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6월 말, 파리, 스퀘어 로비네 5번지
(이전 편지와 같은 값싼 누런 종이에, 같은 검은 잉크로 쓰여 있다. 글씨체는 여전히 힘이 넘치지만, 이번에는 마치 격렬한 논쟁의 한가운데서 써내려간 듯, 단어들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며 더욱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페이지의 여백에는 이전보다 더 많은 메모와 수정 흔적, 그리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도표나 기하학적 낙서들이 가득하다. 마치 편지지 자체가 하나의 복잡한 정신적 작업 공간처럼 보인다.)
친애하는 연금술사 양반에게,
당신의 편지는 돌덩이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교하게 세공된, 내부에 복잡한 회로가 새겨진 수정 구슬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그 투명한 표면을 통해 당신의 고독한 작업실, 시간의 불꽃이 타오르는 당신의 연금술 용광로(athanor)를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망각에 맞선 당신의 처절하고도 우아한 투쟁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제가 던진 거친 돌멩이를 받아, 그것을 당신의 세계를 비추는 프리즘으로 바꾸어 제게 돌려주셨습니다.
당신은 저의 비판—‘수동적’이고 ‘사치스럽다’는—이 틀렸다고 말하며, 당신의 작업을 ‘변성(transmutation)’의 연금술에 비유하셨습니다. 경험이라는 비천한 납을 가져다가 시간의 불로 정제하여 예술이라는 영원한 금으로 바꾸는 작업. 실로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비전입니다. 그 비전 앞에서, 저의 ‘도시 양조장’이라는 투박한 비유는 초라해 보일 지경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그 수정 구슬의 표면을 닦아내고, 그 내부를 더 깊이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당신의 연금술과 저의 양조가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신을 섬기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의 신은 순수함과 영원함, 즉 ‘본질(essence)’의 신입니다. 당신은 경험의 모든 불순물을 태워버리고, 시간의 흐름을 초월하는 단 하나의 순수한 진실, 즉 ‘금’을 찾아 헤맵니다. 그것은 플라톤의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경멸하고, 동굴 밖의 순수한 이데아, 즉 태양을 갈망하는 철학자의 여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신을 믿지 않습니다, 프루스트 씨. 저는 예수회 학교에서 신의 존재와 본질에 대한 수천 페이지의 논증을 공부했지만, 결국 제가 발견한 유일한 신은 언어와 육체라는, 이 지저분하고 필멸하는 물질세계 속에 깃들어 있을 뿐입니다. 저는 연금술사가 아닙니다. 저는 연금술사를 비웃는 화학자이며, 더 정확히는, 당신이 경멸할지도 모르는 불법적인 밀주(密酒) 양조업자, 즉 poitín 제조자입니다.
연금술사는 ‘순수한 금’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수많은 재료를 버립니다. 그는 불순물을 적(敵)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저 같은 양조업자에게 불순물은 적이 아니라, 오히려 풍미의 원천입니다. 저는 경험이라는 옥수수와 감자를 가져다가, 그것을 빻고 으깨어 거대한 통에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시의 더러운 물과, 거리의 소음이라는 이름의 야생 효모와, 역사의 찌꺼기들을 함께 던져 넣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정제하지 않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발효시킵니다. 저의 목표는 순수한 알코올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목표는 그 모든 오물과 불순물들이 서로 뒤섞이고 썩어가며 만들어내는, 머리가 깨질 듯이 강렬하고,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영혼(spirit)’을 증류해내는 것입니다.
당신의 연금술이 경험을 ‘구원’하려 한다면, 저의 양조는 경험을 ‘찬미’하려 합니다. 당신은 납을 금으로 바꾸고 싶어 하지만, 저는 납의 그 묵직하고 칙칙한 납다움(plumbitas, if you will)을, 그 비천함 속에 담긴 진실을 사랑합니다.
제 책의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아침 식사를 떠올려보십시오. 그는 돼지 족발이나 비둘기 모래주머니 같은 동물의 내장을 좋아합니다. 특히 그는 양의 콩팥 구이를 좋아하는데, 그 미묘한 오줌 냄새가 나는 맛을 음미합니다. 당신의 연금술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 ‘오줌 냄새’야말로 정제 과정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이겠지요. 당신이라면 그 콩팥이라는 경험에서 ‘순수한 양고기의 맛’이라는 본질을 추출해내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그리고 블룸에게는, 그 희미한 오줌의 풍미야말로 콩팥이라는 존재의 본질적인 ‘무엇임(quidditas)’의 일부입니다. 그것은 그 콩팥이 한때 살아있는 동물의 몸속에서 피를 걸러내던 기관이었음을, 즉 생명의 가장 비천하고도 필수적인 과정을 담당했음을 증언하는 흔적입니다. 그 맛을 제거하는 것은 콩팥의 진실을 거세하는 행위입니다. 저의 예술은 바로 그 오줌 냄새를, 삶의 그 모든 비천하고 불쾌하고 지저분한 맛들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혀끝으로 맛보며 그 복잡한 풍미를 언어로 기록하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납에서 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납 속에서 가장 완벽한 납의 초상을 그려내려 합니다.
이것이 당신의 ‘영혼의 항복’으로서의 계시와, 저의 ‘지성의 정복’으로서의 에피파니 사이의 진정한 차이점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지성이 무력해지는 순간, 육체를 통해 순수한 본질이 당신을 압도하며 찾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신비주의적 경험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위험한 자기기만처럼 들립니다. 그 ‘순수한 본질’이란 것이, 실은 당신의 섬세한 신경과 교양 있는 지성이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환상은 아닐까요? 당신은 당신의 의지가 배제되었다고 믿지만, 실은 당신의 의식 전체가 그 ‘계시’를 위해 수십 년간 준비해온 것은 아닐까요?
저의 에피파니는 항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벌어지는 짧고 격렬한 스파크, 즉 ‘단락(short circuit)’입니다. 그것은 제가 사물을 정복하는 것도, 사물이 저를 압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물과 제 의식이 순간적으로 완벽하게 일치하여, 그 사물이 지닌 고유한 서명(signature)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제가 ‘горох’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저는 도시의 영혼에 항복한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의 물질성, 즉 그 소리와 형태가, 더블린이라는 도시의 언어적, 영적 마비 상태라는 추상적 진실과 완벽하게 공명하는 지점을 제 지성이 포착해낸 것입니다. 그것은 신비가 아니라, 인식의 기하학입니다. 저는 당신처럼 경험의 본질이 시간의 저편에 숨겨져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기, 지금, 우리 눈앞의 사물과 언어 속에, 그것의 가장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태 속에 현존(present)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언어는 당신의 ‘의식의 미로를 따라가는 지도’가 될 수 없습니다. 지도는 이미 존재하는 영토를 묘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 언어는 영토 그 자체입니다. 저는 지도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긴 문장이 의식의 탐색 과정을 재현한다면, 저의 언어는 의식의 내용물 그 자체—벽돌, 오물, 기도문, 광고 전단지, 잡담—를 가져다가 새로운 구조물을 짓는 행위입니다.
저는 지금 새로운 바벨탑을 짓고 있습니다, 프루스트 씨. 이 탑은 하늘에 닿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땅속으로, 의식의 가장 깊은 지층으로, 즉 잠의 영역으로 파고 들어가는 탑입니다. 그곳에서는 당신의 정교한 문법과 구두점이 모두 녹아내립니다. 단어들은 그 의미의 껍데기를 벗고, 소리의 연금술을 통해 서로 결합하고 분열하며, 역사와 신화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수수께끼, 즉 ‘말장난(pun)’이 됩니다. 당신의 연금술이 망각을 통해 본질을 찾는다면, 저의 새로운 연금술은 기억 그 자체를—인류의 모든 언어와 신화를—하나의 용광로에 쏟아부어, 잠의 언어라는 새로운 물질을 창조하려는 시도입니다. 당신의 미로에는 출구가 있지만, 저의 새로운 미로에는 입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곳은 탐색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히 길을 잃는 곳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예술이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피어난다고 고백하며, 저의 활력에 대한 질투를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그 정직함에 저 역시 정직함으로 답하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그 고요한 투쟁을 질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에게 죽음은 사색의 대상이 될 만큼 한가한 존재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 그 자체입니다.
당신은 안정된 유산과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당신의 예술을 위해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과 망명 속에서, 제 글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언어 교사 노릇을 하고, 후원자들의 변덕에 목을 매야 했습니다. 저는 제 딸 루치아의 정신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고, 제 자신의 눈이 빛을 잃어가는 공포와 매일 싸워야 합니다. 제 아내 노라는 저의 책을 한 페이지도 읽지 않지만, 그녀의 강인한 생명력과 대지에 발 딛고 선 그 확고함이야말로, 저의 현학적인 관념들이 공중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유일한 닻입니다.
이것이 저의 투쟁입니다, 프루스트 씨. 그것은 죽음이라는 고상한 적과의 결투가 아니라, 월세와, 썩은 이빨과, 자식의 울음소리와, 문법을 틀리는 학생들과 벌이는, 지저분하고 희극적인 난투극입니다. 저의 예술은 바로 이 난장판 속에서 태어납니다. 저는 삶을 정제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는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언어로 바꾸어 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제게 글쓰기는 영혼의 구원을 위한 연금술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양조입니다. 제 책의 마지막 단어는 아마, 당신처럼 시간을 되찾는 황홀한 깨달음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제 아내 노라처럼, 이 모든 고통과 혼란에도 불구하고, 삶 그 자체를 향해 온몸으로 외치는, 단순하고도 육체적인 긍정, "그래(Yes)"일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전쟁을 치르고 있는 다른 종류의 전사라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성 안에서, 성벽을 서서히 무너뜨리는 시간이라는 적과 싸우는 고결한 기사입니다. 저는 이 도시의 뒷골목에서, 가난과 질병과 광기라는 이름의 잡배들과 매일같이 주먹다짐을 벌이는 용병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의 편지는 제게, 저의 이 소란스러운 싸움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의 수정 구슬은 제게 당신 세계의 정교한 지도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에게 저의 양조장에서 갓 증류해낸, 불처럼 타는 이 한 잔의 poitín을 보냅니다. 부디 조심해서 맛보시길. 그것은 당신의 섬세한 위장을 뒤집어 놓을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고요한 방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삶의 그 날것 그대로의 맛을 느끼게 해줄 것입니다.
혼돈 속에서, 당신의 동료 싸움꾼,
제임스 조이스