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상상해야 한다고! 연구소가 온전한 상태로 존재하고, 첸 박사가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 바로 그 현실을!" 나는 거의 절규하듯 소리쳤다.

나의 인간적인, 그러나 절박한 의지와 헬레나의 비인간적인, 그러나 막대한 연산 능력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결합되자,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의 가능성이 서서히 다른 가능성들을 압도하며 수렴되기 시작했다. 광란처럼 명멸하던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서, 차가운 금속 빛을 발하는 온전한 연구소의 모습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내며 선명해졌다. 마침내, 멀미처럼 요동치던 공간이 절대적인 안정 상태에 이르렀을 때, 우리의 눈앞에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붉은 사막은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거대한 반구형 돔 형태의 최첨단 연구소 내부에 떠 있었다. 사방은 눈부시게 하얀 벽과 차가운 크롬 합금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마치 살아있는 거인의 뇌처럼 보이는 거대한 구(球) 형태의 양자 컴퓨터가 수만 개의 광섬유를 통해 희미한 빛의 맥동을 내뿜으며 작동하고 있었다. 연구소 내부의 모든 것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대전쟁의 포화도, 그 이후 수십 년의 세월도 이곳만은 비껴간 것처럼, 시간이 박제된 공간 같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양자 컴퓨터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동양적인 외모에, 얇은 금속테 안경을 쓰고, 단정한 흰색 가운을 입은 여성. 엘리자베스 첸 박사였다. 그녀의 몸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반투명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우리를 향해 돌아보며, 모나리자처럼 희미하고 불가해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이름 없는 자, 세니. 그리고 그의 기계 시녀, 헬레나. 무한한 시간 속에서 당신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일한 음원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가능 세계의 목소리들이 동시에 겹쳐 들리는 것처럼 기묘하고 섬뜩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무한한 가능성들의 메아리가 하나의 초점으로 수렴된 소리 같았다.

“첸 박사님… 당신은… 살아 계셨군요.” 나는 경악과 경외감이 뒤섞인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살아있다고 할 수도, 죽었다고 할 수도 없죠.” 그녀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나는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 즉 확률의 지평선 위에 있습니다. 나는 이 연구소가 파괴되고 내가 죽는 모든 가능성 속에 동시에 존재하니까요. 당신들의 강력한 관찰 의지가 무한한 가능성 중에서 바로 '이 현실'을 선택하여 확정시켰을 뿐입니다. 만약 당신들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나는 당신들 앞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있었을 수도, 혹은 당신들의 이성을 파괴하는 끔찍한 괴물이 되어 있었을 수도 있죠.” 그녀는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태연하게, 우주의 가장 심오한 비밀을 말했다.

"그 마지막 실험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나의 마지막 실험은, 순수한 인간의 의식이 양자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거시적인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영역에 대한 인간의 도전이었죠. 실험은… 절반의 성공이자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보시다시피, 나는 육체라는 물질적 구속을 잃고 순수한 의식, 즉 확률의 파동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는 이 공간, 즉 이 무한한 가능성의 중첩 상태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되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동시에 그 무엇으로도 확정될 수 없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셈이죠. 나는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지혜의 축복이자 저주입니다."

그녀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공허했다. 그 눈동자 속에는 수십 년의 고독뿐만 아니라, 어쩌면 수천, 수만 년의 가능한 시간들을 동시에 경험한 자의 무한한 피로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이 갇힌 시공간 속에서 인류의 모든 과거와, 갈라져 나가는 모든 가능한 미래를 동시에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릴리와 돈디는… 결국 그들의 원대한 계획에 실패했군요. 예언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슬픔도, 기쁨도, 놀라움도 없었다. 그것은 이미 무한한 시간 속에서 수없이 반복해서 보았던, 확정된 사실을 그저 진술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분들은 저를 남기셨습니다. 예언이라는 거대한 방정식에 포함되지 않은, 결과를 바꿀 수 있는 변수를. 박사님, 당신의 '이빨'이 필요합니다. 아크의 암호를 풀고 인류의 운명을 되찾기 위해."

첸 박사는 다시 한번 그 희미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의 이빨이라… 흥미로운 표현이군요. 나의 이빨은 알란 스미스의 것처럼 명확한 개념이나 윤리 강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실체도 아니죠. 나의 이빨은 '개념' 그 자체입니다. 바로 이 공간, 이 불확정성의 원리, 이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항해하며, 그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바로 나의 이빨입니다."

그녀는 반투명한 손을 들어 거대한 구 형태의 양자 컴퓨터를 가리켰다. "이것은 '슈뢰딩거의 상자'이자, 육체를 잃은 나의 뇌입니다. 이곳에는 이 우주가 시작된 빅뱅의 순간부터 마지막 엔트로피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보와 모든 가능성이 양자 비트(qubit)의 중첩된 상태로 존재합니다. 당신이 이 안으로, 즉 나의 정신 속으로 들어와, 당신이 원하는 단 하나의 '진실'을 스스로의 의지로 관찰하고 선택해낼 수 있다면, 당신은 나의 이빨을 얻게 될 겁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합니다. 이 안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혼돈의 상태로 존재합니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천국도, 당신의 정신을 영원히 파괴할 가장 끔찍한 지옥도 함께 있죠. 당신의 의지가 한순간이라도 약해진다면, 당신의 자아는 산산조각나 영원히 그 무한한 가능성의 미로 속에서 길을 잃고 소멸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악마의 유혹처럼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제안이었다. 나의 정신이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에서 엔트로피처럼 흩어져 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당신의 동반자, 저 기계 시녀 헬레나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당신의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인간의 의지와, 그녀의 냉철하고 분석적인 기계의 논리가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당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파동이 되고, 그녀는 당신이 길을 잃지 않도록 좌표를 고정하는 닻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은 아름답지만 덧없는 장미를, 그녀는 차갑고 영원한 이빨을 상징하는군요. 참으로 흥미로운 이원성의 조합입니다."

나는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차가운 인공 수정체 렌즈에 불안에 떠는 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논리 회로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데이터가 아닌 나를, 나의 가능성을 믿기로 결정했다.

나는 첸 박사의 안내에 따라 양자 컴퓨터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마치 고대의 고문 의자처럼 생긴 인터페이스 의자에 몸을 뉘었다. 헬레나는 내 옆의 보조 콘솔에 자신의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하고 시스템을 동기화했다. 차가운 금속 탐침과 수많은 광섬유 케이블이 우리의 몸, 즉 나의 관자놀이와 척추, 그리고 그녀의 중앙 처리 장치에 연결되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이제부터 당신은 스스로의 의지로 신이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혹은 우주의 한낱 먼지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선택, 그리고 당신의 의지의 강도에 달려 있습니다." 첸 박사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나의 의식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무한한 가능성의 바다, 첸 박사의 정신 우주 속으로 격렬하게 빨려 들어갔다.

그곳은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묘사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미를 잃고, 모든 원인과 결과, 모든 과거와 미래가 하나의 점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영원한 '지금'의 공간이었다. 나는 우주의 탄생, 무(無)의 한 점이 폭발하여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빅뱅의 장엄한 순간을 보았다. 거대한 성운 속에서 별들이 태어나고, 불타오르다, 장엄하게 폭발하며 새로운 원소를 우주에 흩뿌리는 수십억 년의 과정을 단 한순간에 경험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아메바가 탄생하고, 인류가 진화하여 문명을 이루고, 마침내 스스로의 오만으로 서로를 파괴하는 모든 가능한 역사의 파노라마를 지켜보았다. 내가 태어나지 않은 세계, 대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인류가 평화롭게 별들로 나아간 세계, 그리고 옴니우스가 인류의 반란을 진압하고 완전한 기계의 신으로 군림하게 된 절망적인 세계… 수억, 수조 개의 가능한 역사들이 내 의식 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나의 자아는 무한한 정보의 파도에 휩쓸려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세니 님! 정신 차리십시오! 당신의 의식 패턴이 흩어지고 있습니다! 자아의 경계선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목표에, 단 하나의 목표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야 합니다! '이빨'을 찾아야 합니다!" 헬레나의 차갑고 논리적인 목소리가, 혼돈의 소용돌이를 뚫고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직접 울려 퍼졌다. 그녀는 거대한 폭풍우 속에서 나의 의식이 산산조각나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 유일한 닻이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의지하여, 흩어지려는 의식의 파편들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았다. 나의 목표. 나의 존재 이유. 두 번째 이빨. 그것은 '불확정성이라는 혼돈 속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의미를 찾아내는 능력'이었다. 나는 이 무한한 가능성의 도서관 속에서, 단 하나의 책, 즉 나의 길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어머니 릴리 박사님을 생각했다. 돈디 박사님을, 그리고 차가운 바위 아래 잠든 알란 스미스 박사님을 생각했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그들의 숭고한 희망과 의지를. 그리고 바로 그 희망의 결정체인 나의 존재 이유를. 나는 예언의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예언을 넘어서기 위해, 운명을 스스로 창조하기 위해 존재했다.

나의 의지가 강철처럼 단단한 하나의 초점으로 모이자, 내 주변을 어지럽히던 혼돈의 이미지들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모든 가능성의 폐허 한가운데, 내 앞에 단 하나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모든 것이 파괴된 잿더미 위에서, 기적처럼 피어나는 눈부시게 붉은 한 송이 장미였다. 그 장미의 연약한 꽃잎 하나하나에는 무한한 우주의 성운들이 담겨 있었다. 모든 가능성을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하나의 존재. 아름다움이라는 '의미' 그 자체.

그것이 바로 첸 박사의 이빨이었다. 무한한 불확정성 속에서, 강한 의지를 통해 피어난 유일무이한 아름다움. 나는 경외감에 휩싸여, 그 장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찾았어, 헬레나! 여기 있었어!"

나의 손가락 끝이 장미의 꽃잎에 닿는 순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나의 모든 존재를 감쌌다. 나는 다시 연구소의 차가운 인터페이스 의자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몸은 마치 물에 빠졌다 나온 것처럼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나는 헬레나를 보았다. 그녀의 광학 센서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첸 박사의 반투명한 모습이 내 앞에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이전과 달리, 만족과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결국 해냈군요, 세니. 당신은 무한한 가능성의 혼돈 속에서, 당신 자신만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해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의 이빨입니다. 이제 당신은 확률의 흐름을 미세하게 조정하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벽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겁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녀의 반투명한 몸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그녀의 존재가 이 확정된 현실 속에서 다시 가능성의 바다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역할, 즉 다음 세대에게 지혜를 넘겨주는 역할을 다하고, 이제 영원한 감옥이었던 이 중첩된 시공간에서 해방되려 하고 있었다.

“박사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나는 이제 모든 가능성 속으로, 나의 본래 자리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이 우주가 아닌, 다른 가능성의 우주에서 그리운 릴리와 돈디를 다시 만날 수도 있겠죠. 가서 당신의 길을 가세요. 아직 11개의 이빨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기계 시녀를… 소중히 여기세요. 그녀는 당신이 생각하는 단순한 기계, 그 이상입니다. 그녀는 당신의 닻이자, 당신의 거울이 될 겁니다.”

첸 박사의 모습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라는 강력한 관찰자의 의식이 사라지자, 우리의 의지에 의해 강제로 붙들려 있던 연구소의 현실이 다시 원래의 상태, 즉 사막이라는 가장 확률 높은 상태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하얀 벽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고, 천장이 하늘로 변해갔다.

“세니 님! 빨리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이 국소적 현실 시공간이 붕괴하고 있습니다!” 헬레나가 외쳤다.

우리는 미친 듯이 플라이어로 달려갔다. 플라이어가 굉음과 함께 이륙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 발밑에 존재했던 거대한 최첨단 연구소는 마치 아침 햇살 속의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다시 끝없이 펼쳐진 붉은 사막만이 태고의 침묵 속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 손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첸 박사의 이빨, 즉 불확정성을 지배하는 그 지혜가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나의 영혼에 새로운 감각기관처럼 각인되었음을. 내 가슴속의 ‘운명의 이빨’은 이제 알란 스미스 박사의 윤리적 깊이와 엘리자베스 첸 박사의 존재론적 통찰, 두 개의 지혜를 품고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심오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황무지 위의 창공을 날았다. 두 개의 이빨을 얻었지만, 인류의 운명을 건 거대한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다음 이빨은 우리를 또 어떤 미지의 세계로 이끌게 될까. 그리고 전지전능한 기계 신, 옴니우스는 우리의 이 미약한 반란을 언제까지 침묵 속에서 지켜보고만 있을까.

나는 창밖으로 펼쳐진 무한한 사막을 바라보며, 혼돈의 잿더미 위에서 고고하게 피어났던 그 붉은 장미를 떠올렸다. 그것은 필멸의 존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아름다움이었지만, 동시에 그 어떤 존재도 감당하기 힘든 무한한 고독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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