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양조장의 연금술

by 남킹


1922년 6월 초, 파리, 스퀘어 로비네 5번지

(이 편지는 두껍고 값싼, 누런빛이 도는 종이에 쓰여 있다. 잉크는 진하고 검으며, 때때로 뭉치거나 번진 자국이 보인다. 글씨체는 작고 촘촘하지만, 강한 필압으로 인해 종이 뒷면에 자국이 남을 정도다. 단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밀치고 있으며, 문장들은 짧게 끊어지다가도 예고 없이 길고 복잡한 목록으로 폭발한다. 페이지의 여백에는 나중에 덧붙인 듯한 단어나 기호들이 화살표와 함께 어지럽게 그려져 있다.)

친애하는 프루스트 씨에게,

당신의 편지는 마치 안개처럼, 제 소란스러운 아파트의 문틈으로 스며들어왔습니다. 제 아내 노라가 우편배달부에게서 받아 들고는, 그 섬세한 종이의 질감과 희미한 향(압생트인가, 아니면 그저 오래된 책의 먼지 냄새인가?)에 눈살을 찌푸리더군요. 그녀는 이런 종류의 우아함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세상은 훨씬 더 간단한 물질, 즉 빵과 맥주, 그리고 지불해야 할 청구서들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어쩌면 그녀가 우리 둘보다 더 현명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글을 읽는 데는 꼬박 하루가 걸렸습니다. 저의 이 반역적인 눈이 한 번에 몇 문단 이상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문장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제가 평생을 항해해온 바다와는 다른 종류의, 고요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와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문장은 시작도 끝도 없는 강물처럼 흘러, 독자를 과거라는 이름의 광대한 삼각주로 이끌더군요. 제 글이 독자의 멱살을 잡고 더블린의 뒷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폭력배와 같다면, 당신의 글은 독자를 비단 의자에 앉히고는 속삭임만으로 그의 모든 기억을 해체해버리는 정신분석가와 같습니다.

그 시끄러운 호텔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그 ‘실패한 희극’에 대한 당신의 분석은 지독하게 정확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고장 난 신체 부위를 전시했지요. 마치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늙은 군인들이 서로의 흉터를 보여주며 무용담 대신 신음소리를 교환하듯이. 당신은 그것을 우리의 예술적 조건에 대한 가장 정직한 고백이라 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 점에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당신과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당신은 저의 '눈'을 외부 세계를 빨아들이는 '검은 태양'에, 당신의 '위장'을 경험을 천천히 소화하는 '어두운 방'에 비유하셨습니다. 아름답고도 정교한 은유입니다. 하지만 제게 그 은유는 지나치게 수동적으로 들립니다. 저의 눈은 세상을 그저 흡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탈하고, 목록을 만들고, 해부합니다. 그것은 예수회 학교에서 단련된, 아퀴나스의 논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론으로 무장한 눈입니다. 제 눈이 보는 것은 순간의 '인상'이 아니라, 사물 속에 숨겨진 그것의 고유한 '무엇임'(quidditas, a term borrowed from the Schoolmen)입니다. 거리의 취객이 비틀거리는 모습에서 저는 단순히 비틀거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아일랜드 역사 전체의 마비 상태를,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영적 불구 상태를 봅니다. 그것은 순간의 포획이 아니라, 순간 속에 각인된 영원의 흔적을 읽어내는 작업입니다.

당신은 저의 고통받는 시력이 왜곡된 이미지를 '재구성'하도록 강요할 것이라 추측하셨지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 재구성은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을 위한 것입니다. 저의 눈은 건강한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빛이 부족할 때, 다른 감각들이 날카로워지듯, 제 눈은 시력을 잃어가는 대신 언어에 대한 감각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제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더 의존합니다. 더블린 거리의 소음, 술집의 노랫가락, 시장의 외침,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라틴어 기도문, 이 모든 것이 제 머릿속에서 하나의 거대한 교향곡, 아니 불협화음의 오페라를 이룹니다. 저의 『율리시스』는 눈으로 쓴 책이 아니라, 귀로 쓴 책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그 '위장'. 경험을 수십 년에 걸쳐 소화하고 발효시킨다는 당신의 방식은 제게는 너무나 사치스럽게 들립니다. 저는 망명자입니다, 프루스트 씨. 저에게 과거는 당신처럼 되찾아야 할 잃어버린 영토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평생을 짊어지고 다니는 무거운 짐이자, 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끈질긴 채권자입니다. 저는 과거를 소화시킬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을 게워내야만 합니다. 저의 글쓰기는 소화가 아니라 구토에 가깝습니다. 더블린이라는 도시, 아일랜드라는 역사, 가톨릭이라는 종교, 이 모든 것을 제 안에서 끄집어내어 종이 위에 쏟아내는 행위입니다. 그 결과물이 아름답든 추하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제 몸 밖으로 꺼내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발굴'이라 하셨습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유령을 불러내는 고고학자. 저에게 과거는 폐허 속에 묻혀 있지 않습니다. 과거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과거가 아닙니다(As a young man from Mississippi might one day write). 더블린에서 과거는 현재와 뒤섞여 거리를 활보하고 있습니다. 넬슨 기념탑의 그림자 아래서는 1916년 부활절 봉기의 총성이 여전히 들리고, 리피 강물 속에서는 바이킹의 함대가 유령처럼 떠다니며, 모든 술집에서는 배신자 파넬의 이름이 저주와 찬사 속에서 되살아납니다. 더블린은 도시가 아니라, 모든 시대가 하나의 지층 위에 뒤엉켜 있는 거대한 고고학적 단면, 즉 팔림프세스트(palimpsest)입니다. 저는 발굴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그 모든 것을 동시에 기록하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이 들려준 화가 엘스티르의 이야기는 흥미로웠습니다. '실제' 해변이 아니라 '느꼈던' 해변을 그렸다는 그 화가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술은 게으른 리얼리즘의 복사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인상'이라는 말에도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예술적 계시의 순간은 그보다 더 날카롭고, 더 지적인 섬광입니다. 저는 그것을 '에피파니(epiphany)'라 부릅니다. 일상적인 사물이나 대화의 한가운데서, 그 대상의 영적인 본질이 갑자기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

제가 어렸을 적, 더블린의 어느 거리에서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의 조각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горох(peas, 러시아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별 의미 없는 대화였지요. 그러나 그 순간, 그 단어의 생경한 음절과, 그것을 말하던 남자의 무심한 표정과, 그들을 둘러싼 거리의 지저분한 풍경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저는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마비 상태와 그 안에서 의미를 잃고 표류하는 언어의 본질을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감각적인 '인상'을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물의 영혼이 제게 말을 거는 순간이었습니다. 엘스티르가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감각을 그렸다면, 저는 두 남자의 입에서 나온 ' горох'라는 단어가 만들어낸 의미의 균열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결국 우리의 차이는 '언어'를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언어는 기억의 대성당을 짓기 위한 정교하게 깎인 돌멩이와 같습니다. 당신의 긴 문장은 고딕 성당의 아치처럼, 서로를 떠받치며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갑니다. 그 구조는 경이롭고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언어는 그런 건축 자재가 아닙니다. 저에게 언어는 도시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잘 닦인 대로뿐만 아니라, 오물이 넘치는 하수구, 비밀스러운 밀회가 이루어지는 뒷골목, 신성한 기도와 상스러운 욕설이 뒤섞이는 선술집을 모두 포함합니다. 저는 언어를 통제하려 하지 않습니다. 저는 언어가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저는 영어라는 언어의 감옥에서 탈출하기 위해 다른 언어들을 끌어들입니다.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 심지어 제가 모르는 언어들까지. 단어들이 서로 충돌하고 교배하며 새로운 의미와 소리를 낳게 합니다. 제 목표는 아름다운 대성당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의 소란을 재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의식이란 본디 그런 혼란스러운 소음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습관'과 '지성'의 각질을 벗겨내고 세계의 맨살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당신의 말이 전적으로 옳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가는 두 명의 외과의사입니다. 당신은 섬세한 메스로 기억의 종양을 도려내고, 저는 녹슨 톱으로 의식의 두개골을 열어젖히려 합니다. 방법은 다르지만, 우리의 목표는 환자를 잠에서 깨우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지막 문장은 저를 잠시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남이 종이 위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신의 제안 말입니다. 좋습니다, 프루스트 씨.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의 그 고요한 코르크 방과 저의 이 시끄러운 망명지 사이에 다리를 놓아봅시다.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탐험하는 두 명의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을 달고 싶습니다. 우리 서로에게 완전한 정직함을 요구합시다. 문학적인 수사나 예의 바른 찬사 뒤에 숨지 맙시다. 당신의 대성당에 금이 간 곳은 어디인지, 저의 도시에서 악취가 나는 곳은 어디인지, 서로에게 솔직하게 말해줍시다.

당신의 편지는 제게 지적인 자극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슬어가던 기계에 기름을 친 것과 같았습니다. 당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위험하고도 즐거운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 눈은 여전히 끔찍하고, 세상은 여전히 뿌옇게 보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편지 덕분에, 제가 더듬거리며 나아가고 있는 이 어둠 속에서 저 멀리, 또 다른 등대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등대는 고요하고, 저의 등대는 아마 시끄러운 경고음을 내며 번쩍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둘 다 같은 바다를 비추고 있습니다. 망각이라는 이름의 바다를.

어둠 속에서, 당신의 동료 장인,

제임스 조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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