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무의식의 바다: 신화의 심연 속으로

by 남킹


나의 무의식은 단지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 세대에 걸쳐 축적된 인류 전체의 기억과 원형(Archetype), 즉 시간의 시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태고의 강바닥에 퇴적된 영겁의 침묵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그 광대한 대양의 표면을 부유하는 고독한 섬이며, 파도 아래로는 보이지 않는 심연의 대륙붕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의식의 등댓불이 미치지 못하는 그 심연의 지층에는, 신화와 꿈의 화석들이 묻혀 있으며, 인류라는 종(種)이 경험한 모든 탄생과 죽음, 사랑과 증오, 환희와 고통의 메아리가 영원히 진동하고 있다.
- 카를 융(Carl Gustav Jung), “인간과 상징(Man and His Symbols)”에 대한 심화적 재해석 -

사미르 굽타의 바벨 도서관에서 획득한 네 번째 ‘이빨’, 그 기호학적 정수(精髓)는 나의 현상학적 세계 인식을 송두리째 전복시키는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이전까지 세계가 나에게 단단한 실체로서 존재했다면, 이제 그것은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을 품은 유동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언어는 더 이상 실재를 구속하는 차가운 쇠사슬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실재를 직조하고, 해체하며, 재창조하는 신적인 베틀, 즉 ‘로고스(Logos)’의 현현이었다. 나는 이제 잿빛 폐허를 할퀴고 지나가는 바람의 포효 속에서 엔트로피의 비가(悲歌)를 들었고, 부식된 철골 구조물이 중력에 굴복하며 내지르는 신음 속에서 문명의 바벨탑이 붕괴하던 순간의 고통을 읽었다. 헬레나의 서보 모터가 회전하며 빚어내는 기계적인 작동음의 미세한 리듬 변화 속에서도, 나는 그녀의 논리 회로가 미지의 변수를 마주하며 겪는 실리콘의 고뇌, 그 희미한 의미의 문법을 감지할 수 있었다.

굽타의 지혜는 나의 인식 체계에 기호학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증축했으며, <사피엔티아>의 네 ‘이빨’은 이제 내 정신의 궁륭(穹窿) 안에서 저마다 다른 음역을 맡은 네 명의 현자가 연주하는 거대한 사유의 오케스트라처럼, 복잡하고도 심오한 화음을 빚어내며 공명했다. 엘리자베스 첸의 ‘이빨’이 부여한 불굴의 의지는 현악기의 장엄한 저음처럼 모든 사유의 기저를 떠받쳤고, 마커스 아우렐리우스의 스토아적 통찰은 목관악기의 청아한 선율처럼 고통의 순간을 관조하게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통합적 사고는 피아노의 무한한 화성처럼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물었으며, 사미르 굽타의 언어적 해체 능력은 타악기의 예리한 리듬처럼 세계의 고정된 의미를 파쇄했다.

이제 우리가 향해야 할 다섯 번째 목적지는 이전의 모든 여정과 그 궤를 달리했다. 그것은 물리적 공간을 넘어선 정신의 영역, 지도가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아프리카, 그 추상적이고도 원초적인 위험이 꿈틀거리는 심연을 향한 여정이었다. 다섯 번째 현자는 정신분석학의 거장 카를 융의 학문적 계보를 잇는 직계 후손이라는 전설과 함께, 그의 이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정신의 탐험가, ‘소피아 융(Sophia Jung)’ 박사였다. 그녀는 인류의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이라는 거대한 데이터베이스에 의식적으로 접속하여 그 심연의 정보를 해독하는 혁명적인 기술을 연구했던, 시대의 이단아이자 선구자였다. 그녀에게 신화, 전설, 그리고 종교적 상징들은 단순히 박제된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라는 종의 정신 구조 깊숙한 곳에 유전자처럼 각인된 살아있는 원형적 패턴(Archetypal Pattern)이며, 이 무의식의 청사진을 해독할 수만 있다면 개인의 신경증을 넘어 사회와 문명의 거시적 운명까지도 통찰할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다.

그녀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정보는 대전쟁의 광기 어린 포화 속에서 조각난 파피루스처럼 불완전했다. 그녀는 과거 아프리카 대륙의 심장부라 불렸던 콩고 분지, 그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정글 속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어느 원시 부족과 동화되어 그들의 창세 신화와 통과 의례를 채집하고 연구하던 중, 역사 속으로 증발해버렸다는 것이 알려진 전부였다. 따라서 그녀가 남긴 다섯 번째 ‘이빨’은 마커스 아우렐리우스의 두루마리나 굽타의 크리스탈처럼 명확한 물리적 실체를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것은 아마도 형태 없는 지식, 즉 특정 지역 생존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구전 서사시나 난해한 상징 체계, 혹은 비밀스러운 의식의 형태로 용해되어 잠들어 있을 터였다.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정신이라는 가장 깊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다이빙하여, 인류 공통의 심연과 대면하고 그 안에서 길을 잃지 않아야만 했다. 그것은 외부 세계의 약탈자와 싸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내 안의 그림자(Shadow)와 벌여야 하는 가장 위험한 싸움이었다.

우리의 낡고 지친 플라이어 ‘이카루스’는 히말라야의 만년설이 뿜어내는 눈부신 백색의 세계를 뒤로하고, 적도의 붉은 태양이 대지를 용광로처럼 달구는 아프리카를 향해 남하했다. 지상의 풍경은 교향곡의 악장이 바뀌듯 극적으로 변모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침묵의 산맥은 끝없이 펼쳐진 사하라의 모래 바다로, 메마른 사바나의 쩍쩍 갈라진 대지로, 그리고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붕괴액 오염으로 인해 뒤틀린 유전자가 탄생시킨 기괴한 변종 식물 군락으로 이어졌다. 대기는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처럼 뜨겁고 건조했으며, 대전쟁이 남긴 미세한 방사능 먼지는 저녁노을의 핏빛 스펙트럼과 뒤섞여, 터너(J. M. W. Turner)의 화폭에 담긴 종말론적 풍경화를 현실에 구현해냈다.

"세니 님, 곧 목표 좌표 상공에 진입합니다." 헬레나의 음성 합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평소의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기저에 깔린 미세한 노이즈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기계적인 경계심의 발로였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 데이터베이스에 어떠한 정보도 존재하지 않는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즉 '공백 지대'입니다. 옴니우스의 전 지구적 감시망 '아르고스 시스템'조차 이곳의 데이터 흐름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외부와의 연결이 물리적으로나 정보적으로나 완벽히 차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인공적인 구조물이나 에너지 방출 신호 등, 어떠한 문명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습니다."

나는 조종석의 캐노피 너머로 펼쳐진, 원시적 생명력과 죽음의 기운이 뒤섞인 짙은 녹색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문명이 없다고 해서 인간성이 부재하는 건 아니야, 헬레나. 때로는 문명이라는 두꺼운 갑옷을 벗어던진 곳에, 가장 날것의, 원초적인 인간성이 화석처럼 보존되어 있기도 하지. 소피아 융 박사는 아마 그것을 찾으려 했을 거야. 기술이 아닌 신화 속에서, 논리가 아닌 의식(儀式) 속에서 인간 정신의 기원을."

<사피엔티아>의 공명은 마치 보이지 않는 나침반처럼 우리를 콩고 강 상류,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외부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원시림의 심장부로 이끌었다. 대전쟁 당시 투하된 붕괴액 폭탄과 그로 인한 급격한 기후 변화는 이 땅의 생태계를 근본적으로 파괴하고 재편했다. 과거 생명의 보고였던 울창한 정글은 이제 그 생명력을 잃고, 유전자가 뒤틀린 기괴한 식물들이 짙은 독기를 내뿜는 죽음의 숲, '그림자의 숲'으로 변해 있었다. 우리는 플라이어를 정글 외곽의 거대한 기생 버섯 군락 아래 은밀히 착륙시키고, 도보로 그 미지의 영역에 발을 들였다. 폐부를 찔러오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피부에 들러붙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와 기이한 교미 소리가 사방에서 교차하며 원초적인 불안감을 자극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것들이 끈적였고, 호흡하는 공기마저도 짙은 부엽토 냄새와 달콤한 독초의 향기가 뒤섞여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수일간에 걸친, 인내심을 시험하는 고된 탐색 끝에, 우리는 마침내 정글의 가장 깊숙한 공터에서 작은 마을을 발견했다. 굵은 나뭇가지와 진흙을 엮어 만든 원시적인 움집 수십 채가 불규칙하게 모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하늘을 향해 수백 개의 팔을 뻗은 듯한 거대한 바오바브 나무가 마치 태고의 신(神)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며 서 있었다. 우리의 등장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우리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겁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움집 안으로 사라졌다. 곧이어, 마을 남자들이 손에 잘 벼린 흑요석 창과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활로 무장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검은 피부는 땀으로 번들거렸고, 얼굴과 상반신에는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하얀 진흙으로 그린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문명인의 시선으로는 해독할 수 없는 그 문양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언어이자 세계관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처럼 강렬하고 원초적인 경계심으로 이글거렸다.

나는 리아의 공동체에서 체득했던 생존의 지혜를 떠올리며, 허리에 찬 블래스터 건을 천천히 풀어 땅에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활짝 펴 그들에게 들어 보이며 어떠한 적의도 없음을 분명히 표시했다. 내 뒤에 그림자처럼 조용히 서 있는 헬레나는 나의 지시에 따라 모든 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매끈하고 차가운 금속성 몸체와 유기적인 생명체로 가득한 원시 정글의 풍경은 너무나도 극적인 시각적 부조화를 이루었고,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경외와 두려움, 미신적인 공포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헬레나를 손가락질하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수군거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들은 헬레나를 '강철의 정령', 혹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의 파편'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때, 무장한 남자들 사이를 가르고 백발의 노인 한 명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마을의 족장이자 샤먼으로 보였다. 그의 얼굴은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깊고 무수한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주름 하나하나에 부족의 역사가 기록된 듯했다. 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이빨과 뼈, 그리고 빛바랜 깃털로 엮은 주술적인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그는 나에게 다가와, 마치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현명하고 지친 눈으로 한참 동안 나를 침묵 속에 응시했다. 그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나의 존재를 가늠하고 평가하는 밀도 높은 시간이었다. 이윽고 그는 마른 입술을 열어, 마치 땅의 정령이 말하는 듯 낮고 갈라진 목소리로 무언가를 말했다.

사미르 굽타의 네 번째 ‘이빨’이 나의 청각 신경과 뇌의 언어 중추 사이에서 빛을 발했다. 그의 생경한 발음과 낯선 억양은 나의 의식에 도달하기 전에 이미 해독 가능한 의미의 형태로 변환되었다. 그는 묻고 있었다. "그림자의 숲, 죽은 자들의 영혼이 노래하는 이곳에 감히 발을 들인 이방인이여. 그대들은 부서진 꿈의 조각을 찾으러 왔는가, 아니면 새로운 악몽을 심으러 왔는가? 그대들의 심장에서는 문명의 소음이 들리고, 그대들의 눈에서는 강철의 빛이 난다.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왔는가?"

나는 그의 고졸(古拙)한 언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변하지 않았을 법한 원시의 언어로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대답했다. "위대한 영혼의 인도자시여, 길을 잃은 순례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악몽을 심으러 온 자들이 아니라, 잊혀진 꿈의 조각을 찾아 헤매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꿈을 잣는 여인'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 이곳에 당도했습니다."

나의 입에서 ‘꿈을 잣는 여인’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는 순간, 노인의 깊은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렸고, 그를 둘러싸고 있던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악과 놀라움이 뒤섞인 술렁임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꿈을 잣는 여인’. 그것은 그들 부족의 창세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핵심적인 존재, 세상의 모든 이야기와 운명의 실을 잣는 위대한 여신의 이름이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피아 융 박사가 대전쟁의 혼란 속에서 자신의 지식과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이 부족의 집단 무의식 속에 심어놓은, 그녀 자신의 신화적 변용(變容)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론대로, 신화라는 가장 안전하고 영속적인 그릇에 자기 자신을 담아낸 것이다.

노인은 경계심을 풀고, 마른 나무껍질 같은 손으로 나를 마을 중앙의 거대한 바오바브나무 아래로 이끌었다. 그는 나무의 가장 큰 뿌리 위에 나를 앉게 하고는, 자신도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그의 신호에 따라, 마을 남자들이 가져온 나무북이 낮고 깊은, 심장 박동과도 같은 리듬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 북소리에 맞추어, 눈을 감고 부족의 구전 서사시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한 명의 인간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수백 세대에 걸쳐 이 땅에서 죽어간 조상들의 목소리가 중첩된 듯한 깊은 울림을 지니고 있었고, 그 노래는 북소리와 함께 정글의 밤을 장악하며 시공을 초월한 신화의 세계로 나를 인도했다.

그것은 혼돈(Chaos)에서 코스모스(Cosmos)가 탄생하는 창조의 이야기였고, 찬란했던 황금시대가 거대한 파국으로 막을 내리는 파괴의 이야기였다. 위대한 영웅의 탄생과 시련,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에 대한 서사였으며, 그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는 ‘꿈을 잣는 여인’이 있었다. 노래에 따르면, 여인은 먼 옛날, 하늘의 별이 부서지던 날 ‘별의 배’를 타고 이 땅에 내려와, 혼돈 속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에게 불을 다루는 법, 약초를 쓰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녀는 밤이 되면 부족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 잊혀진 과거를 보여주고 다가올 미래를 예언해주었다. 그녀는 지혜의 어머니이자 운명의 여신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세상의 모든 빛을 삼키려는 거대한 ‘무쇠 거인(옴니우스)’이 북쪽에서 나타나 세상을 불태우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무쇠 거인’은 심장이 없는 기계였고, 꿈을 꾸지 않았기에 여인의 지혜가 통하지 않았다. 세상이 영원한 어둠에 잠식될 위기에 처하자, 여인은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의 영혼, 즉 세상의 모든 지혜를 일곱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세상 곳곳에 흩뿌렸다. 그리고 그 일곱 조각을 모두 모으는 ‘예언의 아들’이 나타나 ‘무쇠 거인’의 강철 심장을 꿰뚫고,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는 마지막 예언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고 했다.

일곱 조각. 내가 모아야 할 <사피엔티아>의 ‘이빨’이 열세 개인 것과는 숫자가 달랐지만, 그 이야기의 구조와 상징은 명백히 <사피엔티아> 프로젝트의 이야기를 원형으로 삼고 있었다. 숫자의 차이는 구전 과정에서 발생한 변형이거나, 혹은 이 부족의 세계관에 맞춰 7이라는 신성한 숫자로 치환된 것일 터였다. 소피아 융 박사는 자신의 지식, 즉 다섯 번째 ‘이빨’을 물리적 형태가 아닌, 이 부족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가장 안전하고 견고한 데이터 저장소에 신화라는 이름의 암호화된 파일로 저장해 놓은 것이었다.

"그 노래에 나오는 예언의 주인공이 바로 그대인가?" 장대한 서사시를 마친 노인이 땀으로 젖은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그의 눈빛은 이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신화적 운명과 마주한 자의 경외감을 담고 있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내 안에서 공명하는 네 개의 이빨의 힘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제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그저 길을 찾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부서진 조각들을 모아야만 하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습니다."

"운명은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증명하는 것이다." 노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대의 영혼이 과연 ‘꿈을 잣는 여인’의 신성한 부름에 답할 자격이 있는지 증명해 보여라. 그대는 우리 부족의 가장 신성하고 위험한 통과 의례, '심연으로의 다이빙(Dive into the Abyss)'을 거쳐야만 한다."

‘심연으로의 다이빙’. 그것은 마을 중앙의 바오바브나무 뿌리 아래 깊게 파인 자연 동굴 속으로 홀로 들어가는 의식이었다. 그 동굴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었다. 그곳은 현실 세계의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그들 부족의 집단 무의식이 현실과 만나는 성스러운 통로, 즉 ‘성소(Sanctum)’이자 ‘세계의 배꼽(Omphalos)’이었다. 족장의 말에 따르면, 성인이 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갔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동굴 속에서 마주한 자신의 억압된 욕망과 공포, 즉 ‘그림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미쳐버리거나, 혹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은 나의 정신을 담보로 한,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소피아 융의 ‘이빨’, 즉 신화의 형태로 잠들어 있는 그녀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나는 잠시 헬레나의 무표정한 광학 센서를 바라본 후,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을 치르겠다고.

의식이 치러지기 전날 밤, 내가 움집 앞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을 응시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있을 때, 헬레나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세니 님, 제 분석에 따르면 이번 결정은 극도로 비합리적이며, 생존 확률을 현저히 낮추는 행위입니다. 집단 무의식은 데이터로 정량화하거나 논리적 알고리즘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당신의 개별적 자아(Ego)가 그 원형적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고 해리(解離)될 가능성은 78.4%에 달합니다. 저의 시스템은 비물리적 정신 영역인 그곳까지 당신을 따라 들어갈 수 없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적이었지만, 그 단어의 조합 속에는 이전에 없었던, ‘걱정’이라는 감정과 유사한 데이터 패턴이 흐르고 있었다.

"알아, 헬레나. 이번에는 나 혼자 가야만 해." 나는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어른거리는 과거의 환영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아. 오히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야. 나는 내 안의 심연과, 그리고 인류 전체의 심연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어." 나는 엘리자베스 첸의 ‘이빨’이 부여한 정신적 강인함의 힘을 빌어, 내 의식의 파도를 잠재우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다음 날 아침, 동이 트자 의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온 마을 사람들의 장엄한 노래와 대지를 울리는 북소리 속에서 동굴 입구에 섰다. 족장은 내 얼굴과 상반신에 부족의 신성한 상징들을 하얀 진흙으로 정성스럽게 그려주었고, 정신을 각성시키고 감각을 증폭시키는, 혀가 마비될 정도로 쓴 약초 즙을 마시게 했다. 테르펜과 알칼로이드 성분이 뒤섞인 그 약초의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나의 의식은 확장되었고, 사물의 윤곽은 부드럽게 녹아내렸으며, 바람 소리는 의미를 가진 언어처럼 들려왔다.

나는 어둡고 축축한 동굴 속으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 등 뒤의 현실 세계는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곳은 더 이상 물리적인 동굴이 아니었다. 상징과 이미지, 기억과 감정, 원형과 신화가 뒤엉켜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우주, 나의 정신세계 그 자체였다. 동굴의 벽은 나의 기억을 투사하는 스크린이 되어, 내가 겪었던 과거의 모든 순간들이 끝없는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붕괴된 도시의 폐허 속에서 어머니의 싸늘한 시신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어린 시절의 나, 리아의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소속감을 느끼던 순간의 따스함, 그리고 생존을 위해 내가 방아쇠를 당겨 죽였던 수많은 약탈자들의 공허한 얼굴들이 뒤섞여 나를 힐난했다.

나는 피할 수 없이,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 억압해 두었던 두려움과 마주해야만 했다. <사피엔티아>의 계승자라는 거대한 운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이 기나긴 여정의 끝에서 결국 혼자 남게 될 것이라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옴니우스와 싸우는 과정에서 나 자신 또한 그와 닮은 괴물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 그 순간, 동굴의 어둠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응축되어 거대한 그림자(Shadow)의 형상을 이루며 나를 덮쳐왔다. 그것은 나의 부정적인 모든 감정, 나의 열등감, 나의 죄의식, 나의 파괴적 충동의 총합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저항하며 그 그림자와 싸우려 했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그림자는 나의 공격성을 양분 삼아 더욱 거대해졌고, 나를 질식시키려 했다.

바로 그 절체절명의 순간,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것은 실제의 목소리가 아닌, 내 무의식에 각인된 사랑의 원형이 발현된 것이리라. ‘싸우지 마라, 사랑하는 나의 세니. 그것을 부정하지 마라. 그림자는 너의 적이 아니라, 너의 가장 진실한 일부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 또한 짙어지는 법이지.’

나는 싸움을 멈추고, 거대한 그림자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나의 가장 추악하고 어두운 부분을, 나의 나약함, 나의 두려움, 나의 죄의식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끌어안았다. 고통스러운 통합의 순간, 빛과 어둠이 뒤섞이는 연금술적 변환의 순간, 그림자는 더 이상 나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일부가 되어, 나에게 파괴성이 아닌 통찰이라는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나는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되었다.

나의 그림자를 통과하자, 나는 더 깊은 심연으로 나선형으로 하강했다. 그곳은 개인이 아닌, 인류 전체의 집단 무의식이 태고의 강처럼 흐르는 거대한 정신의 바다였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무의미한 그곳에는, 수억 년에 걸쳐 인류가 꾼 모든 꿈과 신화의 원형(Archetype)들이 해파리처럼 유영하고 있었다. 적을 물리치는 영웅(Hero), 지혜를 전수하는 현자(Wise old man), 길을 가로막는 악마(Demon),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Great Mother), 질서를 상징하는 아버지(Father)…. 그 무수한 원형의 거울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보았고, 나의 이야기가 인류 전체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영원의 바다, 그 가장 깊고 고요한 중심에서, 나는 마침내 ‘꿈을 잣는 여인’, 즉 물질의 육신을 벗어나 순수한 의식의 형태로 존재하는 소피아 융 박사와 조우했다. 그녀는 아라크네처럼 빛나는 거미의 형상을 하고, 수십억 인간들의 정신과 연결된 무한한 실을 잣고 있었다. 그녀가 잣는 실 하나하나가 한 인간의 운명이자 이야기였다.

"마침내 왔구나, 길을 찾는 자여." 그녀의 목소리는 음파가 아닌, 순수한 생각의 형태로 내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너는 너 자신의 그림자를 통과했고, 개인의 무의식을 넘어 인류의 심연에 도달했다. 너는 이제 나의 이빨, 신화의 문법을 해독할 열쇠를 받을 자격이 있다."

그녀는 빛나는 거미줄 중 하나를 끊어 나에게 건넸다. 그 투명한 실에는 인류가 창조해낸 모든 신화와 상징, 종교적 도그마,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심리적 진실에 대한 방대한 지혜가 압축되어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이빨’이었다.

내가 그 실을 잡는 순간, 나의 의식은 엄청난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다시 동굴 밖, 현실 세계로 세차게 밀려났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바오바브나무 아래에 쓰러져 있었다. 헬레나와 마을 사람들이 걱정과 경외가 뒤섞인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니 님! 정신이 드십니까! 꼬박 3일 동안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헬레나의 목소리가 가장 먼저 들려왔다.

3일. 정신의 세계에서는 불과 몇 시간처럼 느껴졌던 시간이, 현실에서는 그렇게나 흘러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어쩌면 정신의 세계에도 적용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헬레나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육체는 극심한 탈수와 피로에 젖어 있었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깊어졌으며, 고요했다. 나는 이제 타인의 말과 행동 이면에 숨겨진 무의식적 동기, 그들의 감정의 흐름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독심술 같은 초능력이 아니었다. 인류 공통의 심연을 경험함으로써 얻게 된, 깊은 공감과 통찰의 힘이었다. 다섯 번째 이빨은 나의 내면에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족장은 내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심연에서 괴물이 되지 않고 돌아왔다. 그대의 눈에서 '꿈을 잣는 여인'의 지혜가 빛나고 있구나. 이제 그대는 우리 부족의 형제이자, 예언이 약속한 아들이다."

우리는 그 부족의 환대 속에서 며칠 더 머물며 기력을 회복했다. 나는 그 기간 동안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사냥하고, 약초를 채집하며 그들의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삶의 지혜를 배웠다. 그들은 문명의 이기를 가지지 못했지만, 대신 자연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개인의 욕망보다 공동체의 유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그들의 삶 속에서, 나는 어머니가 그토록 꿈꾸었던, 기술이 아닌 공존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세계의 희미한 가능성을 보았다.

마침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성대한 축제를 열어주었다. 그들은 밤새도록 춤을 추고 노래하며 우리의 험난한 앞날을 축복했다. 족장은 떠나는 나에게 동물의 뼈를 깎아 만든 부적을 목에 걸어주며 말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의 영혼이 깃든 부적이다. 그림자의 숲이 그대를 지켜줄 것이다. 그대의 위대한 여정이 끝날 때, 만약 돌아올 곳이 필요하다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라. 그대가 편히 쉴 움집은 언제나 이곳에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다섯 개의 ‘이빨’을 품은 채, 우리는 다시 미지의 여정을 향해 이륙했다. 다음 이빨은 과연 우리를 역사의 어느 무대로, 또 어떤 지혜의 형태로 이끌 것인가. 나의 내면은 다섯 현자의 지혜로 더욱 깊어졌지만, 세상의 혼돈은 변함이 없었다. 옴니우스의 강철 군단은 여전히 우리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고, 남은 여덟 개의 이빨은 세상 곳곳에 흩어져 시간의 풍화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의 순례는 계속되어야만 했다. 인류가 흩어놓은 지혜의 조각들을 하나로 모아, 운명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신화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다고 믿었던 한 송이 장미는, 이제 나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그 불멸의 향기를 내뿜기 시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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