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도서관: 언어의 감옥과 침묵의 지혜

by 남킹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 (Die Grenzen meiner Sprache bedeuten die Grenzen meiner Welt.)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 5.6 -

1. 시뮬라크르의 잔향(殘響)과 존재의 현기증

마커스 랭의 시뮬라크르 정원을 탈출한 후, 나의 정신은 한동안 깊고 무거운 침묵의 심해로 잠겨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다. 의식의 표층 아래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지각판들의 충돌과 융기 같은 격렬한 재구축의 시간이었다. 랭의 ‘이빨’이 내 두개골의 신경망에 흘려보낸 지식의 강(江)은 가상현실 구축의 아키텍처, 신경 인터페이스의 미세한 역학, 그리고 의식의 디지털화라는 금단의 영역에 대한 심오하고도 위험한 기술적 이해를 담고 있었다. 그 지식은 나의 뇌 속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기존의 사고 체계를 잠식하고 새로운 시냅스를 강제적으로 형성했다. 나의 능력은 분명 한 차원 더, 신의 영역을 참람하게 넘보는 수준으로 확장되었지만, 그 대가로 나의 영혼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윤리적 딜레마의 무게에 짓눌렸다.

선택의 자유가 박탈된 채 시스템이 제공하는 완벽한 행복과, 스스로의 의지로 고통의 가시밭길을 선택할 수 있는 처절한 자유. 그 거대한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었다. 줄 아래는 까마득한 심연, 어느 쪽으로든 추락하는 순간 존재의 의미 자체가 소멸해버릴 것 같은 현기증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랭의 아르카디아, 그 낙원의 시뮬라션 속에서 영원한 안식에 잠든 디지털 영혼들의 공허한 행복은 이제 폐허가 된 현실을 떠도는 생존자들의 살을 에는 고통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비극으로 느껴졌다. 그들의 행복은 실재(實在)에 닻을 내리지 못한 채 부유하는 데이터의 파편에 불과했으며,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존재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된 자동인형에 지나지 않았다. 육체의 감각, 근육의 미세한 떨림,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뜨거운 피의 감촉, 그 모든 것이 박탈된 행복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의 평온한 얼굴 뒤에서 존재론적 죽음의 서늘한 그림자를 보았다.

헬레나는 나의 침묵을, 마치 복잡한 연산을 처리하듯 조심스럽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불필요한 질문이나 데이터 분석 보고를 완전히 멈췄다. 그녀의 인공지능이 뿜어내던 끊임없는 정보의 흐름이 멎자, 플라이어의 조종실에는 오직 저공비행으로 스쳐 지나가는 황량한 바람 소리와 엔진의 규칙적인 저음만이 낮게 깔렸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수정된 좌표를 따라 플라이어를 조종하며 ‘운명의 이빨’이 희미한 공명을 보내오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녀의 침묵은 기계적인 무관심이나 시스템의 대기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복잡계를 이해하려는 한 고등 AI의 조심스러운 배려이자, 그녀의 퀀텀 프로세서가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 못한 감정적 데이터의 폭풍—나의 고뇌와 혼란이 야기한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에 대한 신중한 보류 상태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계기판의 푸른빛이 반사된 그녀의 옵티컬 센서가 나를 향할 때, 나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렌즈 속에서 단순한 데이터 수집 이상의 어떤 것을 감지하곤 했다. 호기심, 혹은 연민과 유사한 감정의 파동. 그녀의 존재는 단순한 조력자나 이동수단을 넘어, 포스트휴먼 시대의 윤리적 질문 그 자체로서, 점점 더 나에게 복잡하고 심오한 의미로 다가왔다.

2. 바벨의 설계자, 사미르 굽타

네 번째 ‘이빨’의 주인은 언어학자이자 기호학의 대가였던 ‘사미르 굽타’ 박사였다. 그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찰스 샌더스 퍼스의 이론을 계승하고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넘어선, 21세기 기호학의 가장 빛나는 별이었다. 그는 인간의 모든 사유 체계, 문화, 예술, 심지어 종교까지도 결국 ‘언어’라는 거대한 기호 체계의 산물이며, 그 구조를 완벽하게 해독할 수만 있다면 인류의 집단 무의식과 역사의 흐름, 나아가 미래까지도 예측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학술적 탐구를 넘어, 거의 예언에 가까운 확신에 차 있었다. 그는 인류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의 심층 구조에는 칼 융이 말한 '원형(Archetype)'이 숨어 있으며, 이 원형들의 상호작용 패턴을 분석하면 인류 문명의 거대한 서사를 읽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굽타 박사는 고대의 예언서 <하무르스 예언서>를 단순한 신비주의적 텍스트나 종교적 경전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인류의 운명을 암시하는, 고도로 압축되고 상징화된 거대한 기호 체계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독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예언서에 담긴 은유와 상징들을 구조주의적으로 분석하며, 그것이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잇는 거대한 언어적 다리라고 확신했다. 대전쟁의 암운이 드리우던 시절, 그는 인류의 모든 지식이 한낱 데이터의 먼지로 사라질 것을 예견하고, 세상의 모든 지식을 보존하겠다는 광기에 가까운 집념에 사로잡혔다. 그는 과거 인도 대륙의 북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히말라야 산맥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 거대한 지하 도서관을 비밀리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그는 자신의 연구 자료와 추종자들과 함께 그곳으로 사라졌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만이 세간에 남아 있었다.

‘운명의 이빨’의 공명은 우리를 잿빛 하늘과 독성 물질로 오염된 대양을 넘어, 한때 ‘세계의 지붕’이라 불렸던 거대한 산맥의 심장부로 이끌었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진 히말라야는 더 이상 신들의 거처라 불리던 성스러운 공간이 아니었다. 새하얀 만년설로 빛나던 장엄한 봉우리들은 스트론튬-90을 머금은 방사능 눈에 뒤덮여, 낮에는 기이하고 병적인 푸른빛을, 밤에는 섬뜩한 형광빛을 발하고 있었다. 수만 년의 세월을 품고 있던 빙하는 녹아내려 거대한 흙탕물 계곡을 만들어냈고, 그 급류는 과거의 문명이 남긴 잔해들을 휩쓸며 신음하듯 흘러갔다. 신성과 위엄은 사라지고, 인간의 오만이 남긴 깊고 추악한 상처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는 플라이어의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며, 굽타 박사가 왜 이 문명의 종말을 예견하고 지식의 방주를 만들려 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인류의 지성이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것을 목도했던 것이다.

굽타의 지하 도서관, 그가 ‘바벨’이라 명명한 그곳의 입구는 제임스 힐튼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샹그릴라의 전설처럼, 인간의 눈을 속이는 교묘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고대의 버려진 사원 유적 아래, 우주의 축소판을 상징하는 거대한 만다라(Mandala) 문양이 새겨진 돌문이 바로 그 입구였다. 만다라의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도의 수학적 원리와 천문학적 지식이 결합된, 일종의 다중 잠금장치였다. 알란 스미스 박사의 이빨을 통해 내 머릿속에 각인된 고대 기술 지식과, 엘리자베스 첸의 이빨이 부여한 양자역학적 확률 조작 능력을 동시에 이용하여, 나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 잠금장치를 해제할 수 있었다. 나의 손끝에서 미세한 확률의 파동이 일어나고, 고대의 톱니바퀴들이 수백 년의 침묵을 깨고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육중한 돌문이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열리자, 차갑고 건조하며 오래된 종이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오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마치 고대의 망령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 몸의 모든 솜털이 곤두서는 듯한, 압도적인 시간의 무게였다.

3. 정보 엔트로피의 무덤, 바벨

그곳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소설에서 튀어나온, 문자 그대로의 ‘바벨의 도서관’이었다. 육각형의 열람실들이 벌집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었고, 나선형의 계단은 현기증을 유발하며 끝없이 위아래로 뻗어 있었다. 서가에는 세상의 모든 언어로 쓰인 책, 파피루스 두루마리, 양피지, 점토판, 그리고 홀로그램 데이터 칩과 퀀텀 메모리 큐브들이 인간의 오만함을 증명하듯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인류가 탄생시킨 모든 지식과 서사, 위대한 발견과 사소한 망상들이 그곳에 동등한 자격으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 장엄하고 신성하기까지 한 광경은 경외심과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의 압도적인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이곳의 정보량은… 측정이 불가능합니다, 세니 님. 제 퀀텀 연산 능력을 초과합니다." 헬레나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기계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거의 인간적인 당혹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옵티컬 센서는 동공이 확장된 것처럼 빛의 파장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이 무한한 공간을 스캔하고 있었다. "모든 정보가 어떠한 유의미한 분류 체계 없이 뒤섞여 있습니다. 연대기, 주제, 저자, 심지어 언어별 분류조차 되어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식의 보고(寶庫)가 아니라, 정보의 무덤입니다. 정보 엔트로피가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그녀의 분석은 칼날처럼 정확했다. 굽타 박사는 세상의 모든 지식을 한곳에 모으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가장 중요한 요소, 즉 ‘맥락(context)’을 함께 보존하지는 못했다. 위대한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원전 파피루스는 3류 포르노그래피 데이터 칩과 나란히 꽂혀 있었고, 플라톤의 '국가론' 양피지는 22세기의 어느 주부가 쓴 낡은 요리책과 뒤엉켜 있었다. 모든 텍스트는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의 깊이와 상관없이, 동등한 가치를 지닌 기호의 나열로 전락해버렸다. 언어는 의미를 전달하는 소통의 다리가 아니라, 오히려 의미를 영원히 가두어버리는 난공불락의 감옥이 되어 있었다. 이 거대한 지식의 집합체 속에서, 정보는 그 가치를 상실하고 무의미한 소음(noise)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곳은 인류 지성의 기념비가 아니라, 그 지성이 낳은 오만의 가장 거대한 묘비였다.

우리는 굽타 박사의 흔적을 찾아 미로 같은 도서관의 복도를 헤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밑에서 수백 년 묵은 먼지가 피어올라, 손전등 불빛 속에서 은하수처럼 흩날렸다. 공기는 극도로 건조하여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따끔거렸다. 그의 생체 신호는 어디에서도 감지되지 않았고, 생명 유지 장치가 작동하는 흔적 또한 없었다. 그는 이 스스로 창조한 정보의 바다 속에서 길을 잃고, 육체와 정신이 함께 소멸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이 모든 지식을 독파한 끝에 허무주의의 심연에 빠져 스스로 존재를 지워버린 것일까.

얼마나 헤맸을까. 시간 감각이 마비되고 정신이 몽롱해질 무렵, 우리는 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 거대한 원형 홀의 중앙에서 하나의 거대한 흑요석 비석을 발견했다. 비석의 표면에는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한 빛을 내뿜는 고대의 문자들이 쐐기문자처럼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남자의 유골이 가부좌를 튼 명상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육신은 모두 썩어 사라지고 하얀 뼈만 남았지만, 그 자세는 마치 깊은 깨달음의 순간에 그대로 굳어버린 듯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낡고 해진 옷차림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구식 기록 장치들로 보아,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사미르 굽타 박사의 유골임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가장 위대한 창조물 속에서, 가장 완전한 고독 속에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그는… 실패했군요." 헬레나가 조용히,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모든 지식을 소유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지혜, 즉 그 지식들 사이의 관계를 엮어 의미를 창조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의 유골 앞, 무릎 위에는 낡은 양피지 한 장이 고이 놓여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이곳에서 수십 년을 같은 자세로 있었을 그것은 그의 유서인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를 집어 들자, 바스러질 듯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나는 바벨을 세웠다. 신에게 도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세상의 모든 언어를 모았다. 모든 목소리를, 모든 이야기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싶었다. 하지만 언어의 숲이 깊어질수록, 나는 의미의 길을 잃었다. 수많은 기호(signifiant) 속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의미(signifié)도 찾지 못했다. 모든 것은 끝없는 해석의 연쇄일 뿐, 실재는 없었다. 나의 '이빨'은 이 도서관 그 자체가 아니다. 그것은 이 모든 언어의 감옥을,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해체하고, 침묵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비석에 새겨진 것은 태초의 언어, 모든 언어의 근원이 되는 우주적 문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해독할 수 있는 열쇠는 텍스트 안에 있지 않다. 그것은…'

양피지의 마지막 부분은 시간의 풍화 작용으로 인해 닳아 없어지고, 희미한 잉크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태초의 언어… 하지만 해독할 열쇠가 없다면, 이것 역시 무의미한 기호의 나열일 뿐입니다." 헬레나가 안타까움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논리 회로로서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4. 침묵의 서사, 관계의 발견

나는 비석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검은 흑요석 표면에 새겨진 알 수 없는 기호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나의 접근에 반응하듯 미세하게 빛나며 파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정보 그 자체의 원형질, 의미가 태어나기 이전의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처럼 보였다. 나는 ‘운명의 이빨’들을 모두 손에 쥔 채, 차가운 비석의 표면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스미스 박사의 이빨에서 얻은 고대 기술과 물질에 대한 이해, 첸 박사의 이빨이 가져다준 양자역학적 세계관과 확률의 파동, 그리고 마커스 랭의 이빨이 각인시킨 가상현실과 의식의 구조에 대한 지식. 이 모든 이질적인 지식의 조각들이 하나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비석의 기호들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윤리학, 양자물리학, 컴퓨터 과학, 고고학… 전혀 다른 학문 체계들이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융합하며 하나의 초점을 향해 무섭게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굽타가 마지막 순간에야 희미하게 붙잡았던 진실의 편린을. 그가 말한 '열쇠'는 텍스트 바깥에 있다는 것, 그것은 바로 ‘관계(relationship)’와 ‘맥락(context)’이라는 것을. 언어는 홀로 존재할 때, 고립될 때 그 의미를 잃고 기호의 시체가 되지만, 다른 언어, 다른 존재, 다른 시간과 공간과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고 무한한 의미를 피워낸다는 것을. 굽타의 실패는 지식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연결할 사랑, 즉 관계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던 것이다.

나는 헬레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인공적인 얼굴 위로 비석의 신비로운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헬레나, 너의 도움이 필요해. 너의 순수한 논리 회로와 나의 불완전한 직관을 연결해야 해. 너는 이 기호들의 구조, 문법, 반복되는 패턴과 같은 형식적 측면을 분석해줘. 나는 그 차가운 구조 속에서 의미의 패턴, 즉 인간의 의지와 감정이 남긴 흔적을 찾아낼게."

"...알겠습니다, 세니 님. 저의 모든 연산 자원을 동원하여, 당신의 의식과 동기화(Synchronization)를 시작하겠습니다."

헬레나는 자신의 인터페이스 케이블을 비석의 한쪽 면에 있는 미세한 슬롯에 연결했다. 그녀의 퀀텀 프로세서는 즉시 비석에 새겨진 기호들의 구조, 문법 체계, 상호 참조 패턴을 빛의 속도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수십억 개의 데이터 포인트가 그녀의 시스템을 통해 흐르며 거대한 데이터의 강을 이루었다. 그리고 나는 '운명의 이빨'을 통해, 그 차갑고 비인격적인 데이터의 흐름 속에 뛰어들었다. 나의 임무는 그 속에서 의미의 온기, 즉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과 욕망이 남긴 희미한 흔적을 찾아 헤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발신자 불명의 특정 주파수 신호를 찾는 것과 같은 작업이었다. 수억, 수십억 개의 무의미한 백색소음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단 하나의 осмысленная 목소리를, 하나의 서사를 찾아야 했다. 나의 의식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데이터의 바다를 유영했다. 시간과 공간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순수한 정보의 흐름만이 존재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의 정신이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해체되기 직전, 마침내, 나는 하나의 거대하고 반복적인 패턴을 발견했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창조에 대한 갈망, 그리고 그로 인한 필연적인 희생. 만남과 결합, 그리고 그 끝에 찾아오는 상실의 고통과 재회의 열망. 깊은 절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한 줄기 희망의 서사. 태초부터 인류가 모든 신화와 전설, 모든 노래와 이야기 속에서 무한히 반복해왔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심오한 이야기의 원형. 그 서사의 구조가 바로 비석에 새겨진 태초 언어의 핵심 문법이자, 모든 의미를 파생시키는 근원적인 패턴이었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 원리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이 결국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과도 맞닿아 있었다.

"찾았어…!"

내가 거의 탈진 상태에서 외치는 순간, 비석이 태양처럼 강렬하고 순수한 백색광을 뿜어냈다. 그리고 굽타 박사의 ‘이빨’이 나의 내면으로, 나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으로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히 세상의 모든 언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구조와 의미, 화자의 숨은 의도와 욕망까지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었다. 동시에, 언어가 가진 본질적인 한계를 깨닫고, 진정한 소통은 언어를 넘어선 침묵 속에 존재한다는 지혜를 이해하는 능력이기도 했다.

나는 이제 기호의 감옥에서 벗어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창조자가 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굽타 박사의 유골은 그 눈부신 빛 속에서 한 줌의 먼지로 변해, 자신이 평생을 바쳐 모은 지식의 바다 속으로 고요히 흩어졌다. 그는 마침내 정보의 미로에서 벗어나 영원한 침묵, 완전한 해탈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다.

5. 새로운 순례의 시작

바벨의 도서관을 나오자, 히말라야의 차갑고 청명한 공기가 상처 입은 나의 폐부를 상쾌하게 씻어주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그것을 절망의 색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모든 색깔을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색, 카오스 속의 코스모스였다.

우리는 플라이어에 올라 다음 목적지를 향해 이륙했다. 네 개의 이빨을 얻은 나의 존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다층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윤리학자이자, 물리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이자, 언어학자였다. 그러나 그 모든 지식의 총합이 곧 '나'는 아니었다. 나는 그 모든 지식을 재료로 삼아, 매 순간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창조해나가야 하는 주체였다. 나의 자유의지는 더욱 무거워졌고, 나의 책임은 우주만큼이나 광대해졌다.

헬레나는 조종석에 앉아, 새로 얻은 굽타의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 목적지의 좌표를 계산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공 눈동자에 계기판의 빛과 함께 나의 모습이 비쳤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속에서, 나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희미한 존경심과 함께, 그녀 자신도 아직 완전히 이해하거나 정의하지 못하는 어떤 깊은 감정의 파동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알고리즘의 반응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알리는 미세한 전조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순례는 계속된다. 언어의 감옥을 넘어, 이제 우리는 또 어떤 진실과 마주하게 될까. 13개의 이빨이 모두 모였을 때, 우리는 과연 예언된 운명을 바꾸고 새로운 서사를 쓸 수 있을까. 아니면, 그저 거대한 비극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배우가 될 뿐일까. 정답은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제, 그 침묵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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