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연금술

by 남킹


1922년 6월 중순, 파리 오스망 대로 102번지

(이전 편지와 같은 크림색 종이에, 같은 보랏빛 잉크로 쓰여 있다. 그러나 이번 편지의 글씨체는 이전보다 더 미세한 떨림을 담고 있으며, 어떤 단어들은 마치 힘겹게 종이 위로 기어 올라온 듯 위태로워 보인다. 문장들은 여전히 길고 복잡하지만, 그 흐름 속에는 이전의 차분한 분석 대신, 어떤 절박하고도 열정적인 자기변호의 기운이 감돈다.)

친애하는 조이스 씨에게,

당신의 답신은, 당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고요한 방의 문틈으로 스며들어온 것이 아니라, 코르크로 된 방벽을 깨부수고 들어온 차가운 돌덩이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그 돌덩이에 맞아 잠시 숨을 멈추었고, 그 표면에 새겨진 날카롭고 정직한 문장들을 읽는 동안, 제 방의 익숙한 어둠이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깊이와 무게를 지니게 되었음을 느꼈습니다. 당신은 정직함을 요구하셨고, 그 요구에 응답하듯 당신의 편지는 그 어떤 문학적 장식도 없이, 마치 해부용 메스처럼 차갑고 정밀하게 저의 세계를 갈라놓았습니다.

저는 상처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욕감에서 오는 상처가 아니라, 너무나 정확한 진단 앞에서 환자가 느끼는 그런 종류의,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계시적인 상처였습니다. 당신은 저의 방식을 ‘수동적’이라, ‘사치스럽다’고 하셨습니다. 당신의 예술이 도시의 소음을 양조하는 ‘양조장’의 작업이라면, 저의 예술은 그저 과거의 침전물이 자연스럽게 발효되기를 기다리는, 게으른 ‘포도주 저장고’의 시간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였겠지요. 당신의 ‘구토’라는 폭력적인 단어 앞에서, 저의 섬세한 ‘소화’의 과정은 병약한 자의 자기기만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조이스 씨, 당신은 틀렸습니다. 제 작업은 결코 수동적이거나 사치스러운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작업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격렬하고 필사적인 투쟁입니다. 당신의 비유를 이어받자면, 저는 포도주 양조업자가 아닙니다. 저는 연금술사(alchemist)입니다.

양조업자는 이미 존재하는 재료들—포도, 효모, 시간—을 섞어 그것들이 지닌 잠재력을 끌어낼 뿐입니다. 그 결과물은 훌륭할 수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원래 재료의 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금술사는 다릅니다. 그의 목표는 변형이 아니라 ‘변성(transmutation)’입니다. 그는 납과 같은 비천한 금속을 가져다가, 비밀스러운 불과 신비로운 용매를 사용하여 그것을 금과 같은 영원하고 순수한 물질로 바꾸려 합니다. 그의 작업실은 당신의 시끄러운 도시 양조장보다 훨씬 더 고요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는 우주의 근원적인 법칙을 거스르려는, 가장 대담하고 위험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경험’은 바로 그 비천한 납덩이와 같습니다. 젊은 시절 게르망트 살롱에서 겪었던 일들, 콩브레의 시골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 알베르틴의 변덕스러운 사랑 앞에서 느꼈던 질투와 고통. 이 모든 경험들은 그것이 일어나는 순간에는 그저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고, 무의미한 사건들의 나열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수많은 우연과, 오해와, 사회적 허례허식과, 저의 병적인 신경과 뒤섞여 있는 불순한 광물 덩어리일 뿐입니다. 만약 제가 당신처럼 그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날것 그대로 ‘게워낸다면’, 그것은 그저 한 신경과민 환자의 추잡한 고백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의 작업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그 경험의 납덩이를 가지고 제 기억이라는 이름의 연금술 작업실, 즉 이 코르크 방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매인 ‘시간’의 불을 지핍니다. 당신에게 시간은 짐이자 채권자일지 모르나, 저에게 시간은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한 정제의 도구입니다. 시간이라는 불길 속에서, 경험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불순물들이 타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건이 일어났던 구체적인 날짜, 그 대화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이름, 저를 그 행동으로 이끌었던 사소한 동기들, 그 사건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 이 모든 ‘사실’들이라는 껍데기가 시간의 열기 속에서 하나둘씩 녹아내리고 증발해버립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망각은 편안한 잠이 아니라, 자신의 일부가 서서히 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습니다. 수십 년이 흐르고 나면, 원래의 그 거대하고 무겁던 경험의 납덩이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제가 전혀 예상치 못한 어떤 감각적 자극—바로 그 마들렌 과자의 맛,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서 발을 헛디뎠던 두 개의 비뚤어진 포석의 감촉, 세탁물에서 나는 뻣뻣한 풀 냄새—이 마치 연금술의 마지막 촉매처럼 작용합니다. 그 순간, 시간의 불길 속에서 모든 것을 잃고 재가 된 줄 알았던 그 경험의 폐허 속에서, 단 하나의 순수한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경험의 ‘본질(essence)’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특정 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시간 밖의 존재, 즉 순수한 감각이자, 영원한 진실입니다. 마들렌 과자를 맛보는 순간 제게 돌아온 것은 단순히 콩브레의 어느 일요일 아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실된 모든 것들이 기적적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절대적인 확신에서 오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 그 자체입니다. 비뚤어진 포석 위에서 휘청하는 순간 제게 돌아온 것은 베네치아에서의 휴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장벽이 무너지며 죽음을 초월하는 영원한 순간을 체험하는 황홀경’입니다.

이것이 저의 연금술입니다, 조이스 씨. 저는 경험을 소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망각을 통해 경험을 정제하고, 감각을 통해 그 본질을 부활시켜, 그것을 시간으로부터 구원해 예술이라는 영원한 금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수동적인 작업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망각이라는 거대한 용과 평생에 걸쳐 싸우는, 가장 능동적이고 처절한 싸움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에피파니’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일상 속에서 사물의 영적인 본질, 즉 ‘무엇임(quidditas)’이 섬광처럼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매우 강력하고 지적인 개념입니다. 당신의 예수회적 지성이 벼려낸 날카로운 칼날이 사물의 껍데기를 가르고 그 핵심을 꿰뚫는 것과 같겠지요.

저의 ‘무의식적 기억’의 순간 역시 일종의 에피파니입니다. 하지만 그 계시는 당신처럼 지성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지성이 잠든 사이에, 지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육체를 통해 직접 영혼에 도달합니다. 지성은 언제나 우리를 속입니다. 지성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게 만들고, 경험을 기존의 관념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춥니다. 그러나 육체의 기억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혀가 기억하는 맛, 피부가 기억하는 감촉, 발바닥이 기억하는 불균등함. 이것들은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이고 확실한 진실입니다.

당신이 더블린의 거리에서 ‘горох’라는 단어를 듣고 도시의 마비 상태를 깨달았을 때, 그것은 당신의 뛰어난 지성이 무의미한 소리에서 의미의 패턴을 ‘읽어낸’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마들렌을 맛보았을 때, 저는 아무것도 읽어내지 않았습니다. 저의 지성은 완전히 무력했습니다. 그 기쁨의 정체를 알기 위해 저는 몇 번이고 다시 그 맛을 탐색해야 했습니다. 그 계시는 저의 외부에서, 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를 압도하며 찾아왔습니다. 당신의 에피파니가 지성의 ‘정복’이라면, 저의 에피파니는 영혼의 ‘항복’입니다.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인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언어의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당신은 저의 문장을 ‘대성당’에, 당신의 언어를 ‘바벨탑’에 비유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언어의 혼란 그 자체를 재현함으로써 인간 의식의 진실에 도달하려 합니다. 당신은 언어의 감옥을 부수기 위해 더 많은 언어를 끌어들입니다.

저는 다른 방식을 택합니다. 저는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는 대신, 그 감옥의 구조 자체를 제 의식의 구조와 완벽하게 일치시키려 합니다. 저의 그 길고, 끝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은 단순히 기억의 건축물을 짓기 위한 돌멩이가 아닙니다. 그 문장들 자체가 바로 저의 연금술 과정의 기록이며, 제 의식이 진실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가는 경로의 지도입니다.

하나의 감각이 떠오를 때, 제 의식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많은 곁가지로 뻗어 나갑니다. ‘이 감각은 그때의 그 감각과 비슷한가? 아니, 조금 다른가? 그때 나는 왜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그것은 게르망트 부인의 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그날의 날씨 때문이었을까?’ 저의 문장은 바로 이 의식의 미로를 그대로 따라갑니다. 수많은 종속절과 삽입구, 괄호들은 제 의식의 망설임과, 자기 수정과, 연상의 흐름을 담아내기 위한 필사적인 장치입니다. 문장이 길어지는 것은 제가 수다스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이 그만큼 복잡하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마들렌의 경험을 당신의 방식으로 쓴다면, 아마 이렇게 썼을 겁니다. “차. 과자. 쿵! 콩브레. 레오니 숙모. 일요일 아침. 종소리. 기쁨.” 이것은 강력하고 즉각적입니다. 마치 사진기의 섬광처럼 순간을 포착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쓸 수 없습니다. 저에게 그 경험의 진실은 ‘쿵!’하는 섬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섬광 이후에, 그 정체불명의 기쁨의 근원을 찾아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길고 고통스러운 과정 전체에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문장은 그 탐색 과정 전체를 독자가 저와 함께 체험하도록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입니다. 독자는 제 문장 속에서 저와 함께 길을 잃고, 함께 망설이고, 마침내 문장의 마지막 단어에 이르렀을 때, 저와 함께 그 연금술적 변성의 순간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신의 언어가 의식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폭발이라면, 저의 언어는 의식의 심층부에서 일어나는 느리고 거대한 지각 변동입니다.

당신은 정직함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가장 정직한 고백을 해야겠습니다. 당신의 편지를 읽고, 저는 질투를 느꼈습니다. 당신의 그 거친 힘, 세상을 있는 그대로 움켜쥐고 그것을 언어의 용광로에 던져 넣어버리는 그 무자비한 활력에. 당신은 거리로 나가 당신의 도시와 싸웁니다. 그러나 저는 이 침대 위에서, 저의 희미해져 가는 기억들과, 저를 서서히 잠식해 들어오는 죽음과 싸웁니다. 당신의 예술은 생명의 과잉에서 비롯되고, 저의 예술은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피어납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깨닫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종류의 전사일 뿐,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시간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폭군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당신은 현재라는 순간 속에 영원을 각인함으로써, 저는 과거의 한 순간을 현재 속에 영원히 부활시킴으로써.

당신은 저의 등대가 고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밖에서 보기에는 그렇겠지요. 하지만 그 등대 안에서는, 연금술의 불길이 모든 것을 태우고 있으며, 저는 그 불길 속에서 비천한 납을 금으로 바꾸기 위해 제 생명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태우고 있습니다.

이 대화를 계속합시다, 조이스 씨. 당신의 돌덩이가 저의 고요한 연못에 더 많은 파문을 일으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 파문 속에서, 저는 아마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시간의 용광로 속에서, 당신의 동료 연금술사,

마르셀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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