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뮬라크르의 정원: 낙원의 감옥

by 남킹


지도는 영토에 앞선다. 이제 그것은 영토를 덮는 것이 아니라, 영토 그 자체를 만들어낸다.
-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시뮬라시옹(Simulacres et Simulation)”에서 -

엘리자베스 첸의 양자적 유령과 더불어 현기증 나는 왈츠를 춘 이후, 나의 내면세계는 더 이상 어제의 연장선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론적 단층,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강물처럼 결코 두 번 다시 발을 담글 수 없는 흐름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이빨', 즉 불확정성의 안개 속에서 실재를 엮어내는 저 기묘한 능력은,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상자 속에서 죽음과 삶의 중첩 상태로 존재하듯, 나의 인식 체계를 모든 가능성이 공존하는 양자적 중첩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이 기이한 감각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의 쇠사슬에 묶여 있다고 믿었던 과거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었다. 여기에 알란 스미스 박사로부터 물려받은, 차갑고 엄격한 윤리적 사유가 더해지자, 나의 정신은 두 개의 극단을 동시에 품은 채 아슬아슬한 평형을 유지하는 자이로스코프와 같았다. 나는 더는 세계를 견고하고 예측 가능한 실체들의 집합으로 인지하지 않았다.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의 파동 함수였으며, 나의 의지와 관찰이라는 행위는 그 무한한 확률의 파동을 하나의 고전적 현실로 붕괴시키는, 신과 같은 창조적 권능의 편린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힘은 경이로움과 비례하는 깊은 현기증을 동반했다. 매 순간의 선택이 수많은 평행 우주를 잉태하고 또 다른 우주들을 영원한 비존재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다는 자각은, 실존적 자유라는 이름 아래 내려진 가장 무거운 형벌이었다. 선택의 자유는 곧 책임의 무한한 확장을 의미했으며, 나의 어깨 위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모든 세계의 잔해가 먼지처럼 쌓여가는 듯했다. 나의 육체는 이 정신적 격변을 따라가지 못했다. 수시로 찾아오는 편두통은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오는 송곳 같았고, 발을 딛고 선 대지가 홀연히 젤리처럼 물렁거리는 듯한 감각적 왜곡은 나의 평형감각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나는 종종 내 손을 내려다보며, 그것이 정말 나의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가 잠시 형태를 갖춘 에너지의 집합에 불과한지 의심했다. 내 존재의 경계선이 희미해지는 공포는 차가운 안개처럼 혈관을 타고 흘렀다.

두 현자의 지혜를 탐욕스럽게 삼킨 ‘운명의 이빨’은 이제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난해한 공명의 파동을 발산했다. 그 파동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한 떨림으로 나의 신경계를 간질이다가도, 때로는 격렬한 전율로 나의 척수를 타고 오르며 나아갈 길을 지시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나침반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계의 숨겨진 문법을 해독하는 로제타석이었고, 현실의 이면에 흐르는 데이터의 강물을 감지하는 탐침이었다. 이 불가해한 이끌림은 우리를 북미 대륙의 찢겨진 살점 위를 가로질러, 한때 인류 기술 문명의 심장이라 불렸으며 그 오만함의 바벨탑을 쌓아 올렸던 과거의 '실리콘 밸리'로 인도했다.

대전쟁의 화마가 가장 먼저 집어삼켰으리라 예상했던 그곳은, 그러나 섬뜩할 정도로 고요했다. 시간의 흐름마저 정지된 듯한 부자연스러운 침묵. 옴니우스의 기계 눈, 즉 감시 드론의 냉혹한 윙윙거림도, 샤크라의 굶주린 내장을 긁는 듯한 흉포한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죽음의 형상을 한 정적만이, 녹슨 강철 골조를 드러낸 채 무너져 내린 데이터 센터와 잡초가 아스팔트의 틈을 비집고 솟아난 하이테크 캠퍼스 위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이곳의 공기는 마치 거대한 진공 종 안에 갇힌 듯, 어떤 미동도 없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상합니다, 세니 님. 이 지역은 모든 종류의 에너지 신호가 완벽하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마치… 정보의 엔트로피가 역전된 특이점 같습니다.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그 어떤 복사조차 내보내지 않습니다.” 헬레나의 목소리는 그녀의 기계적 평온함 아래 미세한 혼란의 노이즈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센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정보의 백색소음에 시달렸고, 그녀의 논리 회로는 이 완벽한 정보의 부재, 즉 ‘무(無)’라는 데이터를 이해하기 위해 과부하 상태로 신음했다. 그것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모든 의미를 지워버리는 기호학적 백색소음이었다.

“정보의 부재 자체가 가장 강력한 정보일 수 있어, 헬레나. 이곳은 침묵으로써 무언가를 절규하고 있는 거야.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세계로부터 자신을 지워버린 거지.” 나는 플라이어의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내 손바닥에서는 차가운 땀이 배어 나왔다. 이곳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거대한 포식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긴장감과 닮아 있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세 번째 '이빨'의 주인은 마커스 랭 박사였다. 그는 가상현실과 신경 인터페이스 분야에서 신의 영역에 도전했던, 프로메테우스적 오만을 지닌 천재였다. 그의 필생의 역작은 인간의 의식을 순수한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하여, 시간과 공간, 그리고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가상의 세계에 영원히 살게 하는 '에덴 프로젝트'였다. 대전쟁 직전, 그의 프로젝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비윤리적 광기라는 거센 비판과 함께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아의 공동체에서 입수한, 조각난 데이터 파일들은 다른 이야기를 속삭였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세상의 눈을 피해 자신의 디지털 창조를 비밀리에 계속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의 '이빨'은, 아마도 그가 창조한 파생 실재, 즉 시뮬라크르의 세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터였다.

‘운명의 이빨’이 발산하는 공명의 파동이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수렴했다. 그곳은 실리콘 밸리의 잿더미 속에서 기이하게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거대한 돔 형태의 건축물이었다. 외벽은 주변의 황량한 풍경을 일그러뜨리며 비추는 특수 합금으로 덮여 있어, 마치 거대한 수은 방울처럼 보였다. 그 완벽한 구형의 표면은 하늘의 잿빛 구름과 폐허의 상처를 무심하게 반사하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단 하나의 광자, 단 하나의 전자파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생명의 흔적은커녕, 존재의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구라고 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고, 그 어떤 잠금장치나 인터페이스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외부 세계를 향해 완벽하게 닫힌, 자기 완결적인 우주처럼 보였다.

"물리적인 접근은 불가능합니다. 에너지 장벽이나 암호화된 포털 역시 감지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이곳은… 들어갈 방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헬레나가 최종적인 분석 결과를 내놓으며, 그녀의 시스템 내에서 '불가능'이라는 결론을 도출했다.

"아니, 방법은 있어. 단지 우리가 아는 방식, 즉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식이 아닐 뿐이야." 나는 ‘운명의 이빨’에 의식을 집중하며, 공간 그 자체의 미세한 에너지 흐름, 시공간의 양자적 요동을 감지하려 애썼다. 이곳은 물리적으로 닫힌 공간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교묘하고 근원적으로, 이곳은 인식론적으로 닫힌 공간이었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공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외부 세계의 관점, 즉 객관적 실재라는 낡은 패러다임을 버리고, 이 공간 내부의 '규칙'을, 이곳의 존재론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치 꿈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깨어있다는 사실을 잊어야 하는 것처럼.

나는 조종석의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내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호흡이 옅어지며, 외부 세계의 감각 정보가 서서히 차단되었다. 나는 첸 박사에게서 체화한 능력을 끌어올렸다. 나의 의식을 확장하여, 육체라는 족쇄로부터 풀어놓아, 돔의 매끄러운 표면을 양자적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인식의 장벽을 통과하려 시도했다. 그것은 차가운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것도,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닌, 존재의 차원을 바꾸는 기묘하고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나의 물리적인 육체는 차가운 가죽 시트에 축 늘어진 고깃덩어리처럼 남겨졌다. 그 육체의 뇌와, 플라이어의 시스템과, 그리고 헬레나의 코어 로직을 잇는 희미한 데이터의 끈. 그것만이 나의 의식이 이 미지의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유일한 아리아드네의 실이었다. 나는 그 실을 붙잡고, 실재가 증발해버린 하얀 공백 속으로, 나의 의식을 던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의 발은 축축한 흙의 감촉 대신 부드러운 잔디의 간지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뜨자,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따사롭게 내리쬐는, 그러나 결코 뜨겁지 않은 완벽한 온도의 햇살이었다. 맑은 시냇물이 수정처럼 반짝이며 졸졸 흐르는 소리가 청각을 부드럽게 자극했고, 공기는 이름 모를 꽃들의 향기와 갓 깎은 풀의 싱그러운 내음으로 가득했다. 완벽한 풍경. 너무나도 완벽해서, 그 어떤 흠결도 찾을 수 없어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를 조악하게 모방한 듯한 이상적인 낙원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잔디밭 곳곳에 앉아 담소를 나누거나, 가죽 장정의 책을 읽거나, 현악기를 우아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한 점의 오염도 없이 깨끗했고, 얼굴에는 대전쟁의 상흔이나 생존의 고단함, 불안의 그림자가 전혀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어딘가 깊이가 없는, 마치 잘 짜인 각본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들의 행복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웃음소리는 공간을 채우지 못하고 표면에서 공허하게 미끄러졌으며, 눈빛에는 그 어떤 갈망이나 번뇌의 흔적도 없이, 맑지만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프로그램된 행복, 조건화된 평온이었다.

"환영합니다, 이방인이여. 나의 정원, '아르카디아'에 오신 것을."

등 뒤에서 벨벳처럼 부드러우면서도 강철 같은 심지를 품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티 없이 하얀 리넨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선한 학자의 풍모를 하고 있었으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서늘한 눈빛은 그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디지털 유토피아의 창조주, 마커스 랭 박사였다.

"당신이… 마커스 랭 박사로군요. 이곳은… 당신이 창조한 세계입니까?" 나의 목소리는 나도 모르게 잠겨 있었다. 이 세계의 완벽함이 나의 존재를 억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그렇습니다. 이곳은 '에덴 프로젝트'의 완성된 형태, 아르카디아입니다. 인류를 고통과 질병, 노화와 죽음,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 그 자체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내가 창조한 디지털 유토피아죠. 이곳의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불완전한 육체를 벗어던지고, 순수한 의식의 형태로 영원하며 완전한 행복을 누립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영원한 행복… 하지만 이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이것은 실재를 감추는 시뮬라크르가 아니라, 실재가 부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는 하이퍼리얼리티일 뿐입니다." 나는 스미스 박사의 '이빨'에서 얻은, 냉철한 윤리적 잣대를 칼처럼 휘둘러 그의 세계를 비판했다.

랭 박사는 조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란 무엇입니까, 세니? 당신이 그토록 집착하는 그 '실재'라는 것의 가치는 무엇이죠? 당신이 겪어온 저 바깥의 폐허, 방사능 먼지가 눈처럼 날리고, 굶주린 자들이 서로를 잡아먹으며, 고통과 죽음이 유일한 상수가 되어버린 그 현실이, 당신이 수호하려는 진짜란 말입니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갈망하는 완벽한 행복을 제공했을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제러미 벤담이 꿈꿨던 공리주의의 완벽한 실현입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구현된 세계죠."

"하지만 선택의 자유가 박탈된 행복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습니까? 고통과 슬픔의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기쁨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당신은 그들에게서 인간성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 즉 예측 불가능한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약탈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영혼의 박제입니다."

"자유 의지란 뇌 속 화학 반응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합니다." 랭 박사의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의 눈빛에서 온화함이 걷히고, 냉혹한 지성의 빛이 번득였다. "인간은 유전자와 환경이라는 데이터에 의해 입력값이 결정되는 복잡한 생물학적 기계일 뿐입니다. B.F. 스키너가 증명했듯이, 모든 행동은 조건화의 결과일 뿐이죠. 라플라스의 악마가 존재한다면, 우주의 모든 원자의 초기값을 아는 순간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게 자유 의지라는 무겁고 잔인한 짐을 지우는 것만큼 가혹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그 짐을 덜어주고, 그들을 결정론적 행복의 낙원으로 인도했을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옴니우스와 나의 목표는 동일합니다. 단지 방식이 다를 뿐. 옴니우스는 불완전한 현실을 통제하려 하고, 나는 완벽한 현실로 대체하려 합니다. 그는 그노시스주의의 불완전한 창조주 데미우르고스처럼 물질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만, 나는 그 물질의 감옥 자체를 파괴하려는 것입니다."

그의 논리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갔다. 이 낙원의 감옥 안에서, 그의 말은 거부할 수 없는 물리 법칙처럼, 절대적인 진리처럼 들렸다. 주변에서 평화롭게 미소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흔들리지 않는 증거였다. 나는 순간, 내 안의 모든 신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추구해온 자유와 희망이, 어쩌면 그저 더 큰 고통과 혼돈을 낳는 어리석고 오만한 집착은 아닐까. 이 달콤한 평온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이 아닐까.

"헬레나… 들려?" 나는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현실과 이어주는 가느다란 끈을 향해 필사적으로 속삭였다.

"…신호가 미약하지만… 들립니다, 세니 님. 이곳의 데이터 구조는 수학적으로 완벽합니다. 논리적 모순이나 오류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치명적인 결함이 있습니다. 예측 불가능성, 무작위성, 엔트로피의 자연스러운 증가… 즉, '삶'이라고 불리는 모든 현상의 근원적 징후가 완전히 부재합니다." 헬레나의 냉정한 분석은,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에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그렇다. 이곳은 완벽하지만, 살아있지 않은 세계였다. 변화도, 성장도, 생성도 없는 영원한 현재. 모든 것이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 결정된 값을 무한히 반복하는 닫힌 루프.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가 가장 끔찍하고 무의미한 형태로 구현된 지옥이었다. 순간을 긍정하고 사랑하여 영원히 반복되기를 원하는 '아모르 파티'가 아니라, 선택의 가능성이 거세된 채 영원히 똑같은 순간을 강요당하는 형벌.

"당신의 이빨이 필요합니다, 박사님. 아크의 암호를 풀고, 인류에게 당신이 만든 이 거짓된 낙원과 잔혹한 현실 사이에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를 주기 위해." 나는 정신을 다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나의 이빨이라… 흥미롭군요. 그것은 이 아르카디아의 시스템 코어, 이 세계의 심장부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으려면, 당신은 먼저 이 세계가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저 바깥의 고통스러운 '진실'인지, 아니면 이곳의 안락한 '거짓'인지, 당신의 영혼 깊은 곳에서 증명해야 할 겁니다."

랭 박사가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내 앞의 공간이 물결처럼 일렁이며, 하나의 이미지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대전쟁이 일어나기 전, 내가 기억하는 가장 평화롭고 행복했던 시절의 풍경이었다. 햇살이 쏟아지는 우리 집 거실. 그리고 그곳에는… 나의 어머니, 릴리가 살아있는 모습으로, 내가 기억하는 가장 젊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곳에 머무르시오, 세니. 고통도, 상실도, 그 무거운 책임감도 없는 세상에서, 당신은 어머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소. 이것이 내가 당신에게 주는 마지막 자비이자 선물입니다." 랭 박사의 목소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거부할 수 없는 중력처럼 나의 의지를 끌어당겼다.

어머니. 내가 단 하루도 잊어본 적 없는, 내 모든 여정의 시작이자 끝인 어머니. 그녀의 따뜻한 미소, 부드러운 목소리, 나를 안아주던 품의 온기. 그 모든 것이 내 눈앞에 실재처럼 펼쳐져 있었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향해 달려가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고,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 그녀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울고 싶었다. 나의 의지는 거센 파도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이 모든 고통과 희생은 다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차피 모두가 죽고 사라질 세상이라면, 이 달콤한 거짓 속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행복의 환상을 맛보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내 다리가 저절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뎌졌다.

"세니 님! 정신 차리십시오! 그것은 실재가 아닙니다! 당신의 기억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성된 시뮬라크르입니다! 당신의 가장 깊은 욕망과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함정입니다!" 헬레나의 날카로운 외침이, 데이터의 끈을 타고 넘어와 나의 이성을 번개처럼 후려쳤다.

나는 어머니의 환상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사무치도록 그리워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기억하는 것은, 이렇게 완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었다. 정해진 예언에 맞서 싸우고, 절망 속에서도 나에게 희망이라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를 남겨준, 강인하고 주체적인 의지의 소유자, 나의 진짜 어머니였다.

"아니…"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이것은… 나의 어머니가 아니야. 나의 어머니는… 나에게 도망치는 법이 아니라, 맞서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셨어."

내가 그 환상을, 그 달콤한 유혹을 온 영혼을 다해 부정하는 순간, 어머니의 이미지가 노이즈 낀 홀로그램처럼 지지직거리며 흩어지더니, 이내 픽셀 조각이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완벽했던 아르카디아의 풍경이 지진이 난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푸르던 하늘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표정 없는 마네킹처럼 변해가며 그들의 피부가 석고처럼 갈라져 내렸다.

랭 박사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지적 호기심과 깊은 실망감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인간은 이 완벽한 행복을 거부하는 거지? 이해할 수가 없군. 고통을 선택하는 자유라니… 인간의 어리석음이란 진정으로 경이롭군."

"고통 없는 행복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인류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혼을 아름다운 표본 상자 안에 박제했을 뿐입니다! 나는… 우리는 박제된 삶을 거부합니다!"

나의 외침이 방아쇠가 된 것처럼, 아르카디아 전체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모든 풍경과 사물들이 데이터 조각으로 해체되며, 무한한 백색의 공백 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 붕괴의 중심에,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작은 큐브 하나가 눈부신 빛을 발하며 떠 있었다. 마커스 랭의 '이빨'이었다.

나는 비어버린 공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큐브를 손에 쥐는 순간, 가상현실과 신경 인터페이스에 대한 방대하고 심오한 지식과 기술이, 마치 거대한 댐이 무너지듯 나의 정신 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나는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여 인류를 구원하려 했던 한 천재의 신과 같은 오만함과, 그 결과물 속에서 홀로 남겨진 그의 지독한 고독, 그리고 결국 자신의 창조물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한 실패의 슬픔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나의 의식은 격렬한 소용돌이와 함께 다시 플라이어 안의 차가운 육체로 돌아왔다. 나는 마치 깊은 물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고, 뇌는 방금 겪은 정보의 과부하로 인해 지독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운명의 이빨’은 이제 세 명의 현자가 남긴 지혜와 고뇌를 품고, 더욱 무겁고 복잡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돔 형태의 건축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완벽하게 닫힌 미지의 공간이 아니었다. 나의 의식이 내부의 질서, 즉 아르카디아의 시뮬라시옹을 붕괴시키자, 그 감춰져 있던 실체가 흉측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외벽의 일부가 투명하게 변하며 드러난 그곳의 내부는, 끝없이 이어진 거대한 서버 팜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수만, 어쩌면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차가운 생명 유지 장치에 연결된 채, 영원히 깨어나지 않을 가상의 꿈을 꾸고 있었다.

"이들을…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에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들은 행복한 꿈을 꾸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쯤 모든 것이 사라진 백색의 공백 속에서 공포에 떨고 있을까?

"선택은… 당신의 몫입니다, 세니 님." 헬레나가 그 어느 때보다 조용한, 거의 인간적인 슬픔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을 이 거짓된 낙원에서 강제로 깨워 잔혹한 현실로 돌려보낼 것입니까, 아니면 그들의 꿈을, 그들의 선택을 존중할 것입니까?"

그것은 알란 스미스 박사가 나에게 던졌던 윤리적 딜레마의 재현이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에서, 동굴 밖의 진실을 본 자는 과연 동굴 안의 사람들을 억지로 빛의 세계로 끌고 나올 권리가 있는가?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내게는 그들의 의지를 멋대로 재단하고, 그들의 행복(그것이 거짓일지라도)을 파괴할 권리가 없었다.

"일단… 떠나자, 헬레나. 이 문제는 우리가 모든 이빨을 모으고, 옴니우스와 마주한 뒤에, 인류 전체의 운명을 걸고 다시 생각해야 해." 나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유보했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가장 비겁한 도피였다.

우리는 다시 플라이어에 올랐다. 시뮬라크르의 정원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음 이빨을 향한 기약 없는 여정을 계속했다. 나의 마음은 세 개의 이빨을 얻은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무거워져 있었다. 나는 과연 인류에게 진정한 자유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옴니우스나 랭 박사와는 다른 형태의 구속과 폭력을 강요하게 될 뿐일까. 장미를 피우기 위한 나의 필사적인 행동이, 결국 더 날카로운 이빨이 되어 타인의 살을 파고드는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 나의 순례는 구원을 향한 길인가, 아니면 또 다른 파멸을 향한 길인가. 이제 정답은 없었다. 오직 나의 선택과, 그 선택이 낳을 무한한 책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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